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n Swordsman RAW novel - Chapter 81
81
지금은 완전히 다르다. 괄목상대할 만큼 성장해서 돌아왔다. 단 하루, 하루 사이에!
천요루주가 말했다.
“월아를 찾지 마라.”
“뭐?”
“저놈이 직접 찾도록. 저놈…… 우리가 월아를 손대는 거 원치 않을 거야.”
“그래도 월아를 남에게 맡긴다는 건…….”
“설언이는?”
“후원에.”
“오늘은 푹 쉬자. 방해하지 마.”
천요루주가 휘적휘적 걸어갔다.
***
팽가촌에서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연락도 없었어?”
홍독사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물었다.
“없었습니다.”
“아무도…… 안 와? 이숙이 여자를 죽였다는데?”
“네.”
“하!”
홍독사는 입을 쩍 벌렸다.
이숙이 사람을 죽였다는데 팽가촌 무인들이 검시를 하러 오지 않는다? 이건 뭔가?
팽가촌에서는 이숙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아무도 검시하려고 오지 않는다. 이숙과 연관된 어떠한 일도 팽가촌과는 상관없다는 뜻이다.
이건 반대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숙이 어떤 짓을 했는지 너무 잘 안다. 인정한다. 그래서 연관을 맺지 않으려고 한다.
‘흐흐흐! 내가 소문내지 못할 거라는 건 알고 있고…… 뭐야? 너희가 알아서 조용히 덮어라. 이거야? 분명한 건 이게 잘못 소문나면 내 모가지가 뎅겅 한다는 것이고…….’
이래서 수하들 모두가 월아의 시신을 건드리지 말자고 했다. 그냥 내버려두면 관에서 처리하든 팽가촌에서 처리하든 천요루주가 거두든 누군가는 손댈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 말이 맞다. 하지만 폭풍의 중심으로 들어가려면 무슨 건더기든 손으로 움켜잡아야 하는 것이다.
홍독사가 말했다.
“루주 쪽 사람은 언제 온대?”
“그게…….”
수하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또 왜?”
“그쪽도…… 그냥 장례 잘 지내라고.”
“뭐야!”
“나중에 찾을 테니 양지바른 곳에 정성을 다해서 묻어주란 말은 남겼는데…….”
“흐흐흐! 그럼 그렇지.”
홍독사는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역시 월아는 사건의 한복판에 있다.
천요루주 쪽에서 당장 달려오지 못하는 데는 분명히 그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얼핏 삼파전이 예상된다.
팽가촌이 있다. 천요루주가 있다. 그리고 또…….
또 한 세력은 월아의 목을 꿰뚫은 도흔과 연관이 깊다.
월아를 죽인 수법이 무엇인지만 알 수 있어도 배후를 캐내는 게 훨씬 쉬울 텐데…… 보아하니 천요루주 쪽은 또 한 세력을 짐작하는 듯한데…….
‘제길! 언젠간 알겠지.’
홍독사를 고개를 저으며 소리쳤다.
“야! 그 년 따땃한 곳에 묻어줘라. 우리가 정성껏 묻었다는 표시 팍팍 내고. 알았어!”
2
또르륵!
호박색 맑은 술이 상큼한 향기를 풍기며 작은 술잔에 채워진다.
슥!
루주는 술잔이 채워지기 무섭게 들이켰다.
“천천히 드세요.”
주설언은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루주는 말없이 술잔을 내려놓았다.
‘따라.’
무언중에 뜻이 전달된다.
침묵은 무겁다. 감히 거역할 마음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뜻을 품고 있다.
슥! 또르륵!
주설언은 어쩔 수 없이 주담자를 들어서 술을 따랐다.
벌써 두 주담자째.
술 석 잔이면 황소도 나가떨어진다는 육순주(六旬酒)를 벌써 스무여 잔째 들이켜고 있다.
슥! 벌컥!
또 한 잔의 술이 단숨에 비워졌다.
천요루주는 기루의 주인이면서도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술이 약한 편은 아닌데, 자주 즐기지 않는다. 어쩌다가 술을 마실 기회가 생겨도 고주망태가 되도록 취한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아니, 있다.
루주는 자주 취한다. 인사불성이 되어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가 될 때까지 마시고 또 마시는 못된 습관이 있다.
그녀는 루주의 못된 습벽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녀와 있을 때, 그녀와 함께할 때, 그리고 그녀가 따라주는 술에 취한다.
오늘도 그럴 모양이다.
또르륵!
스물세 잔째 술이 따라졌다.
월아가 죽었다.
무림의 싸움이란 상당히 지저분하다. 적대 위치에 있는 당사자만 노리는 법이 없다. 적이라고 생각되면 주변 모두를 가지치기하듯이 쳐내버린다.
월아가 그런 식의 싸움으로 희생되었다.
그녀는 비밀을 알고 있었다.
