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100th Regression of the Max-Level Player RAW novel - Chapter 388
만렙 플레이어의 100번째 회귀 후일담 12화
12. 시간의 신
‘역시 여기로 올 줄 알았어.’
호스트를 처치하면 다른 호스트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류민은 그런 가정으로 몬태나주의 호스트를 처리한 뒤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도 그 예상은 적중했다.
다만.
‘호스트가… 아니잖아?’
놈의 생각을 읽어보니 호스트가 아닌 ‘시드’라는 상위종임을 알 수 있었다.
생긴 건 비슷하지만 인간의 생체 에너지만을 위해 움직이는 호스트와는 달랐다.
‘생각이 단순하지 않고 복잡하다. 스스로 이름을 지을 정도로 자아가 있기도 하고.’
현재 눈앞에 있는 시드의 이름은 볼루아크.
데오란트의 명을 받고 세계선을 붕괴시키기 위해 나타난 파멸의 씨앗이었다.
‘이제 좀 알겠군. 호스트와 시드의 관계를.’
호스트 위엔 시드라는 고등체가 있었다.
시드의 목적은 단순했다.
호스트가 인간의 생체 에너지를 모으면 일정량이 됐을 때 자신들이 나서서 수확한다.
말하자면 열심히 꿀을 모으는 꿀벌이 호스트였고, 그 꿀벌을 잡아먹는 말벌이 시드였다.
둘의 공통점은 데오란트의 명을 받고 세계선을 붕괴시키는 작업을 진행 중이라는 점.
자세한 붕괴 방법도 알 수 있었다.
‘호스트를 흡수한 시드는 점점 성장을 거듭하고 세계선을 붕괴할 정도의 막대한 에너지를 얻게 된다.’
그만한 에너지를 모으기까지 필요한 인간의 수는 수십억.
즉, 세계선 붕괴는 인간이 거의 멸종한 뒤에 이뤄지는 셈이었다.
결국 붕괴의 중점이 되는 존재는 호스트가 아닌 시드.
‘시드가 없으면 세계선 붕괴는 이뤄지지 않아. 그렇다고 호스트도 방치하고 있을 순 없지만.’
짧은 시간 내에 볼루아크의 생각을 통해 유의미한 정보를 얻었다.
놈들이 호스트와 달리 자아를 가졌고 어느 정도 지능이 있다는 것도.
‘그래 봐야 내 손바닥 안이지만.’
오히려 그 지능이 제 목을 조여올 수 있다.
지금도 호스트를 흡수하기 위해 나타났다가 자신에게 걸리지 않았는가?
시드 볼루아크가 눈을 부라리며 물었다.
“너 누구야?”
“나에 대해선 이미 알 텐데?”
“설마 호스트를 사냥하고 다닌다는 놈이 바로…….”
“그래. 내가 바로 검은 낫이다.”
* * *
‘뭐? 저놈이?’
볼루아크는 검은 낫이라 밝힌 인간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아무리 봐도 특별한 점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평범한 인간으로 보일 따름.
다만 어깨에 걸치고 있는 낫이 심상치 않아 보이긴 했다.
낫을 들고 다닌다는 점도 듣던 것과 일치하고.
‘정말로 저 녀석이 호스트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눈앞에 증거가 너무도 뚜렷하다.
죽어버린 호스트의 시신에 눈길이 간다.
“어디로 한눈파는 거야? 저거 흡수하고 싶어서 그래?”
“뭐?”
볼루아크는 놀라 물었다가 급히 표정을 갈무리했다.
속마음을 들키자, 저도 모르게 감정을 드러냈다.
‘저 자식이 어떻게 알았지? 내가 호스트를 흡수하고 싶어 하는걸?’
아니, 애초에 호스트를 흡수한다는 발상은 어떻게 한 걸까?
‘뭐가 뭔지 모르겠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놈을 이 자리에서 죽여야 한다는 거다.’
스릉-
볼루아크가 한쪽 팔을 검처럼 날카롭게 만들었다.
저 건방진 인간을 빠르게 처치하고 생체 에너지를 흡수하리라.
지금 죽어 있는 호스트의 시신도 흡수하고.
그러나 상대에게서 긴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싸워보려고? 안 그래도 얼마나 강한지 테스트하고 싶었는데 잘됐네.”
자신을 도발했다.
물론 어쭙잖은 도발에 넘어갈 정도로 자신은 녹록지 않다.
“건방진 인간 같으니. 이 몸의 감정을 흔들어 방심을 끌어내려는 수작인가 본데, 어림도 없…….”
말하던 순간 세상이 검게 물들었다.
