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n Swordsman RAW novel - Chapter 80
80
먼저 눈에서 광채가 난다. 흔히 신광(神光)이 어린다고 하는데 꼭 그런 것처럼 느껴진다. 몸은 유연해졌다. 사람 몸이 한순간에 유연해질 수는 없는 것이니, 보는 사람의 마음이 위축된 것이리라.
압박감!
싸움을 걸 수 없는 강자와 대면한 느낌이다.
하룻밤 사이에 달라져도 굉장히 달라졌다.
그가 월아를 마차에 태우고 팽가촌에 방문했을 때는 평범한 파락호에 지나지 않았다. 강인한 기질은 가지고 있었지만, 무공으로 제압하지 못할 상대는 아니었다.
그는 싸우면서 커갔다.
몇 번의 싸움을 거치는 동안 이제는 가주나 원로에게서 느낄 수 있는 여유로움마저 풍긴다.
사람이 이토록 빠른 시일 내에 괄목상대한다면 이를 악물고 무공 수련에 매진하는 사람은 뭐가 된단 말인가. 그들은 천치 바보라도 된단 말인가.
루주는 꿈에서조차 생각할 수 없었던 비약적인 발전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역시 검치의 제자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닌가.
“천요루로 가실 거예요?”
취취가 물었다.
보내주기는 하지만 행동반경은 알고 있어야 한다는 속내가 읽혔다. 취취는 그런 걸 감출 정도로 여우가 못 된다.
“모두들 거기로 갔으니까.”
루주는 옅은 미소를 흘리면서 말했다.
그녀들에게 일별을 던지고 휘적휘적 걸었다.
죽음을 각오했던 길이지만 요행히 목숨을 부지했다. 뿐만 아니라 육신이 생명을 잃어갈 즈음, 두 번째 기적이나 다름없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 깨달음은 그를 한층 강하게 만들었다.
강해진 힘으로 할 수 있는 건 많다.
가장 먼저 무엇을 할까?
어미와 담판 짓는 것은 좋은 행동이 아니다.
어미는 꼬리가 아홉 개 달린 구미호다. 꼬리 하나가 발각되면 도마뱀처럼 냉큼 떼어내고 잠적해 버린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잠적까지는 하지 않을 게다. 팽가촌에서 어떻게든 버텨내려고 할 게고, 또 버틸 수 있다.
팽가연과 어미의 싸움은 시작되었다.
어미의 면면을 알고 있는 여전사와 꼬리 아홉 달린 구미호 간의 싸움이다.
승산은 어미 쪽에 더 많다.
어미는 백전노장이다. 수많은 간계(奸計) 속에서 담금질을 하면서 살아왔다.
하지만 팽가연…… 그녀의 눈빛이 좋다.
그녀의 눈은 정직하다. 쉽게 꺾이지도 않을 성격이다. 더군다나 행동하는데도 망설임이 없다.
좋은 싸움이 될 게다.
자신도 한가할 틈은 없다. 지금쯤 어미는 칠촌음화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게다. 자신을 제거하라고 보냈는데, 오히려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포기할 사람이 아니다. 무엇인가 다른 수를 두어올 게 뻔하다.
어미와의 싸움은 언제나 불공정하다.
그녀는 늘 공격자의 입장이고 자신은 늘 방어를 해야 한다. 항상 그렇다. 눈에 띄기만 하면 그런 일이 반복된다. 어미에게는 자신을 죽일 독심이 있지만, 자신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차마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런 식으로 흘러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미 앞에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다. 단 한 번만이라도 비통하게 죽은 아비를 생각하라고. 옛 기억을 되살리라고. 그게 아비의 바람이었을 것 같아서 말이다. 하기는 죽은 자가 무슨 바람이 있겠느냐마는…….
어미는 검치의 무공을 노린다.
어미뿐만이 아니다. 검치의 무공을 탐내는 자는 중원 천하에 널려 있다. 너무나도 강한 무공이고, 절대적인 무공이기 때문에 일초반식이라도 배우고자 하는 자들이 줄을 섰다.
그런 마당인데 욕심 많은 어미야 말해서 무엇하나.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이 배 아파서 낳은 친자식이 검치의 무공을 수련했다는데 이만한 먹잇감이 어디 또 있겠나. 당장 눈앞에 나타나서 핏줄에 호소하지 않는 게 이상할 지경이다.
그렇다. 그건 분명히 이상하다.
어미는 검치의 무공을 노리는 자들 중에서 가장 여건이 좋다.
솔직히 모자간이라고 해도 서로가 목숨을 노리는 마당에 그만한 정리가 있을 리 없지만, 그래도 말이나마 나눌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자들보다는 훨씬 낫다.
그런데도 어미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팽가촌에 검치의 무공보다 훨씬 가치 있는 그 어떤 것이 있다는 뜻이다.
칠촌음화의 행동만 봐도 그렇다.
