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n Swordsman RAW novel - Chapter 92
92
월륜은 수평으로 뻗어나갔다.
월륜의 변화는 일륜과 사뭇 달랐다.
월륜은 분각(分角) 대신 강기(罡氣)를 더했다. 일월륜마의 손에서 떠날 때는 손바닥만 했던 것이 일장을 날아가는 동안에 쟁반 크기로 변했다. 그리고 또 일 장…… 솥뚜껑만 한 크기, 걸려들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잘라버릴 것 같은 대형 회전톱니로 변했다.
“좋군!”
사내는 짤막하게 말했다.
까앙! 까앙! 까아앙!
쌍도와 일월륜이 정면에서 격돌했다.
천도는 분각된 일륜들을 정확하게 격타해냈다. 지도는 내력이 함축된 월륜을 두 조각으로 쫙 쪼개냈다.
까까까깍!
일월륜이 기괴한 기음을 쏟아내며 부서져 나갔다.
내공의 차이가 너무 뚜렷하게 난다. 일월륜마의 내공은 사내의 내공보다 절반에도 못 미친다. 그렇지 않고는 이토록 싱겁게 승부가 날 리 없다.
아니다. 내공이라면 일월륜마도 만만치 않다. 최소 육십 년 적공(積功)이 아니던가. 일갑자(一甲子)의 내공이 쏟아진다면 그보다는 사내가 당했을 공산이 크다.
그렇다. 일월륜마는 일월륜을 내던졌다. 다시 거둬들일 생각을 하지 않고 냅다 집어던졌다.
팽가 무인을 이긴다고, 그를 죽인다고 해서 무사한 것은 아니다.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탈출하는 것이다. 싸움에서 이기는 것은 지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탈출에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천지연환탈백도를 비켜낼 정도, 딱 그 정도의 내공만 함축시킨 후에 던져냈다. 그리고 전력을 다해서 도주를 시작했다. 마침 도주할 만한 공간도 눈에 띄었고.
쒜엑!
그는 일로와 이로 사이를 뚫었다.
두 사람의 간격은 유난히 넓다.
두 사람이 뒷짐을 진 채 느긋하게 서 있는 모습도 마음에 든다.
물론 저런 모습들도 전부 자신감에서 나온다. 그만한 실력이 바탕이 되니 틈을 벌려 놓은 것이다. 결코 방심이 아니다. 설혹 방심이라고 해도 방심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는 이번 도주에 전심전력을 모두 쏟았다.
그의 신형은 빗살로 변했다.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그리고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순간에 벌인 일이다.
슈욱! 촤아악!
그의 앞을 두 청년이 막아섰다.
한 명은 오호단문도, 또 한 명은 왕자사도를 전개한다.
한 자루의 칼이 하늘에서 떨어져 땅을 스친 후, 다시 올라간다. 커다랗게 반원을 그린다. 또 한 자루의 칼은 전신을 노린다. 왕(王) 자(字), 총 사 획에 죽음의 절기가 담겨 있다. 눈앞에서 왕 자의 절기가 펼쳐진다.
‘빌어먹을!’
노인은 탄식했다.
이놈들은 각 개인의 무공만 뛰어난 게 아니다. 오인합격술(五人合擊術)에도 능하다. 다섯 명이 각기 다른 도법으로 공격해 오는데, 서로가 서로의 빈틈을 메워준다.
퍽!
노인은 달리던 모습 그래도 펑! 사라졌다.
흔적도 없이…… 달리고 있는 잔영(殘影)이 어른거리는 듯한데…… 실체는 없다. 그때,
“유부신법(幽府身法)!”
이로가 나직이 중얼거리며 도집으로 둔탁한 울림을 만들어냈다.
퍼억!
칼도 뽑지 않고 도집으로…… 도주하는 일월륜마의 허리를 가격하여 꼬꾸라트렸다.
일월륜마는 착각한 것이 있다.
십여 명이 주위를 에워쌌을 때, 그들은 개인이 아니었다. 열 명 모두 하나로 연결된 기감의 결정체였다. 한 명이 열 명으로, 열 명이 한 명으로 느낌을 몰아줄 수 있다.
기감이 거미줄처럼 촘촘히 연결되어 있기에 어떠한 움직임도 포착된다.
그는 그 점을 몰랐다.
“어떻게……?”
허리를 가격당한 일월륜마는 땅에 꼬꾸라진 후에도 믿지 못하겠다는 눈길로 이로를 쳐다봤다.
유부신법이 무림에 선을 보인 이후, 지금처럼 간단하게 깨어진 적은 없다. 그 어떤 초강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자를 잡을 수는 없지 않은가.
한 번, 두 번, 세 번!
딱 세 번의 호흡동안은 완전한 유령인간이 될 수 있는 게 유부신법이다.
역시 통천오방진…… 이것이 아니었다면 일월륜마를 잡기가 간단치 않았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일월륜마는 자신이 어떻게 잡혔는지 이유를 알지 못하겠지만.
