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n Swordsman RAW novel - Chapter 69
69
루주는 흠씬 두들겨 맞은 돼지를 구해서 멍 든 자국을 분석했다. 팽가 무공에 맞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살폈다. 그리고 그런 상처를 만들어놓은 것이다.
팽효뢰에게 올가미를 씌우기에는 딱 그만이다.
이 모든 일 사실을 확인하고 있으면서도 팽가연의 마음은 텅 빈 대나무 속처럼 허전했다.
팽가로 돌아간다. 그다음은 어쩌나? 누구에게 무슨 말을 하나? 오라버니를 어떻게 대해야 하지?
그녀가 문기둥에서 등을 떼며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상처를 치료해야지. 호가를 이리 보내줬으면 좋겠는데.”
“당신… 아무래도 제 명에 못 죽을 것 같아. 나도 그렇고. 도산검림(刀山劍林). 한쪽 발을 저승에 걸쳐 놓고 사는 삶. 호호! 오늘에서야 정말로 실감나.”
그녀가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허! 이놈… 코가 아주 단단히 망가졌구나. 개가 냄새를 맡지 못하면 어디다 써먹누. 이놈아, 가만히 있어! 네 코를 고쳐 주려고 이러는 거야.”
문밖에서 운농선생의 음성이 들려왔다.
제20장 사악한 여자
1
가모라는 위치는 자유가 매우 억압되어 있다.
혼자서는 시장도 가지 못하고, 지나가는 길손과 대화를 나눌 수도 없다. 낯선 사람이 있는 곳, 혹은 낯선 사람과 무언인가를 할 때는 항시 호위 무인이 눈을 번뜩인다.
물론 그들은 좋은 의미에서 가모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가모의 입장에서 보면 굉장히 불편할 수밖에 없다.
지금도 그녀를 지키는 사람이 있다.
팽효문, 그는 태아를 잃은 일이 마치 자기 책임이라도 되는 듯 죄책감에 휩싸여 어쩔 줄 모른다. 그는 조금이라도 죄책감을 더는 방법으로 가모를 더욱 안전하게 모시기로 작심한 듯하다.
정말로 성가신 존재다.
가모는 찌푸린 미간을 좀처럼 펴지 못했다.
쌍겸구악이 연락을 취해오지 않는다.
그들은 하루에 세 번씩 고함을 질러서 자신들의 안위를 알려왔다.
미음전성!
파동을 아는 자만이 들을 수 있는 소리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손쉽게 연락을 취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아주 유용하다.
다른 말은 할 필요가 없다. 그저 꿱! 하고 소리만 내지르면 된다. 그러면 ‘아! 잘 있구나’ 하고 안심한다.
그런 간단한 일을 하지 않고 있다.
‘탈이 났군.’
연락이 끊긴 지 이틀째.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다.
‘팽가오로… 가주… 팽효기… 아니, 팽효기는 빼야겠지. 침상에 드러누워 있으니까. 팽가오도? 흑마겸이 있으니 그들로는 무리일 것이고…….’
만약 쌍겸구악에게 일이 벌어졌다면, 누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는지 추측해 봤다.
해당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팽가오로는 팽가촌에 머물고 있다.
바깥출입이 잦던 팽가사로까지도 팽효기가 부상을 입은 채 실려 온 그날부터는 팽가촌을 떠나지 않고 있다.
천요루주가 아무리 죽일 놈이라고 해도 뒷산에서 벌어진 참극에는 비할 바가 아니다. 천요루주 같은 놈 열 명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팽가 무인을 척살한 쌍겸구악은 잡아 죽여야 한다.
팽가촌의 입장은 확실하다.
가주도 팽가촌을 벗어나지 않았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얼굴을 맞대고 있으니 하루 일과를 모를 리 없다.
도대체 누군가! 팽가촌에서는 단신으로 쌍겸구악을 건드릴 수 있는 무인이 없다.
‘무슨 일을 당한 거야!’
가모의 심장이 바싹 타들어갔다.
쌍겸구악에게는 혹이 두 개나 붙어 있다. 나중에 이용하려고 아껴둔 인질들인데 쌍겸구악이 잘못되었다면 그녀들의 존재가 바로 칼날이 되어서 돌아온다.
월아라는 계집에게는 팽효뢰가 걸려 있다. 그리고 팽효뢰에게는 자신과 쌍겸구악이 묶여 있다.
주설언이라는 계집과는 자신이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그때 괜히 만났어.’
때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검치의 무공’이라는 말에 너무 흥분했다. 자식 놈이 검치의 무공을 쓴다니 더욱 흥분했다.
검치의 무공이 어느 정도나 전수되었는지 살펴보고 회유를 하든지, 강제를 하든지 할 생각이었는데, 그 어떤 쪽으로든 주설언은 요긴하게 사용될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쌍겸구악이 잘못되었을까?
