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n Swordsman RAW novel - Chapter 93
93
하북 하오문은 천요루주의 덕을 많이 보았다.
천요루라는 기루가 하북의 명소가 되었을 때, 수많은 은자를 가마니로 쓸어 모을 때, 루주는 하오문의 부탁을 한 번도 거절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들이 필요하다는 금액을 선뜻 내놓았다.
하지만 이번에 하오문이 그를 도와준 것은 그가 과거에 많은 은자를 내놓았기 때문이 아니다.
루주는 기녀를 아꼈다.
기녀를 돈벌이의 수단으로 쓰지 않고 진실로 아꼈다. 술판에 굴리면 당장 돈이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감기 몸살 같은 자잘한 병만 걸려도 쉬게 했다.
기녀들의 여건이 조금 좋아진 것에 불과할까?
세상 사람들은 모르는 일이지만…… 천요루 기녀들 중 적지 않은 기녀가 기적에서 이름을 뺐다.
천요루주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그들의 새 삶은 요원했을 것이다.
하오문은 이런 루주의 노력을 가상하게 여겨서 특별히 이번 일에 발 벗고 나서주었다.
과거 중원을 떨쳐 울리던 여녀 중에 요녀, 절염색녀가 어찌 된 연유인지 팽가촌 가모가 되어 있다.
이런 소문이 은근히 기루에서 기루로 번져갔다.
많은 사람이 알 필요는 없다. 무림에 소문을 낼 필요도 없다. 기녀들이 귓속말만 하면 된다. 그러면 기녀들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이런 자들의 귀에도 들어간다.
하북에 이상한 자들이 들이닥치기 시작한 것은 사총 때문이 아니다. 쌍겸구악 때문도 아니다. 팽가주가 가주직을 던져버린 것은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루주가 말했다.
“놈들은 지금 어디에 있어?”
“그놈들의 소재야 환히 파악하고 있지만… 헤헤!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도대체 이런 일을 벌인 까닭이 뭡니까? 팽가촌을 골탕 먹이는 수법치고는 치졸하고…….”
“홍독사.”
“…….”
홍독사가 입을 꾹 닫았다.
루주의 눈꼬리가 위로 떠지기 시작했다. 루주가 성질을 내고 있다는 증거다.
“그럼 한 가지만 확실히 짚고…… 정말 이번 일을 마지막으로 저희와는 인연을 끊는 건지…….”
“천요루에 발길도 들여놓지 않겠다.”
“헤헤! 그러시다면.”
홍독사가 서랍을 열고 종이 두루마리를 꺼냈다.
“여기 놈들의 소재가 다 적혀 있습죠. 오늘 아침 상황까지는 소상히 적어놨는데.”
“홍독사, 고맙다.”
루주는 종이두루마리를 들고 일어섰다.
“그럼 이제 저희와는…….”
“돌아가는 대로 후원을 비워주지. 십간조도 백인대도 너흴 건드리는 일은 없을 거야. 그리고…… 도와줘서 정말 고맙다. 빈말이 아니라 진심이야.”
“헤헤! 나도 뭐 얻은 게 많으니까.”
홍독사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어미가 팽가촌에 잠입해 있는 이유!
루주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현재 어미의 입지는 굉장히 이상해졌다. 팽가촌에서 지금도 그녀를 성녀라고 보는 사람은 없다. 대신, 사총과의 연관성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녀는 신체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연금 상태다.
그런데도 탈출을 시도하지 않는다.
팽가주와의 인연을 당장 끊고 빠져나오거나 외인과 연통을 시도할 줄 알았는데…… 어미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다. 마치 팽가촌을 벗어나서는 살 길이 없다는 듯 붙박였다.
팽가촌에 미련이 남았을 리는 없다. 팽가주를 진심으로 사랑한 것도 아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칠촌음화는 가모의 명령을 거역하고 루주를 죽이려고 했다.
가모는 검치의 무공을 원한다. 십검을 원한다. 천하제일 검공의 구결을 원한다.
칠촌음화는 그런 구결보다도 가모가 팽가촌에 머물러 있는 이유가 더 크다고 봤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그에게 비도를 날릴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런 행동을 하면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
루주를 죽였으면 어찌 되었을까?
그는 어미로부터 버림받는다. 절염색녀의 육신을 안을 수 없다. 손목조차도 잡을 수 없다. 절염색녀에게 중독된 사내가 색(色)에 대해서 버림받는다.
모르긴 해도 지옥보다도 못한 삶이 될 게다.
그것은 소문만 듣고도 하북 땅으로 몰려든 이십여 명의 거마효웅들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칠촌음화는 그런 버림까지도 감수하면서 어미의 명령을 어겼다.
도대체 팽가촌에 어미가 노릴 만한 것이 무엇인가. 어떤 보물이 있는 것인가.
