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n Swordsman RAW novel - Chapter 64
64
후원이라고 해봐야 손바닥만 한데, 가모는 그만한 곳에서 한 시진이나 두 시진을 거니는 건 보통이다.
‘또…….’
혈기가 들끓는 사람에게 가모의 행선은 답답하기만 하다.
팽효뢰는 집을 빙글 돌아서 후원으로 갔다.
각종 장을 담아놓은 항아리가 있고, 그 옆에는 장작을 수북이 쌓아놓은 장작더미가 있다.
후원은 바로 그 곁에 있다.
보통 집 앞마당 정도의 크기에 가모가 직접 심은 꽃들이 화려한 색조를 뽐낸다.
가모의 손끝이 꽃잎에 닿았다.
시든 꽃이 안쓰러워서 만져 주고 있다.
“가지치기 같은 거 안 해요? 병들거나 시든 꽃은 잘라주는 게 좋잖아요.”
“싱싱한 꽃은 생(生), 시든 꽃은 노병(老病). 결국은 사(死)로 돌아가는 것이니 서둘 필요가 없겠지? 이 모든 게 자연의 모습이니, 있는 그대로 보고 즐기면 되는 거란다.”
어렸을 때 들은 말이지만, 아직도 뇌리에 뚜렷이 각인되어 있다.
시들거나 못생긴 꽃은 서슴없이 잘라 버리는 것만 보아오다가 시든 꽃 또한 삶의 일부라는 말에 큰 충격을 받았던 듯하다. 어떤 이유에서이든 가모가 해준 말은 아직도 기억한다.
“시들었습니까?”
가모가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봤다. 그리고 옅게, 포근하게 느껴지는 미소를 지었다.
“벌레가 먹었네.”
“해충이 있군요. 해충이라면 잡아 없애는 게 최선이죠. 그래야 다른 꽃들이나마 멀쩡하지 않겠어요.”
그가 뼈있는 말을 했다.
“해충의 기준이 뭘까?”
“……?”
“이 꽃에 해가 되는 게 해충이라면… 글쎄? 내가 해충을 잡을 필요가 있을까? 잡으려면 직접 해를 당한 꽃이 잡아야지. 정 견디기 어려우면 해충이 다가오지 못할 만한 악취라도 풍기든지. 그런데 이 꽃을 봐. 가만히 있잖아? 먹을 테면 먹어라. 난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런 말로 들리지 않아?”
“꽃잎은 칼날 앞에 약할 수밖에 없지 않나요? 원래 생겨먹은 게 그러니까.”
‘원래부터 칼보다는 글을 좋아하던 사람들 아닙니까!’
“그런 꽃잎에게 뜯어 먹히기 싫으면 네 스스로 방어를 하라고 말하는 건, 너무한 듯싶은데요.”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은 만물의 기본 법칙인데, 포식자만 나쁘다고 할 수 있겠어? 누군가를 먹어야 누군가가 사니까. 기준… 해충의 기준부터 정해야 할 거야.”
두 사람은 뼈있는 말을 주고받았다.
팽효뢰는 혼란스러웠다.
가모는 팽가 사람이다. 팽가의 안주인이다. 그러니 이번과 같은 일이 일어났을 경우, 당연히 팽가 편에서 쌍겸구악을 소리없이 제거하자는 쪽으로 말해줄 줄 알았다.
쌍겸구악의 악행이 점점 노골화되고 있으니 어떤 조치든 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머니는 해충 타령을 한다.
‘무슨 소리지?’
얼핏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해충의 기준을 정하라는 말은 이해득실을 따져 보라는 소리처럼 들린다. 또 누군가를 먹어야 누군가가 산다는 말은 그들을 죽이지 않았으면 자신들이 당했을 거라는 말처럼 들린다.
무슨 일이 있었나?
가모가 가까이 다가왔다.
훅!
아침이슬을 머금은 풀잎처럼 청초한 향이 풍긴다.
한순간이지만 확 껴안고 싶다는 욕념이 치밀었다.
‘아! 이런!’
팽효뢰는 쿵쾅거리는 마음이 들킬까 봐 재빨리 얼굴을 돌렸다.
얼굴도 붉어진 것 같고, 입에 침이 마르고, 굳이 설명할 것도 없다. 욕념이다.
어머니에게 욕념을!
‘이게… 도대체 무슨 생각을! 내 마음 밑바닥에 이런 놈이 숨어 있었던 건가!’
“잠시 걸어. 걸으면서 깊이 생각해 보고… 그리고 차 한잔해. 괜찮겠지?”
“예, 예.”
팽효뢰는 다른 곳에 눈길을 주면서 급히 대답했다.
‘냄새가 참 좋아. 편안해.’
팽효뢰는 가모의 우아한 모습을 흘끔흘끔 쳐다봤다.
