Tangmun reincarnation RAW novel - Chapter 41
당문전생 (41)
빙랑과 옥군
며칠째 왕 숙모는 수업을 진행하지 못했다.
젊은 시절 호호탕탕 무림을 누비며 얻은 명성의 뒤안길엔 크고 작은 상처가 있었는데, 이것들이 재발해서 몸져누웠다고 한다.
그나마 삼십 대까지는 악과 깡으로 버텼으나 사십 줄이 넘어가니 도리가 없었나 보다.
역시 세월 앞에 장사 없다.
“해서 새로운 사부님을 모셨답니다.”
“에이.”
왕 숙모의 ‘빡센’ 수업에서 잠시 벗어나 자유를 만끽하던 아이들에게 그녀를 대신할 선생이 온다는 소식은 달가울 리 만무했다.
하지만 아이들의 반응 따위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던지라 잡무를 담당하는 여인이 수업에 사용될 석필과 석판 등을 배치하고 총총히 사라졌다.
그녀가 자리를 비우자 아이들이 볼멘소리를 냈다.
“좋던 시절 다 갔네.”
“이번 사부는 얼마나 깐깐하려나.”
툴툴거리는 아이들을 곁눈질하던 당쾌풍이 몸을 슬쩍 젖혔다.
“그녀는 어때?”
“그녀?”
“왕소군.”
“아아.”
몸을 반쯤 틀은 당쾌풍을 멀거니 응시하던 당찬일이 고개를 저었다.
“평사낙안 이후로 감감무소식이다.”
이서악의 지도를 받고 다시 술래잡기를 벌인 후부터 이청하와는 어떠한 교류도 없었기에 당찬일이 무심한 어조로 답했다.
“허어, 그럼 쓰나? 네가 우유부단한 태도를 견지하니까 빈틈을 엿보고 천금매소(千金買笑)가 달려들지.”
천금매소는 포사를 표현하는 또 다른 말이다.
비단 찢는 소리에만 웃음을 보였던 포사를 위해 주나라의 유왕이 비단을 마구 사들여서 나라가 흔들렸다는 것에 유래한 단어다.
“관심 없어.”
어처구니없어서 당찬일이 고개를 돌렸다.
그가 철벽을 치자 못내 아쉬운 듯 당쾌풍이 연신 입맛을 다셨다.
“튕기다가 나중에 후회할 텐데, 쩝쩝.”
당쾌풍이 계속해서 질척거리자 귀찮아진 당찬일이 그를 외면하는 순간 또 다른 시비가 교실로 들어왔다.
“공자님들, 공녀님들, 기쁜 소식이에요!”
또 뭔데?
심드렁한 아이들을 향해 시비가 한껏 미소를 지으며 외쳤다.
“드디어 새로운 사부님을 모셨답니다!”
뚱―.
한껏 볼을 부풀린 아이들이 이구동성으로 넋두리처럼 중얼거렸다.
“이미 들었다네.”
“드, 들었다고요?”
적이 당황한 시비가 교실을 나서면서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다? 나도 지금 막 들은 소식인데?”
그녀가 자리를 비우고 얼마나 지났을까?
“킁킁!”
갑자기 당쾌풍이 코를 벌름거렸다.
“아니, 이것은!”
잠시 주변을 살피던 당쾌풍이 날카로운 시선들 번뜩였다.
“저런 조무래기들과는 달리 성숙한 소저만이 풍길 수 있는 아스라한 방향(芳香)!?”
이 자식…….
평소에는 매사 무관심하다가 이럴 때만 놀라운 집중력을 보인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저런 조무래기의 대장인 방취취가 발끈해서 고리눈을 뜨는 순간 교실 문이 열렸다.
뜨악!
교실로 들어서는 여인은…… 아름다웠다.
당쾌풍의 말처럼 솜털도 가시지 않은 조무래기들과 차원이 다른 성숙함과 풍염함 그리고 차디찬 매력을 물씬 풍기는 진짜배기 여인.
“우와아!”
그녀의 등장에 일단 남자아이들이 나지막이 환호했고.
“우와아!”
조무래기의 대장인 방취취를 비롯한 여자아이들이 남자아이들과는 다른 의미로 환호했다.
그러나 여인은 아이들의 과장된 반응 따윈 아랑곳없다는 듯 도도한 시선으로 교실을 쭉 한번 훑고서 입꼬리를 슬그머니 올렸다.
딱! 따닥!
석필을 든 여인이 석판에 적은 두 글자.
“난 빙랑이라고 해요. 오늘부터 여러분들을 가르칠 사람이지요.”
