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ngmun reincarnation RAW novel - Chapter 91
당문전생 (90)
마음만큼은 당당하신 무명자(無名子)
벽에 기대어 날카로운 눈으로 당찬일을 주시하던 적무연이 죽립을 눌러썼다.
“넌 지금 당문에 반, 너만의 세계에 반, 그렇게 엉거주춤 발을 걸치고 있는 걸로 보인다.”
적무연이 살짝 죽립을 비틀었다.
“어중간한 태도로는 될 것도 안 돼.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당문은 적당히를 모르는 가문이니까.”
그럼 어쩌라는 거야, 하는 물음을 던질 법도 한데 당찬일은 눈동자를 아래로 모을 뿐이었다.
이미 그는 답을 알고 있었으니까.
당찬일의 생각에 쐐기라도 박듯 적무연이 첨언했다.
“너만의 세계에서 속히 발을 빼고 당문 속으로 스며들어라.”
적무연이 한마디를 남기고 빙글 몸을 돌렸다.
“완전히 몸을 담그란 말이야.”
폭우 속으로 몸을 던지려는 적무연에게 당찬일이 지나가듯 한마디를 던졌다.
“고맙군.”
훗, 하며 콧방귀를 뿜은 적무연이 비를 바라보다 뜻 모를 소리를 뇌까렸다.
“유평월은 당문을 근사하게 바꿀 구상들이 많이 있다고 했지. 너무나 파격적이라서 당과로를 설득해야만 실행할 수 있는 착상이라나?”
용케도 잊지 않았구나.
적무연의 등을 바라보는 당찬일의 입가에 훈훈한 미소가 그려졌다.
유평월이었던 자신은 고리타분한 당문을 확 바꿀 멋들어진 계획 몇 가지를 떠올렸다. 하지만 일개 청부업자였기에 건의조차 할 수 없었다.
지금은?
가주를 설득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당찬일이 웃음 짓자 그를 힐끔거린 적무연이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행복해라.”
“뭐?”
뜬금없이 무슨 말인가?
“행복하라고.”
“그게 무슨……?”
당찬일이 의이한 표정을 지었지만 적무연은 아무런 답 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이만.”
적무연이 무겁게 내리는 빗줄기 사이로 몸을 감추자 그의 등을 응시하던 당찬일이 탄식을 토했다.
오늘 적무연은 생각 이상으로 많은 말을 쏟아 냈고, 날카로운 지적과 주문으로 당문에서 어설프게 겉돌던 자신의 위치를 일깨워 주었다.
‘맞아, 지금은 혼란기이자 호기일지도 모른다.’
조정도, 벽려군도 조용한 이때야말로 전열을 재정비할 좋은 기회다.
“적무연의 말처럼 당문 속으로 들어가려면.”
……무늬만이라 아니라 내용물까지 당찬일이 되어야겠지.
* * *
“이것이 무엇이냐?”
당찬일이 얇은 책자를 올리자 당과로가 뚜루루 훑어보았다.
“오대세가의 기초 권각법과 당문의 것을 혼합시킨 권각술입니다. 이미 세간에 노출이 된 수법이라 결례도 아니지요.”
“흐음.”
책자에 수록된 권각술은 간단하면서도 명쾌해서 기초 교습서로는 아주 훌륭했다.
“이걸 네가 정리했다고?”
“정리는 제가 했습니다, 대가주님.”
당찬일 옆에 앉아 있던 당진이 고개를 숙였다.
“며칠 전에 현질(賢姪)이 찾아와서 부탁하기에 손을 좀 봤습니다.”
“손을 좀 본 정도가 아닌데?”
칭찬에 인색한 당과로가 치하할 정도로 당진의 정리는 훌륭했다.
“감사합니다.”
당진은 외당주다.
무공부가 외당 소속이니 당연히 당진이 무학을 정리해야 옳다.
하지만 아랫사람 시켜서 대충 넘길 수도 있었던 사안을 본인이 손수 파고든 이유는 윤덕일 건에서 당찬일이 보여 주었던 모습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었지만.
“아주 좋아. 이것을 어디다 쓰려 하느냐?”
당찬일와 눈짓을 교환한 당진이 입을 열었다.
“우선 가내에 머무는 잡역부들에게 가르쳐 볼까 합니다.”
“교관은 누구로 할 테냐?”
이번에는 당찬일이 고개를 들었다.
“봐 둔 사람이 있습니다.”
