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n Swordsman RAW novel - Chapter 60
60
부서진 강도 속에서 삼 척 길이의 소도가 불쑥 튀어나왔다. 순간,
“헛!”
루주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다.
‘이겼어!’
그가 목검을 든 이유는 목검이든 진검이든 혈파검 앞에서는 한낱 소모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혈파검의 폭발력을 이겨내는 물체는 없다.
이것은 상대도 마찬가지다. 천하에 다시없는 보검일지라도 혈파검의 진기 앞에서는 수수깡처럼 부서져 나간다.
팽효기가 정말 그런 점을 모를까? 막연하게 소문으로 들은 것도 아니고, 혈파검을 직접 부딪쳐 본 사람이 강도를 들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천하의 바보라도 그런 짓은 안 한다.
기본 중의 기본을 어겼을 때, 반드시 이유가 있는 법이다.
강도 속에서 대도보다는 작고 소도보다는 큰 칼이 튀어나왔다. 혈파검에 부딪치고도 깨지지 않은 칼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당연히 놀랄 상황이다. 그래서 경악성을 토해냈다. 얼굴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려고 경직성까지 보였다.
팽효기의 검, 한두 번 겪어본 게 아니다.
검 속에서 검이 튀어나오는 경우, 칼 속에 칼이 숨겨진 경우는 다반사로 겪었다.
솔직히 이런 경우는 수련 중에도 겪었다.
검을 뽑지 않고 검집째 휘두르면 이런 경우가 생긴다.
검과 검집이 딱 맞을 때는 한 몸처럼 부서져 나간다. 하지만 도집에 검을 넣었을 때처럼 병기와 집 사이에 공동이 생기면 집만 깨지는 현상이 벌어진다.
부서진 칼에서 다시 칼이 튀어나오는 것처럼 빠른 공격은 없다.
한 번의 격검 후에는 검을 교체해야 하는 혈파검의 경우, 쾌검을 상대하기 위해서 특별한 수련을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수련 중 하나가 복검(腹劍), 검 속의 검이다.
팽효기를 끌어들일 최상의 함정이 준비되었다.
쒜엑!
복중도(腹中刀)가 머리를 쳐왔다.
루주는 급히 상반신을 틀었다.
머리를 보호하는 대신에 어깨를 내준다. 팔 하나 정도는 없어도 그만이지만 머리가 다치면 곤란하지 않나.
누구나 보일 수 있는 반응이다.
“하하하!”
팽효기가 웃었다.
그에게 이 싸움은 결코 질 수 없는 싸움이 되었다. 지금 당장 천지가 개벽한다고 해도 이미 정해진 승패는 바꿀 수 없다. 그때,
탁!
살을 베는 파육음 대신 엉뚱한 소리가 울렸다.
‘……!’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칼로 어깨를 내리찍었는데, 살과 뼈가 갈라지지 않는다. 피도 튀지 않는다. 그리고,
퍽!
옆구리에서 화산이 폭발하는 듯한 충격이 느껴졌다.
“엇!”
“저, 저!”
뒤에서 구경을 하던 두 동생이 경악성을 터뜨렸다.
팽효기의 복중도는 루주의 어깨를 쳤다. 틀림없이 쳤다. 한데 그 사이, 루주가 상반신을 돌리는 사이 등에 메고 있던 목검이 미끄러지듯이 흘러내려서 어깨에 닿았다.
탁!
경쾌하지도, 날카롭지도 않은 타격음이 터졌다. 그리고 또 한 자루의 목검이 팽효기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즉사다!
루주의 검이 혈파검임을 감안하면 요행 같은 것은 기대조차 할 수 없다.
그들은 즉시 유엽도를 뽑았다.
하나 그들보다 더 빠른 움직임이 있다.
쒜에엑!
숲에서 비호(飛虎)가 도약했다. 눈 한 번 감았다가 뜰 만한 짧은 순간에 유엽도가 뽑히고, 천지를 양단하는 천단세(天斷勢)가 몸을 쪼개왔다.
턱!
루주는 쓰러지는 팽효기의 몸을 등으로 받았다. 한쪽 팔로는 허리춤을 붙잡았고. 다른 팔은 등 뒤의 목검을 꺼내 들었으며, 두 무릎은 땅에 닿을 정도로 굽혔다.
“이런!”
노호(怒虎), 팽청치는 난감한 듯 탄식을 토해내며 칼을 물렸다.
그가 그대로 천단세를 전개할 경우, 제일 먼저 상할 사람은 손자 팽효기다.
루주는 얄밉게도 팽효기를 덮개로 삼아 그 속에 숨었다.
손자를 빼앗아올 수도 없다. 그가 다가가기 전에 루주의 일격이 먼저 터질 것이다.
손자는 어떤 상태일까?