별안간 밤이 찾아왔나 싶지만, 아니다.
세상과 완전히 단절됐다.
이윽고 볼루아크는 자신이 어디에 갇혔는지 알아차렸다.
“네, 네놈이 어떻게 시공의 결계를……?”
“그건 알 거 없고.”
상대가 손가락을 까닥였다.
“먼저 들어와 봐. 선공은 양보할게.”
“이 찢어 죽일 인간 놈이!”
기어코 화를 못 참고 볼루아크가 달려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거리를 좁힌 뒤 검은 칼날을 들이밀었다.
그때까지도 인간은 아무런 대응도 못 하고 목석처럼 서 있을 따름이었다.
‘끝났다!’
라고 생각한 순간.
카앙!
칼날이 어둠의 벽에 막혔다.
“스피드는 합격. 호스트보다 훨씬 낫군.”
‘이게 막혀?’
검은 액체로 변형한 자신의 칼은 쇳덩이도 두부처럼 자를 만큼의 파괴력과 절삭력을 자랑한다.
하지만 자랑이 무색하게 너무도 쉽게 막혀 버렸다.
“선공했으니 이제 내 차례지?”
검은 낫이 검붉은 낫을 휘둘렀다.
후웅!
“윽!”
속도가 상상 이상으로 빠르다.
몇 번 피하다가 도저히 피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자.
카아앙!
칼날로 막아낼 수밖에 없었다.
‘크윽! 무슨 힘이 이렇게나……!’
전해진 충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인간의 힘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
“한 번 막아놓고 뭘 놀라? 좀 더 막아보라고.”
류민의 낫이 춤을 췄다.
그때마다 볼루아크는 막아내기에 급급했다.
캉캉캉캉캉-!
“으, 으윽!”
어찌어찌 공격을 막아내곤 있지만 당혹감을 숨길 수 없었다.
‘어, 어떻게 된 거냐? 아무리 플레이어라도 이런 속도와 힘을 낼 순 없을 텐데…….’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여긴 볼루아크가 훌쩍 뒤로 점프해 거리를 벌렸다.
잠깐 숨 고를 틈이 필요했다.
“뭐야? 벌써 지친 거야?”
“닥쳐라, 인간.”
볼루아크는 몸을 웅크리며 기회를 엿봤다.
‘놈이 다가오는 순간, 기습적으로 검은 비를 뿌린다.’
볼루아크는 놈과 자신 사이에 가상의 선을 만들었다.
저 선을 넘으면 비를 퍼트려 죽이겠다고.
이윽고 상대가 사정거리 내로 들어오자.
‘지금이다!’
날다람쥐처럼 몸을 펼치며 죽음의 액체를 뿌렸다.
파파파파파팍!
검은 비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결코 피할 공간도, 반응할 시간도 없었다.
자신이 보기에는 말이다.
‘사라졌어?’
“여기야.”
“헉!”
위에서 들린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든 순간.
서걱!
“끄아악!”
한쪽 팔이 잘리며 생소한 고통이 느껴졌다.
“스피드는 좋은데 내구력은 별로네. 불합격.”
“큭, 이, 이놈이!”
잘린 단면에서 액체를 뿜어내 떨어진 팔을 주웠다.
팔이 달라붙으며 원상복구되자 지켜보던 검은 낫이 미소 지었다.
“재생력은 합격. 그런데 고통은 느낀다니, 아이러니하군.”
“닥치라고 했지!!!”
호기롭게 외치며 공격했으나 상황은 정반대로 흘러갔다.
“쿨럭!”
연신 검은 액체를 토해내며 쓰러지는 건 볼루아크였으니까.
“넌 절대로 못 이겨. 내가 풀어주지 않는 한 시공의 틈새에서 나갈 수도 없고.”
“크윽…… 어떻게 인간이 그런 힘을…….”
“내가 아직도 평범한 인간으로 보여?”
“…….”
볼루아크는 입을 다물었다.
반박의 여지가 없다.
“어떻게? 더 할 거야?”
“…….”
“하고 싶으면 더 덤벼보든가. 나야 하루 종일도 상대해 줄 수 있으니까.”
솔직한 말로 볼루아크는 더 덤빌 생각이 없었다.
무슨 짓을 해도 이길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다.
‘녀석과 나의 격차는 하늘과 땅 차이. 내가 이길 가능성은 제로다.’
가만히 죽음을 기다리는 일밖에는 할 일이 없다.
하지만.
“…….”
상대는 자신을 죽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있었다면 주저리주저리 떠들기 전에 공격 한 번이라도 더 했을 테니까.
‘이유가 뭐지?’
