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n Swordsman RAW novel - Chapter 87
87
츠으으읏!
진기가 전신을 휘돌며 술기운을 밀어낸다.
걱정, 분노, 상심 등등 모든 감정적인 느낌들을 지워낸다.
꽈르르릉!
청명한 기운이 지나가고 혼원벽력신공의 강렬함이 정수리에 내리꽂힌다. 그리고 그 순간,
‘루주!’
그녀의 머릿속에 한 인물이 퍼뜩 떠올랐다.
이른 새벽, 세 여인이 술 냄새 퀘퀘한 골목으로 들어섰다.
골목은 몹시 지저분했다. 주루에서 내놓은 음식찌꺼기가 산처럼 쌓여서 썩고 있다. 만취한 사람이 토한 것으로 보이는 흔적도 여러 군데서 발견되었고…… 무엇보다 싫은 것은 사내자식들이 싸질러 놓은 오물 흔적이다.
“크!”
취취가 손으로 코를 막았다.
“하필이면 이런 곳에…….”
흠화도 인상을 찡그렸다. 그때,
“죽기 싫으면 조용히 해.”
팽가연이 정나미 뚝 떨어질 정도로 싸늘하게 말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녀는 손가락을 빳빳하게 곤두세웠다. 언제든지 칼을 뽑을 수 있는 자세다.
취취는 흠칫했다. 흠화는 재빨리 사방을 훑어보았다.
그녀들의 강호 경륜은 얕지 않다. 크고 작은 싸움을 수십 차례나 치러본 경험이 있다.
팽가연의 음성에서 묻어나는 긴장감을 놓칠 리 없다.
“아무것도 없는데…….”
취취가 지나가는 말로 중얼거렸다.
사실은 그 말이 더 무섭다. 당연히 느껴져야 할 살기, 예기(銳氣), 느낌이 전혀 감지되지 않는다. 그것은 상대가 그만큼 강하다는 반증이다.
이런 느낌은 아주 좋지 않다.
“어떤 놈들이에요?”
흠화가 물었다.
팽가연만이 감지할 수 있는 자들이라면 상당한 고수다. 숨어 있는 것과 공격하는 것은 다르다. 무공의 강약이 숨어 있는 것으로 결정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녀들이 전혀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은밀히 숨어 있을 수 있다면, 공격 역시 특별하다고 봐야 한다.
팽가연이 짧게 말했다.
“살수.”
루주가 묶는 저택은 천요루의 지저분한 뒷면을 지나쳐야만 들어설 수 있다.
정말로 두 번 다시 걷고 싶지 않은 길을 거쳐 왔을 때, 그녀들은 한 무리의 건달들과 마주쳤다.
“…….”
그들이 세 여인을 쳐다봤다. 그리고 짐짓 딴청을 피우며 눈길을 돌렸다.
저벅! 저벅! 저벅!
그녀들이 파락호들 사이를 걸어갔다.
시비는 없었다. 파락호들이 미치지 않은 다음에야 팽가촌의 소문난 여자들을 건드릴 리 없다.
“의외로 파리가 많이 꼬여 있네.”
취취가 비웃듯이 말했다.
“훗! 자기들도 파리처럼 달라붙으면서 누굴 뭐래.”
그녀들의 등 뒤에서 들린 말이다.
취취가 홱 고개를 돌렸지만 모두들 딴청을 부리는 바람에 누가 말했는지 찾아낼 수 없었다.
예전 같으면 찍소리도 못했을 놈들인데.
팽가촌 사람이었을 때와 출문한 상태는 확실히 달랐다.
세 여인이 안으로 들어섰을 때, 루주와 주설언은 돌 틈에 피어난 장미꽃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예뻐요.”
“이런 곳에서 산 게 신기한 거지.”
“꽃이잖아요. 꽃은 어디에서나 피어날 수 있어요.”
“잡초나 그렇고.”
“장미든 백합이든 다 마찬가지예요. 꽃은 어디서나 필 수 있어요.”
“한 마디도 안 지네?”
“요즘 이기는 연습을 부지런히 하고 있거든요. 뭐든 이기려고 노력 중인데, 흠! 지금까지는 뜻대로 잘 되고 있어요. 뭐랄까? 이제 상공 정도는 가볍게 상대할 수 있다랄까?”
“뭐야!”
“호호호!”
두 사람은 아무런 격의 없이 농담을 주고받았다.
하북에서 일어난 살인들, 처참한 살육전들, 체온마저 식혀 버리는 싸늘한 공기를 전혀 느끼지 못한 사람들 같았다.
“흠!”
팽가연은 일부러 큰기침을 했다.
“어서 오시오.”
루주는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녀와 비연이도가 나타난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하기는 숨어서 다가온 것도 아니고 당당하게 걸어왔는데 몰랐다는 건 말이 안 되지만 말이다.
“오늘이나 내일쯤 올 줄 알고 있었는데, 아침 댓바람이라니.”
루주가 허리를 펴고 일어서면서 말했다.
“차를 내올까요?”
“그래 줘. 아냐, 차보다 아침이 좋겠는데. 보아하니 아침도 거른 것 같아.”
