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n Swordsman RAW novel - Chapter 39
39
루주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목검 두 자루를 모두 놓아버렸다.
탁탁!
목검이 땅에 떨어졌다.
팽효기는 당연히 무슨 뜻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약간은 곤혹스러운 듯, 또 약간은 경계의 눈빛을 띠고 루주를 쏘아봤다.
루주가 말했다.
“우리 승부… 일다경(一茶頃)만 미뤘으면 좋겠는데.”
“후후! 이건 또 무슨 수작…….”
“미뤄주는 걸로 알겠다.”
루주는 팽효기의 대답을 듣지 않았다. 그가 응하지 않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벌써 왼쪽 발에 감각이 없는 것을 보면 상당히 강한 독에 당한 것 같다.
팟!
그는 무릎을 살짝 구부렸다가 용수철처럼 퉁겨냈다. 동시에 등에 멘 목검 중에서 두 자루를 뽑아냈다.
팽효기가 움찔거렸다.
루주에 맞서서 공격을 해야 할지 아니면 그가 말한 대로 기다려 줄지 아주 잠깐 망설였다. 하지만 그는 곧 결정했다. 미허보법을 펼쳐서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혹여 공격을 당하더라도 방비할 수 있게끔 전권(戰圈)에서 물러난 것이다.
다른 때, 다른 장소였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루주는 적이지만 믿을 수 있다는 신뢰감을 준다.
싸움 자체는 믿을 수 없다. 놈은 정당하지 않다. 온갖 사술로 사람 눈을 현혹시킨다. 하지만 그 외에는 우직할 정도로 정면 돌파를 고집한다.
그때, 허공으로 솟구친 루주가 방향을 홱 틀었다.
‘웃!’
암사는 깜짝 놀랐다.
루주는 이해 불가능한 행동을 보여주고 있다.
독침에 발라진 독은 칠보사(七步蛇)에서 채집한 맹독으로 격중되면 일곱 걸음 안에 즉사한다.
그러면 일곱 걸음을 걸을 동안의 시간이 주어진 것인가?
아니다. 본인이 제일 잘 알겠지만 격중된 부위부터 마비되기 시작해서 촌각 만에 전신으로 번져 간다.
루주의 왼 다리는 나무토막이나 다름없다.
오른쪽 다리에 의지해서 신형을 띄웠지만, 허공에 몸을 두는 순간 오른 다리마저 마비되었을 게다.
저런 몸으로는 움직일 수 없다.
지금까지 움직인 자가 없었다. 마비된 부위를 붙잡고 쩔쩔매다가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놈이 독침에 당하고도 신형을 띄운 최초의 인간이다.
‘그래 봤자 넌 죽었어!’
암사는 망설이지 않고 신형을 쏘아냈다.
팽효기가 옆에 있지만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의 적을 죽여준다는데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일이지 않나.
적이 시간을 달란다고 정말로 시간을 주는 미친놈이 어디 있나. 한참 싸우는 도중에. 팽효기 그놈이 공격만 했어도 자신이 손을 쓸 이유는 없었을 텐데.
쒜엑!
목검이 천지를 가를 듯 내려쳐진다.
미친놈! 변식(變式)도 일체 없고, 속도도 느리고, 힘도 빠져 보이는 검, 그것도 나무로 만든 목검을 두려워할 사람이 어디 있다고 이따위 검을 쓰는가.
그는 거침없이 마주쳐 갔다.
루주가 검치의 제자라는 건 알지만 지금 그는 칠보사의 독에 중독된 상태다. 그가 전개하는 검이 팽효기를 상대할 때에 비해서 훨씬 산만하다.
이 정도는 무서워하지 않는다.
쒜에에엑!
검배(劍背)로 목검을 들어 올리며, 이어서 가슴을 베어갔다. 그때,
파팟! 파파파파팍!
괴이한 소리와 함께 그의 검이 산산조각나기 시작했다. 쇠로 만든 청강장검이 모래알처럼 흩어져 간다.
“이!”
암사는 너무 놀라서 입을 쩍 벌렸다.
그토록 힘이 없는 검, 독에 중독된 검으로도 혈파검을 전개할 수 있는 것인가.
그 순간, 루주의 신형이 눈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리고 거대한 힘이, 팔두마차가 깔아뭉개는 것 같은 막대한 힘이 옆구리를 강타했다.
“컥!”
암사는 비명을 쏟아내며 나뒹굴었다.
“컥! 컥컥! 컥……!”
암사는 비몽사몽간에 피만 쏟아냈다. 자신이 지금 어떤 처지인지, 산 건지 죽은 건지 아무 생각도 없었다. 그냥 견딜 수 없어서 피를 토해내고 있을 뿐이다.
툭!
목에 목검이 대어졌다.