어미는 칠촌음화에게 자신을 죽이라고 명하지 않았을 게다. 검치의 무공을 빼앗아라. 생포해라. 무슨 일이 있어도 목숨만은 살려놔야 한다. 그래야 검치의 무공을 얻는다.
어미는 욕심을 버릴 여인이 아니다.
그런데 칠촌음화는 살수를 전개했다. 검치의 무공을 묻기는 했지만 형식에 불과했고, 즉각 살수를 전개했다.
칠촌음화에게는 자신이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낫다는 뜻이다. 즉, 검치의 무공보다 어미가 팽가촌에 머물러서 십여 년이나 잠복한 이유를 해결하는 게 훨씬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자신도 눈길을 놓을 수 없다.
어미가 팽가촌에서 무엇을 하는지 계속 지켜볼 심산이다. 팽가연이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느냐마는…… 그래도 자신의 어미인 만큼 자신 역시 지켜볼 것이다.
‘후후! 참 묘한 사이야. 정말 친자식인가 의심될 때도 있다니까. 후후! 참 독한 사람이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눈길에 슬픔이 가득했다.
***
덜컹!
뒷문이 은밀히 열렸다.
“뒤따르는 사람은?”
“없어.”
“확실해?”
“누굴 바보로 아나. 아, 몇 번이나 확인해 봤어.”
그제야 문을 열어준 사내가 옆으로 물러섰다.
사내 두 명은 들것을 들고 재빨리 들어섰다.
들것에는 축 늘어진 시신이 놓여 있었다.
“어디로 놔?”
“안에 들여놔. 관 하나 들여다 놨어.”
“어휴! 원한을 품고 죽은 시신이 되어서 그런가 엄청 무거워.”
두 사내는 힘들어하면서 시신을 옮겼다.
“시신을 가져왔습니다.”
예상했던 보고가 올라왔다.
홍독사는 놀라지 않았다. 당연한 거다. 반색하지도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는 일이다. 대신 머릿속으로는 주판알이 맹렬하게 튀겨졌다. 어느 쪽 수지타산이 좋은가.
“시신을 건드리지 말고… 그대로…… 가져온 그대로 넣어놔.”
머릿속으로 주판알을 퉁기면서 무심히 한 말이다.
“그렇게 했습니다.”
“소문나지 않게 행동조심, 입조심…….”
“여부가 있겠습니까.”
수하는 말귀를 착착 알아듣는다.
아마도 홍독사가 지금 어떤 계산을 하고 있는 지까지 눈치채고 있을 게다.
월아의 시신은 좋은 협상거리가 된다.
월아가 운 나쁘게 지나가는 놈에게 맞아 죽은 것이라면 아무런 가치도 없겠지만…… 놈은 팽가촌의 이숙에게 죽었다. 이숙이 날린 비도에 목이 뚫려 죽었다.
자, 이제 셈해보자. 이 일이 어느 쪽에 불리할까?
월아를 죽인 이숙은 천요루주에게 죽었다.
세상은 모두 이 일을 모르고 있지만, 그는 발 빠르게 움직인 덕분에 누구보다도 빨리 알아챘다.
이숙은 효령과 유리도 죽였다.
분명히 팽가촌의 적, 배신자가 되었다.
솔직히 이숙이 왜 그런 짓을 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늑대의 탈을 뒤집어쓰고 흉악한 인간으로 변신한 느낌이다.
어떤 사연이 있기는 하겠지만…….
이숙이 팽가촌의 중심부에 칼을 꽂았다. 효령과 유리를 죽인 것은 바로 팽가연의 심장에 칼을 꽂은 것이나 다름없다. 팽가연과 비연사도의 정리를 생각하면 당장 복수를 해도 부족함이 없다.
그런데 이숙의 이런 행동은 천요루주에게도 적으로 작용한다.
월아는 루주의 여인이다. 천요루에서 웃음을 팔았던 모든 기녀가 그의 여인이다.
월아는 그런 기녀들 중에서도 특히 총애를 받았다.
천요루주가 마음이 있었다는 게 아니다. 그와 생사를 같이하고 있는 호가의 짝사랑이 그녀에게 향하고 있다.
이숙은 호가의 짝사랑을 죽였다.
이숙은 명실공히 팽가촌과 천요루주의 공동 적이 되었다.
이 일은 다시 말해서…… 이숙이 제 삼의 세력이라는 뜻이다.
제삼자…… 그들은 천요루주 쪽도 아니고, 팽가촌 쪽도 아니다. 천요루주를 죽이려고 하면서, 팽가촌에도 등을 돌렸다. 아니, 양쪽을 모두 건드렸다.
‘엉뚱한 놈들이 나타났어.’
홍독사는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모든 사건에는 사건이 일어날 만한 요인이 있는 법인데, 이번 일의 요인은 무엇인가? 이숙의 이런 행동이 누구에게 득이 되는가?
