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n Swordsman RAW novel - Chapter 53
53
살수가 흑풍을 쳐다보며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이건 소량으로 특효를 발휘하기 때문에 좋긴 한데, 용도에 비해서 값이 비싸서 쓰는 사람이 없어요.”
“구하기 힘든가?”
“별로요. 구하기는 별로 어렵지 않은데… 방금 말했잖아요, 비싸다고. 우리 같은 놈들은 쓸 생각도 못해요.”
“그럼 어떤 놈들이 쓰는데?”
“뭐 동주나 암사 정도?”
“그놈이 그놈이네.”
“틀리죠. 그분들은 곳간을 마음대로 들락거리지만 우린 주는 돈에서 해결해야 하니까.”
“됐어. 괜히 머리만 아프다. 뭐 알아내는 게 있어야지.”
“어! 기껏 다 말씀드리니까.”
살수들이 투덜거렸다.
맹삼력은 그들의 말을 귓가로 흘려들으며 루주를 쳐다봤다.
알아낼 수 있는 게 없다. 솜가시는 너무 귀한 것이라서 알아볼 수 없고, 후각을 마비시킨 독분은 시중에 널리 풀려 있는 것이라서 알아내지 못한다.
호가에게 다가가는 길이 끊겼다.
“그 무미각… 효력은 얼마나 지속되지?”
루주가 물었다.
“아주 끝장났다고 할 수 있죠? 이게 개에게는 원체 치명적이라… 개만 전문적으로 노린 거라니까요. 저놈 후각신경이 완전히 절단 났을 겁니다.”
“뭐야! 그 말을 왜 지금 해!”
맹삼력이 급히 흑풍의 머리를 들어서 살폈다.
눈으로 본다고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뭐가 되었든 해보아야만 했다.
끄릉! 끄르릉!
흑풍이 낮게 웅얼거렸다.
“음… 너 냄새를 완전히 잃어버린 거냐? 네가 이러면 그놈은 어찌하라고. 기운을 내야지?”
맹삼력이 흑풍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흑풍은 말귀를 알아들었는지 슬픈 눈으로 허공을 쳐다봤다.
살짝 벌어진 입에서 날카로운 송곳니가 번뜩이지만 지금은 물지도 냄새 맡지도 못한다.
‘후우!’
루주는 속으로 침음했다.
흑풍이 후각을 상실했다면 호가를 찾을 길은 영영 없다.
‘하루나 이틀 정도 기다리면 후각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사실 호가에게는 그만한 시간도 없다. 솜가시에 당했다면 촌각을 다퉈야 한다. 하지만 찾을 길이 없는 것을 어찌하겠는가. 오로지 흑풍에게 모든 걸 의지했는데…….
하지만 겉으로는 낙담한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너도 나도 모두 낙담하면 호가는 정말 찾지 못한다. 한 사람이라도 희망을 가지고 있어야 모두들 불가능한 일에 도전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싸움터에서 그리 쉽게 빠져나오지 않았을 게다. 다른 자들의 발자국을 찾고, 추적술에 능통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실마리를 찾으려고 노력했을 게다.
아니다. 그런 방법으로는 호가를 찾지 못한다.
호가나 그를 친 자나 여기 있는 살수들 정도로는 추적하지 못할 만큼 고절한 자들이다.
그들의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게다.
‘그럼 이제 단서는 팽효뢰와 월아에게 있는 것인가? 그들을 찾아야만 호가를 찾는다. 이미 해를 입었을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그렇다고 찾지 않을 수도 없지.’
생각이 하북팽가에 머문다.
호가를 찾으려면 팽효뢰를 쫓아서 팽가로 가야 한다.
이번 방문은 예전 방문과는 전혀 다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는 미천한 기루 루주였다.
천하의 하북팽가와 미천한 기루 루주, 비교의 대상이 아니다. 힘의 차이가 워낙 뚜렷해서 나란히 세워놓기도 민망하다. 그렇다. 팽가는 강자고, 자신은 약자였다.
언제든지 짓밟을 수 있는 미천한 동물!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하북팽가와 접전을 벌였다. 팽가연과 비연사도가 패배를 당했다. 승부를 완전히 가르지 못했다고 우기는 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짓이다.
팽효기와도 비등한 싸움을 벌였다.
그 싸움 역시 승부가 나지 않았지만, 서로 경시하지 못할 상대라는 점만은 분명히 각인했다.
그는 이제 미천한 기루 루주가 아니다.
검치의 제자가 팽가를 방문하는 격인데, 서로 간에 풀리지 않은 매듭이 존재한다.
더군다나 이번에는 정식 방문이 아니다.
팽효뢰를 찾는다고 해도 그가 이실직고할 리 만무하다. 멀쩡한 정신을 가진 놈이 살인과 납치를 인정할 리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그랬던 것처럼 잠입해서 생포해야 한다.