하북 팽가의 무공은 아니다.
혼원벽력신공이 가공하지만, 어미의 무공 또한 절정에 이른 자가 거의 없을 정도로 지고하다. 자신에게 뛰어난 절공이 있는데, 그걸 완성하지 않고 남의 무공을 탐낸다는 건…… 이런 미련한 행동은 바보도 하지 않는다.
보물은 더욱 없다.
하북 팽가는 보물을 수집하지 않는다.
금붙이 같은 것은 신경도 쓰지 않고, 보옥이나 패물도 필요 없는 신외지물(身外之物)로 여긴다.
하북 팽가에서 보물 중의 보물이라는 게 팽가연이 지녔던 보도 정도다. 그것도 먼저 싸움에서 산산조각 났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어미를 유혹할 만한 무엇이 없다.
그렇다면…… 사총이다.
실제로 사총의 인물들이 어미를 도왔다. 쌍겸구악은 사총의 충실한 개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 부분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총을 위해서는 기꺼이 죽음도 감수한다.
그런 사람들이 어미를 도운 이유가 무엇 때문이겠나.
어미가 하는 일이 사총에도 도움이 된다는 뜻이다. 즉, 사총을 은둔에서 깨어나게 만드는 아주 강력한 무엇인가가 팽가촌에 있다. 그리고 그 열쇠는…… 팽가주가 쥐고 있다.
어미는 임신을 했었다.
그 나이에…… 그 늦은 나이에…… 몸매를 생명보다 더 아끼는 어미가 아이를 갖는 수고도 아끼지 않았다.
팽가주의 마음을 틀어쥐려고 한 것이다.
열쇠는 팽가주에게 있다.
어미가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것이 팽가주에게 있다. 팽가주의 마음에 달려 있다. 가주가 어떤 장소를 알고 있을지도 모르고, 어떤 영약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고, 어떤 병기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가주는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이라면 벌써 어미의 손에 쥐어졌다. 알고 있는 것,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 그러면서도 함부로 발설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 어미를 더욱더 자극해야 한다. 지금 당장 움직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도록 몰아붙여야 한다. 팽가주가 십족령으로 어미의 발을 붙잡고 있느니, 발밑에 끓는 물을 붓기만 하면 된다.
그것이 어미의 옛 사내들이다.
이제 어미는 선택해야 한다.
지금처럼 죽어서도 팽가촌의 귀신이 되겠다는 식의 눈물 섞인 가식은 통하지 않는다.
절염색녀의 본색이 드러나기 전에 행동해야 할 게다.
팽가촌이 바보가 아닌 이상 이미 가모의 정체를 알고 있다고 보는 편이 낫겠지만.
어쨌든 이제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상황은 통하지 않게 되었다. 수많은 사내들이 달려들면서 절염색녀를 찾고 있으니 어떻게든 반응을 해야 할 게다.
‘사총과 연관된 일이라면…… 아주 위험한 도박을 한 셈. 도대체 어쩌시려고…… 어떻게 사시려고 이렇게 끊임없이 일을 벌이시는 건지. 차라리 팽가주를 사랑해서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 하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면 이해했을 텐데.’
루주는 술기운이 올라오는 것을 느끼면서 휘적휘적 걸었다.
3
‘기회!’
병조 수장은 더없이 완벽한 기회를 잡았다.
루주는 방심했다. 술도 마셨다. 적당하게 마신 게 아니라 제대로 걷지도 못할 정도로 만취했다.
저녁도 아니고 백주대낮에 술 취해서 흐느적거린다.
슥!
턱짓으로 루주를 가리켰다.
그러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한 무더기의 살수들이 신형을 쏘아냈다.
스읏! 번쩍!
루주의 머리에 일검이 떨어졌다.
빠르기는 뇌성이 후려친 것처럼 번쩍이는 검의 흐름밖에 보이지 않는다. 검의 성질은 은밀하고 부드러워서 낙엽 한 잎이 하늘하늘 떨어지는 것 같다.
빠르면서도 부드럽다.
검기(劍氣)라든가 예기(銳氣), 살기(殺氣) 등 검이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기운을 죽여 버린 절정의 살인검이다.
슈웃!
독 묻은 강침이 루주의 등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이번 공격도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강침이 허공을 날아오는데, 일절 파공음이 들리지 않는다. 허공에서 물체를 떨어뜨리려도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법인데, 강침은 그저 공간에서 공간으로 이동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다. 강침의 바로 뒤를 이어서 쇠꼬챙이처럼 가느다란 세검(細劍)이 쏘아졌다.
술 취해서 휘청거리던 루주가 뒤돌아섰다. 그 순간,
스읏!
루주가 뒤돌아서기를 기다렸다는 듯 돌아선 그의 등을 노리고 검광이 터졌다.
한 가닥, 두 가닥, 세 가닥!
