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n Swordsman RAW novel - Chapter 14
14
그러면 어쩌자는 말인가?
금선탈각(金蟬脫殼)!
지금의 모습을 던져 버리고 완전히 다른 새로운 사람으로 변신하면 된다.
그럴 수가 있을까?
팽가 가모가 떠나라고 한 사람은 천요루주뿐이다. 호가와 맹삼력은 떠나지 않아도 무방하다. 그러니 그들이 천요루를 인계받는다. 그리고 천요루주는 숨어서 움직인다.
아니다. 이건 너무 속이 빤히 보인다. 그리고 숨어서 움직인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하북팽가가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엎드리면 코 닿을 거리. 결국은 발각되고야 만다.
그럼?
잔혈부는 천요루주의 생각을 짐작하지 못했다.
어떻게 할 건 확실한데 무엇을 어떻게 하려는지 도무지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흥미롭다.
“후후후! 어떤 놈인지 만나보면 알겠지. 하하하! 하하하하!”
2
가모는 불상 앞에 꿇어앉아 기도를 올렸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그녀는 간절한 염원을 담아서 불호를 외웠다.
부처님 앞에 잘못을 고한다.
사람을 그렇게 때리는 것이 아니었다. 충고나 훈계만으로도 충분했다. 매를 들자 반항 한번 못해보고 얌전히 두들겨 맞은 무기력한 사내가 아니었던가.
천요루주…… 앞날에 평안이 있기를.
그녀는 적을 위해서 기원한다.
언제나 그랬다. 비천문이 몰락했을 때는 무려 일 년 동안이나 불당을 떠나지 않았다. 그 밖에도 크고 작은 싸움이 벌어질 때마다 죽고, 다치고, 상한 사람들을 위해서 기원했다.
그녀는 살아 있는 부처다.
그녀는 그저 불심 깊은 사람일 뿐이라고 겸손해하지만, 옆에서 보기에는 그만한 부처도 없다.
천요루주가 팽가촌에 다시 온 사실은 그녀의 귀에도 전해졌다.
“미숫가루를 탔다고?”
“네. 가주님께서 비밀로 하라고 했는데…….”
“휴우! 괜찮다. 오죽 억울했으면 그런 짓을 했을까. 너무 억울해서 잠을 이룰 수 없었던 게지. 아무래도 내가 너무한 것 같구나. 여자를 물건처럼 팔고 사는 행위만 하지 않았더라도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런 놈은 맞아도 싸요. 마님 잘못이 아니에요.”
시녀의 위로는 아무런 위안도 되지 못했다.
가모는 루주의 침입 사건을 억울함의 표현으로 해석한 듯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휴우! 나무아미타불…….”
그녀는 불상을 향해 두 손을 모았다.
‘하는 짓도 꼭…….’
제 아비를 닮았다.
어떤 짓을 하긴 하는데 도무지 목적이 뭔지 알 수가 없다. 시간이 지나서 어떤 일이 터지면 그때에서야 ‘아! 전에 한 일이 이것 때문에 그랬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놈은 아비를 닮았다.
놈이 우물에 미숫가루를 탄 데는 분명히 이유가 있다.
그녀는 루주의 올가미를 의식했다.
그 올가미가 자신을 향해서 던져졌다는 건 불문가지, 생각할 필요도 없다.
‘미숫가루… 미숫가루…… 아!’
그녀는 퍼뜩 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 사람의 아이를 가졌을 때, 놈을 가졌을 때, 한참 더운 여름날 길가에서 일하던 농부가 내어준 한 잔의 물, 미숫가루를 탄 물, 그 물을 나눠 마시며…….
‘행복하다고 말했어. 그러고 보니 내가 행복하다고 말한 적은 딱 그때뿐…….’
행복은 큰 것에 있지 않다. 소소한 것에 있다.
그러다가 퍼뜩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놈이 아이를 노린다!’
은자 육백 냥을 말하면서 아이를 거론했다. 이번에 또 태중에 마셨던 미숫가루를 상기시킨다.
그녀는 둥글게 부풀어 오른 배를 쓰다듬었다.
놈이 노리는 것은 이 아이다.
‘이놈이!’
분노가 치민다. 감히! 하지만 제 아비를 닮아서 간계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놈이니 일단은 피하는 게 상책이지 싶다.
“송화암(松華庵)에 다녀와야겠어요.”
그녀가 입을 열었을 때, 놀라는 사람은 없었다.
팽가촌에 마련한 작은 불당에서 심신의 평안을 찾지 못할 때 늘 가던 곳이 송화암이다.
팽가촌 인근에는 대사찰이 많이 있다. 불가의 고찰인 운거사도 걸어서 반 시진이면 갈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마차로 사흘이나 걸리는 송화암을 선호했다.
그녀가 워낙 송화암을 좋아하는지라 팽가촌 무인들치고 송화암을 가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송화암은 만리장성(萬里長城) 너머 축록산(逐鹿山)에 위치한다.