입춘(立春)은 한참 지났지만 아직까지는 쌀쌀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얇은 옷 하나만 걸친 당쾌풍이 연못가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는 연못의 잉어들에게 모이를 툭툭 던져 주었는데, 어쩐지 매가리가 하나도 없었다.
“먹어라, 먹어.”
우르르.
잉어 떼가 몰려들었지만, 연못 구석의 몇 마리는 끼어들지 못했다.
“너희는 왜 안 오냐?”
당쾌풍이 열심히 손짓을 했지만 물고기가 사람의 몸짓에 반응을 보일 리는 만무했다.
“이런 답답한 녀석들.”
소외된 잉어 무리에 모이를 던져 주었지만 녀석들은 식욕이 없는지 연못 위로 솟아오를 줄 몰랐다.
“너희도 나 같은 신세냐?”
당쾌풍의 목소리에 진한 아픔이 묻어 있었다.
“나는 당문 사람이면서 암기나 독을 그저 그렇게 배웠어. 누구처럼 이름을 무려 여섯 개나 올리기는커녕 단 하나도 못 올렸지.”
잉어들을 바라보면서 당쾌풍이 털어놨다.
“그렇다고 경천동지할 무학을 지닌 것도 아니고, 숫자는 젬병에 글공부도 별로거든.”
당쾌풍의 침울한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결정적으로 출신도 변변찮아요. 한마디로 가문의 계륵이지.”
우울한 분위기를 팍팍 풍기는 당쾌풍의 곁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여기 있었군.”
“아, 재종.”
당쾌풍이 힘없이 손을 들어 보이자 당찬일이 그의 곁에 궁둥이를 붙였다.
“무슨 생각 하나?”
“궁상.”
당쾌풍이 태연하게 답하자 당찬일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쾌풍은 올해로 열여섯이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미래에 대한 걱정이 시작될 시기다.
문제는 당쾌풍 본인의 분석대로 그는 당문에서 매우 어정쩡한 위치라는 거다. 독술이나 암기술에 특출한 재능을 지닌 것도 아니고, 권각술은 훌륭하지만, 그래 봐야 후기지수 가운데서 도드라지는 수준이다.
세가의 운영적인 측면으로 봐도 재무 쪽 일은 해 본 적이 없으며, 글월도 시원치 않아서 제 이름 석 자 쓰고 이해하는 것이 고작이다.
적무연이 말했듯, 당문은 적당히를 모른다.
아니, 당문뿐 아니라 모든 사회가 그렇다. 무엇이든 특출나지 않으면 금방 뒤처지고, 내쳐지기 마련이다.
결정적으로 당쾌풍은 대단한 부모를 두지도 않았기 때문에 무한 경쟁의 사슬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다.
“마음만큼은 당당하신 무명자답지 않게 왜 그래?”
“이제는 나다운 게 뭔지 잘 모르겠네요.”
당쾌풍의 어깨가 처지자 당찬일이 얇은 책자를 내밀었다.
“이게 뭔데?”
책자를 넘기던 당쾌풍이 입을 툭 내밀었다.
“기초야?”
“어.”
“이런 걸 왜 나한테 주는 거야?”
“초보용으로 어때?”
“초보용?”
다른 관점으로 보기 시작하자 흥미가 일었는지 당쾌풍이 책에 얼굴을 박았다.
“이야, 이거 괜찮은데? 지나치게 훌륭하잖아!”
“그렇지?”
“물론이라니까? 봐 봐!”
당쾌풍이 벌떡 일어서서 책자에 적인 기초 권법을 자세까지 잡아 가며 설명했다.
“이 권법은 이렇게! 여기서 뒷다리에 힘이 들어가면 자세는 편하지만 위력이 반감되므로 바짝 당겨 줘야 하고!”
파라락!
“이 퇴법! 이거, 이거, 양자문 공자의 선풍각 비스무리하지만, 초보한테 회전 발차기는 어려우니까 제자리에서 크게 휘둘러 치는 쪽으로 바꾸면 효과적일 거야!”
‘역시!’
당쾌풍은 암기나 독에 탁월한 재능은 없지만, 권각술을 잘 이해하고 타인에게 풀어서 설명하는 재주가 있었다.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확신한 당찬일이 공을 들여 설명하는 당쾌풍의 어깨를 짚었다.
“어떤 표정을 짓던가?”
당찬일이 묻자 당쾌풍이 맹렬하게 턱을 쓰다듬었다.
“말!”
“말이라?”
다소 의외라서 당찬일이 눈을 금붕어가 입을 벌리듯 끔뻑거렸다.