잘은 모르겠지만 나쁘지 않은 상황이다.
‘이 기회를 틈타면…… 가능성이 생길지도.’
고작 한 방울.
자신의 생체조직 한 방울만 떼어내 놈에게 붙일 수만 있다면?
생체 에너지를 흡수하여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다.
‘놈은 그래 봐야 인간. 딱 한 번의 기회만 주어진다면 죽이는 건 어렵지 않아.’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게 두뇌 아니겠는가?
볼루아크는 검은 낫에게 말을 걸었다.
방심을 유도하다가 기습을 먹일 작정이었다.
“너 대체 정체가 뭐냐?”
“검은 낫이라는 건 너도 들어서 알고 있을 텐데?”
“검은 낫? 그게 이름이냐? 특이하군.”
“모르는 척하지 마. 내가 플레이어라는 건 아르키자르에게 들어서 알고 있을 텐데? 그리고 생체조직으로 기회를 엿보려는 것까지도.”
“뭐……?”
시작도 하기 전에 계획이 들키고 말았다.
상대는 눈치채고 있었다.
자신이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지.
하지만 가장 놀라운 점은 녀석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왔다는 점이었다.
“어, 어떻게 아르키자르를 아는 거지?”
“어떻게 아는 거 같아?”
류민은 일부러 퀴즈를 내듯 반문했다.
상대가 의심하고 상상력을 발휘하게끔.
“나는 네가 호스트를 찾으러 올 줄 알고 있었어. 볼루아크.”
“내, 내 이름까지 안다고?”
“과연 어떻게 미리 알고 있었던 걸까?”
“서, 설마……!”
볼루아크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내부에 배신자가 있는 거야. 내가 이쪽으로 올 거라는 정보를 흘린 거라고!’
가만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시체를 수거하러 왔더니 검은 낫이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나타났다.
검은 낫이 어떻게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을까?
자신은 물론 아르키자르의 이름은 또 어디서 들은 걸까?
‘이쪽에서 정보가 새어 나간 게 틀림없어!’
시드 중에 누군가가 검은 낫에게 정보를 흘렸다.
그런 예상은 적중했다.
검은 낫이 보란 듯이 밝혔으니까.
다만 그의 입에서 나온 정보는 꽤나 충격적이었다.
“아르키자르가 나에게 정보를 줬지. 볼루아크를 유인해 낼 테니 제거해 달라고.”
“뭐……?”
그 배신자가 아르키자르일 줄은 몰랐으니까.
“아르키자르가 경고했지? 미국의 호스트를 건들지 말라고. 그거 일부러 그런 거야.”
“……뭐?”
“경고하면 오히려 네가 먼저 의심하고 시체를 흡수하러 올 거라고 아르키자르가 예상했지. 그 예상은 역시나 맞아떨어졌고.”
“내가… 그놈한테 놀아났다고……?”
충격받은 볼루아크였지만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속마음을 읽은 류민이 정보의 우위를 이용해 그럴싸하게 스토리를 지어낸 것에 불과했다.
녀석으로서는 그 사실을 꿈에도 모르겠지만.
“아르키자르는 시드들을 제거하려고 한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시드를 없앨 작정이지.”
“대체 왜……?”
“세계선을 붕괴한다는 공을 혼자서만 가로채기 위해서다. 통솔자인 그에게 있어 다른 시드들은 경쟁자일 따름이지.”
“…….”
녀석이 시드들을 제거하려 한다니.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볼루아크의 바보 같은 표정에 류민은 속으로 웃었다.
‘거짓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군.’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통솔자에 이어 데오란트까지 언급했으니.
‘본디 그럴싸한 거짓말을 하려면 진실도 좀 섞어야 하는 법.’
류민이 설명했으나 그렇다고 볼루아크의 의문이 해소된 건 아니었다.
“나에게 사실대로 얘기하는 이유가 뭐지? 아니, 그보다 너 대체 정체가 뭐냐?”
“나?”
류민은 기다렸던 질문이었다는 듯 대답했다.
“나는 시간의 신이다.”
“시, 신……!?”
“호스트라는 이질적인 기운을 느끼고 이곳에 인간의 몸을 빌려 강림했지. 그러다가 우연히 아르키자르를 만났고 놈은 굴복했다.”
“굴복……?”
“나와 협력하기로 했다는 말이다. 녀석이 호스트의 위치를 제공하면 나는 시드를 제거해 주기로 했지. 하지만 이제는 갈아타려고 한다. 아르키자르가 아닌 너로.”
류민은 그리 말하며 볼루아크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에게 협력해라. 그러면 아르키자르에게 복수할 기회를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