북방(北方)답지 않게 산세가 수려하고, 오밀조밀해서 장엄하다기보다는 포근하다는 느낌을 풍긴다.
“태중인데 괜찮겠소?”
“미안해요. 다녀와야 마음이 편하겠어요.”
“허허! 임자는 마음이 너무 고와서 탈이야. 다녀와야 마음이 편해진다니 어쩌겠소. 대신 호위는 단단히 붙일 터이니 그것마저 사양하지는 마시오.”
“괜찮아요. 어디 싸우러 가는 것도 아닌데요, 뭘.”
“나한테는 임자를 밖에 내놓는 것이 싸움터에 내놓는 것보다 더 근심스럽소.”
“아! 고마워요.”
가모는 가주의 품에 살짝 안겨들었다.
“허어!”
가주는 가모를 안으면서 등을 쓰다듬었다.
가모는 두 번, 세 번 생각을 거듭한 끝에 말을 꺼낸다. 그래서 그녀가 한 말은 거의 고집에 가깝다.
송화암에 가겠다고 말을 꺼낸 이상 가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아무리 만류해도 소용없다. 노기(怒氣)를 터뜨려 봐야 뚝뚝 떨어지는 눈물 앞에서는 이겨내지 못한다.
마음 편히 보내주는 것이 낫다.
송화암은 먼 곳에 있다. 하지만 아주 이상적인 휴양처이기도 하다. 단 며칠이라도 세상을 잊고 조용히 지내고 싶다면 적극 추천할 만한 곳이다.
가주는 생각했다.
‘며칠 쉬었다 오는 것도 좋겠지. 그동안이면 피비린내도 씻겼을 테니까.’
출행 준비는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마차가 준비되고, 송화암에 시주할 곡물과 가모의 일상 용품이 실어졌다.
가모의 송화암 나들이는 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준비물도 거의 고정되어 있다시피 하다. ‘가자’ 하는 말이 떨어지고 넉넉잡아 한 시진이면 모든 준비가 끝난다.
호위도 정해졌다.
다섯 명.
이공자와는 동배분(同輩分)이지만 이미 무명(武名)을 날리고 있는 고수들이다.
무림인들은 이들에게 팽가오도(彭家悟刀)라는 별호를 안겨주었다.
깨달은 칼이라는 뜻이다.
팽가에서는 깨달을 오(悟) 자 대신에 다섯 오(五) 자를 써서 그냥 팽가오도(彭家五刀)라고 부른다. 하나 이것은 외인(外人)에 대한 겸손일 뿐 기분 좋은 것은 사실이다.
이들 다섯 명이 호위하면 철벽(鐵壁)을 둘러친 것과 같다.
다른 때 같으면 이들이 나서지 않았을 터이지만 지금은 신경 쓰이는 일이 벌어진 후라서 각별히 선정했다.
“다녀올게요.”
“쯧! 가지 않으면 좋으련만.”
“열흘이면 될 거예요.”
“알겠소. 잘 다녀오시오.”
가모는 밝은 웃음을 지으며 마차에 올랐다.
사단은 마차에 오르자마자 일어났다.
‘헉!’
갑자기 척추 신경을 잘라낸 것처럼 손발이 자르르 마비된다. 몸도 움직일 수 없고 간신히 고개만 돌릴 수 있다. 목 밑 부분이 모두 마비된 것 같다.
‘잠깐! 세워!’
그녀는 마차를 멈추려고 했다. 하지만 소리없는 말은 사람들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끼럇!”
마부가 말고삐를 풀어냈다.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뒤따르는 다섯 고수의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잘 다녀오세요!”
의붓딸 팽가연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다른 때 같으면 그녀도 마주 손을 흔들어주었다. 하지만 오늘은 움직일 수 없다. 음성조차 나오지 않는다. 간신히 눈썹을 꿈쩍거리는 것이 할 수 있는 행동의 전부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그녀는 자신에게 물어봤지만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병을 얻은 것인가? 머리에 혈관이 터진 것인가? 중풍이라도 맞은 건가?
‘으으으……!’
그녀는 마차에 같이 탄 시녀에게 눈짓을 보냈다. 하지만 시녀는 그녀를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허리를 숙인 채 신발을 벗기고 양털로 만든 발판에 발을 올려주었다.
그런 건 중요치 않다. 일어나서 얼굴을 봐라!
시녀는 보지 않았다. 발판 위에 발을 올린 다음에는 부드러운 천으로 발을 감싸주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먼 길을 갈 때 필수적으로 필요한 요강과 물을 챙긴다. 간식거리도 준비한다.
마차 안에서 시녀가 할 일은 의외로 많다.
쿡!
불현듯 어깻죽지가 비수로 찔린 듯 아파왔다.
‘으… 윽!’
그녀는 소리없는 비명을 터뜨렸다.
암습…… 암습이다!
뇌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니다. 목뼈 밑으로, 척추를 단숨에 마비시켜 버리는 강력한 독에 당했다.
