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n Swordsman RAW novel - Chapter 26
26
십검애사(十劍哀史) 2
-당번여류(撞翻如流) 오는 대로 받아넘긴다
제8장 주검 하나
1
‘검치의 제자…….’
검치가 어떤 사람인지는 팽가연도 알고 있다.
시대가 달라서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무림을 질타했던 절대고수를 모를 리 있겠나.
치기 어린 사람과 정신박약은 구분된다.
검치는 후자다. 본인 의지와는 상관없이 정신세계가 어린 세계에 머물러 있다.
즉, 어린아이가 절대 검수로 성장했다는 말과 다를 바 없다.
어린아이에게 주어진 것은 시간뿐이다. 정신적인 성숙은 제자리에 머물러 있으되, 시간만 넉넉하게 주어졌다.
어린아이가 주어진 시간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반복된 수련뿐이다. 검공에 대한 사고(思考)도 할 수 있지만, 깊게 들어가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끈기와 인내를 가지고 반복 수련을 하는 길밖에 없다.
그런 수련으로 절정 검공을 깨달을 수 있을까?
그는 의문으로 가득 채워진 고수다.
그런데 제 일신(一身)을 돌보기에도 벅찰 것 같은 검치가 제자까지 거뒀다.
온통 불가사의(不可思議)투성이다.
루주도 이해할 수 없다.
그가 정녕 검치의 제자인가? 그렇다면 회자수 서른 명쯤은 너끈히 해치웠어야 한다. 그런데 최정상에서 무명을 떨친 검치의 제자가 밑바닥 인생을 사는 회자수들에게 난자당했다. 비록 그들을 모두 죽이긴 했지만 그 역시 불기화령혼이라는 특이한 대법이 아니었으면 회복하지 못했을 상처를 입었다.
검치의 제자가 맞기는 한 건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투성이다.
호가라는 자도 심상찮다.
일개 주루의 접객원(接客員)이 불기화령혼을 알고 있다.
중원 전체를 이 잡듯 뒤져도 아는 사람이 전무한 천축의 대법을 능숙하게 사용한다.
이 작자는 뭐하는 놈인가.
팽가연은 혼란스러웠다.
그렇다고 변한 건 없다. 루주는 의모의 아이, 자신의 동생을 낙태시켰다.
그 정도 함정쯤은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약간 놀래줄 생각이었다?
살인을 해놓고 왜 피하지 않았느냐고 말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 행위가 고의로 판명된 지금 결코 놈을 용서할 수 없다. 놈이 자신의 손아귀에 걸려들었으니 자신이 끝내줄 심산이다.
팽가연은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혔다.
절정 도법은 무심의 상태에서 현신한다.
그렇다. 자신이 펼치는 게 아니다. 하늘이 기운, 땅의 기운, 세상의 모든 기운이 도에 깃드는 것이다. 자신은 도의 움직임을 표현해 주는 도구일 뿐, 도의 흐름은 자연이 만들어준다.
스으으으!
진기가 전신을 맴돈다.
무릎 위에 올려놓은 유엽도에도 진기가 스며든다. 쇠붙이는 엄연히 이물질이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육신의 일부다. 육신의 연장선에 존재한다.
그녀는 운공삼매(運功三昧)에 빠져들었다.
루주는 죽어야 한다.
천지가 개벽해도 변하지 않을 불변의 사실이다. 다만 방법론에서는 약간의 이견이 있다.
팽가연은 직접 손을 쓰고자 한다.
가모를 해코지했다. 그런 자를 두 발 편히 뻗고 자게 만드는 것은 하북팽가의 체면 문제다. 한낱 기루 루주에게 농락당하고도 허수아비처럼 멍하니 지켜보기만 했다.
무슨 낯으로 강호 동도를 대할 것인가.
그녀의 말은 백번 옳다.
하지만 팽가촌은 이미 그런 일을 저질렀다.
루주를 죽이려면 팽가촌에서 죽였어야 한다. 그때 살려 보냈으니 이제는 죽일 명분을 잃었다.
대의(大義)로 용서.
강호 동도에게는 그런 식으로 설명해 나가야 한다.
그런데 팽가연의 고집을 그 누구도 꺾지 못한다는 데에서 문제가 있다.
그녀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일을 포기한 적이 없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니라고 해도 그녀가 옳다고 판단하면 반대편에 선다.
그런 성격 때문에 골치 아픈 적이 어디 한두 번이던가.
그녀가 루주를 직접 죽이겠다고 말했을 때, 팽효기는 순순히 시인해 주었다.
만류해 봤자 소용없다. 그녀가 이미 마음속으로 결심을 굳힌 후이기 때문에 파란만 일어난다. 그럴 바에는 싸우는 사람의 마음이나 편하게 해주고 싶다.