그럴 리 없다. 팽가촌이 말 벌통을 건드린 듯 들썩거리고 있지만 그들을 건드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괜히 서둘 필요는 없고. 그래도 준비는 해야겠어.’
그녀는 팽효문을 힐끔 쳐다봤다.
문밖에서 장승처럼 버티고 서 있다.
역시 거치적거린다. 저런 혹덩이가 달려 있으니 꼼짝도 할 수 없지 않은가.
해가 정오를 지나 미시(未時)를 향해 달려간다.
팽가촌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조용하다. 너무 조용해서 천장에 벌레가 기어가는 소리까지 들린다. 팽가촌의 겉모습을 보면 안팎으로 정신없이 시달린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다.
쌍겸구악은 점심 신호도 건너뛰었다.
이제는 확실히 탈이 생겼다고 생각해야 될 것 같다.
당장에라도 석경산에 오르고 싶다. 쌍겸구악을 만나서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고 싶다. 약 반 시진 정도만 몸을 빼면 될 것 같은데, 무슨 핑계를 댄다?
뒷산에서 문인들이 몰살을 당한 터이다. 한데 쌍겸구악을 만나려면 뒷산을 넘어가야 한다. 그쪽으로 가지 않으면 멀리 빙 돌아가야 하는데, 그러자면 족히 두 시진은 걸린다. 반시진도 몸을 빼지 못하는데, 두 시진을 어떻게 뺀단 말인가.
또 도의적인 측면에서 그쪽으로는 발길을 옮기지 못한다.
사람이 죽은 장소를 지나쳐서 한가롭게 산책을 하는 짓은 어린아이도 하지 않는다.
‘북쪽이면… 소아(素娥)가 있지.’
핑곗거리가 생각났다.
대략 일 년쯤 됐나? 하북 전체를 날려 버릴 듯 거대한 태풍이 몰아쳤다. 허름한 움막은 모두 부서져 나갔고, 거목도 뿌리째 뽑혀서 나뒹굴었다.
소아는 그 태풍에 부모를 잃었다.
무너진 집에서 잔재에 깔린 채 무려 십여 일이나 생존했다.
소아를 발견한 사람이 바로 가모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신음 소리를 듣고 직접 소매를 걷어붙였다. 옷이 찢어지는 것도 감수하면서 잔재를 치웠다. 그리고 다 죽어가는 생명을 구해냈다.
사람들이 그녀에게 ‘성녀’라는 말을 붙인 것은 결코 우연이나 강요가 아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쏟아부은 사랑이 그만큼 많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그래, 소아를 만나러 가면 되겠어.’
그녀는 출타를 하려고 일어섰다.
빨리 서둘러야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온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저녁 밥상은 항상 가주와 함께 해왔다.
‘전례를 깰 수는 없지.’
굳이 그럴 필요도 없다. 소아를 만나러 갔다 오는 건 두 시진 정도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때 말도 타지 않고, 비연사도도 없이 혼자서 터벅터벅 걸어오는 팽가연을 봤다.
그녀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다.
항상 건장한 말을 타고 질주하는 것이 버릇이었는데. 비연사도를 거느리지 않고는 한 걸음도 나서지 않았는데.
‘어디 갔다 오는 거지?’
그녀가 의아해할 때, 팽가연은 곧장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어디 나가시려고요?”
“응. 소아 좀 만나보려고. 문득 잘살고 있나 궁금해지네. 어디 갔다 와?”
그녀는 말을 하면서 의자를 가리켰다.
팽가연이 사양하지 않고 의자에 앉았다.
‘앉아? 말이 길어지겠어.’
오늘은 쌍겸구악을 확인해 보려고 했는데.
그녀는 탁자를 사이에 놓고 마주 앉았다.
팽가연은 문가에 서 있는 팽효문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라버니, 어머님과 비밀리에 할 말이 있는데 자리 좀 피해주실래요?”
“응? 그러지 뭐.”
팽효문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순순히 자리를 비켜줬다.
팽가연은 팽효문이 집 밖으로 나갈 때까지 넋 잃은 표정으로 뒷모습을 쳐다봤다. 아니, 쳐다봤다기보다는 시선 둘 데를 잃고 멍하니 지켜봤다는 표현이 옳다.
“한 가지만 여쭤보려고요.”
팽가연은 팽효문의 뒷모습에서 눈길을 거두지 않은 채 힘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얘가 왜 이래?’
팽가연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폭풍 같은 분노가 느껴진다.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분기(憤氣)가 감지된다.
눈동자도 새빨갛다.
다치거나 아픈 것은 아니고 눈두덩이까지 부어 있는 것으로 보면 울어서 충혈된 것이다.