가모를 찾아올 때만 해도 칼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한데 지금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저 이 순간이 좋다. 지극히 편안하고 행복하다.
월아를 생각해야 한다. 아니, 그녀를 생각하기 전에 해충의 기준부터 정해야 한다.
해충의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할까?
기준을 팽가에 두면 은원이 간단해진다. 팽가에 해를 끼친 쌍겸구악은 해충이다. 그러니 추적해서 죽여야 한다. 이의가 있을 수 없다. 팽가 식솔을 무려 서른네 명이나 죽인 놈들인데, 그들이 해충이 아니면 누가 해충인가!
무슨 일이 있어도 쌍겸구악은 제거해야 한다.
현재, 팽가 무인들이 뒷산을 이 잡듯이 뒤지고 있다. 북경은 물론이고 하북 전체로 경계망을 넓혀 나가는 중이다.
쌍겸구악은 빠져나가지 못한다.
이것이 지금 팽가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것 외에 다른 기준은 있을 수 없다. 어떻게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가.
월아…….
월아는 그들 손아귀에 있다. 따라서 월아는 해충과 함께 스러진다.
이 부분은 피할 도리가 없다. 월아를 건지면서 해충만 싹 도려낼 수 있는 방도는 없다.
가모가 그들을 불렀다.
멀쩡한 꽃잎 위에 해충을 얹어놓았다.
팽가 무인들이 해충만 잡아 죽이겠는가. 누가 해충을 불러왔는지 따지지 않겠는가. 모두 캐낼 것이다. 자신들은 해충을 없앨 때, 함께 제거되어야 하는 시든 꽃이다.
그런 경우를 방지하고, 모든 일을 없었던 것처럼 만들려면 쌍겸구악도 죽이고 월아도 죽여야 한다. 비리나 죄악을 말할 만한 입들은 모두 닫아놓아야 한다.
‘그러면 돼.’
팽효뢰는 월아를 잊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그녀 생각을 참 많이 했다. 그녀와 만난 것은 몇 번 되지 않지만, 생각한 것으로 따지면 십 년은 같이 산 것 같다.
납치를 한 이후, 그녀는 그의 소유물이 되었다.
길은 두 가지뿐이다.
회유해서 자신을 좋아하게 만들어야 한다.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구슬릴 생각이다. 따지고 보면 자신처럼 뛰어난 신랑감이 어디 있는가. 가문 좋고, 인물 좋고, 장래 창창하고. 한낱 기녀가 팔자 고치기에는 더없이 좋지 않은가.
그녀도 결국은 자신을 좋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이 안 되면 죽인다. 그래야 살인과 납치라는 중대범죄가 땅속에 묻힌다.
물론 지금은 후자를 생각하지 않는다. 오직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만 골몰한다.
싱싱한 야채가 반찬으로 올라오면 그녀가 생각난다.
‘동굴에 갇혀 있다던데, 먹는 건 괜찮을까? 어머님이 돌봐주시니까 괜찮겠지? 이런 걸 같이 먹으면 좋을 텐데…….’
무공 수련을 하다가도 그녀가 생각난다.
‘팽가 여인이 되면 호신법(護身法) 정도는 수련해야겠지? 뭘 가르친다… 뼈마디가 약해서 고생깨나 할 거야. 후후!’
침상에 누워 잠을 청할 때면 사뭇 그립다.
‘살이 봄눈처럼 나긋나긋했어. 가슴도…… 언제쯤 같이 누워서 잘까? 후후! 어쩔 수 없을 거야. 며칠 안으로 항복하겠지.’
마음속에 많은 그리움이 켜켜이 쌓였다.
그런데 이 순간, 가모와 같이 거니는 이 순간, 그녀의 생각이 말끔히 지워졌다. 그녀의 얼굴조차 생각나지 않는다. 아니, 생각하기 싫다. 그녀를 생각하는 건 가모와 같이 있는 순간을 욕되게 하는 것 같아서 싫다.
또르륵!
찻잔에 푸른 차가 채워졌다.
가모는 흠잡을 데 없는 예쁜 손으로 찻잔을 내밀었다.
“마셔.”
“예.”
가모를 찾을 때의 투지는 사라진 지 오래다. 일가 친족을 잃은 분기도 녹아버렸다.
“월아를 빼내줄까? 아무래도 저들과 같이 있는 건 무리겠지? 내 말을 잘 듣는다지만 마인은 마인이니까.”
“아뇨. 월아는 화근입니다. 그녀가 살아 있으면 쌍겸구악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어요. 차라리 같이 제거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후우! 내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어머님, 죄송합니다.”
“어멋! 진심이야?”
가모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진심입니다. 이제야 제정신을 차린 것 같아요.”
이상하다. 오늘 정말 왜 이럴까?