‘곤란하게 됐어.’
미간이 절로 찌푸려지는 건 당연하다.
팽가연은 정정당당한 승부를 원한다.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루주 같은 자와 검을 섞는다는 자체가 정정당당과는 거리가 멀다. 그녀는 평생 동안 무공만 수련했다. 루주는 온갖 잡 짓을 한 놈이다.
승부가 될 리 없다.
그래도 다 나을 때까지 기다려 준다니 그게 어디인가. 지금 당장 쳐도 할 말이 없는 판에 싸울 수 있는 몸을 만들 때까지 기다려 준다니 다행이지 않은가.
루주는 고마워해야 한다.
또 그 점은 팽효기도 고맙다.
지금 당장은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으니까.
‘할아버지가 오시면 결정을 내려주시겠지.’
“가연이가 직접 싸울 생각이냐?”
“네. 만류해 보았습니다만…….”
“네가 용인해 주었겠지.”
“네. 거절할 명분이 없었습니다.”
팽효기가 공손히 대답했다.
“승부라…….”
팽가사로 팽청치는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크게 고민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저 어린 손녀의 재롱이 아주 재미있다는 표정이다.
팽효기는 이런 할아버지의 표정을 익히 보아왔다. 그리고 그런 표정이 지닌 의미도 안다.
“승부가 될 리 없습니다.”
할아버지의 생각을 강하게 부정했다.
“너무 가볍게 생각했구나.”
“네?”
“어쩌면 너보다 가연이의 안목이 나을지도…….”
“승부가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저놈이 검치의 제자라는 사실을 잊었느냐?”
“그런 뜻에서 하신 말씀이라면 승복할 수 없습니다. 루주가 사용한 무공은 반편입니다. 제대로 수련한 무공이 아닙니다. 그런 무공으로 어찌 팽가 도법을…….”
팽가사로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이론적으로는 팽효기의 말이 백번 맞다. 어느 한구석 틀리지 않다. 이런 의견에 반론을 제시한다면 그게 잘못된 게다.
그래도 팽청치는 고개를 흔들었다.
세상에는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
루주라는 인간이 그렇다. 그는 상식 밖에서 행동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말이 되는 게 없다.
세월을 오래 지켜본 사람의 직감이지만 팽가연과 루주, 좋은 승부가 될 것 같다.
“이 승부, 말리지 마라.”
“그대로… 지속시킵니까?”
“지속시켜라.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니… 입을 꾹 다물게 하면 되겠지.”
말뜻을 알아들었다.
“뒤처리… 깨끗하게 처리하겠습니다.”
팽가사로가 왔다 갔다.
죽음을 몰고 다니는 작은할아버지가 이곳에 왔다.
‘죽을 팔자였군.’
팽가연은 루주의 운명을 예감했다.
자신이 그를 놔줘도 그리 멀리 도주하지 못한다. 누가 손을 쓸지는 모른다. 할아버지가 직접 손을 쓸지 회자수를 동원할지 모르겠지만 할아버지가 노린 이상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잘됐어. 이제는 아무 부담 없어.’
그녀는 빙그르 웃었다.
그녀라고 세상을 보지 못하는 게 아니다. 어른들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안다. 정도 문파 팽가가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북팽가가 샛길을 염두에 두었다.
무림에서 항상 있어왔으나, 입 밖으로 난 적이 없는 아주 더러운 일이 벌어진다.
더럽건 말건 상관하지 않는다.
오직 의모를 해치려고 했다는 사실 하나만 주목한다.
그 행동 때문에 빛도 보지 못하고 스러져 간 핏덩이……. 가슴에 한을 품게 된 의모만 생각한다.
‘죽어 마땅한 놈…….’
***
“쟤네들 뭐니?”
“꼴에 명문정파라 이거 아냐.”
“다 나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치려고? 염병. 죽을 놈 간신히 살려놨더니 또 죽을 운이네. 조심해라. 이번에는 안 살려준다.”
“살려줄 수나 있고?”
“없지. 저것들이 본격적으로 칼을 휘두르기 시작하면 감당이 안 돼. 한 칼이라도 맞는 날에는 그야말로 즉각 황천행이야. 손쓰고 말고 할 틈도 없다는 거지.”
호가가 맹삼력의 상처를 살피면서 말했다.
“너무 빨리 낫는 거 아냐?”
“왜? 칼 맞을까 겁나냐? 늦게 낫는 건 염려하지 마. 치료하다가 실수하는 척하고 칼침 한 대 놓지, 뭐.”
“너 그거 농담 아니지? 늘 마음속에 품고 있던 생각이지?”
“농담으로 들렸냐?”
호가는 감고 있던 붕대를 힘껏 잡아당겼다.
“아얏! 살살… 살살…….”