쌍겸구악이 저지른 일, 팽효뢰가 저지른 일, 그리고 어미가 얽힌 일…… 그 많은 일을 알고 있는데 무사하기를 바란다면 그야말로 도둑놈 심보일 게다.
그렇다.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인데…… 그런 사실을 간과했다.
월아가 의원을 떠날 때, 그녀를 만류한 사람이 없었다. 모두들 편안하게 고향 땅을 밟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말로 더 이상의 위험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목숨을 위협하던 흑마겸이 죽고 백살겸이 생포되었다.
모든 사실을 알아낸 팽가연이 분심(忿心)을 억누르지 못하고 단숨에 팽가촌으로 달려갔다.
이런 마당이니 적어도 월아에 대한 안전만은 염려하지 않아도 마땅하지 않은가.
그런데 죽었다. 아니, 죽는 게 당연하다. 위험이 한 치도 감소하지 않았는데, 어디서 안전을 구한단 말인가.
이 모든 것을 몰랐던 게 아니다. 조금만 생각해도 짐작이 된다. 헌데 월아가 떠나는 순간에는 잠시 망각했다.
움직일 수 없는 몸으로 강적을 맞이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합리적인 사고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쌍검구악을 무너트렸다는 호승심이 이성을 흐려놓았다.
살아 있는 사람들 모두 월아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
‘어미!’
루주는 동그란 술잔에서 어미의 얼굴을 봤다.
어미는 웃는다. 활짝 웃는다. 저승에서 갓 튀어나온 듯 아주 요악한 웃음을 흘리고 있다.
네까짓 게!
어미의 비웃음이 마음을 적신다.
술을 마신다. 술잔을 비운다. 어미의 웃음을 마시고, 어미의 비웃음을 비운다.
어미가 아니었다면 아직도 살아 있을 월아.
슬프다. 아주 슬픈 날이다.
주설언은 탁자 위에 머리를 처박고 쓰러져 버린 루주를 안쓰러운 눈길로 쳐다봤다.
주담자를 네 병이나 비웠다.
지금까지 보아온 중에 가장 많이 마셨다. 아니, 이 정도면 마신 게 아니라 들이부은 것이다.
주설언은 루주의 심중을 헤아린다.
처음에는 루주가 왜 그토록 취하려고 하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취중에 바람처럼 흘린 한 마디…… ‘월아’라는 말을 듣는 순간 루주의 마음을 단숨에 꿰뚫었다.
루주는 강한 사내가 못 된다.
싸움을 잘하는 사내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독심(毒心)과는 거리가 멀다. 아주 멀다.
루주는 약해야 할 사람에게는 한없이 약하다.
“휴우!”
그녀는 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술로 달랬지만, 내일은 마음으로 삭힐 것이다. 죽은 월아에 대한 죄책감, 호가에 대한 미안함이 늘 마음 한켠을 어둡게 만들 것이다.
그녀는 무너진 루주를 안아 일으켰다.
약한 여인이 건장한 사내를 안아 일으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런 일쯤은 이골이 난 터인지라 그리 어렵지 않다.
겨드랑이 사이로 어깨를 들이밀고 장작을 들어 올리듯 힘껏 떠민다. 그러면 꼼짝도 하지 않을 것 같던 루주의 몸이 신기하게도 둥실 떠오른다.
그를 안아 일으키는 건 어렵지 않다. 오히려 몇 걸음 안 되는 침상까지 가는 길이 훨씬 어렵다. 그때는 작은 동체에 루주의 전 체중이 실리기 때문에 온 힘을 다 쏟아야 한다.
루주를 침상에 뉜 후에도 할 일이 있다.
그녀는 습관처럼 보석함을 열었다.
그곳에는 언제든 사용할 수 있게끔 도톰한 가죽주머니 다섯 개가 들어 있다.
첫 번째 것을 열어서 침상 주변에 흩뿌린다. 두 번째 것을 열어서 방안에 골고루 뿌리고, 세 번째 것을 열어서 창문 틈이나 방문 앞에 뿌린다.
이 세 가지의 가죽 주머니에는 가벼운 독분(毒粉)이 들어 있다.
서로가 극성의 성질을 지녔기 때문에 한 가지 해독약으로는 방비할 수 없다. 또한, 성질이 극악해서 웬만한 침입자쯤은 단숨에 제압해 버린다.
중독을 피할 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녀가 만든 안주를 먹거나, 해가 뜰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그녀가 뿌린 독분들은 따스한 햇살을 받으면 거짓말처럼 증발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녀는 무공을 모른다. 그래도 루주를 보호해야 한다. 루주는 자신을 믿고 만취했다. 마음 편하게 술을 마셨다.
언제 기회가 되면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물어보긴 해야 할 것 같다.
루주는 적이 많다. 홍독사도 적이었다. 온갖 파락호들이 그를 노렸다. 원한 관계만 있는 게 아니다. 루주가 가진 위치나 금전을 노린 자들도 많다.
사방이 적인데 도대체 어떤 배포로 무공 한 푼 쓸 수 없는 기녀 앞에서 대취할 수 있는 것인가.