“끌고 가. 쯧! 온갖 잡놈들이 다 모여들 것 같군.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는지.”
일로가 혀를 끌끌 찼다.
‘역시!’
팽가촌에서 통천오방진은 무적이다.
다른 곳에서는 어떨지 모르지만 이곳에서만큼은 오방진을 뚫을 수 없다.
일월륜마는 저토록 허술하게 당할 사람이 아니다. 그의 은형신술(隱形身術)은 ‘꼬리가 아홉 개 달린 여우’라고 불린다.
내공도 강하다. 일월륜으로 펼치는 초식은 신랄하다 못해서 독랄하기까지 하다. 일월륜에 맞은 사람은 육신이 걸레처럼 찢겨나간다. 그것만 봐도 그의 잔혹성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너무 간단하게 잡혔다.
그가 살 길을 모색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했다면 팽가오도 중 한 명은 잡을 수 있었다. 그는 일월륜마를 얕보고 있었으니까. 천지연환탈백도라면 이 정도의 노마는 쉽게 잡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보다 일월륜마가 확실히 한 수 위다.
그는 팽가오도가 아니라 팽가오로와 견줄 수 있는 고인이다. 비록 마인이고, 냄새나는 늙은이일망정 일가를 이룬 무공만은 인정해 줘야 하는 거마다.
그런 거마가 약간의 판단 착오를 일으켰다.
그가 통천오방진의 존재를 알았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그는 처음부터 전력을 다했을 게다. 열 명의 팽가 고수들 중에서 적어도 두세 명은 크게 다쳤을 것이다. 그리고 그도 사로잡히는 추태 대신에 장렬한 죽음을 맞이했을 게다.
팽가 고수들 중에 그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있어도 사로잡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통천오방진!
치밀하게 짜인 기의 그물 앞에서는 잔재주가 통하지 않는다. 유부신법도, 은형신술도…… 모두 깨진다. 유일한 탈출 방법은 패력(覇力)으로 강력하게 뚫고 나가는 것뿐이다.
아쉽지만…… 그래도 괜찮다.
‘어차피 저 늙은이는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까.’
가모는 옅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효문.”
“…네.”
“저자. 죽여.”
“가모님!”
“죽이고 와.”
“꼭 그래야 합니까?”
“저자…… 나에 대해서 너무 잘 알아. 어차피 모두가 알고 있는 일이겠지만…… 절염색녀…… 호호호! 효문, 너도 나에 대해서 많은 소리를 들었지?”
“좋은 소리만 들었습니다.”
“고마워. 그렇게 말해주니.”
“…….”
“나에 대해서 말하는 거 싫어.”
결국은 죽이고 오라는 소리다.
세상에 비밀은 없다. 많은 것이 이미 알려졌다.
가모의 사주를 받은 팽효뢰가 지하 밀실로 스며들었던 사실도 알려졌다. 그런데 그런 일을 이번에는 자신에게 시킨다. 자신 역시…… 소모품에 불과했던 것인가.
“알겠습니다.”
가모를 지척에서 모셔왔던 팽효문, 그는 가모의 말을 거역하지 못했다. 이성으로는 거절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몸이 벌써 부응하고 나섰다.
가모를…… 아는 게 아니었다.
2
– 일월륜마, 침입(侵入).
제일보(第一報)는 그리 놀랍지 않았다.
외인의 침입 같은 것은 생각해 본 적이 없는 하북 팽가이지만 다른 자가 침입하지 말란 법은 없다.
어쩌다가 마인이 침입했고, 잡혔다.
– 일월륜마, 자살(自殺).
제이보(第二報)가 심상치 않다.
멀쩡하게 잡혀 있던 자가 느닷없이 자살했다는 것이다.
마인이 사로잡혔다는 이유로 자살을 해? 고문도 하지 않았는데 괜히 죽어?
누가 봐도 의심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 벌어졌다.
“이제는 개나 소나 마음만 먹으면 들락거리는 곳이 되었네.”
흠화가 밀마를 보면서 못마땅한 투로 말했다.
팽효기가 전달해 준 밀마는 팽가촌의 추락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씁쓸했다.
“루주는?”
팽가연은 아까부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언제나 눈길이 닿는 곳에 루주가 있었는데, 오늘은 없다. 특별히 갈 곳도 없는데, 없다.
“글쎄요? 아까부터 보이지 않던데…….”
취취가 말끝을 흐렸다.
그날, 그러니까 루주와 일장격돌을 벌인 그 날 이후로, 팽가연은 유독 루주에게 신경을 쏟는다.
주설언과 루주가 다정하게 식사하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본다.
운공 중인 루주를 쳐다보다가 갑자기 옅은 한숨을 쉬기도 한다.
말을 해도 대꾸가 없어서 고개를 들어 쳐다보면 엉뚱한 곳을 쳐다보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눈길을 따라가 보면 그 끝에는 언제나 루주가 존재했다.
