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n Swordsman RAW novel - Chapter 16
16
“아뇨. 잘못했어요.”
주설언은 급히 손을 내저었다.
사실 루주가 떠난다고 해도 웃으면서 보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호가의 언질 때문이다. 호가가 희망을 북돋아 주지 않았다면 이토록 대범하게 보낼 수는 없었을 게다. 아마 다른 여인들처럼 울며불며 매달렸겠지.
호가는 루주 앞에서는 모른 척했다. 속셈을 말하면 반대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떻게 빠져나가죠? 사방이 막혀 있는데…….”
“후후! 이래서 여우는 굴이 세 개인 거야. 적어도 위험을 빠져나갈 곳이 세 곳은 되는 셈이지.”
“그런데 절 데려가면 루주께 혼나지 않아요?”
“혼나지. 신경질 되게 낼걸?”
“그래도 괜찮아요?”
그 말에 호가가 주설언을 쳐다봤다. 그리고 말했다.
“내 저놈을 오래전부터 보아왔다고 했지? 그래서 아는데… 저놈 계집질은 꽤 했는데 한 여자와 반년 동안이나 같이 산 적은 없어. 너랑 있으면서 다른 여자에게 눈길 준 적 있디?”
“그건 술 취한 여자를 품고 싶지 않다고… 아!”
“너 의외로 멍청이구나. 따라와. 갈 길이 멀다.”
호가가 앞장서서 걸었다.
“다른 언니들은…….”
호가는 대답하지 않고 걷기만 했다.
주설언은 잠시 기녀들이 머물고 있는 누각을 쳐다보다가 입술을 잘끈 깨물고는 호가의 뒤를 쫓았다.
그 뒤를 조랑말 정도는 됨 직한 큰 개가 흰 이를 드러내며 어슬렁어슬렁 따라왔다.
두 사람이 떠나고 얼마 후,
화르륵! 화르르륵!
천요루에서 불길이 솟았다.
곳간에서 일어난 불길은 순식간에 누각으로 옮겨 붙었다. 기름덩이에 불이 붙은 것처럼 물을 끼얹고 어쩌고 할 틈도 없이 천요루 전체가 불바다로 변했다.
“불이야! 불이야!”
기녀들이 기겁을 하며 쏟아져 나왔다.
“엇! 저, 저…….”
회자수들은 망연자실하니 불난 곳을 쏘아봤다.
그곳에 그들의 작품이 있다. 루주란 놈과 두 사내를 꼼짝없이 옭아 넣을 함정이 있다.
불길은 모든 것은 삼켜 버렸다.
“비켯! 비켜, 새끼들아!”
기녀들은 앞뒤 문을 막고 있는 회자수에게 성난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그도 그럴 것이, 뒤에서 화마가 다가오고 있으니 이판사판이지 않은가.
“허!”
회자수들은 길을 열어줄 수밖에 없었다.
따각! 따각!
마차가 관도를 따라간다.
첫 번째는 이공자를 데려다 주러 간 길이고, 두 번째는 외상값을 받으러 갔다. 그리고 이번이 세 번째, 죽으러 간다. 아니, 살기 위해서 간다.
“그것참, 팽가촌을 내 집 드나들 듯 들락거릴 줄은 몰랐는데.”
“입조심.”
“왜? 아!”
맹삼력이 급히 입을 다물었다.
마차 주위에 낯선 그림자들이 잔뜩 깔려 있다.
맹삼력은 루주가 주의를 주기 전까지는 그림자들이 이토록 가까이 붙어 있는 줄 알지 못했다.
스슷! 스스슷!
그림자들은 기척을 흘리지 않는다.
두 발이 땅을 딛고 있는데, 기름 위를 미끄러지는 것처럼 부드럽다.
“꿀꺽!”
맹삼력은 마른침을 삼켰다.
신법 하나만 봐도 상대의 무공을 짐작할 수 있다.
마차를 따라붙은 그림자들, 그들 중 그 누구라도 자신 같은 건 일도에 처리할 수 있다. 그만큼 강한 고수들이다.
“누군지 짐작 가는…….”
맹삼력은 말까지 흐렸다.
“다섯.”
“아!”
맹삼력은 루주의 언질에 퍼뜩 다섯 무인을 떠올렸다.
팽가촌에 다섯 명으로 이루어진 절대도객, 바로 가모의 호위로 나섰던 팽가오도다.
“나도 참 돌머리야. 휴우!”
맹삼력이 자신의 머리를 툭 쳤다.
팽가촌에 대해서는 파악할 만큼 파악해 놓은 상태다. 개개인의 무공은 물론이고 성질이나 습관까지도 조사해 놨다.
마차를 소리없이 따라붙을 정도의 고수라면 당연히 팽가오도를 떠올렸어야 한다. 한 명이 따라붙었다면 생각할 인물이 많지만 여럿일 경우에는 그들부터 생각했어야 한다.
