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n Swordsman RAW novel - Chapter 8
8
“내 도… 도…….”
그는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도 칼을 찾았다.
팽가오로 중 깡마른 노인이 칼을 집어 건네주었다.
슥! 차앙!
팽효뢰는 다짜고짜 칼을 뽑았다.
누구를 베고자 함은 아니다. 칼을 가슴 앞에 세우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호흡을 조절하느라고 애쓴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서도 신변의 위협을 느낀 게다.
“암습이군.”
키 작은 노인이 말했다.
“술에 취한 게 아니라 약에 취한 것인가. 후후! 천요루… 감히 수작을 부렸다 이 말이지.”
얼굴에 웃음기가 없는 노인이 말했다.
팽효뢰는 함정에 빠진 맹수가 최대한 발악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칼을 뽑고, 어떻게든 진기를 끌어내려고 기를 쓴다. 진기가 쉽게 모이지 않으니 입술까지 깨물어 버린다.
본능적으로 자신이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직감한 게다.
사리 분별은 되지 않지만 정신을 수습해야 살 수 있다는 맹수의 본능이 꿈틀대고 있는 게다.
팽효뢰가 어떤 일을 당했는지는 대충 짐작된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천요루주가 왜 이런 승산없는 일을 벌였냐는 것이다.
그가 얻어간 것이 무엇인가? 겨우 은자 열 냥이다. 기껏 찾아왔다가 본전도 뽑지 못하고 돌아갔다. 은자 한 냥에 목도 한 대를 얻어맞았으니 공돈을 벌어간 건 아니다.
일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팽효뢰가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천요루의 존폐가 결정된다.
아니, 그것은 이미 결정되었다. 가모가 보름의 시한을 주었으니 그 안에 정리해야 한다.
팽가촌은 가모의 권위를 세워줘야 한다.
팽가촌이 이 일을 해주지 않으면 그녀의 권위는 땅에 떨어진다.
천요루주는 보름 안에 천요루를 정리하고 하북 땅을 떠나야 한다. 천요루주의 마음이 어떻든 그가 어떤 행동을 하든 천요루가 사라진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천요루주의 어설픈 장난과 가모의 냉엄한 심판이 맞물린 결과다.
“방명(芳名)을 여쭤도 되겠소?”
“월아(月娥)예요.”
“월아? 평범한 이름은 아닌 듯싶소만.”
“천요루에 있어요. 어멋! 놀라셨어요?”
청초한 매력에 두 번, 세 번 눈길을 주게 만드는 여인.
술과 노래와 춤보다는 시(詩)와 담론(談論)이 어울릴 법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인.
월아는 가녀린 참새를 떠오르게 만든다.
살짝 보듬어 안기만 해도 부끄러움에 파르르 떨 것 같다.
그런 그녀가 천요루의 상기(上妓)다.
놀랐느냐며 묻는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하다. 순진함이 가득 묻어 있는 눈길에 쓸쓸함이 스쳐 간다.
팽효뢰는 안타까움이라는 말뜻을 처음으로 알았다.
이 여인이 뭇 사내에게 술을 따른다.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 방사(房事)를 한다.
“천요루라면… 놀러 가면 만날 수 있겠군.”
“오지 마세요.”
“……?”
“절 한 사람의 여인으로 생각하고 말을 거신 거잖아요. 이런 기분 좋아요. 깨고 싶지 않아요. 공자님이 마음에 안 들면 오건 말건 상관없는데… 오지 마세요.”
팽효뢰는 갔다.
천요루의 월아는 그가 만난 월아와 달랐다.
극에서 극으로 변형이 이루어졌다. 청순함이 사라지고 관능미만 꿈틀거린다. 옷섶을 살짝 풀어헤치고 도발적인 눈빛을 보내온다. 강렬한 유혹을 담는다.
사내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코앞에서 흐느적거리는 여인을 황홀하게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갈증이 치밀면 입에 술이 넣어지고, 욕념이 솟구치면 나긋나긋한 육신이 휘어감아 온다.
팽효뢰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
어제 만나서, 어제 술을 마셨고, 기억을 잃었다.
“미인계(美人計)인가? 흠! 마음을 단숨에 휘어잡았다……. 사전에 네 취향을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다는 뜻인데… 오래전부터 관찰해 왔다? 허허! 이거야…….”
생각이 난관에 부딪쳤다.
천요루주가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했느냐 하는 대목에 이르면 생각이 뚝 끊겨 버린다.
무지무지하게 심심한 인간이 몰매라도 한번 맞아볼까 하는 심산이라면 모를까, 아니, 그것도 아니다. 그러기에는 사전 공작이 너무 꼼꼼하다.
팽효뢰를 기루로 끌어들이는 데 어떠한 무리도 없다.
그가 팽가촌을 나설 때, 그 누구도 오늘 같은 사태를 짐작하지 못했다.