팽효뢰의 눈에는 가모가 보이지 않았다. 색기 어린 입술, 농염한 몸, 풍만한 가슴……. 가모가 여자로 보였다. ‘아버지의 여인’이라는 생각도 처음으로 해봤다. 어머니가 한 사내의 여인으로 보이기는 처음이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마음이 들끓는 것처럼 몸도 끓어오른다.
피가 빠르게 돌고, 양물이 딱딱하게 곤두선다. 손에서는 식은땀이 흐르고, 입에서는 단내가 푹푹 풍긴다.
가모는 그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듯 가늘고 부드러운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잡았다.
‘훗!’
순간, 그는 다른 손까지 움직여서 가모의 손을 잡고 싶었다. 두 손으로 손을 잡고, 그녀를 끌어당기고 싶었다.
가모… 어머니…… 지금은 그저 안고 싶다.
가모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훗! 아픈 이야기를 해야겠네. 내가 쌍겸구악 같은 흉한(兇漢)을 어떻게 아는지 알아?”
“어떤 사연이 있을 거라고만…….”
그는 가모의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쌍겸구악 뒤에는 사총이 있어.”
“알고 있습니다. 이미 무너졌지요.”
“누가 그래?”
“……!”
“모두 무너졌다고 하지만… 난 무너지지 않은 걸 알아. 사총이 무너지고 일 년 뒤 아버님이 돌아가셨지. 가슴에 낙화인(落火印)이 찍혀 있었어.”
가모가 담담하게 말했다.
팽효뢰는 너무도 엄청난 사실에 입만 쩍 벌린 채 말을 잊었다.
가모의 말이 사실이라면 사총 사대마군(四大魔君) 중에 한 명이 살아 있다는 말이 된다. 낙화인이 바로 주작마군(朱雀魔君)의 성명절기가 아니던가.
“어쩌지? 쌍겸구악이 패악무도한 일을 벌였지만… 난 그들을 내 손으로 처리하지 못하겠어. 그들을 버리면 사총과 연결된 줄이 끊어지니까.”
“아! 그런 일이!”
팽효뢰는 새로운 사실에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어머니에게 이런 아픔이 있었나?
어머니는 이런 아픔을 지니고도 성녀가 되었다. 옳고 착한 일만 하신다. 반면에 월아는 술 냄새, 사내 냄새, 퀴퀴한 뒷골목 냄새……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자신이 왜 그런 여자에게 빠졌던 거지?
가모가 말했다.
“그렇다고 그들의 죄를 묻지 않을 수도 없고. 흉성(凶性)을 누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휴우! 고민이야. 어머! 이 손 좀 봐. 무슨 굳은살이 이렇게 단단해?”
가모가 그의 손바닥을 만지며 말했다.
“칼을 놓아본 적이 거의 없어서… 보기 싫죠?”
“아니, 아주 보기 좋아. 사내답잖아. 어머! 그러고 보니 내가 사내 손을 잡고 있는 건가? 호호호!”
가모가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아뇨, 아뇨. 괜찮습니다.”
팽효뢰는 가모가 손을 뺄까 봐 얼른 말했다.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하다. ‘사내’라는 말이 이토록 반가울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가모가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부탁이 있어.”
“부탁이라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해야죠.”
“꽤 어려운 부탁이야.”
“하하! 그렇게 말씀하시니 더 궁금한데요. 어서 말씀해 보세요. 제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들어드리겠습니다. 약속드릴게요. 그래도 못 믿으세요?”
“아니, 믿긴 하는데 너무 큰 부탁이라…….”
가모는 여전히 망설였다.
그 모습이 앳된 소녀 같다. 수줍어하는, 볼이 붉게 상기된, 도홧빛, 확 달려들어 깨물고 싶은 볼, 하얀 이, 달콤해 보이는 입술…….
‘내가 정녕 미쳤구나. 오늘 왜 이러지? 미쳤어. 미쳐도 단단히 미쳤어. 이게 무슨… 휴우!’
“잘못되면 부자지간이 잘못될 수도 있어. 아버님이 되게 화내실 거야. 하지만 이 가슴에 쌓인 한을 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데… 아!”
가모가 가슴을 만지며 한숨을 토해냈다.
가슴…… 가슴…… 가슴…….
팽효뢰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마, 말씀해 보세요. 어떤 말이든…….”
팽효뢰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떤 말이든 들어줄 준비는 되어 있었다.
가모는 돌아가는 팽효뢰를 보면서 진기를 풀었다.
파아아앗!
눈가에 떠올랐던 푸른 기운이 일시에 사라졌다.
‘의외로 정념(正念)이 굳어. 충동을 못 이기고 껴안을 줄 알았는데… 똑바로 배우긴 했다만…….’
팽효뢰는 월아를 진심으로 좋아했다.
한눈에 반했다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