혈파검에 맞았으니 즉사했겠지만 혹시 살아 있다면, 그런 기대가 팽청치로 하여금 칼을 물리게 만들었다.
스읏!
루주가 팽효기의 몸을 껴안고 뒤로 물러섰다.
죽음과도 같은 정적이 흘렀다.
네 사람은 금방이라도 발작할 듯 서로를 쏘아보았지만 실제로는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루주가 말했다.
“혈파검을 쓰지 않았소. 이 사람… 혼절했을 뿐이오.”
3
“참… 어이없는 사람들이군.”
그녀는 한심하다는 듯 두 사람을 쳐다봤다.
“그거 듣기 거북한 말씀이시네.”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올린 백살겸이 눈가에 흉광을 드러냈다.
그녀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듣기 거북하면 일을 제대로 하든지.”
“흐흐흐!”
손을 품에 찔러 넣고 있는 흑마겸이 음흉하게 웃었다.
그의 얼굴에는 ‘어린 게 많이 컸네’ 하는 어이없음과 불쾌함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팽가는 쌍겸구악라는 존재를 알아챘어.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들을 뒤쫓고 있을걸?”
“흥!”
백살겸이 코웃음을 쳤지만 그 정도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하북팽가의 무공을 눈 아래로 굽어보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팽가 무인들이 만만하다는 뜻은 아니다.
하북팽가는 강하다.
중원 오대세가 중 일가로 자리매김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하북팽가는 오로지 무공만으로 오대세가라는 자리를 꿰찼다.
“그놈들이 아무리 눈에 불을 켜고 찾아봐야 우리 꼬리를 잡기는 힘들 테니…….”
“또 그런 소리!”
그녀는 흑마겸의 말을 잘라 버렸다.
“내 장담할까? 내일쯤이면 꼬리가 잡힐 거고, 모레쯤이면 공격이 시작될 거고. 글피면 시신 두 구를 볼 수 있겠군. 어때, 내 말이 틀릴 것 같아?”
“가모! 이거 듣자 하니 정말 신경 곤두서게 만드는데…….”
“그러니 헛소리 그만하고 내 말 똑똑히 들어. 오랜만에 강호에 나왔으면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부터 배우란 말이야! 이건 뭐 벽창호도 아니고. 쯧!”
가모는 혀까지 찼다.
쌍겸구악을 철저히 무시하는 행위다.
옛날, 사총이 번창했을 때는 생각하지도 못했을 행동이다. 그때, 가모는 코흘리개에 지나지 않았다. 아니, 그때도 명성을 날리던 여마이기는 했지만 감히 쌍겸구악 앞에서 고개도 들지 못하던 풋내기에 불과했다.
“세상이 변하기는 많이 변했군.”
백살겸이 격세지감을 느낀 듯 말했다.
사실이 그렇다. 사총이 무너진 순간부터 두 사람은 만인의 공적이 되어버렸다. 두 발 뻗고 잠자본 지가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면 말 다 한 게 아닌가.
지금이라고 편히 잠들 수 있는 건 아니다.
가급적이면 사람들과 부딪치지 않으면서 살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다가도 식은땀을 흘리면서 벌떡벌떡 일어나는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다.
자신들의 존재가 정도 무림에 알려지면 며칠 내에 죽었다고 보는 편이 낫다.
지금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팽가 무인들의 눈을 속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제 놈들이 알아도 어쩌랴 싶은 마음이 컸다.
쫓아와? 쫓아와 봐!
그래, 쌍겸구악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건 너희도 짐작하고 있었잖아. 짐작대로 정말 살아 있다. 어쩔래!
드넓은 황야로 달아난 생쥐 한 마리는 잡지 못하는 법이다.
가모는 잡을 수 있다고 한다. 너희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 이상 팽가의 이목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한다. 그리고 아마도 그 말이 맞을 것 같다.
사총이 건재할 때, 하북팽가는 사총 앞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 당시, 쌍겸구악의 눈에는 하북팽가가 보이지도 않았다.
무림 태두라는 소림사나 무당파조차도 안중에 두지 않던 터에 하북팽가를 염두에 둘 리 있는가.
그런 오만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자신들은 충분히 주의한다고 했지만, 아직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무시하는 경향이 남아 있다. 그리고 그런 경향이 이번과 같은 실수를 저질렀다.
하북팽가가 추적을 한다면 자신들을 찾는 것은 일도 아니다.
이곳이 어디인가? 하북이다. 또한 팽가촌에서 엎드리면 코 닿을 곳이다.
내일이면 팽가 무인들과 얼굴을 맞댈 것이고, 모레쯤이면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 있을 게다.
하북팽가는 결코 만만치 않다.
가모가 말했다.
“호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마. 그런 거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이래서야 파락호나 쌍겸구악이 다를 게 뭐야.”