평생 검만 보고 내달려 왔던 무인이 한 여인을 보고 이성을 잃었다.
그녀가 기녀라고 신분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여인에 대한 호기심이 가시지 않았다.
미인계, 그것도 고도의 미인계다.
이런 미인계에 아무런 목적이 없을 리 있나.
가주가 말했다.
“어쩔 수 없이… 뿌리를 뽑아야겠군요. 기왕 손을 대야 한다면 신속하게, 정확하게.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되겠지요. 사숙(四叔)께서 맡아주십시오.”
가주의 눈길이 팽가오로 중 가장 냉혹하다는 네 번째 숙부 음도냉살(陰刀冷殺) 팽청치(彭淸淄)에게 꽂혔다.
***
그 시간, 마부는 부리나케 마차를 몰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아니, 세상에! 매 맞아 죽을 자리로 기어들어 가는 인간이 어디 있어! 어휴! 저렇게 살아 돌아온 것만 해도 다행이지.”
“계속 투덜거릴 거야?”
“전생에 매 맞아 죽지 못한 귀신이라도 있나. 왜? 아예 검을 들고 싸우지. 도대체 이게 뭔 짓이래.”
“귀 따가워.”
“미친…….”
“방금… 욕한 거야?”
“그래! 했다! 어쩔래!”
“좋은 세상이다. 마부가 루주에게 욕지거리도 하고.”
“콱! 퉤! 미친놈 같으니.”
마부가 거칠게 가래침을 뱉었다.
팽가촌은 잠자는 용이다.
평화로운 마을은 늘 고요하다. 산속에 자리 잡은 사찰보다도 적막하다. 사람들이 살고, 움직이고, 활기차게 생활하지만 한가로운 시골의 저녁 풍경을 보듯이 편안함을 안겨준다.
팽가 무인들은 다투지 않는다.
다툴 만한 시빗거리는 알아서 피한다. 사람들이 시빗거리를 제공하지도 않지만, 그들 스스로도 늘 몸가짐을 조심한다.
무공만 강하다고 명가(名家)가 되는 게 아니다. 재산만 많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강한 힘과 더불어서 겸손한 미덕도 갖추어야 한다. 현명한 판단으로 사람들을 영도해야 한다.
루주는 그런 곳에 평지풍파를 일으켰다.
용이 잠자는 굴에 들어가서 수염을 뽑았다. 그리고 어서 빨리 일어나서 확 깨물어보라는 듯이 도발까지 했다.
살아남은 게 용하다.
아니다. 아직은 안심하기 이르다.
이공자가 깨어나고, 저간의 사정이 밝혀지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형성된다. 그때는 아무리 인의한 팽가촌이라고 할지라도 징계(懲戒)의 매를 들 것이다.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다. 팽가촌에 맞서 싸울 만한 무공이나 문파 같은 것이 있을 리 없다.
무모한 짓을 했다.
마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루주는 옆에만 있어도 한기를 느낄 정도로 차디찬 냉혈한인데, 가끔가다가 이렇게 이해하지 못할 짓을 한다.
“워! 워!”
마부는 또 다른 마차가 세워진 곳에서 마차를 세웠다.
“피하지는 못할 것이다.”
마차 안에서 루주의 음성이 들렸다.
“네.”
월아가 다소곳이 대답하는 소리도 들렸다.
“넌 있는 그대로만 토설해라. 해는 입지 않을 것이야.”
“네.”
“운 좋게 잡히지 않는다면… 내가 할 말은 아니다만…… 넌 꽃이 아니다. 꽃은 잊어라. 술도 노래도 춤도 그리워하지 마라. 기녀의 화려함이란… 그건 네가 잘 알 테니. 이거면 그리 큰 고생은 하지 않을 게다. 잘살아라.”
“루주님.”
월아가 격앙된 음성으로 루주를 불렀다.
‘웬일이래?’
마부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루주가 이렇게 다정할 때도 있었나? 아니, 이건 자상하다고 해야 하는데……. 하! 루주가 자상한 마음으로 누굴 챙길 때도 있다니, 정말 세상은 오래살고 볼 일 아닌가.
“절강(浙江) 삼원(三元)이 제 고향이에요. 버드나무가 많아서 류촌(柳村)이라고……. 시간… 안 나시겠죠?”
“이 생활, 다 잊어라. 이 생활을 하면서 배운 재주, 만난 사람들 모두 싹 잊어라.”
“네.”
“가봐.”
“네.”
삐걱!
마차 문이 열리며 온몸이 멍투성이인 여인이 내렸다. 하나 그녀는 그냥 돌아서지 못했다.
“루주님, 혹시라도 시간이 되시면…….”
“…….”
루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것아, 그냥 가.”
보다 못해서 마부가 말했다.