암사는 그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누가 자신을 위협하든 말든 그저 죽을 것 같은 고통에서 벗어나기만 바랐다.
“컥! 컥! 컥……!”
그는 한참을 죽을 듯이 컥컥거리다가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입에서는 침과 피가 질질 흘러내린다. 코에서도 콧물과 핏물이 함께 쏟아진다.
그는 이마에서 굵은 땀을 비 오듯 쏟아낸 후에야 간신히 정신을 수습했다. 목에 닿아 있는 목검이 의식된 것도 그때다. 자신이 당했고, 아직 죽지 않았다는 사실도 비로소 인식되었다.
“해… 약…… 없다.”
암사는 툴툴 웃으면서 말했다.
그의 검을 부서 버린 건 혈파검이었지만, 육신을 가격한 건 혈파검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루주가 펼쳐 낸 검과는 사뭇 다르다.
루주는 적을 살려주지 않는다. 하물며 암습을 가한 자를 살려준다는 건 있을 수 없다.
루주가 왜 이런 검을 썼겠나? 해약(解藥)을 얻고자 함이 아닌가. 후후! 있어도 주지 않는다.
한데, 루주가 엉뚱한 소리를 했다.
“여자… 어디 있나?”
‘여자? 이게 무슨 소리?’
암사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이자가 왜 자신에게 여자를 물어볼까? 여자라면 그 여자! 천요루의 기녀! 그녀에게 탈이 생겼나? 왜? 어쩌다가?
또 다른 생각도 들었다.
‘기회닷!’
루주는 독에 중독되었는데도 해약에는 관심이 없다. 대신 여자를 물어왔다. 이 말은 자신의 안위보다도 여자를 더 끔찍이 위한다는 뜻이다.
그는 음충맞게 웃으며 말했다.
“흐흐흐! 말할 기회가 없어서 말하지 않았는데, 내가 당한 고통이 고스란히 그녀에게 전해질 것이다! 네가 날 치면 그녀도 맞는다. 네가 날 죽이면 그녀도 죽는다. 흐흐흐!”
암사는 승부는 끝났다는 듯이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때,
“그런가. 그럼 죽여야겠군.”
루주의 냉담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리고 그의 머리 위에서 바람 가르는 소리가 울렸다.
빠악!
목검이 그의 머리를 묵사발로 만들었다.
그를 죽이는 데 굳이 혈파검을 쓸 필요는 없었다. 힘껏 내려친 목검에 머리뼈가 절반이나 부서져 나갔다.
머리를 반이나 잃은 육신이 풀썩 꼬꾸라졌다.
기루를 운영하려면 인심술(人心術)에 뛰어나야 한다.
술장사, 여자 장사는 이것저것 부수적인 요건이 많지만 결국은 사람 장사다.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어야 장사가 잘된다.
세상 사람들은 ‘술장사를 한다, 기루를 운영한다’ 하면 포악한 얼굴부터 떠올린다.
폭력, 갈취, 독심(毒心), 무정(無情) 등등 좋지 않은 것은 모두 생각한다.
그중에서 가장 크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바가지다.
다른 것은 자신들과 직접적인 상관이 없지만 바가지는 바로 피해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술장사하는 놈치고 바가지 씌우지 않는 놈 없다.
이게 현실이다. 하지만 정말 큰 장사를 하려면 바가지 같은 것은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하나라도 더 줄 때, 아낌없이 베풀 때 들어오는 것도 많다.
사람을 팔고 사는 사람 장사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는 진짜 사람 장사다.
그는 인심술에 능하다. 표정만 보고도, 말하는 어투만 듣고도 참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다.
암사는 거짓을 말했다.
‘여자’를 물었을 때, 그의 눈에 의문이 스쳐 갔다.
지극히 짧은 시간에 번뜩였다가 사라진 눈빛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참으로 불행한 일이지만, 그의 목숨을 쥐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런 눈빛을 읽는 데 능한 사람이다.
지금까지 귀동이 주설언을 납치한 줄 알았는데……. 그녀는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현장에 남겨진 것은 분명히 납치의 흔적인데, 누가 데려간 것인가.
귀살왕이 암사 모르게 단독으로 납치한 것일까?
그녀를 납치한 목적이 자신이라면 조만간 마각을 드러낼 게다.
다른 쪽도 생각해야 한다. 그녀에게는 전표가 있었다. 일생을 편히 쉴 만한 거액을 지녔다. 또한 그녀는 예쁘다. 하북제일미녀인 팽가연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그런 점을 노린 파락호, 회자수일 수도 있다.
그 부분은 맹삼력이 주력해서 파악하는 중이니…….
“끄응!”
그는 극심한 독기에 현기증이 치밀었다. 두 다리는 이미 마비된 것 같고, 팔도 찌릿찌릿 저려온다. 하지만 아직 상대가 남았다. 이런 상태로 싸울 수 있을지 모르지만 목검을 들었다.