“절 따라오세요.”
주설언은 세 여인을 향해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주설언은 세 여인을 방으로 안내했다.
루주의 방?
널찍한 침상과 큼지막한 탁자를 제외하고는 변변한 집기조차 구비되어 있지 않아서, 누가 봐도 한눈에 임시거처임을 알아볼 수 있는 방이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곧 아침 준비해올게요.”
“아침은 됐고. 루주와 이야기 좀 하고 싶은데.”
“식사부터 하세요. 부처님도 배 곪고는 일하지 못해요. 호호!”
“방금 전에 루주가 한 말이 무슨 뜻이냐!”
팽가연과는 달리 흠화의 음성은 싸늘했다.
주설언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무슨 말이요?”
“우리가 올 줄 알았다고? 오늘이나 내일쯤?”
“아! 그 말요. 저희도 귀가 있는데 어찌 아씨의 출문 소식을 듣지 못했겠어요. 루주께서는 그 말씀을 듣자마자 그러시더군요. 목적이 같으니 조만간 방문하실 거라고요.”
“루주가…… 그랬단 말이야?”
“네. 편히 앉아 계세요.”
주설언이 방긋 웃으면서 나갔다.
루주는 세 여인이 아침 식사를 마치고, 차까지 한 잔 마신 후에야 들어섰다.
아마도 세 여인이 간밤에 노숙한 것을 알고 편안한 시간을 일부러 빼준 것 같다. 덕분에 모두들 세면도 하고, 머리도 만지고, 옷도 갈아입었다.
어제저녁만 해도 답답했는데, 주설언 말대로 배부르고 시간적 여유가 생기니 자신도 돌아보게 된다.
팽가촌에 있을 때는 신경도 쓰지 않던 부분들인데…… 출문하고 하루 만에 먹고, 입고, 자는 아주 간단한 일상사마저 챙기지 못하게 되었다.
유객(遊客) 생활을 안 해 본 것도 아니다.
짧게는 며칠에서부터 길게는 반 년 넘게까지 중원을 떠돌면서 유랑생활을 즐긴 적도 있다.
그때도 여러 날씩 노숙을 한 적이 있고, 씻지 않고 며칠을 보낸 적도 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자신 안에 당당함이 살아 있는데 다른 사람의 눈치를 왜 보는가.
지금은 다르다. 그때의 당당함이 사라졌다. 귀찮아서 씻지 않은 게 아니라 씻는다는 단순한 생활을 의식하지 못했다.
루주를 빨리 만나야 한다는 급박함이 있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출문의 충격이 의외로 컸던 모양이다. 본인 스스로 출문하긴 했지만, 막상 밖에 나와서 천애고아가 된 고독감을 맛보니 마음이 착잡했던 것 같다.
“여긴 천요루 후원입니다. 우리도 홍독사의 객식구이다 보니 눈칫밥을 먹는 처지라…… 찬이 변변치 않았을 텐데, 괜찮았습니까?”
루주가 환히 웃으면서 들어섰다.
사람이 밝다. 어두운 구석이 없다. 기녀들의 등이나 처먹는 기둥서방쯤으로 봤을 때는 얼굴만 반반한 기생충으로 보였는데, 속을 숨기고 음침하게 숨어 있는 오라버니보다 백 배 낫다.
“아주 맛있었어요.”
팽가연이 말했다.
루주는 탁자 맞은편에 앉아서 찻잔에 차를 따랐다.
“여긴 듣는 귀가 없습니다.”
루주가 차를 마시면서 한 첫 말이다.
“아실지 모르지만…… 웬일인지 살수들이 진을 치고 있군요. 후후! 아마도 귀살왕과 연관이 있지 않나 싶은데…… 그들 속에 팽효기가 섞여 있습니다.”
“……!”
팽가연은 하마터면 들고 있던 찻잔을 놓아버릴 뻔했다.
“누구라고요!”
“팽가사로가 왔었습니다. 후룩!”
루주는 작은 찻잔을 비우면서 말했다.
팽가사로와 나눈 말, 팽효기의 역할…… 팽가사로가 하북 팽가의 밀마까지 건네준 사실…… 모두 말했다.
루주가 말을 끝내자, 주설언이 품에서 소책자를 꺼내 탁자에 올려놓았다.
“이게 하북 팽가의 밀마예요. 아씨도 보셔야 할 거예요. 아씨가 알고 있는 밀마와는 상당 부분 다를 테니까요.”
팽가연은 소책자를 집어 들어 내용을 살폈다.
익숙한 문양들이 질서 있게 정리되어 있다. 헌데…… 그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밀마는 대체적으로 두 부분으로 나뉜다.
하나는 사물을 지칭하는 불변의 언어이고, 다른 하나는 움직임을 나타는 변화의 언어이다.
이 부분들이 수정된다면 밀마를 풀어낼 방도가 없다. 또한, 밀마는 언어를 압축하는 특성이 있다. 어느 한 부분만 정정해도 뜻이 통하지 않는다.
소책자는 모든 부분이 변했다.
즉, 하북 팽가의 밀마체계가 완전히 수정되었다.