팽가촌에서 팽가 무인을 납치하는 기막힌 일이다.
상황에 따라서는 살아남기 힘들다.
‘이거 어찌 꼭 죽으러 가는 기분인데… 그래도 가야지 어쩌겠나. 후후후!’
루주는 세 명의 살수를 쳐다봤다.
“살수!”
“거 살수라니… 이제 한솥밥을 먹는 처지인데 호칭 좀 바꾸는 게 어떻습니까?”
“아까 그곳으로 다시 가. 거기서부터 주변을 뒤져 나가는데, 여자를 숨길 만한 장소에 초점을 맞춰.”
“아! 무슨 말인지 접수 완료!”
“너도 같이 가.”
루주가 맹삼력을 쳐다보며 말했다.
“넌?”
“난 나대로 찾아볼 곳이 있으니까. 호가를 쓰러뜨린 놈들이라면… 이놈들이 그자들을 만나면 호랑이 입에 닭 몇 마리 들이민 꼴이야. 네가 따라가 줘. 이놈도 데려가고. 도움이 될 거야.”
루주가 흑풍의 머리를 두들겼다.
“난들 뭐 대수롭나.”
맹삼력은 말을 그렇게 하면서도 벌써 일어서고 있었다.
3
“세워줘.”
“네? 아, 네.”
팽효문은 등 뒤에 있는 마차 벽을 손으로 쾅쾅 쳤다.
“워! 워!”
마차를 세우는 소리가 들렸다.
“집까지는 얼마나 남았지?”
팽효문이 마차 밖을 살폈다.
“한 십 리 정도 남았는데요. 천천히 가도 반시진이면 충분히 도착합니다.”
“그래… 여기서부터는 좀 걷지.”
가모가 마차 문을 열고 나섰다.
팽효문은 즉시 뒤따라 내렸다. 마차를 좌우에서 호위하던 팽가오도 역시 급히 말에서 내렸다.
“아니, 내릴 필요 없어. 너희는 그냥 가. 여기서부터는 나 혼자 걷고 싶어. 생각할 것도 있고.”
“네? 그건 안 됩니다!”
“호호호! 왜? 걱정되어서? 걱정 마. 내 몸 하나는 지킬 수 있어.”
“그래도…….”
“십 리면 금방이야. 한 시진이나 두 시진? 나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
가모는 팽효문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럼 멀리서라도…….”
“가서 수향(秀香)이 보고 목욕물 좀 데워놓으라고 해줘. 한가한 마음으로 푹 쉬고 싶군.”
“네. 그럼 빨리 오십시오.”
팽효문이 포권을 취했다.
가모는 빙긋 웃음을 머금어주었다.
그녀의 눈이 산을 담았다. 바람도, 풀잎도 담았다. 주변의 자연경물이 여유롭게 스쳐 갔다.
그녀는 이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즐거움이 여섯 사내의 마음에도 전달되었다.
‘여유를 즐기시고 싶은 거야.’
***
어디로 가나!
팽효뢰는 갈 곳을 잃고 산을 헤맸다.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따라오는 사람도 없는데, 딱히 갈 곳도 없는데 달리고 또 달렸다.
걸음을 멈추면 예전 상황이 되풀이될 것 같아서 두려웠다.
죽여야 하나, 사랑을 구걸해야 하나. 아니, 사랑이라는 말은 거부한다. 겨우 옷자락 스친 정도의 가벼운 인연에 불과한데 무슨 사랑 타령인가.
냉랭한 표정만 짓지 않으면 된다.
예전처럼 방긋 웃고, 상냥한 말을 하고, 고혹적인 자태를 취해주면 된다. 딱 그 정도만 원한다.
그래서? 그런 모습을 봐서 어쩌겠다고?
어차피 마지막은 죽음으로 끝내야 한다. 그녀를 데리고 팽가로 갈 수도 없다. 어디 은밀한 곳에 숨겨놓을 수도 없다. 살아 있는 사람을 어떻게 숨긴단 말인가.
발걸음을 멈추면 꼭 죽여야 할 순간이 올 것 같아서 멈추지 못했다. 계속 달리고 또 달리고, 달리면서 어떻게 할까 하는 고민을 떠올려 봤지만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러다 문득 정체 모를 자들, 결코 정의롭지 못한 자들의 말이 떠올랐다.
“가모께서 오망정(烏望井)으로 오라고 하시더군요.”
그들은 좋지 않은 자들이다.
사람의 성정(性情)은 얼굴에 나타난다. 좋지 않게 살아온 사람은 풍기는 면모도 좋지 않다. 악심(惡心)을 품은 사람이 부처처럼 보이려면 무진 노력이 필요하다.
일견하기에도 그들은 좋지 않다.
한데 그들이 말했다, 가모께서 오망정으로 오라고.