맹삼력이 복부를 움켜잡고 식은땀을 흘렸다.
하북팽가의 무공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초식이 어떻고, 신공이 어떻고, 신법은 표범이 광야를 질주하는 것 같다는 둥 팽가 무공을 설명하는 말이 무수히 돌아다니지만 어느 말도 정확하지 않다.
하북팽가 같은 큰 문파, 대가문의 무공은 사람에서 나온다. 신공을 볼 게 아니라 사람을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누가 어떤 무공을 어느 경지까지 수련했느냐.
하북팽가의 모든 무인이 절정고수일 리는 없다. 그들 중 상당수가 무공을 수련 중인 미숙아(未熟兒)다. 절정을 목표로 삼고 분투 중인 수련도일 뿐이다.
열 손가락에 꼽히는 소수의 몇 명이 하북팽가 전체를 이끌어간다.
열 손가락…….
열 명도 채 안 되는 사람들이 중원무림의 오대세가(五大勢家) 중 일가(一家)라는 명성을 유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팽가오로라고 해서 모두 고수는 아니다.
이미 명성을 입증한 팽가오도 역시 전부 고수로 볼 수 없다.
중원무림은 그들을 고수로 인정하고 있고, 또 그만한 대접도 받고 있지만, 글쎄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생각하는 고수 반열에는 미치지 못한다.
고수는 검 한 자루에 전신진기를 실을 줄 알아야 한다.
그걸 누가 못하냐고?
맞다. 모두가 다 한다. 개나 소나 다 한다. 진기를 운용할 줄 알고, 병기를 쓸 줄 아는 자라면 진기 없이 병기를 쓴다는 건 생각하지도 못한다.
검에 진기를 주입해야 강력해진다.
한낱 쇠붙이가 살아 있는 생명체로 변한다.
진기 운용을 잘하는 자가 검을 들면 바람도 없는데 검명(劍鳴)이 터져 나온다.
우우우웅!
검의 울음, 칼의 울음을 한 번이라도 들어본 사람이라면 차원이 다른 경이로움에 넋이 나갈 것이다.
그런 일들을 무인들이 한다.
하나 그것은 진정한 진기 주입이 아니다.
진기를 육신과 검이 균등하게 나눠 가지는 게 무슨 진기 주입이란 말인가.
육신이 텅 비어져야 한다.
검과 몸이 허공에 뜨면 검은 살아서 움직이되 육신은 죽어서 검을 쫓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상대의 병기가 육신을 가격하는 것은 느끼지 못한다. 칠 테면 치라는 식이다. 하지만 손에 든 검에 무엇이라도 닿을라치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몸으로 감지된다. 검이 느끼기 때문에 몸도 따라서 느끼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진기 주입이다.
하북팽가에는 이런 식으로 도를 쓸 수 있는 사람이 적어도 열 명은 된다.
그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도 한 자루로 바위도 무너뜨릴 수 있고, 염라대왕도 벨 수 있다.
팽가사로는 그런 고수다.
그가 나타나는 순간, 온몸에 칼로 찌르는 듯한 전율이 짜르르 흘렀다.
팽청치는 도를 뽑지 않았다. 하지만 쳐다봤다. 진기가 눈빛에 실려서 전신을 난자했다.
그가 느낀 것은 팽청치의 눈빛이다. 하지만 그 눈빛만으로도 전신이 갈라지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팽가연도 고수이고 그 옆에 있는 사내도 상당한 예기를 풍기지만 팽가사로와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도를 능숙하게 사용하는 무인’ 정도의 평가면 충분하다.
물론 자신도 그런 고수가 아니다. 그런 고수가 되려고 했고, 지금도 되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사부가 보여주었던 절정의 모습을 재현해 내는 데는 실패하고 있다.
이번에는… 이번에는…….
언제나 자신있게 펼쳐 보지만 결과는 늘 실망뿐이다. 검에 대해서 실망하고, 자신에 대해서 실망한다.
‘이번에는…….’
상처를 쳐다봤다.
불기화령혼은 깊은 상처에 기름으로 도포를 입혀준다. 피가 나오지 않게, 염증이 생기지 않게, 그리고 그 어떤 치료보다도 빨리 낫게 해준다.
상처는 십여 일 정도면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나을 것이다.
팽가연을 상대로 검을 써보는 것도 괜찮다.
그녀를 죽이는 건 어떨까? 어머니가 고통을 받을까?
아니, 아니다. 마음속에 얼음 덩어리를 지니고 있는 여자가 고통 같은 것을 느낄 리 없다.
그녀는 오히려 팽가연이 죽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그러면 팽가 전체가 혈안이 되어서 뒤쫓을 것이다. 그녀가 원한 대로…… 그보다 더한 즐거움이 어디 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