“무슨 일인데? 말해봐.”
그녀는 팽가연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며 말했다.
그런데 팽가연이 손을 뺐다. 무감정한 표정으로 미간까지 찌푸리면서 고개를 툭 떨군 채,
“쌍겸구악을 아세요?”
벼락같은 말이 떨어졌다.
‘역시!’
가모는 침착했다.
쌍겸구악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것이라는 추측은 계속해 왔지만 그 말을 팽가연에게서 들을 줄은 몰랐다.
팽가연이 어떻게 알고 있지?
팽가연은 쌍겸구악을 상대할 수 없다. 그건 확실하게 단정할 수 있다. 만약 그들 앞에 칼을 들고 마주 선다면 일 초도 전개하기 전에 쓰러지리라.
“흠!”
가모는 옅은 웃음을 흘리며 일어섰다. 그리고 차를 따르기 위해 주담자가 있는 다탁(茶卓)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걸으면서 생각했다.
어떻게 할까? 모른다고 우길까? 그래도 상관없을 것 같다.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모르지만, 아니다. 저 표정, 저 모습을 봐라. 확실히 뭔가 아는 눈치이지 않은가.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또르륵!
주담자에서 흘러내린 찻물이 찻잔에 가득 찼다.
안다고 시인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그럴 경우에는 변명거리가 확실해야 한다.
팽가연을 설득할 만한 변명거리가 있나?
팽가연은 약점이 없다. 이용할 만한 욕구도 없다. 팽가 도법을 훨씬 능가하는 절정 도법이라면 몰라도 그 외에 어떤 것도 흥미를 끌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팽가연은 혈육에 대한 정이 짙다.
흔히 ‘가족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내놓을 사람’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팽가연이 정말로 그런 여자다.
그런데 쌍겸구악은 뒷산 문인들을 몰살했다.
팽가연이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하는 혈족들을 죽였다.
타협이 될 리 없다. 설득할 만한 요소도 없고, 이해를 바랄 수도 없다. 설혹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한 변명거리가 있다고 해도 사람을 죽인 죄 값은 어떤 식으로든 치러야 한다.
그렇다면 결론은 정해졌다.
철저하게 부인한다. 부인하다가 막히면 처리한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그녀의 입을 봉해놓는 일이다.
그녀가 찻잔 두 개를 들고 돌아섰다.
“우선 차부터 마셔.”
“대답부터 해주세요.”
“쌍겸구악이라고 했어?”
순간, 팽가연의 미간에 깊은 골이 새겨졌다.
그녀는 가모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다른 대답이 나온 것이다.
‘역시 알고 있어!’
이 빌어먹을 놈들! 그래도 한때는 일세를 풍미했다는 마두 놈들이 또 어떤 어설픈 짓을 했기에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계집애에게 들켰단 말인가.
“쌍겸구악을 모르는 사람도 있나? 우리 나이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걸?”
“쌍겸구악과 어떤 관계세요?”
팽가연은 가모의 말을 일절 무시하고 물어왔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 그러니 거짓말은 그만해라. 오직 진실만 듣고 싶다.
너무도 분명한 뜻이 전해져 왔다.
가모는 웃으면서 말했다.
“어떤 관계냐니? 그게 무슨 말이야?”
“이번 살인과도 관계있어요?”
“도대체 무슨 소린지 난…….”
꽝! 쩡그렁! 쨍!
돌연 팽가연이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탁자가 산산조각났다. 탁자 위에 있던 물건들이 이리 구르고 저리 부딪치면서 깨졌다.
“이게 무슨 짓이지!”
가모가 눈빛을 싸늘하게 굳히며 말했다.
“경고라는 거지.”
팽가연의 말투가 확 변했다.
“백살겸을 잡아놨어. 흑마겸은 죽었고. 잠시 후면 흑마겸의 시신이 도착할 거야. 백살겸은 다리가 잘렸는데 꼴 같지 않은 놈이 입은 되게 무겁더라고. 두고 봐야지. 얼마나 무거운지. 월아와 주설언도 찾아냈어. 그 여자들이 아주 재미있는 말을 하대? 당신 이름도 나오고 오라버니도 거론되고. 아주 재미있었어. 지금부터 그 일을 낱낱이 파헤칠 거야. 그래서 이번 살인사건과 연관된 걸 밝혀내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아, 절대!”
팽가연의 눈에서 파란 인광이 번뜩였다.
“…….”
가모는 묵묵히 듣기만 했다.
더 이상은 부인할 수 없다. 쌍겸구악이 그 지경이 되었다면, 백살겸이 입을 열 리는 없다 하지만 증거는 월아와 주설언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녀들이 입을 열고, 사실 정황이 꿰맞춰지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