고심을 거듭해 봐도 감이 잡히지 않는다.
정말로, 정말로 무슨 일인가 벌어지고 있는데…… 아주 큰 일, 세상을 뒤집어 버릴 만한 큰 일이 태동하고 있는데…… 쓰디쓴 주먹 세계에서 살아온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아주 큰 폭풍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는데…… 도대체 그게 무엇인가?
가장 좋은 방법은 이 모든 일에서 비켜서 있는 것이다.
땅속 깊이 파묻혀 있는 돌멩이는 폭풍이 휘몰아치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도 최선은 아니다.
재수 없는 놈은 무슨 짓을 해도 뒤통수를 얻어맞는다. 휘몰아치는 폭풍이 땅까지 뒤집어 버리는 용권풍(龍捲風)이라면 땅 밑이 아니라 이 세상 밖에 있어도 휘말리고 만다.
더욱이 자신처럼 주먹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입장에서는 필연코 부딪쳐야 할 사단쯤으로 생각하는 게 속 편하다.
어떻게 한다?
일단 여인의 시신은 천요루주에게 돌려준다. 최고급 관에 넣어서 정중히 건네준다.
천요루주, 그 새끼가 검치의 제자란다.
단숨에 밀고 들어와서 피떡을 만들 때만 해도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했지만 놈이 검치의 제자라면 죽지 않은 걸 천만다행으로 생각해야 한다.
검치의 제자를 상대할 필요가 없다.
여인…… 월아는 목에 비수가 틀어박혀 있다.
이 부분은 팽가촌에서 확인해야 한다. 그래야 천요루주만 두둔했다는 원망을 듣지 않는다.
시신을 건네주는 것과 검시(檢屍)를 동시에 하게 만든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것뿐…… 그다음이 중요해.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죽어.’
***
호가는 눈만 끔뻑거렸다.
몸을 운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특별한 움직임을 보일 수도 없지만…… 감정마저도 바짝 메말라 버린 듯 일점의 동요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놈아, 월아가 죽었단다.”
맹삼력이 말했다.
“그래.”
여전히 담담한 반응이다.
“이놈아, 월아가 죽었다고!”
“그래…….”
맹삼력은 더 말하지 않았다.
담담한 음성 속에서 진한 아픔을 느낀다. 처절하게 찢어져 나가는 심장의 울음을 듣는다.
다른 사람은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른다.
같은 기루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도 말 한 번 제대로 나눠보지 않았다. 멀리서 지켜보고, 연모했으며, 가슴 아파했다. 두 사람이 통정한 것도 아니고, 일방적인 마음뿐이다. 또…… 상대는 기녀다. 돈에 웃음을 파는 기녀…….
훌훌 털어버리고 웃으면 그만 아닌가.
원래 기녀와는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가볍게 술 한 잔에 담갔다가 흘려보내면 끝이다.
그런데 호가는 그렇지 못하다.
여자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기녀와의 사랑이 어떤 것이라는 것도 잘 아는 놈인데…… 월아에게만은 목숨도 던질 정도로 깊은 사랑을 준다.
그런 그가 평범하게 대답한다.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남의 가정사를 듣는 듯,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린다.
“홍독사가 시신…… 월아를 데려온 모양인데. 어떻게 할래? 가서 볼래? 데려가 줘?”
“왜?”
“뭐! 왜? 왜라니? 무슨 말이 그래?”
“양지바른 곳에 잘 묻어줘.”
“안 볼 거야?”
“볼 이유가 없잖아.”
“……!”
맹삼력은 할 말을 잃었다.
상심(傷心)한 사람을 숱하게 보아왔지만 이런 반응은 처음이다.
‘이놈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맹삼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물러나왔다.
월아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도 태연하다. 홍독사가 시신을 보관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도 담담하다. 눈물을 흘려도 모자랄 판인데…… 그러고도 남을 위인인데…….
방문을 닫고 밖으로 나오던 맹삼력은 멈칫 섰다.
사내!
낯익은 사내가 방문 밖에 서 있었다.
“멀쩡하네?”
“응.”
“이숙을 죽였다고? 말 들었어.”
“칠촌음화.”
“그렇지. 칠촌음화지. 그런데 저놈 아무래도 이상하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맹삼력이 염려스러운 듯 호가가 누워 있는 방을 쳐다보며 말했다.
“들었어.”
“그…… 래?”
맹삼력은 놀라서 반문했다.
듣다니? 그럼 오래전부터 와 있었다는 말이지 않은가. 그런데도 자신은 인기척을 감지하지 못했다. 천요루주의 내공이 자신보다 월등히 앞섰다는 뜻이다.
천요루주가 칠촌음화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다. 그때 느낌은 ‘그런 몸으로 상당한 거물을 쓰러트렸구나. 역시 놈! 불가능한 상황에서 끊임없이 활로를 찾는 놈!’하는 정도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