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n Swordsman RAW novel - Chapter 54
54
“집 나온 지 오래됐지?”
“……!”
팽효뢰가 말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가모를 쳐다봤다.
그가 월아 때문에 팽가촌을 나섰다는 건 모두 다 아는 사실이다.
한낱 기녀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 출행한 것은 아니다. 그럴 만큼 치졸하지는 않다. 루주나 마부 놈에게는 협박 비슷한 말을 했지만 월아를 어쩌려고 한 적은 없다.
물론 그때는 지금 같은 감정까지는 고려하지 않았다.
월아를 보면 담담할 줄 알았는데…….
월아는 자신에게 두들겨 맞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팽가오로가 직접 확인했다. 얼굴과 복부를 가격한 수법은 팽가의 파갑추(破甲錘)다. 다리를 부러뜨린 수법은 철혈백사십팔퇴(鐵血百四十八腿)였다.
단순한 모방이 아니다. 팽가오로가 본가의 수법이라고 확인할 정도로 고명했다.
월아를 찾아 팽가촌을 나온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다.
월아를 찾아서 그녀를 구타한 무공이 어디서 나왔는지 알아내야 한다. 어떤 자가 팽가 무공을 도둑질했으며, 어느 수준까지 연성했는지 파악하고 처리해야 한다.
하루 이틀 사이에 해결될 일이 아니다.
월아를 만나는 순간 출타한 이유를 망각해 버렸지만, 월아 문제를 해결한 후에도 한동안은 팽가촌에 들를 수 없을 게다.
가모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월아를 만나지 못한 것으로 해.”
“네?”
“월아는 소문대로 저택이 불타면서 죽은 거야. 모두들 그렇게 알고 있으니, 거기에 맞춰야지.”
“아! 네…….”
“월아에게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는 거야. 죽었으니까. 무슨 말인지 알지?”
“네.”
“나중 일은 걱정 마. 죽었다가 부활한 사람이 한두 명이야?”
가모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빙그르 웃으면서 말했다.
가모의 말을 듣다 보니 정말 아무 일도 아닌 것 같다. 괜히 죽일 것인가 살릴 것인가 고민했지 않나.
“그럼 월아는…….”
“내게 맡겨줄래? 월아도 충격을 받았을 테니, 잠시 혼자 있게 내버려 두는 게 좋아.”
“그래 주시겠어요?”
팽효뢰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모든 근심 걱정이 썰물 빠지듯 사라졌다. 무엇보다도 월아를 죽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다행스럽다.
“저 어머님, 그런데 그 사람들은……?”
팽효뢰는 비로소 낯선 자들에게로 생각이 돌아갔다.
가모의 얼굴을 마주 보고 있는 지금도 가모와 그들을 연결 지어서 생각할 수 없다.
가모는 그 일도 별것이 아니라는 듯 빙그레 웃었다.
“이런 일을 누구에게 시키겠느냐. 휴우! 결코 인연 맺고 싶지 않은 자들이나… 휴우! 어쩔 수 없지.”
가모는 한숨을 두 번이나 쉬었다.
팽효뢰는 미안한 느낌이 울컥 솟았다.
이제야 어찌 된 영문인지 일목요연하게 보였다.
저택이 불타고 기녀 몇 명이 타 죽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발 달린 말처럼 천 리에 퍼져 나갔다. 멀리 멀리 퍼져 나가 송화암에서 정양 중이시던 가모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다른 사람들은 무심히 흘려버릴 소문.
가모는 흘려듣지 않았다. 소문 속에서 자신의 냄새를 즉각 찾아냈다. 저택, 기녀, 월아. 불길한 느낌을 받은 순간, 가모는 즉시 자리를 떨치고 일어섰다.
‘자식이라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던 게다.
열네 살, 한창 반항기가 심할 무렵에 새어머니랍시고 아주 곱고 성결한 여인이 아버지 곁을 차지했다.
속을 참 많이 썩였다.
좋은 말도 안 듣고, 나쁜 말도 듣지 않았다. 어머니 입에서 나온 말은 무조건 거부했다.
머리가 큰 후에는 서로 상관하지 않는 쪽으로 방향을 굳혔다.
어머니도 큰일이 아니면 상관하지 않았고, 자신 역시 굳이 얼굴을 붉힐 필요가 없었다.
팽가촌의 가모, 그러나 자신의 어머니는 아니다.
그런 자식도 자식이라고 태아를 잃은 몸으로 먼 길을 달려왔다. 팽가 무인들을 부릴 수 없는 일이기에, 그리고 소문이 나서도 안 되는 일이기에 사마를 끌어들였다.
모든 게 고맙고 미안하다.
“죄송합니다.”
가모는 두 손으로 그의 손을 감싸주었다.
따뜻했다. 솜처럼 포근하고, 봄날의 태양 볕처럼 따스했다.
두 사람, 그들은 누구인가?