각기 다른 방향에서 검 세 개가 요혈을 노리며 달려들었다.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은자지검(隱者之劍)이 존재한다.
어느 은자지검이나 제일 먼저 만지는 것은 살기다. 일단 살기부터 빼내야 한다.
풋내기 살수들은 검에서 살기만 빼내면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한다. 은자지검이 완성되었다, 완벽한 은자검을 지녔다고 자부한다. 그러다가 죽는다.
은자지검에서 중요한 것은 살기가 아니다.
인간이 표출할 수 있는 기운은 인간이 거둘 수 있다. 살기도 그러한 기운 중 하나로 수련만 하면 얼마든지 거둬낸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병기가 지닌 물체의 속성이다.
쇠는 철기(鐵氣)를 띈다. 동(銅)은 동 특유의 기운을 흘린다.
보통사람은 감각이 여의치 않아서 감지하지 못하는 기운이겠지만 무인은 정확히 읽어낸다.
아니, 보통사람들도 일상생활 속에서 흔하게 감지한다. 다만 자신이 감지한 것조차 의식하지 않고 무심히 흘려버리기 때문에 감지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할 뿐이다.
의식을 깨워보라.
명확한 의식을 가지고 하루만 지내보라.
부엌칼 같은 쇠붙이에서는 쇠의 기운이, 목기(木器) 같은 나무에서는 나무의 기운이 포도송이에서 포도가 떨어지듯 알알이 부딪쳐 오는 것을 느낄 것이다.
이런 사물이 지닌 속성까지 완벽하게 지워내야만 비로소 은자지검이 완성된다.
그들의 검은 이런 검이다.
살기 같은 것은 오감을 총동원하여 찾으려고 해도 느껴지지 않는다. 물체가 흘러오는데 바람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런 느낌도 주지 않는다.
루주가 말했다.
“울고자 하는데 뺨을 때리는가.”
번쩍!
등 뒤에 매고 있던 목검 네 자루가 전후좌우를 휩쓸었다.
까앙! 깡!
제일 먼저 강침 한 무더기가 힘을 잃고 떨어졌다. 머리에 내리치던 검도 산산조각이 났다. 둥 뒤를 노리면서 달려들던 검들이 힘을 잃고 무너졌다.
“헉!”
살수들이 경악성을 토해냈다.
루주의 한 수, 그 한 수에 사방을 에워싸던 병기들이 녹아버렸다. 산산조각이 나서 허공중에 흩뿌려졌다. 쇠로 만든 병기들이 모래알처럼 조각나서 흩어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두 눈을 뜨고 있었어도 믿을 수 없다.
쒜엑!
이번에는 좌우 허리에 꽂혀 있던 목검이 움직였다.
머리 위로 한 자루!
번쩍!
병기를 잃고 막 땅에 발을 디디려던 살수가 꿈틀거렸다.
목검이 옆구리를 뚫고 들어갔다. 그리고 명치 부근에서 우뚝 멈춰 세워졌다.
루주의 왼손도 움직였다.
왼손에 들린 목검은 세검을 들고 달려들던 살수의 정수리에 내리꽂혔다.
머리가 흩뿌려진다.
일반적으로 목검에 머리를 맞으면 묵사발처럼 으깨지는 것이 보통인데, 이건 아예…… 머릿속에 화약을 집어넣고 폭발시킨 것처럼 쾅! 흩어져버린다.
놀라운 것은 십검의 위력뿐만이 아니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놀라운 것은 빠름이다.
살수들이 일수를 내뻗을 동안, 그는 무려 사검을 썼다. 또 거기서 그치지 않고 살수들이 부지불식간에 깜짝 놀라서 입을 쩍 벌리는 동안 또 한 번의 검을 쏟아냈다.
두 명이 찰나 만에 목숨을 잃었다.
그다음으로 뭔가를 깨닫듯이 퍼뜩 느껴진 것은 아니었는데, 죽음이 일어나고 보니 놀라운 게 있다.
루주의 왼손은 위에서 아래로 떨어졌다. 오른손은 우하에서 좌상으로 비켜 올렸다.
한몸의 양손이 전혀 다른 곳에서 다른 곳으로 흘렀다.
실제로 시전해 보면 이 두 가지의 행동 흐름이 얼마나 기도 안 차는 움직임인지 알 것이다.
일단 진기를 쏟아 붓기 힘들다. 일도양단(一刀兩斷) 같은 절정의 힘을 쏟아 부을 수 없다. 무희들이 춤을 추듯이 아름다움을 그려내는 느릿한 움직임이라면 몰라도 싸움에서 사람을 살상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움직임이다.
그런 움직임으로 살수 두 명을 죽였다.
나머지 세 명의 운명도 별반 다르지 않다. 찰나라는 차이는 있어도 죽음을 거스를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