몇 마디 해준 것만도 놀랄 일이다. 루주가 충고 같은 것도 해줄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알았다.
월아는 루주를 쳐다보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루주에게서 대답을 듣기는 틀렸다. 그는 마치 목석이라도 된 듯 차갑다.
그녀는 마부에게 말을 건넸다.
“오라버니, 고마웠어.”
“잘살아, 이것아.”
“잘살아야지.”
그녀는 절룩거리는 걸음으로 대기하고 있던 마차에 올랐다.
“어이구, 저거… 저거, 저거, 저거, 아무래도 이 물 다시 먹겠다. 술, 노래, 춤은 잊어도 루주는 못 잊겠지! 제길! 요즘 왜 이렇게 미친것들이 많아. 몸뚱이가 누구 때문에 박살 났는데, 뭐? 삼원이 제 고향이에요? 시간 안 나겠죠? 빌어먹을! 야이 미친년아, 정신 똑바로 차리고 착한 놈 물어서 잘살아. 그게 남는 거야!”
“알아. 이 생활 몇 년인데.”
월아가 뒤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안다는 년이 울상을 하고 떠나냐!”
“루주님이 노상 하는 말 있잖아, 어떤 건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다고. 루주님과 함께 있어서 정말 행복했는데 어떻게 잊으라고. 이제는 추억이니 더 못 잊을 거야. 그래도 가야지. 오라버니, 시간 나면 들러.”
고통 때문에 멍든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검은 입술 사이로 가지런하고 고운 이빨만은 하얗게 빛났다.
“빈말인 것 알아, 이것아! 어서 가!”
마부가 빨리 가라고 손짓했다.
“쟤가 숨을 수 있을까?”
“…….”
루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잡히겠지?”
“별 탈 없어.”
“정말 별 탈 없을까?”
“별 탈 없다니까.”
“제길! 뭘 믿고 그렇게 큰소리치는 건데?”
마부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공자와 기녀의 관계는 참으로 복잡하다. 또 아주 단순하다.
좋을 때는 물불 안 가리고 불꽃을 태운다. 그때는 아주 복잡하다. 이것저것 걸리는 것도 많고 주는 것도 많다. 하지만 돌아설 때면 언제 그랬냐 싶게 냉정해진다.
그들은 필요에 의해서 만난다.
공자는 기녀의 재주와 육신을 탐내고, 기녀는 돈을 탐낸다.
간혹 인간을 흠모해서 사달이 나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 그런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또 그런 경우라면 어렵기는 해도 해결책이 있다.
기녀와 공자.
어느 한쪽이 필요하지 않게 될 때 그들 관계는 끝난다.
하기(下妓)의 경우에는 공자 쪽에서 떨어져 나가는 경우가 많고, 상기의 경우에는 반대가 많다.
필요가 없으면 멀어진다.
그런 관계를 모르고 만난 건 아니다. 만나면서도 늘 머릿속에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애가 웃고 있지만 돈이 떨어지면 쌀쌀맞게 변하겠지?
지금은 나를 탐내지만 긴 밤이 지나고 나면 다른 꽃을 향해 날아가겠지?
그런 상황을 모르는 게 아니지만 그래도 버려지는 것은 아프다. 아무리 화류계 생활에 이골이 난 기녀라 할지라도 자존심이 상하게 된다. 물론 공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질투와 보복이 따르게 된다.
이공자의 경우 월아에게 당한 아픔, 배신, 충격이 증오로 변해 있을 게다.
무인의 자존심을 건드린 기녀라…….
루주의 보호 아래 있어도 목숨이 간당간당한데 루주는 그런 그녀를 마차에 태워 보냈다.
죽으라는 말? 성동격서(聲東擊西)? 월아에게 이목을 집중시키고 빠져나가려는 수작?
마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알고 있는 루주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타인을 희생양으로 내놓을 사람이 아니다. 다른 점은 몰라도 그것만은 누구에게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잡힐 거 빤히 알고 안쓰러워서 몇 마디 해준 거 아냐! 차라리 잡힐 것 같으면 혀를 빼물고 죽으라고 하지 그랬어!”
“아무 탈 없다고 했잖아.”
“뭔 배짱으로 그렇게 말하는지 모르겠다만… 에라, 모르겠다! 끼럇! 끼럇!”
그는 죽을힘을 다해서 마차를 몰았다.
지금 당장은 서둘 필요가 없다. 적어도 이삼 일 동안은 아무런 탈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팽가촌을 건드렸다는 압박감이 마음을 조급하게 만든다.
그는 채찍을 힘차게 휘둘렀다.
“끼럇! 끼럇!”
제3장 무모한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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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루는 낮과 밤이 반대다.
사람들이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는 시간에, 그들은 술에 쩐 몸을 침상 속으로 들이민다. 사람들이 하루 일과를 마칠 때, 그들은 깊은 밤을 준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