팽효뢰는 가모가 어쩔 수 없이 끌어들인 두 사람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들은 평범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위태로웠다는 걸 안다. 싸우는 도중에는 몰랐지만, 지금 돌이켜서 생각해 보면 아주 위태로웠다. 호가의 아가리 속에 머리를 들이민 꼴이었다.
‘여우같은 놈!’
그 순간만 생각하면 지금도 약이 오른다.
한데 그런 여우도 두 괴인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처럼 옴짝달싹 못했다.
자신이 그들과 부딪쳤다면 바로 승부가 결정되었다는 결론이다.
범상치 않은 자들이다. 결코 무명배가 아니다. 누군지 알아볼 수는 없지만 분명히 악명을 날린 자들일 게다.
그는 이숙(二叔) 집으로 향했다.
“언제 왔어?”
만나는 사람마다 물어오는 말이다.
“지금 막 오는 길입니다.”
“아버님은 뵈었고?”
“집에 안 계시더군요. 아직 못 뵈었습니다.”
“그래? 요즘 울적하신 것 같으시던데… 낚시라도 가셨나?”
한결같은 대화다.
말투가 다르고 억양이 다르고, 세세한 차이가 있긴 하지만 거의 대동소이하다.
팽효뢰는 이런 대화를 꾸준히 이어갔다.
이숙 집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열 번은 같은 말을 나눈 것 같다.
“언제 왔어?”
이숙도 똑같은 물음부터 던져 왔다.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아버님은 어디 가셨나 안 보이시더군요. 급한 일이 있어서 이숙부터 찾아뵀습니다.”
팽효뢰는 키 작고, 바싹 마른 사람을 보면서 말했다.
말이 좋아서 이숙이지 그는 팽가의 핏줄이 아니다. 아버지에게 빌붙어서 사는 위인인데, 하루 종일 하는 일이라고는 술독에 파묻혀 사는 것이다.
그를 이숙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거부감이 없다. 어렸을 적부터 이숙이라고 불러왔기 때문에 오히려 그게 더 자연스럽다.
외인(外人)!
아버지는 그에게 장서(藏書)를 관리하는 사서(司書) 임무를 맡겼다.
필요한 책을 내주고 누가 가져갔는지 기록해 두는 아주 간단한 임무다.
한마디로 생김새처럼 위인 자체가 별 볼일 없는 자이다.
아버지는 이런 위인을 왜 곁에 두고 있는 것일까? 이숙을 볼 때마다 불쑥불쑥 치솟는 의문이지만 오늘도 그 궁금증을 가슴 깊이 묻어둔다.
“한잔하셨어요?”
“한 잔은 무슨……”
이숙이 시치미를 뗐다. 하지만 입에서 푹푹 풍기는 술 냄새까지 감출 수는 없다.
“건강도 생각하세요.”
‘저놈의 딸기코.’
팽효뢰는 주독에 찌들어 발갛게 부어오른 코를 보면서 말했다.
“급한 일이 있다고? 뭔데?”
“무림인명록(武林人名錄)을 살펴봤으면 해서요.”
“인명록을? 누구 궁금한 사람이 있어?”
이숙이 부스스 일어서며 말했다.
“누굴 좀 찾아보려고요.”
“누군데? 말만 해봐. 웬만한 자들은… 흐흐! 이 머릿속에 다 있다는 이야기 아니냐.”
이숙이 자신의 머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
팽효뢰는 두 괴인의 용모를 떠올렸다.
“두 사람인데… 한 명은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올렸고…….”
이숙이 히죽히죽 웃었다.
‘알고 있다!’
팽효뢰가 눈을 빛내며 쳐다봤다.
많은 말을 한 것도 아니다.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올렸다는 딱 한마디만 했다. 그런데 웃기 시작했다. 주기(酒氣)에 찌든 딸기코를 벌름거리면서 웃었다.
이숙이 말했다.
“그놈 중 한 놈은 맨발이었지?”
“그걸 어떻게?”
“그놈 키는 나만 하고 호리호리한, 아니, 빼빼마른 몸에다가 이마 여기에 혹이 하나 나 있지?”
이숙이 오른쪽 이마를 가리켰다.
“네. 아세요?”
“다른 한 놈은 눈이 가늘게 쭉 찢어졌고, 한 손은 품에 찔러 넣고 있겠지?”
“네. 아시네요?”
“그놈들을 어디서 봤는데?”
“오다가요. 한눈에 경계해야 할 자들인 것 같아서 눈여겨보았는데… 누군데요?”
팽효뢰는 가모와 그들 간의 관계를 숨겼다.
자신이 아니었다면 그들을 끌어들이지 않으셨을 게다. 그런 점을 알면서 가모를 곤란하게 한다면 사람도 아니다.
이숙은 말을 하지 않고 머리만 긁적거렸다.
“누군데 그래요? 궁금해 죽겠어요. 누구예요?”
