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ngmun reincarnation RAW novel - Chapter 80
당문전생 (79)
수라윤무(修羅輪舞)
당찬일이 잘라 말하자 잠시 그를 살피던 백리천아가 열쇠를 다시 갈무리했다.
“우우.”
“오오.”
전능지약이 백리천아의 품으로 사라지자 사람들이 아쉬운 마음에 탄성을 내질렀지만 두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오늘 즐거웠다.”
“그랬습니까?”
당찬일이 애매하게 답하자 그를 힐끗 쳐다본 백리천아가 몸을 돌렸다.
“또 보자꾸나, 당찬일.”
“잠깐.”
당찬일이 귀빈석을 나서려는 백리천아를 붙잡았다.
“저 사람의 마지막 변화.”
연무장을 내려다보며 당찬일이 물었다.
“이름이 있다면 알려 주시겠습니까?”
발길을 멈춘 양학과 백리천아가 고개를 살짝 돌렸다.
“그걸 왜 알고 싶지?”
백리천아가 묻자 당찬일이 잠시 주저했다.
이전에 본 적이 있었던 것 같다고 답한다면 괜한 오해를 불러올 것이다. 그렇다고 다른 핑계를 대자니 아귀가 맞지 않는 말만 떠오른다.
궁리하는 당찬일을 착 가라앉은 눈으로 내려다보던 백리천아의 고개가 다시 정면을 향하려는 순간!
“초식에도 표정이 있습니다.”
쿵!
“사람뿐 아니라 동물도 감정을 드러내듯 초식 또한 창안자의 생각을 담지요.”
“네 말대로라면 초식은 시전자가 아니라 창안자의 느낌까지 전달한다는 거냐?”
백리천아의 물음에 당찬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 그 정돈 아니겠죠. 다만 시전자가 초식을 통제할 경지까지 이른다면 감정마저 좌우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양학의 마지막 변화가 너에게 어떤 표정을 지었나?”
자못 흥미로운 얼굴로 백리천아가 묻자 당찬일이 또다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천천히 벌어지는 당찬일의 입.
“말하기 곤란하군요.”
당찬일이 슬쩍 피하자 백리천아도 다시 고개를 틀었다.
“그렇다면 나도 답하기 곤란하구나.”
애매한 여지의 대답.
묘한 미소를 남겨 두고 백리천아가 떠나가자 당찬일의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대단했어!”
“과연 최연소 어전호위일세!”
“무림맹주님의 자식이랍시고 거들먹거리는 꼬라지라니!”
조금 전까지는 백리천아의 기세에 꼼짝도 못 하던 사람들이 그가 자리를 뜨자마자 태도를 표변했기에 당찬일이 쓴웃음을 지었다.
소위 무림 명숙이란 작자들이 땅을 박박 기던 자신의 면을 세우려고 온갖 변명을 늘어놓자 당찬일이 적당히 응대했다.
뭐 어쩌겠는가? 이들에겐 이들의 생존 방식이 있는데.
온갖 교언영색으로 조금 전에 벌어졌던 치부를 수습한 명숙들이 떠나자 당찬일에게 털레털레 다가온 당쾌풍이 인상을 와락 구겼다.
“젠장, 죽는 줄 알았네.”
“아아, 수고했다.”
당쾌풍을 맞이한 당찬일이 그를 데리고 귀빈석을 나섰다.
“그 양학이라는 놈, 정말 인간 같지 않더라.”
당쾌풍이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인간이 만들어 내는 사각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뻔히 알면서도 당할 뻔했다니까?”
이론은 실전과 다르다.
또한 양학의 움직임은 당쾌풍이 상대하기에 너무도 빠르고 정교해서 넋 놓고 당할 정도였다.
한마디로 눈 뜨고 코 베이는 격이랄까?
“정말 잘했다. 그새 실력이 또 늘었네.”
당찬일이 진지하게 칭찬했다.
사실 승패는 반반 확률이었다. 당쾌풍이 예전 실력 그대로였다면, 그리고 자신의 지시를 조금이라도 불신했더라면 절대 양학을 잡지 못했을 것이다.
“맨날 널 보고 있는데 나라고 가만히 있을 수 있냐?”
“음?”
“젠장. 계속 친구라도 하려면 죽으라고 해야 할 것 아니겠냐고.”
당쾌풍이 씨익 웃었다.
“두고 봐라. 내가 곧 너를 넘어서 줄 테니까.”
당찬일이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미 넘어섰다. 네 나이 때 나는 너 정도 되지 못했었거든.’
당쾌풍의 어깨를 꽉 움켜쥔 당찬일이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그것보다…….”
당찬일이 전에 없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양학이란 자가 마지막 변화를 보일 때 본 게 뭐야?”
“어? 알고 있었냐?”
“그래.”