꾸욱!
이번에는 옆구리 쪽으로 비수가 날아들었다.
전신에 경기가 일어날 만큼 엄청난 극통이 치민다.
그녀는 신음조차 흘리지 못한 채 굵은 식은땀만 흘렸다.
“어! 마님, 어디 아프세요?”
비로소 시녀가 그녀를 봤다.
‘어서! 어서 마차를 세워!’
그녀는 눈짓으로 급하게 말했다.
너무 아프다. 미간이 잔뜩 찌부러져 있을 게다.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지 않은가.
“마님, 땀을 너무 흘리세요. 어디 아프신 데 있는 건 아니죠?”
시녀는 말을 하면서 수건으로 이마를 닦아주었다. 목도 닦고 뒷덜미도 닦아주었다.
시녀에게는 그녀의 아픔이 보이지 않는 듯했다.
‘양털!’
그녀가 앉는 자리는 양털로 덮여 있다.
양털 방석은 푹신하고, 보온도 되고, 마차의 덜컹거림도 많이 흡수해 준다.
양털 방석에 수작을 부렸다.
루주 그놈, 그놈에게 당했다. 놈은 자신이 송화암에 다닌다는 사실을 파악해 냈다. 그리고 미숫가루를 던져서 불안감을 조성했다. 자신이 움직이도록. 그리고 바로 이 짓, 양털 방석에 독고(毒蠱)를 뿌려놨다.
아직 독고의 종류는 알 수 없다.
살을 깨물 때마다 비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치민다는 점과 아주 빠른 속도로 전신을 마비시킨다는 두 가지 특징밖에는 찾아내지 못했다.
마비는 전체적으로 일어난다.
시녀가 그녀의 고통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얼굴 근육이 움직임을 잃었기 때문이다. 평소의 무덤덤한 얼굴, 아무 고통도 없는 표정을 짓고 있기 때문에 알 수 없는 게다.
혈관은 정상적인 듯하다.
심장이 규칙적으로 뛰고 피의 흐름이 순조롭다. 공기를 들이쉬고 내뱉는 폐의 기능도 지극히 정상이다. 그렇다고 정신이 혼미한 것도 아니다.
몸을 마비시킨다는 것 외에는 해(害)가 없다.
‘아이!’
그녀는 바싹 긴장했다.
독고가 아이를 해하는 것일까? 이렇게 당하고 마는 것인가?
어떻게 하면 이번 난관을 이겨낼 수 있을지 해결 방법을 찾기 위해 부심했다.
이번 일은 보기 좋게 당했다. 놈을 너무 가볍게 본 탓이다. 놈이 무엇을 할까 싶어서 내버려 둔 탓이다. 그래, 네가 먼저 수작을 부려봐라. 보기 좋게 맞받아쳐 주지. 그리 생각한 게 실수다.
그때다!
“웃! 이거 왜 이래!”
바깥에서 마부가 경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질렀다. 그리고,
삐걱! 삐이… 걱! 투투투둑!
기분 나쁜 소리, 아주 기분 나쁜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어멋! 마차가 왜 이래!”
마차가 심하게 흔들리자 시녀가 몸을 기우뚱거리면서 말했다.
‘틀렸어!’
그녀는 눈을 감아버렸다.
천요루주가 일차로 자신의 몸에 수작을 부렸고, 이차로는 마차 바퀴를 고장 내놨다.
시녀나 마부가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마차는 전복되게 되어 있다.
이거다! 놈이 노린 것은 마차의 전복이다!
“마차 좀 살살 몰아요! 너무 심하게 흔들리잖아요!”
시녀가 고함을 빽 질렀지만 요동은 더욱 심해졌다.
“어이쿠! 마님, 괜찮으세요?”
맞은편에 앉아 있던 시녀가 그녀 쪽으로 떠밀려 와 콧방아를 찧었다.
‘안 돼… 이것만은…….’
그녀의 안색이 해쓱해졌다.
핏기 잃은 얼굴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어! 어! 어! 이거 왜 이래! 이려!”
마부가 어쩔 줄 몰라 하며 급히 말고삐를 낚아챘다. 순간,
우당탕! 탕탕!
마차 바퀴가 박살이 나면서 다섯 명이 타도 넉넉할 정도의 거대한 마차가 확 뒤집어졌다.
꾸당당탕! 크르르릉!
마차는 대여섯 번이나 허공에 퉁겨졌다.
엎친 데 덮쳤다고나 할까? 하필이면 마차가 구른 곳이 암석 지대였기 때문에 타격도 컸다.
마차는 한 번 퉁겨질 때마다 한 구석씩 깨져 나갔다.
세 번째인가, 네 번째인가? 마차가 몇 바퀴 굴렀을 때, 시녀가 창밖으로 튕겨 나갔다.
그녀는 바위더미에 머리를 찧고 즉사했다.
쿠당탕탕! 탕!
박살 난 마차가 움직임을 멈췄을 때, 그녀는 혼절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