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ngmun reincarnation RAW novel - Chapter 47
당문전생 (47)
괴질(怪疾)
“마흔다섯 번.”
당찬일의 입술을 달싹거렸다.
“놈의 몸에 정확히 마흔다섯 번 칼을 박아 넣었지.”
십오 년 전에 상산혈귀로 악명을 떨치던 조규를 척살한 사람은 다름 아닌 전생의 당찬일이었다.
당시 악행을 일삼던 조규를 잡지 못해서 전전긍긍하던 관은 당문에 청부를 넣었다.
조규는 희대의 악인임에 틀림없었지만 결국 일개 무인에 불과했다.
그런 그를 국가가 잡지 못한다면 정부의 무능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라서 결국 관은 비밀 엄수에 확실했던 당문의 문을 두드렸던 거다.
물론 당문은 대외비의 특수조직이었던 비천대를 활용해서 관과의 결탁을 숨겼다.
조규가 단독으로 움직였기에 무리를 지어서 추적한다면 놈이 눈치챌 공산이 크다는 판단이었다.
그래서 당찬일은 홀로 그를 뒤쫓았다.
상산혈귀 조규는 신출귀몰했지만 당찬일은 그 이상의 추종술을 지녔었다.
결국 조규를 잡은 당찬일은 공포에 질린 그에게 마흔다섯 번의 벌을 내렸다.
“상신혈귀가 살해한 부녀자의 수는 알려진 바와 달리 마흔다섯. 곱절로 응징했어야 마땅하나 놈의 신분을 알리려면 최소한 등의 점만큼은 남겨야 했지.”
만약 조규의 몸을 구십여 차례나 칼로 공격한다면 그의 시신은 형체조차 남지 않을 터.
일벌백계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는 저잣거리의 시체가 조규의 시신이란 걸 만천하에 알려야 했으므로 당찬일은 피해자의 수만큼만 벌을 내렸다.
“과연 대단한 사람이다. 나와 상산혈귀의 시대적인 모순을 정확히 지적했어.”
이서악의 지적처럼 시간만으로 따진다면 당찬일은 조규를 알 도리가 없다.
조규가 죽임을 당한 건 당찬일이 태어나기 이 년 전이었으니까.
이서악은 그 점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의 문제 제기 역시 당찬일의 예측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는 걸 이서악은 알고 있을까.
“합리적인 사람들의 약점은 논리의 틀이야.”
이서악은 죽었다 깨어나도 당찬일의 전생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이서악은 자신을 조금 엉뚱하고, 무척이나 특이한 소년 정도로 치부하리라.
둘의 사이는 약간 소원해질 수 있지만, 이번엔 그것을 감수해야 했다.
조규라는 패가 얼마나 위험한지 당찬일도 잘 알고 있었다.
시간의 간극이 가지는 문제는 생각보다 대단해서, 상산혈귀의 과거 행적을 파고들다 보면 이전 생의 자신이 노출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규를 언급했던 이유는 오로지 하나.
이서악에게 과거의 무림공적을 상기시켜 정체불명의 사내를 추적하는 데 온 힘을 쏟도록 유도하기 위함이었다.
“검군의 넓은 발을 믿겠습니다.”
아니다. 시간도 남으니 이럴 게 아니라 직접 찾아보자.
‘당가대서관에라도 가 봐야 하나.’
* * *
없었다.
당가대서관의 수많은 책을 뒤졌지만 중년인과 비슷한 무림인은 찾지 못했다.
“지난 백 년 동안 무림을 종횡하면서 악행을 일삼았던 악인들이 수록되어 있는 책이지만 간밤의 사내와 비슷한 분위기의 무인은 없다.”
턱!
꽤나 두툼한 책을 내려놓은 당찬일이 또 하나의 서적을 집어 들었다.
“《무림기인록(武林奇人錄)》.”
강호의 괴이한 인물들에 관해 정리해 놓은 책이었지만 거기에도 비슷한 인물은 보이지 않았다.
당찬일의 앞에는 이미 수십 권의 책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하지만 중년인과 비슷한 인물에 대한 기록은 없었다.
아니, 평범한 체구의 고수는 밤하늘을 수놓는 별만큼이나 많았다. 다만 어젯밤에 만났던 중년인처럼 위험한 눈을 지닌 고수는 없었다.
잔인한 눈빛이니, 흉성이 담긴 눈동자니, 만인을 죽일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느니.
