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n Swordsman RAW novel - Chapter 28
28
도인은 피하지 못했다.
회자수들이 피하지 못했을 때는 저런 것도 못 피하는 병신들이라고 비웃었다. 하지만 살수, 그것도 특급 살수로 보이는 자가 눈 빤히 뜨고 당했다.
루주의 검을 다른 각도에서 살펴야 한다는 뜻이다.
팽효기와 팽가연은 어째서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지 관찰해 냈다.
루주는 부서진 검을, 손잡이만 남은 검을 도인에게 던졌다. 두 눈 사이의 미간을 노렸다.
그런 걸 맞을 사람이 있나.
당연히 고개만 살짝 틀어 피한다. 한데 그 순간, 루주는 또 다른 검을 꺼냈고, 찌르거나 벤다.
완전한 눈속임이다.
모르는 사람이 당했다고 생각하면 글쎄?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는 치밀한 눈속임이 아닐까?
그런데 그다음, 루주는 관용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섞이지 않는 살검을 쓴다. 굳이 그런 검을 쓰지 않아도 되는데 억지로 검을 터뜨린다.
아주 비효율적인 죽임이다.
그런 검을 쓰면 일단 검이 불필요하게 소진된다. 그냥 베기만 해도 죽을 텐데 왜 굳이 검까지 버릴까.
진기 소진도 극심하다.
루주는 한 사람을 죽이면서 두 번이나 진기를 썼다. 서로의 병기를 조각내면서 한 번, 죽이면서 한 번. 보통 무인들이 전력을 기울여도 되지 않을 정도의 극강한 타격을 두 번이나 사용한다.
탈진 상태가 빨리 올 수밖에 없다.
확실한 죽음? 그런 건 필요없다. 루주가 검을 치는 각도는 한결같이 치명적인 사혈(死穴)이다. 굳이 검을 비산시키지 않아도 살아날 가능성이 전무하다.
그가 회자수들에게 난자당한 것도 이 때문이다. 첫 번째 진기 소진은 어쩔 수 없다고 쳐도, 두 번째 진기 소진은 누가 봐도 쓸데없는 낭비다.
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이런 검을 전개했으니,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한 것만도 천행이다.
루주는 왜 이런 검을 쓸까?
직접 그에게 물어보지 않고는 정녕 이해가 불가능하다.
여기서 또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루주는 회자수들의 온갖 병기에 이어서 귀동 살수의 검까지 부숴 버렸다.
귀동 살수의 내공은 상당한 수준이다. 팽가 무인들과 정면에서 부딪쳐도 견뎌낼 수 있을 만큼 강하다.
그런 자의 검이 부서졌다.
이런 경우, 루주의 검이 부서졌어야 한다. 도인이 마혼이라는 명검까지 들고 있는 이상 병기의 싸움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도인이 절대적으로 우세하다.
그런데 같이 부서졌다.
이런 일은 전에도 있었다. 회자수, 그들은 내공이 강하지 않다. 한데 그들의 병기와 부딪쳤을 때도 같이 부서졌다.
상대의 내공 여하에 관계없이 양쪽 병기가 같이 부서진다.
루주의 검에 필력(必力), 원력(原力)이 실렸다는 뜻이다.
그는 전력을 다해서 검을 쓴다.
아주 단순하지만 대응책이 없는 공격법이다.
이런 검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첫 번째 일검을 무조건 흘려버려야 한다.
그까짓 걸 못 피하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만한 신법도 갖추지 못한 채 무림에 나왔냐고 말할 수도 있다.
루주의 검은 그럴 공간을 주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다.
충분히 피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피하지 못한다. 부딪치지 않으려면 공격하지 않는 수밖에 없는데, 그럼 싸울 이유도 없는 것이고, 그렇다고 공격해 들어가면 반드시 얽힌다.
정말 묘하면서 웃긴 검이지 않나.
“잘 생각해야겠다.”
팽효기가 남의 이야기처럼 말했다.
‘그까짓 것…….’
팽가연은 무심히 튀어나가려는 말을 억지로 꾹 눌러 삼켰다.
모두들 그런 식으로 말했다가 당했다.
그녀가 본 것은 회자수의 싸움과 도인과의 싸움뿐이지만, 그들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까짓 것’ 하면서 무시했을 게다.
연구해야 한다. 강적을 만났을 때처럼, 정신 똑바로 차리고 어째서 피할 수 없는지 이유를 찾아야 한다.
도가 부서지면 당한다.
물론 그럴 때도 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지만 지금은 그녀조차도 확신하지 못한다.
피하고 친다.
원칙은 정해졌다. 남은 문제는 무엇으로 어떻게 피하느냐 하는 방법론뿐이다.