팽가오도, 도를 깨달은 사람들.
도를 수련한 사람들이 아니라 깨달은 사람들, 각자(覺者)라는 표현을 쓴다.
도대체 얼마나 강하면 그런 별호를 쓸까 하고 생각한 적이 있다.
‘더럽게 강한 놈들이네. 난 일초지적도 안 되겠어.’
맹삼력은 속으로 툴툴대면서 마차를 몰았다.
츠츳! 츠츠츳!
사방에서 살기가 뻗쳐 온다.
살기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루주와 맹삼력은 오체분시(五體分屍)가 되고도 남았다.
맹삼력은 잔뜩 주눅 든 표정으로 마차를 몰았다.
아무 이유 없이 살기를 쏘아내는 경우는 없다.
당장 공격은 하지 않더라도 죽일 마음이 있기에 악의(惡意)를 담아서 쏘아보는 것이다.
그런 눈빛을 받아내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담담함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면 상대의 분노는 활활 타오르는 불속에 기름을 쏟아 넣었을 때처럼 걷잡을 수 없이 치솟는다. 더불어서 상대에 대한 경계심도 높아진다.
두 번째는 맹삼력이 하고 있는 것처럼 잔뜩 움츠러드는 것이다.
나는 기가 죽었다. 네 먹잇감이다. 때리면 맞을 수밖에 없는 처지다. 제발 목숨만…….
기가 죽어서 주눅 든 것이 아니라 사나운 눈길을 받아내는 방법 중에 하나다. 기루를 전전하면서 마부 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터득하지 못했을 대응책이다.
루주가 목도로 등을 가격당하던 동네 어귀에 도착했다.
“멈춰라.”
마차 옆에서 싸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맹삼력은 마치 그 말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급하게 고삐를 낚아챘다.
“이놈아, 이놈아! 서란다, 이놈아!”
히히힝!
말들이 투레질을 하면서 멈춰 섰다.
또 왔다. 팽가촌!
제5장 백도(白道)의 체면
1
“허허! 아주 영악한 놈이로세.”
팽가일로(彭家一老)가 말했다.
“일이 우습게 돌아갑니다.”
팽가일로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게 말일세. 일이 아주 우습게 돌아가고 있어. 이건 팔 하나 잘린 것보다 더 아픈걸. 허허!”
웃고 있지만 웃는 게 아니다.
“형님은 뭐하고 있었습니까? 저런 놈인 줄 알았으면 일찍 끝내 버리시지 않고.”
오로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팽가삼로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마차만 노려봤다. 팽가사로는 싸늘한 안광만 발산했다.
북경을 벗어나면 바로 칠 생각이었다.
오늘, 내일…… 하루 이틀 사이에 결판날 일이었다.
한데 그동안에 놈은 가모를 습격했을 뿐만 아니라 당당하게 마차를 타고 들어선다.
하북팽가는 완벽하게 당했다.
놈은 사지로 걸어 들어온 게 아니다. 유일한 생로(生路), 탈출구를 찾은 것이다. 이것이 탈출구가 될지 사지가 될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지만 천요루주가 택할 수 있는 많은 길 중에 최상의 길을 택한 것만은 틀림없다.
사람들은 수군댄다.
천요루주가 가모를 습격했다며?
그게 말이나 되나. 루주 같은 놈이 어떻게 습격을 해? 팽가가 그렇게 만만한 곳인가?
마차에 손을 썼대.
이건 또 무슨 소리야? 팽가촌 깊숙이 모셔져 있는 마차에 어떻게 손을 써? 루주가 팽가촌을 들락거렸단 말이야? 그러는 동안 팽가 무인들은 두 손 두 발 다 놓고 멀거니 지켜만 봤고?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 말이 되지 않는 소리가 실제로 벌어졌다.
사람들이 믿지 않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되는 일이 현실로 드러났다.
실제로 그렇다면 하북팽가의 대망신이 아닐 수 없다.
기루 루주같이 비루한 자가 팽가촌을 들락거릴 동안 팽가 무인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 팽가촌이 그토록 허술한 곳이었나? 마차 바퀴에 수작을 부리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을 텐데, 그동안 모두 잠만 자고 있었나?
또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고 해도 팽가는 대망신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팽가는 천요루를 핍박했다.
천요루 주변에 무인을 배치했다. 직접 압박해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지붕 위에서 감시하는 것만으로도 팽가의 의도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물론 천요루를 고사(枯死)시킬 목적이었다는 건 안다. 그 이유가 이공자 음해 사건이라는 것도 안다. 그러나 가모의 마차 전복 사건까지 그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은 너무했다.
사람들은 이번 일은 팽가의 억지라고 생각한다.