빙랑이 자신을 소개하자 아이들이 입을 모아 인사했다.
당쾌풍만 빼고.
“교실의 조무래기들과는 달리 성숙한 소저만이 풍길 수 있는 아스라한 방향을 지닌 사부님의 등장인데 왜 그리 경직되어 있나?”
당찬일이 농을 건넸지만 당쾌풍은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할 뿐이었다.
“빙랑이 등장하면 반드시…….”
벌컥!
당쾌풍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시 한 번 교실의 문이 열렸다.
매우 박력 있게.
“제군들, 안녕하신가!”
박력 있게 열린 문만큼이나 기운찬 목소리로 인사하던 사내가 빙랑을 발견했다.
“그, 그대가 왜 여기에?”
“다, 당신이 이곳엔 어쩐 일로?”
빙랑과 사내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응시하는 순간, 두 명의 시비가 다급하게 다가왔다.
“이게 어찌 된 일인지 모르오나 저는 빙랑 아가씨를 모시라는……!”
“저는 옥군(玉君) 공자님을 모시라고……!”
두 명의 시비가 쩔쩔매자 빙랑과 옥군이 동시에 외쳤다.
“난 이 사람하고 같이 못 있어요!”
“난 이 여자와는 같이 못 있네!”
으르렁거리면서 빙랑과 옥군이 시비들을 닦달했다.
“자리는 하나인데 사람은 둘이라니, 뭔가 착오가 있었나 보네. 어서 알아보시게.”
“그래요. 속히 알아보세요.”
두 사람이 다그치자 황급히 어딘가로 갔던 시비가 울상이 되어서 돌아왔다.
“어찌 되었나?”
옥군이 반색하며 맞이했지만 시비는 고개도 들지 못하고 답했다.
“그, 그것이…….”
“그것이?”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던 빙랑과 옥군이 시비의 다음 말에 대경했다.
“두 분이 수업을 병행하시라는…….”
“뭐요?”
“뭐시라?”
발끈해서 뭔가를 말하려던 빙랑과 옥군이 동시에 이를 갈아붙였다.
“대가주우…….”
“당 대가주…….”
얼마나 세게 이를 갈아 댔는지 이빨 부스러기라도 떨어질 것만 같아서 살포시 인상을 구기던 당찬일이 몸을 앞으로 굽혔다.
“대체 저들이 누구기에 저러는 건가?”
“빙랑과 옥군을 몰라?”
멀뚱하게 당찬일을 응시하던 당쾌풍이 곧 자신의 이마를 두드렸다.
“아아, 넌 혼수상태였으니까 모를 수도 있겠다.”
뒤이어 당쾌풍이 말하길 옥군과 빙랑은 본래 연인 사이였단다.
두 사람 모두 무림에서 나름 알려진 고수였지만 돈이나 명예 따위에 큰 욕심이 없어서 안분지족을 즐기는 와중에 모종의 사건을 겪었단다.
“어떤 일인지는 철저히 비밀인가 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지만 한 쌍의 잉꼬처럼 서로를 아끼던 두 사람은 연인 관계를 정리한 정도로도 모자라 앙숙으로 돌변했다.
“그 일 이후 두 사람은 무림을 등졌다고 들었는데, 우리 학당에 모습을 드러낼지 누가 알았겠냐?”
시큰둥한 당쾌풍의 답변에 당찬일이 눈을 아래로 모았다.
‘옥군과 빙랑이라.’
그 와중에도 옥군과 빙랑은 기세 싸움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내가 홀숫날에 수업을 진행할 테니 그날에는 교실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말아요!”
“누구 마음대로 홀숫날이 그대의 수업 날짜야? 나도 홀수가 좋다고!”
“양보를 못 하시겠다?”
빙랑이 스산하게 눈을 빛냈다.
“우리 유치하게 동전 같은 거 던지지 말고…….”
쿠르릉!
그녀가 기세를 뿜자 교실에 비치된 걸상이며 책상이 마구 흔들렸다.
“나갈까요?”
한판 붙자!
“그것 좋지!”
빙랑의 나른한 제의에 옥군이 팔을 둥둥 걷어붙이자 두 명의 시비가 그들을 뜯어말렸다.
“아이고, 소저! 진정을……!”
“공자님, 제발 고정하세요!”
동전 던지기보다 몇 배는 유치한 싸움을 벌이느라 두 사람은 수업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으으으.”
“크으으.”
이마를 딱 맞대고 서로를 노려보는 두 사람과, 그들을 떼어 내려 용을 쓰는 시비들.
그래서 비록 하루지만 아이들은 행복했다.