“그래, 말! 수십 마리의 말이 마구간에서 일시에 풀어지면서 내달리는 모습!”
역시!
생동감을 이런 식으로 받아들이고 표현할 줄 알다니!
당쾌풍의 미친 공감 능력에 박수를 쳐 주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은 당찬일이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 줄게.”
“뭐?”
“오늘부터 죽어라고 연습해.”
“야, 재종! 내 무학이 아무리 비루해도 이런 기초조차 못 하겠냐?”
“달달 외우라고.”
당쾌풍의 어깨를 짚은 손에 힘을 실으며 당찬일이 속삭이듯 말했다.
“일주일 뒤부터 인부들 가르쳐야 하니까.”
“누가? 내가?”
“그래.”
“내가 사람들을 가르친다고?”
“그렇다니까. 뭐든 보완할 부분 있으면 주저 없이 외당주님께 건의하고.”
그날부터 당쾌풍은 뻔질나게 외당주실을 찾아서 당진은 학을 떼야만 했다.
“당주님!”
“그래…….”
이미 지친 당진의 응대.
“여기 이 부분! 당주님께서는 오른팔을 굽히라고 하셨는데 살짝 펴는 편이 더 낫다고들 합니다!”
벌써 오늘 하루만 몇 번째인지.
하지만 당쾌풍의 음성에는 무어라고 형언키 어려운 박력이 깃들어 있었다.
“대체 누가 그러는데……?”
“벽 수리를 담당하는 장 씨 삼부자의 공통된 의견이에요!”
“하아, 일단 가져와 봐.”
당쾌풍이 서책의 한 부분을 가리키며 다가오자 당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래대로라면 내 말대로 자세를 취해야 제대로 힘을 받을 텐데?”
“원래는 그렇지요. 하지만 장 씨 삼부자는 무학에 문외한 아닙니까.”
“그렇지.”
“내공이 없고, 일초반식의 무공도 모르는 입장에서는 이 동작이 무척이나 부담스럽다더라고요! 이럴 바에야 차라리 이 부분을 통째로 들어내든가, 아니면 문외한의 입장에서 타협하는 편이 낫겠어요!”
“흠!”
당쾌풍의 의견은 충분히 일리가 있었기에 당진이 팔짱을 꼈다.
‘대단한걸? 이 녀석은 초보자들의 무술 교관을 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 같지 않은가!’
그날 저녁 당진은 당찬일을 불렀다.
“내일부터 시작해라. 그 녀석에겐 교관 자격이 차고 넘치니 시간을 더 끌 필요가 없겠어.”
“부탁드린 대연무장 옆의 공터는 준비가 되었는지요?”
“물론이다.”
당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럼 이제부터 시작하면 되겠군요!”
당찬일이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자 당진이 책자를 내밀었다.
“이 무공서의 이름을 짓도록 해라.”
“외당주님께서 전반적으로 손을 보셨으니 의당 이름도 지으셔야지요.”
“그 무공서가 내 손에 넘어왔을 땐 네가 태반을 정리해 둔 상태였지 않으냐? 거기다 이번 일의 구상은 전적으로 네가 했으니 이름도 네 몫이지.”
외당주님이 아니라 숙부님이다, 하며 당진이 당찬일의 이마에 알밤을 먹였다.
“그럼…….”
당찬일이 붓을 쥐었다.
《사천무편(四川武遍)》
“사천에 널리 쓰이는 무학[四川武遍]이라.”
당진이 조금은 실망한 표정으로 책자에 적힌 이름을 응시했다.
“뭐, 이름은 나쁘지 않다만 그래도 우리 당문의 이름을 넣는 것이 낫지 않을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당찬일이 고개를 저었다.
“앞으로 사천 하면 당문을 자연스레 떠올리도록 만들면 되지요.”
“포부가 크구나!”
당진이 부드럽게 웃으면서 당찬일의 등을 두드렸다.
껄껄 웃는 당진을 보며 슬그머니 몸을 돌린 당찬일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어렸다.
* * *
당문 인근의 공터를 손보겠다는 당진의 말을 듣자마자 당암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사람들 건강 체조를 가르치면서 자금을 달라는 말이냐?”
“형님께서도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대연무장이 미어터질 정도로 열기가…….”
“봤다. 호응이 생각 이상으로 놀랍더군. 하지만 우리는 자선 단체가 아니라 무림세가 아니더냐!”
당진을 주시하며 당암이 물었다.
“문제는 단순히 이번 한 건이 아니다. 그 공터마저 가득 차면 어쩌려고? 다른 공터를 또 사들일 생각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