당찬일이 답하자 당쾌풍이 그 순간을 떠올리고는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아, 씨…… 지금도 소름 끼치네.”
팔로 어깨를 감싸 쥔 당쾌풍이 꽉 다문 이빨 사이로 씹어뱉듯 말을 토했다.
“정해진 형태는 아니었고, 느낌에 가까운 건데…….”
당쾌풍이 고개를 들었다.
“그걸 말로 하자면…… 지옥?”
* * *
쪼르륵!
양학이 차를 따르자 백리천아가 한 모금 들이켰다.
“역시 좋군. 심란한 마음을 다스릴 때는 연꽃차가 제격이지. 이래서 연꽃을 화중군자(花中君子)라고 했던가.”
찻잔을 들고 중얼거리는 백리천아에게 양학이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괜찮다, 양학. 녀석은 나를 알았고, 나는 녀석을 몰랐으니 결과가 그리 나올밖에. 그러니 너는 아무런 잘못이 없어.”
‘지피지기를 거스른 건 정작 나였군.’이라며 킥킥거리던 백리천아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파삭!
자신의 손에 찻잔이 산산조각 나면서 찻물이 바닥을 더럽혔지만 이를 신경 쓰지 않고 백리천아가 팔걸이를 잡았다.
“내가 너무 쉽게 봤다.”
“아닙니다.”
깨진 찻잔을 치우며 양학이 입을 열었다.
“공자님의 계획은 큰 틀에서 어긋남이 없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등장했을 뿐이지요.”
“그건 위로가 안 돼.”
백리천아가 턱을 괴며 피식 웃었다.
이번 오가제전은 백리천아를 위한 무대였어야만 했다. 처음부터 그렇게 준비되었고 계획 또한 훌륭했다.
아울러 무림맹에 막연한 거부감을 가진 이들을 심적으로 완벽히 굴복시키는 장이어야만 했다.
모든 게 잘 굴러갔는데…….
“양학.”
“예, 공자님.”
“수라윤무(修羅輪舞)가 마지막으로 세상에 보여진 게 언제였지?”
수라윤무!
아마도 양학이 연무장에서 선보였던 마지막 변화의 이름일 것이다!
고개를 숙였던 양학이 공손히 답했다.
“십삼 년 전으로 기억합니다.”
“십삼 년 전이라.”
백리천아가 다탁에 놓인 종이를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 보자, 십삼 년 전이라면 당찬일이라는 아이가 태어났던 때로군.”
종이를 다시 다탁에 내려놓은 백리천아가 콧등에 주름을 잡았다.
“어째서 그 녀석이 수라윤무에 관심을 기울일까?”
“무공에 대한 호기심이 아닐까요?”
“그럴까? 어째 단순한 호기심이 아닌 것 같아서 말이야.”
화르륵!
백리천아의 눈에서 섬뜩한 불꽃이 피어났다. 모든 것을 불태우고 자신마저 살라 버릴 지옥의 겁화(劫火)가.
“녀석에겐 호기심을 넘어서는 무엇이 있었어.”
“그게 뭡니까?”
양학의 물음에 백리천아가 눈동자를 왼쪽 위로 모으며 당찬일이 지었던 표정을 상기해 보았다.
“설명하기 복잡하군. 워낙 다면적인 것이라서…….”
백리천아가 고개를 뒤로 젖혔다.
“고작 열세 살짜리 꼬마가 지을 표정이 아니었거든.”
깍지 낀 손을 다탁에 올린 백리천아가 낮은 숨을 내쉬었다.
“당찬일.”
정수리를 가르는 은발을 매만지며 백리천아가 고개를 들었다.
“지금까지 수립했던 계획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해야겠어. 무림은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비틀린 웃음을 짓는 백리천아에게 양학이 고개를 숙였다.
“당찬일이라는 아이를 파헤쳐 볼까요?”
“그 녀석을? 무엇 때문에?”
백리천아가 양팔을 벌렸다.
“오늘 벌어진 돌발적인 사건 하나로?”
그건 호들갑이야, 하며 백리천아가 손을 내젓자 양학이 신중한 어조로 간언했다.
“어딘지 모르게 신비한 구석이 있는 아이였습니다. 허투루 넘기지 마시고…….”
“양학.”
백리천아가 양학의 말허리를 댕겅 잘랐다.
“나를 모욕할 셈이냐?”
쿠우우!
백리천아의 숨 막히는 기세에 양하기 곧바로 머리를 조아렸다.
정수리를 가르는 은발을 뒤로 넘기며 백리천아가 고개를 돌렸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존명!”
양학이 고개를 숙이자 백리천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한 가지 궁금한 건, 그 녀석에게 수라윤무가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하는 점이야.”
의자에 몸을 기대며 백리천아가 눈동자를 굴렸다.