그녀는 진중하게 말했다.
“연구거리가 생겼네요.”
3
‘죽어?’
귀살왕은 도인의 죽음을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손가락만 까딱거려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놈에게 되레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이럴 수는 없다. 뭔가 잘못되었다.
귀살왕은 도인의 죽음이 하북팽가의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 자리에는 팽가 무인이 두 명이나 있었다. 팽가연과 팽효기라는 걸출한 무인이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그런 자리에서는 싸우는 게 아니다. 살수는 암습으로 승부를 내는 존재이지 무공을 자랑하는 존재가 아니다. 강한 자들이 득실거리는 곳에 버젓이 기어들어 가서 무공으로 승부를 결할 정도의 못난이가 아니다.
그런데 그런 짓을 했다.
누군가가 심하게 압박했다는 뜻이고, 귀살왕은 그 주체로 팽효기를 염두에 두었다.
“살펴봐라! 팽가의 무공이 단 한 오라기라도 나온다면 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니!”
결과는 상당히 놀랍다.
도인은 특이하게 죽었다. 죽을 수밖에 없는 필사의 공격을 당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허수아비라도 이 정도로 당하지는 않았으리라 싶을 정도로 심하게 망가졌다.
그러나 그 속에서 하북팽가의 손속은 발견되지 않았다.
“마혈(痲穴)을 찍힌 채 짓이겨진 거 아냐!”
아니다. 수하들에게 물을 필요도 없다. 도인의 배를 갈라보니 이건 정말 말이 나오지 않는다.
‘뭐냐!’
귀살왕은 침묵 속으로 들어갔다.
사람 뱃속을 이 지경으로 만든 무공이 뭐란 말인가!
하북팽가의 무공이 아니다. 절대 아니다. 무공에도 성격이란 것이 있는데, 팽가의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잠시 다른 생각을 했었다. 하북팽가가 마혈을 찍어놓고 사인을 구분할 수 없게 평범한 수를 썼다고 생각했다.
아니다. 이제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아니다.
‘이게 정녕 놈이 한 짓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가모의 말이 틀렸다. 놈은 무지렁이가 아니라 무시할 수 없는 무림 고수다.
귀살왕의 주름이 점점 깊어갔다.
검치의 제자!
하북팽가가 알아낸 사실을 귀동도 알아냈다.
루주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하지만 아주 잔인하게 회자수들을 도륙해 버린 일은 비밀도 아니다. 특히 뱃속에 화약을 넣고 터뜨려 버렸다는 소문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검치!
정신 상태가 어떻다는 말이 많지만 어쨌든 그는 당대 제일의 검호(劍豪)다. 그와 겨뤄서 이긴 자가 없다. 비등하게 끝낸 자도 없다. 진 자와 싸움을 기피한 자만 있다.
그런 자가 제자를 키워냈다. 제정신이 아니라서 옳게 키워내지 못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검호가 키워낸 제자다. 열 개 중에서 한두 개만 이어받아도 한 지방 패주(覇主) 노릇 정도는 한다.
청부를 너무 싸게 받았다.
일파의 문주에 해당하는 청부였는데, 하급 졸개 정도로 치부해 버렸다. 놈이 천요루 루주였다는 점이 놈을 비하시키는 요인으로 작동했다.
“팽가연과 팽효기가 그놈 곁을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서로 숨지도 않고 견제만 합니다. 아무래도 조만간 어느 한쪽은 끝장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이것은 매우 좋은 소식이다.
적어도 한 번은 놈의 정확한 무공을 살필 기회가 생긴 셈이다.
“암사(暗死).”
“네.”
기둥에 등을 기대고 서 있던 애꾸가 무심히 대답했다.
“길 떠날 채비를 갖춰라.”
암사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떠날 채비는 이미 끝났다. 살수가 검 한 자루 챙기면 끝난 게 아닌가. 더 무엇이 필요한가.
귀살왕은 다른 자들을 쳐다봤다.
수하가 많다. 저들 모두 사람을 죽여본 경험이 있다. 능숙한 자도 있고, 미숙한 자도 있다. 하지만 루주에게는 안 된다. 되는지 안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왠지 안 된다는 느낌이 든다.
“너희는… 됐다.”
귀살왕은 얼굴 전체를 뒤덮는 큰 방갓을 쓰고 일어섰다.
“제길! 우리는 끝까지 무시당했네.”
한 놈이 투덜거렸다.
“자존심 상하는 문제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 짓도 슬슬 지겹지 않아?”
“어차피 우리한테는 청부도 안 들어올 테고. 들어와 봤자 바람난 여편네나 죽여 달라는 소리일 테고.”
“갈까?”
“됐다는 말… 따라오지 말라는 말은 아니잖아?”