이런 통상적인 표현도 수없이 등장했지만 사내를 표현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나의 감이 틀리지 않는다면 여기 적힌 사람들 중에 내가 찾는 인물은 없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넋두리처럼 중얼거리는 당찬일의 맞은편에 누군가 털썩 앉았다.
“그가 누군데?”
“아.”
자신이 검토한 서책들을 뒤적이면서 당쾌풍이 묻자 당찬일이 바람 빠진 소리를 냈다.
“그런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
잠시 주변을 둘러본 당찬일이 어제 조우했던 중년인에 관해서 들려주자 당쾌풍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런 자가 우리 사천의 성도를 활보한다고?”
“글쎄.”
안광과 분위기만 지운다면 평범한 촌로였다.
얼굴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기세를 드러내지 않으면 장삼이사란 말이렷다? 그렇다면 그때는 왜 눈을 희번덕거렸는데?”
아마도 당숙정의 기세를 느꼈겠지.
당숙정은 자신의 기운을 갈무리한다고 했겠지만, 절정을 넘어서는 고수라면 눈치챘을 테니까.
당숙정과의 야간 동행을 이야기할 수는 없어서 당찬일이 말문을 닫았다.
당쾌풍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다.
당숙정과 비밀을 나누기로 한 이상 공유자는 적을수록 좋다.
“얼마나 센데?”
“글쎄.”
당찬일이 모호한 태도를 견지하자 답답했는지 못마땅한 표정을 짓던 당쾌풍이 몸을 앞으로 숙였다.
“당주님들보다 강하다는 건 아니겠지?”
비교가 어려운 질문이다.
당암과 당진은 자체적인 무공만으로도 능히 절정을 헤아리는 고수다. 거기에 강호에서 가장 강한 집단이라는 당문을 통솔하는 지도력까지 더해져서 일반적인 강호인들은 범접하기 어려운 힘을 발산한다.
“대상이 잘못되었다.”
“왜?”
“힘의 성격이 다르거든.”
“그래? 흠…….”
순순히 수긍한 당쾌풍이 침음하다 다시 물었다.
“그럼 뒷동산의 고수 아저씨하고는?”
“역시 달라.”
“또 달라? 뭐가 이리 달라?”
“그자가 지닌 힘은 내공이라든가 초식 같은 것이 아니란 말이지.”
“그럼 뭔데?”
그걸 모르겠다.
전생에 수많은 고수들과 악인들 그리고 은거 기인들을 상대했지만 중년인과 같거나, 최소 비슷한 분위기라도 흘리는 인물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대체 중년인은 누구일까?
당찬일이 뜬구름 잡기식의 반응을 보이자 김이 새 버린 당쾌풍이 뒤적이던 책자를 내던졌다.
“에이, 그딴 거 집어치우고 우리 밥이나 먹으러 가자.”
“밥?”
아직 식사 시간이 되려면 멀었다. 그럼에도 굳이 지금 나가자는 건…….
‘이 녀석.’
뭔가 물어 왔군.
으슥한 곳으로 당찬일을 데려가자마자 당쾌풍이 시중에서 나도는 소문을 들려주었다.
“그게 정말인가?”
끄덕끄덕.
당쾌풍이 평소의 장난기를 싹 거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당찬일이 입술을 깨물었다.
세상만사를 의미 없게 여기던 녀석이 이런 심각함이라니.
“괴질의 치료제를 당문에서 이미 만들었지만 더 높은 값을 받기 위해서 일부러 풀지 않는다고?”
“배포할 시기를 저울질한다더군.”
헛소리다.
괴질의 원인조차 파악하지 못했는데 무슨 놈의 치료제란 말인가.
“한발 더 나아가 이번 괴질을 인위적으로 유포한 쪽이 당문일지도 모른다?”
“우리 당문이라면 이런 괴질 정도는 며칠 만에 만들 수 있다고 떠든다는군.”
“그런 풍문을 우리 문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들도 믿기 시작했고?”
“소문은 말이니까.”
발이 없지만 천 리를 단숨에 주파하는 명마.
그것이 소문이다.
당쾌풍이 전해 준 이야기가 충분히 우려스러운 것이라서 당찬일이 중지로 다탁을 톡톡 두드렸다.
이번 소문이 말도 안 되는 가정에서 출발했다면 무시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시중에 떠도는 이야기는 개연성이 충분해서 헛소문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
‘당문을 대표하는 건 누가 뭐라고 해도 암기와 독.’
괴질로 숨을 거두는 이들의 사인은 아직까지 오리무중이지만 과거의 역병과는 다른 특징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전염성이 없다는 것!