당일 수업은 물 건너갔으니까.
* * *
요란하고 유치한 등장과 달리 옥군과 빙랑은 며칠도 지나지 않아서 아이들의 신임을 얻었다.
두 사람은 자신들만의 고유한 자식을 지닌 전문가들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에겐 다소 생경한 영역을 접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제군들은 무림세가의 자제라서 일부를 제외하곤 언젠가 강호로 나서게 될 거다.”
돌돌 말은 책자로 탁자를 두드리면서 옥군이 아이들을 훑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제군들은 그 무시무시하고 험난하다는 무의 숲[武林]의 일원이 되어서 때론 비무로, 때론 생사결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는 소리다.”
당찬일과 당쾌풍의 얼굴에 지루함이 묻어날 무렴, 옥군이 다탁을 두드리던 작은 책자를 흔들었다.
“하여 제군들을 아끼는 당문에선 친히 《병법삼십육계》라는 고색창연한 교본을 내려 기본적인 병법에 관한 교육을 내게 주문했다.”
《병법삼십육계》라는 고색창연한 교본.
주지하다시피 《병법삼십육계》는 전국시대에 손자가 작성한 최고의 병법서다.
그런데 옥군은 이것을 고색창연한 교본이라고 평가 절하했다.
고색창연.
말이 좋아서 예스럽고 그윽하다는 것이지, 결국 낡아 빠져서 쉰내 난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이 양반 봐라?’
옥군의 삐딱한 태도에 호기심이 들은 당쾌풍이 눈을 빛내고.
‘대가주의 꼭두각시 짓거리는 하지 않겠다는 건가?’
당찬일도 얼굴에 어렸던 권태를 살짝 걷었다.
두 사람과 달리 아이들은 한 권씩 나눠 받은 《병법삼십육계》를 신줏단지처럼 소중히 모시는 눈치라서 피식 웃은 옥군이 첫 장을 펼쳤다.
“어디 보자. 《병법삼십육계》의 승전계(勝戰計) 중에서 만천과해(瞞天過海)라. 하늘을 가리고 바다를 건넌다. 제군들도 오가면서 한 번쯤은 들어 봤지?”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옥군이 돌발적인 행동을 감행했다.
“누구나 다 아는 전략은 쓸모가 없다.”
쫘악!
“헉!”
옥군이 《병법삼십육계》에서 만천과해 부분을 찢자 아이들의 대경실색했다.
교본을 찢어 버리다니!
이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옥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다음 장을 읽어 내려갔다.
“승전계의 두 번째, 위위구조(圍魏救趙)라. 위나라를 포위하고 조나라를 구한다. 대체 언제 적 위나라이고, 언제 적 조나라야?”
기가 차서 혀라도 차야겠다는 듯 끌끌거리던 옥군이 그 부분도 찢어 버렸다.
쫘악!
기세 좋게 종이를 찢어 낸 옥군이 입을 떡 벌린 아이들에게 채근했다.
“뭐 해?”
“예?”
“뭐 하느냐고. 어서 찢어 버리라니까?”
“아, 아니, 그게……!”
당황해서 서로를 둘러보던 아이들이 곧 옥군의 지시를 따랐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고 했다.
사부님은 임금님과 동격이니 어찌 그의 말을 거역할까?
쫘악!
아이들이 종이를 찢자 적이 만족한 표정으로 다음 장을 읽던 옥군이 또다시 종이를 찢었다.
“차도살인(借刀殺人). 내 참, 이건 갓난아이라도 아는 이야기가 아닌가?”
쫘악!
“이일대로(以逸待勞).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여 전력을 비축하고 나서 피로해진 적을 상대한다? 안 그러고 싶은 사람도 있어?”
쫘악!
그렇게 《병법삼십육계》 중에서 승전계 부분을 작살 낸 옥군이 이번에는 적전계(敵戰計)를 공략했다.
“무중생유(無中生有). 없으면서 있는 척하라. 도박판 가 보면 중독자들이 잘하는 짓이지.”
“예?”
아이들이 영문을 몰라서 눈동자를 굴리자 옥군이 빙그레 웃었다.
“전문 용어로 뻥친다는 뜻이다.”
쫘악!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적전계도 초토화시킨 옥군이 공전계(攻戰計)를 펼쳤다.
“아아, 타초경사(打草驚蛇)! 하도 자주 듣다 보니 귀에서 피가 날 판이다!”
쫘악!
파죽지세로 공전계마저 전멸시킨 옥군이 혼전계(混戰計)와 병전계(幷戰計) 모두를 도륙 냈다.
쫙! 쫙!
빙랑(氷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