“중독?”
“괜찮다.”
괜찮지 않다. 루주는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고 만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린다. 얼굴도 붉은 물감을 뿌려놓은 것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다.
팽효기는 암사가 나타나고, 루주와 격전을 벌이는 순간에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눈치챘다.
암사가 죽었다. 루주는 중독 현상이 뚜렷하다.
그는 잠시 망설였다.
루주를 죽이기에는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없을 것이다.
하북팽가의 결정은 단호하다. 반드시 죽이라는 것이다. 거기에 루주의 상태를 고려하라는 말은 포함되지 않았다. 반드시 정면 대결만 하라는 말도 없다. 무조건 죽이기만 하면 된다.
팽효기는 곡도를 축 늘어뜨렸다.
독에 중독된 자를 치는 건 재미없지 않은가. 검치의 무공을 맛이나마 보여줄 수 있는 자인데, 이대로 보내기에는 아쉬움이 너무 많이 남지 않나.
“하나만 묻자. 내일이면 거침없이 살검을 썼을 거라고 했는데, 무슨 뜻이냐?”
“소… 문.”
루주는 이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소문?”
“검치… 의 제자……. 무림… 출현…… 소문…….”
“그렇군.”
팽효기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루주는 기루 주인에서 무인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그래서 팽가에서 걸어온 싸움을 정식 싸움으로 바꿀 셈이다.
그런 상황이라면 죽음이 문제되지 않는다.
무인과 무인의 겨룸에서 생사(生死)가 일어나는 건 당연한 것. 그런 일을 복수의 꼬투리로 삼을 수는 없다.
‘내일이면 죽은 목숨? 후후후!’
팽효기는 곡도를 거뒀다.
이쪽에서 마음껏 칠 테니 너희도 자신있으면 와라.
그 배짱이 마음에 든다. 그리고 루주와는 반드시 승패를 결정하고 싶다. 루주와 자신의 싸움이 아니라 철혈적성도와 십검의 싸움을 원한다.
“네 말대로 내일 싸우자.”
루주는 팽효기가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풀썩 꼬꾸라졌다.
그는 서 있을 힘도 없었던 게다. 싸워야 한다는 의지만으로 버텼던 것이다.
팽효기는 그에게 가서 상태를 살폈다.
얼굴을 보고, 목을 보고, 가슴과 팔을 살폈다. 그리고 하체로 가서 바지를 걷어 올렸다.
“음!”
침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정강이의 살이 시커멓게 죽어 있다. 침을 맞은 곳에서는 고름까지 잡혔다.
“이런 상태로 싸우려고 했다니, 날 아주 우습게 봤군.”
팽효기는 소도를 꺼내 상처를 쨌다. 그리고 팽가의 비전(秘傳) 해독산(解毒散)을 뿌렸다.
치이이익!
기이한 소리와 함께 상처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3
쿵!
몸이 거칠게 내동댕이쳐졌다.
‘악!’
비명이 절로 터졌다. 하지만 입 밖으로 소리가 되어 흘러나오지는 않았다. 마치 목에 무엇인가 걸린 것처럼 소리가 탁 걸리더니 다시 안으로 잦아들었다.
‘저, 여보세요!’
주설언은 사람을 찾았다.
자신에게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누구에게 원한을 산 일도 없는데……. 돈이 필요하다면 줄 테니 그만 풀어달라고 애원이라도 하고 싶었다.
한데 음성이 새어 나오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몸도 움직일 수 없다. 손가락조차 움직여지지 않는다. 온몸이 마비된 듯 꼼짝도 하지 않는다.
그녀는 침착해지려고 노력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하지 않던가. 정신 차려야 한다. 지금 자신에게 닥친 일은 발버둥 친다고 헤어날 수 있는 게 아니다.
말이 나오지 않는 건 아혈(啞穴)을 제압당했기 때문이다.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 건 마혈(麻穴)을 제압당해서다.
무인에게 혈도가 제압당했다.
그녀는 잠시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이런 일을 벌인 자가 누구인지 살폈다.
무인과의 다툼이라면 생각 가는 데가 있다.
루주는 하북팽가와 다퉜다. 가주의 금지옥엽(金枝玉葉)과 싸우기까지 했다. 그전에 팽가 가모에게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
다른 곳과의 다툼도 있다.
회자수를 많이 죽였다. 두 번에 걸쳐서 피가 강이 되어 흐를 정도로 처참하게 싸웠다.
살수는 어떤가? 그쪽 세계는 잘 모르지만 일단 점찍은 자는 절대로 살려두는 법이 없다고 한다.
생각해 보니 원한 산 곳이 많다.
납치? 가능한 일이다. 자신을 인질 삼아서 루주를 죽음의 자리로 불러낼 심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