남은 살수들이 서로를 쳐다봤다.
그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귀살왕과 암사가 잘못되면 그들 또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일단 살수는 포기해야 한다.
귀살왕처럼 비중있는 자의 수하로 다시 들어가지 않는 한, 살수로 살아남기 힘들다.
살수가 좋아서 하나. 먹고살기 힘드니, 혹은 사람 죽이는 짓밖에 잘하는 것이 없으니 하는 짓이지 않나.
다른 살수 문파에도 자신들과 같은 존재들이 득실거린다. 즉, 다른 곳으로 가고자 해도 받아주지 않는다.
그들의 생존은 귀살왕에게 달려 있다.
“가지, 뭐.”
앉아 있던 자가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
“그놈, 건드리지 마! 어떤 놈이든… 손끝만 건드려도 내 살점을 씹어 먹어버릴 테니까!”
상서가 분노했다.
그는 루주를 직접 처리하고자 한다.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끊어야 직성이 풀린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상서의 명령이 그런 이상, 철두철미하게 따른다.
북경 사람들에게 팽가촌 하가는 낯선 곳이 아니다.
회자수들이 하가를 살펴보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다. 주변을 훑고, 그리고 루주를 비롯해서 여러 사람이 득실거리는 곳을 찾아내는 것도 손금 보는 것보다 더 쉽다.
회자수 삼십 명을 때려잡은 놈!
상서에게 변고만 생기지 않았어도 벌써 지옥 문턱을 넘어섰을 놈!
회자수들은 루주를 놓지 않았다. 끈질기게 찾았고, 드디어 발견해 냈다.
“찾았어.”
“흐흐흐! 여기 숨어 있었군. 도망가 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이지. 멀리 가지 못할 줄 알았다. 흐흐흐!”
“그런데 팽가 사람들이 같이 있으면 어떻게 되는 거야? 우리가 쳐야 하나, 구경부터 해야 하나?”
“상서가 어떻게 할 것 같아?”
“상서 성격이라면 더 볼 것 있나. 다짜고짜 들이치겠지. 상서가 언제 남의 눈치 보는 사람이야?”
“흐흐흐!”
회자수들이 슬금슬금 물러섰다.
목표물을 발견했으니 이제 가서 보고한다. 그리고 상서의 결단에 무조건 따른다. 치라면 치고 구경하자면 한다. 졸개가 판단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때,
스읏!
물러서는 그들의 등 뒤로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깃털 네 개가 떨어져 내렸다.
“회자수군.”
깃털 중 한 명이 말했다.
회자수들이 소스라치게 놀라서 뒤를 돌아봤다.
장승처럼 떡 버티고 선 네 여자, 비연사도!
회자수들은 뒤통수로 낯선 말을 들을 때보다 더 크게 놀라 입을 쩍 벌렸다.
“상서가 바뀌었다는 소리는 들었어. 잔혈부가 반란을 일으켰다며? 곤란한 자가 상서가 되었단 말이야.”
다른 여인이 말했다.
“그놈은 원래가 반골(反骨)이야. 진작 제거했어야 하는데 죽이기는 아깝고… 어디 결정적인 곳에 써먹으려고 했겠지. 제 발등 제가 찍을 줄 모르고 말이야. 누굴 탓해.”
“회자수가 오면 안 되겠는데. 괜히 골치 아파.”
“그렇지?”
회자수들이 돌아가는 상황을 즉시 눈치챘다. 그들은 황급히 무릎을 꿇고 싹싹 빌었다.
“아, 아닙니다. 저희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아무것도 못 봤어요.”
“그렇습니다. 이봐, 여기도 없잖아. 내가 뭐라고 그랬어. 괜히 헛걸음한다고 했지. 어서 가자고.”
회자수가 슬금슬금 일어섰다.
“훗! 능구렁이 같은 놈들. 누구에게 수작을 부리는 거야?”
효령이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했다.
“난 아까부터 냄새나서 죽겠어. 이 사람들, 씻지도 않나 봐. 땀 냄새에 골치가 다 아파.”
유리가 코를 틀어쥐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마혈만 제압할 거야. 며칠 동안만 조용히 있으면 풀어줄게.”
취취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아무도 손대려고 하지 않는 그들을 향해 다가섰다.
“저, 저희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니까요!”
“반항하지 마. 반항하면 내가 어떻게 못해.”
그녀의 한마디에 두 회자수는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비연사도 중에서 가장 마음이 여린 사람은 취취다. 그녀의 손속이 제일 여리다. 그녀가 손을 쓰면 마혈도 부드럽게 제압되지만 다른 여인들이 손을 쓰면 목숨까지 위태로울 수 있다. 특히 흠화, 그녀는 가장 매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