팽가로서는 죄를 입증해야 할 의무가 생긴 셈이다. 그렇지 않으면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을망정 놓아줄 수밖에 없다.
천요루주가 무슨 짓을 했는가?
뒷산을 타고 들어와 우물에 미숫가루를 뿌렸다.
그것이 전부다.
팽가사로가 말했다.
“어쨌든 저놈은 반드시 죽여야 할 놈이 되었군요. 영악하든 영악하지 않든 말입니다.”
팽가 무인들은 멍청하지 않다.
그들은 살기를 쏘아냈지만 이미 승산없는 싸움이라는 걸 감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분노까지 포함시켜서 더욱 진한 살기를 토해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럴 경우, 사마외도 같으면 당장 목을 쳐냈다.
그놈의 증거 따위가 무슨 소용인가. 심증만 있으면 끝난 것이다. 일단 죽여놓고 저간의 사정을 천천히 따진다.
세간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그들이 부러울 때도 있구나.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놈이 가주의 담장을 넘었을 때, 그때 잡았어야 한다.
분기를 참지 못하고 우물에 오물을 투하했다고 하자. 아무렴 먹어도 배탈조차 나지 않을 미숫가루를 쏟아 넣었을까. 독은 아닐지라도 하다못해 똥이라도 던져 넣는 게 사람 마음이 아니던가.
그때 놈을 다그쳤어야 한다.
아무래도 이상했는데 곧 끝장날 놈이니 며칠만 기다리자던 게 실수였다.
젊은 청년이 천요루주 앞에 섰다.
이목구비가 말끔한 미공자다. 신언서판(身言書判)의 가장 앞에 있는 신으로 볼 때 최상의 사내 중 한 명이다.
그는 백설(白雪)처럼 고운 백의(白衣)를 입고 있었다. 허리에는 날렵한 유엽도를 찼다.
“내가 누군지 알겠느냐?”
“죄송합니다. 사람을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천요루주는 사내를 힐끔 쳐다보았을 뿐 별다른 예(禮)를 취하지 않았다.
“저기, 저…….”
루주 곁에 시립해 있던 맹삼력이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했지만 입을 열지 못했다.
사내가 피식 웃으면서 맹삼력을 쳐다보았다.
“너는 내가 누군지 아는 모양이군.”
“이, 이공자님…….”
맹삼력이 더듬거리면서 말했다.
“아직도 기억나지 않느냐?”
이공자의 눈길이 천요루주에게 향했다.
“흠! 그렇군요. 공자님이 이공자님이시군요. 하하! 이거 참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공자님께 외상술을 드렸다가 괜히 목도만 얻어맞지 않았겠습니까. 하하하!”
루주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술만 얻어 마신 게 아니지. 술 깬 후에야 알았는데, 아주 황홀한 약까지 줬더구나.”
“그렇습니까? 쯧! 그렇게 단속을 하는데도……. 요즘 애들은 마음에 드는 사내를 만나면 어떻게든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고 엉뚱한 짓도 하는 모양입니다.”
“네 잘못은 없다는 투로구나.”
“하하! 그 아이… 깊은 사정이야 전들 알겠습니까?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공자님께서 늘씬하게 두들겨 패놓은 건 봤습니다.”
“하하하! 물고 늘어지겠다? 하하하! 그건 그렇고… 월아 그 애는 어디로 빼돌렸느냐?”
“착각의 말씀. 빼돌린 게 아니라 도주했습니다.”
“그래?”
“은자까지 훔쳐서 도주했으니……. 그런 애들, 일단 숨으면 좀처럼 찾지 힘들죠.”
“그건 너희 말이고… 후후후!”
이공자 팽효뢰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렸다.
‘잡혔다!’
눈치코치로 밥을 먹고 살아온 사람들이 평생 무공만 파고든 무공 샌님의 표정을 읽지 못할 리 없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그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잠자코 있는 수밖에 없다.
이공자가 살기 깃든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하하하! 재미있게 됐어. 벼룩에게 물리는 맛이 이런 거군. 하하! 들어가 봐라. 아버님께서 기다리신다. 가는 길은 알지? 한 번 와봤잖아. 하하하!”
“독대다. 안 돼!”
맹삼력이 소매를 잡았다.
“후후! 선택의 여지가 없어. 여기까지 왔잖아.”
“그래도 독대야. 여기서 버텨야 해.”
맹삼력은 입술이 바짝 타들어갔다.
정도 문파의 약점!
이 점을 최대한 이용해야 한다.
현재까지는 천요루주도 불리하지 않다.
그는 가해자, 팽가촌은 피해자다. 이런 상황에서 심판을 받는다면 누구든 팽가촌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증거가 없다. 이것이 정도 문파의 맹점이다. 만인 앞에서 일의 선후를 따진다면 얼마든지 응대할 수 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