“흐흐흐! 가모, 정말 심하게 다그치는데… 고양이가 생쥐를 몰 때도 길은 터주고 모는 법이오. 정말 이런 식으로 몰아붙여도 된다고 생각하시오!”
가모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대가만 바라는 건 도둑놈 심보 아냐? 제대로 좀 해봐, 제대로.”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말하면서 두루마리를 꺼내 툭 던졌다.
“세상은 주는 것만큼 받는 거야. 뭔가를 받고 싶거든 먼저 줘. 기대해도 될까?”
가모는 치욕으로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두 괴마를 쳐다보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제길! 대단하다 싶기는 했지만… 정말 본격적으로 판을 벌일 셈인데.”
“이걸 하면 우린 죽어.”
“안 해도 죽어.”
“제길!”
쌍겸구악은 가모의 아름다운 얼굴을 떠올리면서 치를 떨었다.
하북팽가 무인들은 그녀를 성모라고 부른다. 어떻게 독기로 똘똘 뭉친 전갈 같은 여인을 성모로 본단 말인가. 인두겁 뒤에 숨겨진 전갈의 본모습이 그렇게도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하북팽가에는 눈이 제대로 박힌 자가 한 명도 없단 말인가.
“하긴 해야겠지?”
“이왕 나섰으니… 해야겠지.”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다. 언제까지 쥐구멍에 숨어서 눈치나 살필 수는 없잖아.”
백살겸이 속 시원하다는 듯 두 손을 탁탁 털며 말했다.
이번 일… 잘못되면 자신들만 잘못되는 게 아니다. 자신들의 배후에는 가모가 있다. 가모가 연류되었다는 증거는 지금 당장 손에 들고 있는 두루마리 서신만으로도 충분하다. 아니, 살아 있는 증거가 두 명이나 있다.
“그래, 잘된 일이지. 이왕 시작했으니 확실하게 한 판 벌여보자고. 세상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배워라? 허! 이 나이에 그런 말이나 듣고. 내 참 한심해서.”
흑마겸이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며 말했다.
두루마리에는 정교한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이리저리 선을 쭉쭉 그어놓은 도면(圖面)이지만 누가 봐도 지도라는 걸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입구는 두 군데다.
두 사람은 그중 정자 아래쪽에 난 입구부터 찾았다.
세심루(洗心樓)!
현판 글자만 봐도 마음이 시원해진다. 일필휘지(一筆揮之)로 단숨에 몰아친 글자들이 온갖 번민과 우환을 말끔히 씻어주는 듯하다.
“내가 할까?”
백살겸이 흑마겸에게 소리 나지 않는 소리, 미음전성으로 말했다.
그는 누각 밑에 뚫려 있는 작은 구멍을 쏘아보고 있었다.
“아니, 이건 내가 하는 게 좋겠어. 쫓겨오는 놈들을 처리하는 건 너보다 내가 낫잖아.”
흑마겸이 품속에 넣은 손을 꼬무락거리며 말했다.
“나더러 몰이꾼을 해라?”
“그냥 몰이꾼 노릇만 하는 게 아니잖아. 아마도 네 손에 죽는 놈이 더 많을걸?”
“후후후! 그런가?”
백살겸이 흑마겸에게 일별을 던진 후, 신형을 쏘아냈다.
쒜엑!
그의 신형이 비호처럼 산등성이를 질주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예전과 달리 세심루 지하 인간들에게 발각되지 않았다.
이제 그들은 지하 무인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어디서 어떤 구멍을 통해 세상을 보는지도 안다. 아주 은밀히, 아주 빨리 움직였는데도 어떻게 해서 팽가 무인들에게 발각되었는지 이유를 찾아냈다.
두루마리 도면은 많은 말을 해준다.
흑마겸은 작은 구멍을 노려보면서 생각했다.
‘네놈들… 독 안에 든 쥐야.’
독 안에 든 쥐, 맞다.
앞뒷문이 모두 막혔다. 앞에서 혈풍이 불고, 뒤에서 죽음의 손이 덮쳐 온다.
“경종! 경종을! 크윽!”
그들은 경종도 울리지 못했다.
만일을 대비해서 경종을 네 군데나 만들어놨는데 어떤 종도 울리지 않는다.
“경종을 울리란 말이야!”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아. 끊겼어.”
“뭐라고!”
그들은 당황했다.
팽가 역사상 이런 경우는 없었다. 팽가촌이 급습을 당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가산 깊숙이 숨어서 두더지처럼 살아가는 그들을 공격한 무리는 없었다.
전례에 없던 혈풍이 불어온다.
“흐흐흐! 이것들이 여기 숨어 있었어? 흐흐흐! 감쪽같이 속았잖아. 아무도 없는 산인 줄 알고 날뛰었더니 눈깔 수십 개가 지켜보고 있었다 이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