그녀가 알고 있는 밀마로는 어떠한 문양도 해석하지 못한다. 눈앞에서 하북 팽가의 밀마를 봤어도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해 머리를 긁적이는 상황이 연출될 게다.
“이게…….”
“어휴! 하루 새…… 정말 너무들 하시네.”
흠화와 취취가 소책자를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루주가 말했다.
“이건 우리들의 밀마입니다. 하북 팽가의 밀마는 변하지 않았어요. 여전히 사용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전해지는 밀마는 바로 이 책자로 해석해야 합니다.”
“아!”
취취가 알았다는 듯 활짝 웃었다.
역시! 아버지는 그녀들을 위해 할 일을 남겨놓았다. 그 일을 설마 루주에게 맡겼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이 밖에 다른 말은 없었나요?”
“기다리는 게 있습니다. 여기서 기다리시겠습니까?”
“뭔데요?”
“…….”
루주는 대답 대신 웃기만 했다.
주설언이 대신 말했다.
“저한테도 말 안 해줬어요. 기다려봤다가 별거 아니면 꼬집어 주려고요.”
“좋아요. 뭔지 모르지만, 하루 이틀 정도라면 같이 기다리죠. 어차피 밀마도 숙지해야 하고.”
“그 정도면 충분할 겁니다.”
루주가 찻잔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제25장 불나방
1
마(魔)는 시궁창에서 자란다.
썩고 곰팡이가 핀 오물덩이를 먹으면서 한 치씩 성장한다.
그들의 칼에 독심(毒心)이 스며있는 건 당연하다. 인정이 메말라 붙은 것도 당연하다. 배신을 밥 먹듯이 하고, 한 끼 밥을 위해서 살인까지 불사하는 행동도 당연하다.
오물덩이 속에서 뒹굴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들의 악랄함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뒹굴어 보았다.
놈들이 먹는 오물덩이를 먹었고, 썩은 물을 온몸에 뒤집어쓴 채 살았다.
놈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악마적인 충동이 일어나는 것을 이 악물면서 참았다는 것이다.
살인을 하고 싶다.
당연하다. 살인을 하지 않으면 굶어 죽는다는데 칼을 들지 않을 위인이 어디 있겠나. 밥을 위해서 살인하는 미친놈이 어디 있느냐고? 그런 말을 하는 놈은 딱 닷새만 굶겨봐야 한다. 그런 후에 그놈 입에서 어떤 소리가 나오는지 들어보자.
도둑질을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손이 슬그머니 움직인다.
강도짓을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미 칼이 뽑히고 있다.
미친 듯이 일어나는 악마의 숨결을 굳센 부동심(不動心)으로 견뎌냈다.
마를 견뎌낸다는 것은 죽음보다도 더한 고통이다.
그들은 깨달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병기 중에서 가장 날카로운 것은 마음의 칼이다. 마음의 날카로움이다.
도검의 날카로움 따위는 마음의 날카로움에 비하면 어린애 장난에 불과하다. 도검으로는 베지 못하는 것이 수두룩하지만 마음으로는 어떤 것이든 베어낸다.
그들이 더 이상 시궁창에 있을 필요가 없어지자, 일어섰다.
인(刃) 자(者)!
그들은 백 명이다. 정도에 입문하여 입마(入魔)했다가 마를 극복하고 다시 정도로 돌아온 정도의 힘줄이다.
무림의 몇몇 명숙은 그들을 이렇게 불렀다.
백인대(百刃隊)!
“앞에 떨거지들이 있다.”
“어디 놈들인데?”
“살천루.”
“후후후! 귀살왕의 복수를 하겠다는 건가?”
그들은 살천루의 살수들이 잠복해 있는 이유를 짐작했다. 아니, 살천루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이유를 알아챘다.
이게 살천루의 법이다.
귀살왕은 살천루가 배출했다. 살천루라는 거대한 거목에서 잘려나간 잔가지다. 그런 가지가 무참하게 무너졌을 때, 이는 살천루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한다.
그들은 마인들만 아는 게 아니다. 살수들의 행동방식도 환히 꿰고 있다.
“살천루가 칼을 뽑았다면, 저놈도 꽤나 피곤하겠군.”
“몇 명이나 있어?”
“한 열 명?”
“열 명…… 햐! 이거 재밌겠는데. 한 번 부딪쳐봐?”
말한 자는 손가락을 우두둑 소리 나게 꺾었다.
그들은 백 명이다. 하지만 백 명이 모두 온 것은 아니다. 아흔다섯 명은 조용한 곳에서 숨을 죽이고 있고, 그들 다섯 명만 양지에 모습을 드러냈다.
살천루도 마찬가지다.
눈에 보이는 자들이 열 명뿐이라고 해서 가볍게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살천루를 절대로 열 명을 내보내는 법이 없다.
일반적인 살행이 아니라 복수를 향한 줄달음질이라면 최소한 백 명 이상이 동원된다.
갑(甲), 을(乙), 병(丙), 정(丁), 무(戊), 기(己), 경(庚), 신(辛), 임(壬), 계(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