그 말을 들을 때는 무심히 지나쳤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의아스러운 게 한두 개가 아니다.
가장 먼저 떠오른 의문은 가모가 어떻게 해서 그런 자들을 아느냐 하는 점이다.
가모와 그들은 도저히 연결되지 않는다.
두 번째로 떠오른 의문은 자신이 벌인 일을 가모가 어떻게 아느냐 하는 점이다.
가모는 자신의 행동을 읽었다.
호가가 흑풍을 데리고 쫓아온 것은 이해한다. 천요루 기녀들이 무방비 상태로 내쳐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반드시 천요루주의 손길이 닿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녀들 중에 몇몇이 탈이 났다면 뒤를 쫓는 자가 생기는 것도 당연하다.
호가가 예상 밖으로 빨리 쫓아온 것은 흑풍이라는 걸물이 있어서이니 하등 이상할 게 없다.
그런데 난데없이 두 괴인이 나타났다.
다시 생각해 보아도 사마(邪魔)에 가까울 정도로 좋지 않은 기운이 물씬 풍기는 자들이다.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자들이다.
그들은 어떻게 나타난 것인가?
가모가 지켜보고 있다.
가모는 기녀들이 불 타 죽은 사연을 안다. 자신이 벌인 살인과 납치를 안다.
‘오망정!’
오망정으로 가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 되었다. 한데 그 일이 가슴을 답답하게 만든다.
가모는 언제 봐도 단아하다.
오망정은 숲 속에 있는 우물이다. 더군다나 주변에 까마귀들이 까악까악 울어대기 때문에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긴다.
그곳에 가모가 앉아 있다.
두레박으로 오망정 물을 떠서 마시는 모습이 매우 편안해 보인다.
쿵! 쿵! 쿵!
팽효뢰는 가슴이 쿵쾅거린다.
납치한 여인을 어깨에 둘러메고 가모 앞으로 가는 심정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다. 이제 막 성(性)에 눈을 뜬 아이가 여인과 쾌락에 젖어 있다가 부모에게 들켰을 때의 그 심정이다.
“왔구나.”
가모가 살포시 웃으며 맞이했다.
팽효뢰는 가모의 웃음을 접하자 온갖 번뇌가 스르르 녹아 없어지는 편안함을 느꼈다.
“어… 머님…….”
가모는 손으로 옆자리를 톡톡 쳤다.
팽효뢰는 쭈뼛거리면서 다가섰다.
“그 아이?”
“네.”
팽효뢰가 월아를 내려놓았다.
가모 앞에서 언제까지나 어깨에 짊어지고 있을 수는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숲 속 어디에라도 숨기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는 할 수 없었다.
또 어차피 사건의 전모가 드러난 상황이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
“어디…….”
가모가 월아를 쳐다봤다.
“예쁘네.”
“네…….”
팽효뢰가 겸연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사람을 죽이고 여인을 납치했다. 팽가의 후손으로서 절대로 행해서는 안 될 짓을 했다. 그런데 가모는 그런 점을 지적하지 않는다. 어떻게 할 거냐고 걱정하지도 않는다. 그를 이해한다는 듯이 편안하게 웃어준다.
그는 마음이 탁 풀렸다.
‘어머니!’
단언컨대 가모가 지금처럼 고마웠던 적은 없다.
“이 아이… 죽일 생각이야?”
“그게…….”
“혼인하지는 못해.”
“알고 있습니다.”
“혼란스럽지?”
“네.”
팽효뢰는 말 잘 듣는 어린아이처럼 순순히 대답했다. 자신도 모르게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흘러나온 대답이다.
‘어머니라면… 월아를 죽이지 않고 옆에 두는 방법을 찾아줄 수 있을 거야.’
그의 생각대로 가모는 그를 편안하게 해주었다.
“너무 걱정 마. 같이 방법을 찾아보자고.”
“죄송합니다.”
“아니, 그런 말은 하는 게 아냐. 적어도 남녀 간의 일에서는. 이 아이, 월아라고 했나?”
“네. 본명은 모르고 기명만…….”
“스쳐 지나가듯 한 번 본 것만으로 사랑한다고는 할 수 없고… 복수? 그런 것 같으면 당장 죽였을 거고. 죽일 생각은 전혀 없는데 왠지 죽여야 할 것만 같은 기분? 월아를 납치하기는 했는데… 문득 깨닫고 보니 왜 납치했는지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고, 옆에 둘 수도 없고, 하다못해 말조차 걸 수 없는 생소한 사이라는 게 새삼 인식되고……. 그런 거지?”
“그걸 어떻게?”
“호호호!”
가모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팽효뢰는 점점 더 편안해졌다.
가모는 자신의 심정을 안다.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안다. 왜 납치를 했는지. 그러니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알고 있으리라. 그리고 그것이 적어도 월아를 죽이는 일만은 아닐 것 같아서 한결 마음이 놓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