“가장이 숨을 거두었지만 그의 자식들, 심지어는 병든 노모조차 멀쩡해.”
잠시 주변을 살핀 당쾌풍이 속삭였다.
“이상하지 않냐?”
이상하다.
당쾌풍의 전해 준 소문대로라면 충분히 이상하다.
“당문에선 시신을 검시(檢屍)하지 않았나?”
“당연히 했지.”
“사인을 밝히는 데 실패했고?”
당쾌풍의 반응으로 미루어 답변을 짐작한 당찬일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럼 독에 의한 사망은 아니란 소리로군.”
“알 수 없지.”
당쾌풍이 당찬일의 가정을 잘랐다.
“우리 당문이 전지전능하진 않으니까.”
당문도 모르는 독이나 질병이 존재할 수 있다!
“이건 최악의 가정인데.”
잠시 뜸을 들이던 당쾌풍이 쥐어짜 내듯 말을 이었다.
“만약 괴질이 인근 마을까지 전파된다면 나라에선 민심의 동요를 막기 위해서라도 우리 당문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까?
무림세가를 관에서 간섭한다면 정말로 심각한 상황이란 소리다.
거기다 당문은 나라와 암암리에 협조하는 처지인데도 이런 행동에 돌입한다는 건 지금까지 맺었던 선린우호 관계를 싹 무시하겠다는 뜻이 된다.
“민심 수습 차원에서 당문을 버릴 수 있다?”
당쾌풍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우리의 역할을 대신할 곳은 얼마든지 있잖아.”
어둑어둑해지는 하늘가로 시선을 던지면서 당쾌풍이 뇌까렸다.
“그런 상황까진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슬픈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다고 했던가.
당찬일이 당쾌풍과 대화를 나누고 사나흘이 지나지 않아 괴질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한 마을의 가장들이 서너 명 죽어 나가는 건 일쑤요, 많게는 십수 명이 사망했다는 소리도 들렸다.
결정적으로 성도에서 고위직을 역임하던 관원 두 사람이 괴질로 쓰러지자 성도 사람들은 불안감에 휩싸여서 나라를 성토하기 시작했다.
관원이 숨을 거둔 지 이틀 후.
인근 지역인 덕양과 금당 그리고 중강에서도 괴질로 사망하는 사례가 발생했다.
괴질은 더 이상 성도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빌어먹을.”
뜨는 둥, 마는 둥 탕을 깔짝거리던 당쾌풍이 숟가락을 힘주어 잡았다.
“차라리 아무런 말을 하지 말걸. 가만있었으면 중간이라도 가는 건데.”
자신의 예언 아닌 예언 때문에 괴질 사태가 악화되었다면서 당쾌풍이 자책했다.
“네 책임이 아냐. 그러니 스스로를 탓하지 마라.”
“그게 되냐?”
왈칵 성질을 부리며 당쾌풍이 눈을 부릅떴다.
“재종, 너도 알다시피 내가 쓸데없는 말을 하기 전까지는 이런 일이 없었다고!”
누구에게 발산하는 분노일까.
어깨까지 들썩거리면서 당쾌풍이 씩씩댔다.
“이놈의 빌어먹을 입방정 때문에 사람이 죽어 나가! 그것도 인근 마을까지!”
“자책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자책이라고?”
차분하다 못해서 냉정하기까지 한 당찬일의 응대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당쾌풍이 더욱 열을 올렸다.
“이게 자책으로 보여? 어디까지나 이건……!”
허공에 손가락질까지 해 가면서 당쾌풍이 성질을 부리는데 식당으로 시비 하나가 급히 뛰어 들어왔다.
“공자님들! 밖으로 나가지 마세요!”
식당 안의 모든 학생들이 고개를 돌렸다.
“지금, 지금……!”
숨을 헐떡이던 시비가 털어놓듯 입을 열었다.
“관원들이 쳐들어왔어요!”
관원들은 쳐들어오지 않았다.
나라에서 당문을 칠 요량이었으면 관원이 아니라 관병(官兵)을 동원했을 테니까. 그렇지만 당문을 찾은 이들이 관원이라고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었다.
관원을 대동한 이가 다름 아닌 사천성의 우두머리인 성주였으니까.
대략 오십여 명의 관원을 데리고 당문으로 들이닥친 사천성주는 등등했던 기세와 달리 총집사의 귀띔을 듣고서 어딘가로 향했다.
일각 후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사천성주는 일장훈시를 남기고 관원들과 함께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