그녀가 독분을 준비하는 건 그래도 혹여 있을지 모를 급습에 대비한 고육지책(苦肉之策)이다.
사실 그녀는 자신이 뿌린 독분의 성능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다.
언젠가 호가에게 고민을 말한 적이 있고, 호가가 웃으면서 약방문 몇 개를 써주었는데…… 의원들 말로는 장난삼아 쓸 수 있는 가벼운 독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호가가 독을 다룰 줄 모르는 그녀를 생각해서 일부러 가벼운 독분을 만들어 준 듯하다.
어쨌든 그녀는 다섯 가지의 독분을 항시 준비한다. 그리고 루주가 만취한 날이면 의식을 치르듯 방안에 골고루 뿌린다.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주머니는 품에 넣고 잔다.
그것은 방안에 뿌려놓는 게 아니라 침입자에게 던질 요량으로 구비해 놓은 것이다.
효능? 기대효과? 물론 알지 못한다.
그저 만일의 경우에 망설이지 말고 던지라는 말을 들었으니 품에 넣고 잔다.
그녀는 세 개의 독분을 꼼꼼히 뿌렸다.
침상 주변에 뿌리는 것, 방에 고루 펼쳐서 뿌리는 것, 그리고 창틈에 뿌리는 것…… 모두 구분이 있다. 아무 주머니나 막 뿌리는 게 아니다.
그녀는 무심히 독분을 뿌린 후, 나머지 두 개의 독주머니는 품에 찔러 넣었다.
지금까지 침입자가 있다거나 어떤 사단이 벌어진 적은 없었다. 하지만 루주가 움직일 수 없는 상태이니 만일의 경우는 항시 대비해야 한다.
“됐어.”
그녀는 방안을 쓱 돌아보며 만족했다.
***
스읏!
앞서 가던 수두(首頭)가 오른손을 번쩍 쳐들었다. 그러자 뒤따르던 사내들이 거짓말처럼 제자리에 멈춰 섰다.
수두는 손으로 두 명을 지목했다.
지목을 받은 두 명의 사내가 미끄러지듯 기와를 스치며 달려갔다.
스읏! 스읏!
그들은 처마 끝에 이르자, 앞으로 꼬꾸라지듯 쓰러졌다.
처마 밑으로 굴러떨어진 건 아니다. 두 발의 발등을 기와에 얹고 박쥐처럼 거꾸로 매달렸다.
잠시 후, 그들이 다시 돌아왔다.
“추몽혈사분(追夢血死粉입니다.”
“놀랄 일도 아니군. 호가는 청성파 인물이야. 코 밑에 당문이 있으니 그만한 독쯤은 다룰 수 있겠지. 해독단은?”
“없습니다.”
뒤에 멈춰서 있던 무리들 중 한 사내가 말했다.
“흠!”
수두가 깊은 침음을 흘렸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세상은 쥐 죽은 듯 조용하다. 전각 지붕 위에는 십여 명의 사내들이 뭉쳐 있지만, 숨소리조차도 들리지 않는다.
“돌아간다.”
수두가 결정을 내렸다.
“겨우 추몽혈사분입니다. 한두 명만 죽으면 됩니다.”
즉시 반대의 소리가 울렸다.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한 번의 이의제기는 얼마든지 용인된다. 신이 아닌 이상 실수란 언제나 있기 마련이고, 수장(首長)이라 한들 실수를 피해 가긴 어렵기 때문이다.
숙고, 숙고!
수두는 반대의 소리를 깊이 있게 숙고했다. 그리고 결정을 내렸다.
“돌아간다.”
큼직한 전각에는 아직도 불이 밝혀져 있다.
세상이 온통 어둠으로 뒤덮여 있는 깊은 밤인지라, 전각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은 한층 더 밝게 느껴진다.
“이유를 설명해 주십시오.”
반대를 말했던 자가 물었다.
“굳이 들어가려는 이유는 뭔가?”
“직감입니다.”
“호기라고 판단한 건가?”
“맞습니다.”
사내에게서 강한 신념이 피어났다.
살수에게는 직감이라는 게 있다. 객관적으로 상황이 살펴보면 도저히 틈이 없다. 하지만 직감상 살인을 하기에는 이번만큼 좋은 기회가 없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지금이 그런 때다.
루주는 술을 마셨다.
육순주의 강렬한 주향이 십 리 밖에까지 퍼져 나갔다.
술 냄새가 어떻게 십 리 밖까지 퍼져 나가느냐고? 맞다. 평범한 자들은 도저히 맡을 수 없는 냄새다. 하지만 고도로 훈련된 그들의 후각까지 속일 수는 없다.
루주는 술에 취해서 곯아떨어졌다.
루주를 그림자처럼 따르던 호가와 맹삼력의 호위도 보이지 않는다. 호가는 움직일 수 없는 처지고, 맹삼력도 월아가 죽었다는 슬픔에 젖어서 술잔을 기울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