“대체 녀석은 수라윤무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 * *
백리천아와 당찬일의 대리전에 관한 보고를 받으며 당과로의 얼굴에 미미한 경련이 일었지만 그건 나타날 때보다 빠르게 사라졌다.
“재미있군.”
이때 총관이 슬쩍 다가와서 당과로에게 보고서 한 장을 내밀었다.
인상을 팍 쓰던 당과로가 몸을 돌렸다.
“본파로 돌아간다.”
* * *
아미파의 여승들이 백주에 살해당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인 사실인데, 목격자가 전혀 없다는 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아미파에서 당문의 검시를 청했던 건데…….
“우리 아이들까지 모두 죽었다고?”
귀환한 당과로가 습관처럼 용평상의 팔걸이를 두드렸다.
“그렇습니다.”
간만의 해후인데도 보고하는 당암이나 보고를 받는 당과로나 인간적인 정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사인은?”
“외상 하나 없는 급사인데, 외견상으로는 심장 발작에 의한 사망으로 보입니다.”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의 흔적은?”
“바로 그것입니다.”
당암이 머리를 조아렸다.
“이들의 몸에는 하나같이 실선처럼 기다란 자국이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은 자상(刺傷)도 아니고 창상(創傷)도 아니었기에…….”
“아직 강호에 알려지지 않은, 그런 특이한 내가중수법의 흔적 같다는 게냐?”
“그렇습니다.”
내가중수법이란 상대방의 겉은 전혀 건드리지 않고 속만 상하게 하는 절정의 무학이다.
내가중수법이 극한에 이르면 산 하나를 격하여 반대편에 있는 소를 때린다는 일명 격산타우(隔山打牛)의 수법이 가능하다고 전해진다.
“어째서 아미일까?”
이때 총집사가 다가와서 아미파의 낙산사태가 보낸 전갈을 건넸다.
“또 이 녀석인가.”
“누굴 말씀하시는지요?”
“요즘 우리 세가에서 가장 시끄러운 녀석이지 누구를 말하겠느냐? 제멋대로 아미파와 괴상한 협의를 해서 이 사달을 만들었지.”
당과로가 낙산사태의 편지를 당암에게 보여 주었다.
“이 일이라면 알고 있습니다. 재정에도 적지 않은 보탬이 되고 있지요.”
사실 당문으로서는 땅 짚고 헤엄치기인 것이 원래 이들은 살인 현장 검토가 주 업무라서 피륙(織物)이나 옷감 따위의 지식에 밝을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잠시 주저하던 당암이 털어놨다.
“실적만으로 따진다면 지난 사분기에 아미파와의 협의로 거둔 이익이 우리 당문의 총이익 가운데 무려 일 할을 차지합니다.”
“그럴 거다.”
당과로가 또다시 까마귀처럼 깍깍 웃었다.
“다들 애써 모르는 척, 외면하지만 의식주만큼 돈이 되는 사업은 없다. 건드리면 안 되는 종목이지만 의식주는 배신을 하지 않지.”
“그렇습니다. 외부의 눈치 때문에 우리 당문에선 이전까지 진출하지 못했었지만 아미파와 협의를 통해 용케 뚫었지요.”
“나도 들었다. 거기다 청성 쪽에선 전장 하나를 아예 통째로 매입했다지. 아무리 봐도 이건 다섯째의 수법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거든.”
당과로가 상체를 숙였다.
“그런데 역시 뒤에 그놈이 있더란 말이야.”
“당찬일, 그 아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흐흐흐흐.”
“그건 무리입니다! 고작 열세 살짜리 꼬마가 그런 사업 수완이 있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거기다……!”
“거기다?”
당과로가 추임새를 넣듯 반문하자 당암이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그 아이는 무려 십 년 동안을 혼수상태에서 헤매다 이제 갓 일어난 상태입니다.”
“맞아, 그랬다지.”
용평상의 팔걸이를 두드리던 당과로가 손을 멈추었다.
“그게 이상하지 않으냐?”
“무슨…… 말씀이신지?”
“무려 십 년 동안이나 혼수상태였던 아이가 어느 날 벌떡 일어나서 너무도 훌륭하게 자라고 있어. 아니, 그 이상이지 뭐냐?”
용평상에서 일어선 당과로가 당암 앞에 앉았다.
“무슨 조화인지는 몰라도 녀석은 이곳 성도부에 방문한 흠차대인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최연소의 나이에 제삼 어전시위까지 역임했거든.”
당암을 직시하면서 당과로가 물었다.
“너라면 그 나이 때에 가능했겠느냐?”
“으음.”
“그런데도 나이 타령을 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린 당암을 굽어보던 당과로가 괴소를 흘리면서 지시했다.
“숙정이와 그 녀석을 아미파로 보내라. 뿌린 대로 거두라고 했으니 녀석이 행한 일은 녀석이 책임져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