“쌍겸구악(雙鎌 惡).”
“쌍……겸구악요?”
팽효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림에 모습을 드러냈던 자라면 상당히 많은 자들을 알고 있는데, 쌍겸구악이라는 별호는 들어보지 못했다. 최소한 무림인명록에 기재되지 않은 자들이다.
“쌍겸구악의 무공은 고절하다, 아주 고절해. 가주가 직접 나서도 신중하게 대해야 할 정도로 강한 자들이야. 그리고 사악하지. 배고프면 사람도 먹을 수 있는 자들이야.”
‘웃!’
팽효뢰는 깜짝 놀랐다.
‘어머니가 그런 자들을! 그런 자들을 어떻게 알고! 이게 모두 나 때문에…….’
그의 얼굴에 짙은 어둠이 깔렸다.
이숙이 그의 얼굴을 슬쩍 훑어보며 말했다.
“쌍겸구악을 상대하지 말라는 건 그들이 강하기 때문만은 아니야. 그들 뒤에는 사총(死塚)이 있어. 쌍겸구악은 사총이 무림에 내놓은 전초병일 뿐이야.”
팽효뢰는 입을 쩍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총…….’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졌다.
쌍겸구악은 모르지만 사총은 안다.
사총, 죽음의 무덤!
사총이 검을 들면 하북팽가는 단숨에 멸절한다.
단순한 추측이 아니다. 사실이다.
사총은 하북팽가만으로 맞서기에는 너무 거대한 사마집단이다. 오대세가가 연합하여 대적해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마의 무덤이다.
십여 년 전, 사총은 무림연합에 밀려 자취를 감추었다.
천하의 사총도 오대세가와 구파일방(九派一幫)이 연합한 무림대연맹(武林大聯盟) 앞에서는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졌다.
마인들이 상처 입고, 죽어갔다.
무림대연맹은 죽음의 무덤을 노도처럼 들이쳤고, 사마외도를 싹쓸이했다.
그때,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이 검치다.
그가 아무도 모르는 사총의 위치를 알아내 주었다. 그 덕분에 무림대연맹은 사총을 포위, 접근하여 멸절시킬 수 있었다.
검치가 사총염왕(死塚閻王)을 상대해 주었다.
무림 초강자들을 단 일 초 만에 즉사시키던 마공 중의 마공 사사멸(死死滅)을 깨뜨렸다.
검치가 없었다면 사총을 무너뜨리는 건 불가능했을 게다.
그랬는데 그들의 전초라는 쌍겸구악이 다시 나타났다. 그것도 어머니의 부탁으로 무림에 나섰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 때문에, 자신이 벌인 일 때문에.
‘굉장히 곤란할지도… 모르겠어.’
팽효뢰는 놀란 내심을 숨기기 위해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억지로 지어낸 웃음은 어색하기만 했다.
팽효뢰는 생각에 몰두하느라고 이숙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이숙은 히죽히죽 웃었다.
제16장 바람이 폭우로 변하니
1
툭!
어두컴컴한 석실에 둔탁한 울림이 일었다.
주설언은 두 손으로 어둠을 더듬어갔다. 둔탁한 울림이 왠지 꼭 사람 같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손에 따뜻한 감촉이 닿았다.
역시 사람이다. 몸이 부드럽고 가녀린 것으로 보아서 여인이 틀림없다. 얼굴에서 분 냄새가 풍기는데 상당히 고급 분이다,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이 냄새는! 천요루! 천요루 냄새야!’
주설언은 단번에 알아챘다.
천요루의 기녀들은 냄새가 독한 분은 쓰지 않는다. 은은하면서 청아한 향을 쓴다. 루주가 냄새를 맡아보고 써도 좋다고 허락한 분만 쓰기 때문이다.
“누구야! 괜찮아?”
그녀는 급히 여인을 안아 일으켰다.
“으음…….”
여인은 가는 신음을 흘렸다. 아마도 석실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혼절해 있었던 모양이다.
주설언은 할 것이 없었다.
그녀는 무공을 몰라서 혈(穴)을 문질러 줄 수도 없고, 진맥 같은 것도 하지 못한다.
주설언은 여인의 온몸을 주물렀다.
진기를 유통시키려는 게 아니라 본능적으로 팔다리를 주무르면 피가 잘 통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런데 온몸을 주무르다 보니 여인의 윤곽이 잡힌다.
살의 탄력, 골격, 얼굴 생김새, 머리 모양. 모든 걸 종합해 봤을 때, 여인은 월아다.
‘월아 언니! 기어이 잡혀왔어.’
그녀는 긴 한숨을 토해냈다.
짐작은 했지만 팽가의 복수가 시작되었다.
팽가와 관련된 사람들이 하나둘 잡혀온다.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사로잡아 온다. 죽여서 본보기를 보이는 것보다 살아 있는 육신이 필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