루주를 지켜보는 날이 많다.
싸움에서 졌기 때문에?
호승심(好勝心)은 절대 아니다. 그날 이후로, 무공을 제대로 수련한 적도 없다. 왜 무공 수련을 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혼원벽력신공은 마음의 무공이라는 말만 한다.
마음이든 손가락이든 움직여야 발전하는 거 아닌가.
그런 눈길쯤은 무신경하게 흘려 넘길 수 있다.
정작 신경 거슬리는 것은 힘이 빠져버린 눈동자다.
생기를 잃어버린 눈동자에 고독이 쌓인다. 외롭고 쓸쓸한 기운이 넘친다.
아주 좋지 않은 징조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팽가촌에 마인이 침입했다. 의문사로 여겨지는 죽음을 당했다. 내부 공범이 의심되는 상황이지 않은가. 가모의 수족이 묶인 상태에서 벌어진 일이니 제삼자가 있다는 결론이다. 이처럼 중대한 일이 벌어졌는데 겨우 하는 말이 루주가 어디 있냐는 물음이다.
어떤 때 보면 출문한 이유조차 잊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때도 있다.
그만큼 팽가연은 위태로워 보인다.
“취취, 저 여자와 친해봐.”
그녀가 주설언을 턱으로 가리켰다.
“저 여자하고요? 왜요?”
“도대체 루주가 기다리는 게 뭔지 그것 좀 알아봐. 언제까지 이렇게 손 놓고 기다릴 수는 없잖아.”
“아! 예. 그거라면 걱정 마세요. 제가 무슨 수를 써서든 꼭 알아내고 말게요.”
취취가 환히 웃으면서 말했다.
괜한 걱정을 했나? 아씨의 마음속에는 오직 하북 팽가에 대한 염려뿐인 것을.
그 시간, 루주는 홍독사와 마주 앉았다.
“저… 이런 말씀 드리기는 그렇지만…… 혹 뒤를 밟히신 건 아닌지…….”
“걱정 마.”
“아! 물론 걱정은 안 합니다만 혹시나 해서. 세상에 불여튼튼이라는 말도 있잖습니까. 하하! 거 십간조도 그렇고 백인대도 그렇고 이름만 들어도 소름이 쫙 끼치는 놈들이라. 하하!”
홍독사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루주는 술잔을 들어 단숨에 마셨다.
오늘은 아무래도 술 좀 취해야 할 것 같다. 아니, 조금 취하는 정도가 아니라 많이 취해야 할 것 같다. 너무 많이 취해서 이성을 잃어버리면 조금 나을 것 같다.
탁!
루주가 술잔을 거칠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시간 없어. 읊어.”
“헤헤! 그럼…… 예, 그러니까 월륜마가 들어온 것은 아실 테고…… 팔부중신(八部衆神), 만초광마(萬草狂魔)…… 이런 놈들은 마도 쪽 놈들이고요. 여의환승(如意歡僧), 일수낙의(一手諾意), 미염공자(美髥公子). 이쪽은 아시다시피 그런 놈들이고.”
홍독사가 사마요(邪魔妖)의 인물들을 차례로 열거해 나갔다.
루주는 무려 이십여 명에 가까운 명호를 들었다.
사악한 놈, 마두, 인간쓰레기, 잡종…… 온갖 인간 벌레들의 명호가 거론되었다.
홍독사의 입에서 명호가 거론될 때마다 루주는 술을 들이켰다.
이들 모두 어미를 안다. 보통으로 아는 사이가 아니라 아주 깊은 관계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부부사이라고 우겨대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삶을 공유했던 자들이다.
그들이 어미의 소식을 듣고 하북으로 몰려왔다.
그러고 보면 어미도 참 대단한 여인이지 않은가.
어느 사내에게나 지나간 여인 한두 명쯤 있다. 좋은 추억이기도 하지만 나쁜 추억일 때도 있다. 그게 어떤 경우이든 마음속에 묻어놓고 뒤돌아보지 않는다.
지나간 여인을 회상하느니 현재의 여인에게 충실한 게 낫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십여 명에 이르는 사내들이 만사 제쳐놓고 하북으로 몰려왔다.
활동 기반도 있을 터이고, 가정도 꾸몄을 것이고, 어떤 자는 일파의 지존이 된 자도 있지만 모든 걸 버리고 하북 팽가의 원수가 될 지도 모를 자리를 찾아왔다.
그들 모두 죽음을 무릅쓰고 온 것이다.
정말 대단하다. 어떤 여인이 사내들로 하여금 이런 행동을 하게 만들 수 있단 말인가.
한 잔, 두 잔, 석 잔…… 술이 거듭되면서 루주의 얼굴도 붉게 물들어갔다.
그들이 절염색녀의 존재를 확신하고 하북으로 몰려든 데는 홍독사의 역할도 컸다. 아니, 홍독사의 역할이라기보다는 하오문(下午門)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