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31st Piece Overturns the Board RAW novel - Chapter 139
제138화
‘미친 건가?’
김세현의 고개가 비스듬히 꺾였다.
신기한 것, 혹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맞닥뜨렸을 때 그의 버릇이었다.
지금 눈앞의 남자가 자신에게 빌어야 한다고 했다.
그저 농담 삼아 던진 말에 진지하게 반응한 것도 우스웠지만, 그 말이 어째서인지 김세현의 가슴에 와서 박혔다.
정말 꼭 빌어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것처럼.
‘네가 뭔데?’
자신의 거점 일리아에서 이만한 무시를 당해본 적 없던 김세현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빌어야 한다고? 야… 하, 미친 새끼….”
남자의 옆에 있던 여인이 더는 못 참겠는지 웃음을 터트렸다.
“큭… 푸흑흑… 야 세현아, 너 오늘 참으면 안 돼. 나까지 병나겠어.”
“이거 지금 당황해서 말이 잘 안 나오네? 나 방금 존나 무시당한 거 맞지?”
“어, 맞아. 내가 봤어.”
김세현은 주변을 둘러보며 누군가를 찾았다.
“씨발… 경수는? 아직이야?”
“아까 애들 보냈어, 거의 다 왔을 거야.”
사실 김세현은 이 무리의 대장이 아니었다. 그는 허우대는 멀쩡했지만, 무게 없이 행동하며 담이 작은 편이었다. 이 때문에 사회에 있을 때도 별다른 인정을 받지는 못했었다.
이 무리의 실질적인 대장은 장경수였다.
덩치도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큰 데다가 듬직한 어깨와 사악한 품성까지.
장경수는 무법을 동경하는 이들에겐 대장감으로 훌륭했다.
그런 장경수가 오고 있다.
그 말 한마디가 김세현의 가슴속에 있는 야수를 깨웠다.
‘죽인다.’
연달아 자신의 행동을 방해받자, 김세현은 화가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당혹스러웠다.
대체 어디서 떨어진 놈들이길래 이리 눈치가 없을까? 일리아에서 자신들의 악명을 못 들어본 것일까?
‘순례자는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무시하고… 저 새끼는 죽인다.’
이미, 이 도시 안에서 그들 패거리의 손에 목숨을 잃은 전이자가 여럿이었다. 한국의 사회였다면 살인 그 자체로 삶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썩게 됐겠지만, 이곳에서는 영주에게 주의만 받았을 뿐, 별다른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부터 그들은 더욱 잔인해지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폭력은 철저히 전이자들에게만 향했다. 겉으로는 판데아의 주민들과 잘 어우러지는 모습이었지만 속으로는 전이자들 위에 군림하려 했다.
실제로, 일리아에서 그들을 거스를 자들은 없었다.
‘…설마 그 녀석인가?’
며칠 전, 옆에 있는 유태림이 말했던 존재.
일리아에 들어온 수수께끼의 비공개가 저자인가 하는 의심.
‘300만 점이 넘었다는데….’
김세현과 유태림, 그리고 장경수는 얼마 전 모험 점수 220만 점을 넘겼다. 적어도 일리아 내에서라면 적수가 없었던 상황.
며칠 전에 나타났던 그 비공개만 아니라면 모두 제압이 가능했다.
거기다, 놈은 1명이고 자신들은 3명이었으니 준비만 한다면 설마 질까 싶기도 했고.
그런 김세현의 눈빛을 받은 유태림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걔.”
“확실해?”
“여자라는 소문이 있어, 쟤는 남자잖아. 안 보여?”
“그럼 됐네, 이 씨발놈은 왜 사람을 간 떨리게 해서….”
김세현이 잠시 고민한 사이, 차멜리가 강설에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괜히 저 때문에….”
“아닙니다. 물러나 계세요. 순례자들은 이 일에 나서지 마시길.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
위기의 순간에 나선 강설에게 아련한 눈빛을 보내는 차멜리. 뭔가 단단히 착각한 것 같지만 어쨌든 차멜리는 물러났고 강설은 눈앞의 김세현 일당에게 집중했다.
‘10명이 조금 넘네.’
숫자를 세는 데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그냥 시장에서 사 온 귤이 검은 봉투에 몇 개 들었나 확인해보는 느낌.
쒜에엑-!
뭔가가 강설을 향해 날아왔다.
팍-!
낚아챈 강설의 손이 살짝 떨릴 정도의 충격. 손바닥을 펴보니 그 안에 동전이 있었다.
강설이 의아한 눈으로 김세현을 쳐다보았다.
“노잣돈, 병신아. 상황 파악이 느리냐?”
“…….”
“생각이 바뀌었어. 너랑 쟤들… 그냥 사이좋게 뒤지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아.”
“다시 생각해라. 마지막 기회니까.”
“잘 안 들리는데?”
김세현의 기세가 변했다.
[쿨세현이 난도질을 사용합니다.]
[병기가 쉽게 살을 헤집어 놓습니다.]
[거친 상처를 유도합니다.]
[연달아 공격에 성공했을 시 일정 확률로 과다 출혈 상태에 빠트립니다.]
그가 신호도 없이 강설에게 파고들었다.
한 손에는 단도, 한 손에는 투갑을 낀 그는 접근했을 때 파괴적인 능력을 사용하는 직업으로 보였다.
‘일단 결투사는 아니고, 노상강도인가.’
자세와 능력, 그리고 행동 패턴을 보고 순식간에 직업을 유추한 강설.
그리고 그걸 바탕으로 상대가 다음에 사용할 능력을 예측했다.
“일단, 너부터 이 개새….”
“…치.”
[쿨세현이 날치 찌르기를 사용합니다.]
[날치 찌르기를 적중시키면 10초 동안 2초마다 무법을 획득합니다.]
김세현의 몸이 뒤틀리면서 단도가 춤췄다.
사선으로 상승하는 공격 패턴. 강설이 예측한 날치 찌르기가 맞았다.
“뒤져!”
강설의 목, 혹은 얼굴을 노리며 단검이 휘둘러졌다. 적중당하면 그대로 죽거나 혹은 살아도 산 게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때, 김세현의 동작이 우뚝 멈췄다.
“…어?”
강설의 손에서 뻗어 나온 또 다른 검붉은 손이 김세현의 움직임에서 핵심이 되는 오른쪽 어깨를 누르고 있었다.
“이게… 이… 이게….”
“김세현! 조심해!”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멈춘 김세현에게 유태림의 비명과 그녀의 도움보다 먼저 도착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단검을 꼬나쥔 자신의 손이었다.
“아, 안….”
강설의 질척한 검은 손이 김세현의 손을 낚아채 그대로 김세현의 반대편 어깨를 찔렀다.
푸지이익-!
“끄아아아아아아악!”
자신의 손이 자신을 공격하는 상황이라니.
김세현은 그 충격으로 바닥을 굴렀다.
“이 개새끼가!”
[태리미가 승리 확신을 사용합니다.]
[승부에 앞서 자신감을 가집니다.]
[높은 자신감이 전의를 상승시킵니다.]
“뒤졌어!”
[태리미가 승부! 를 사용합니다.]
[승부사의 승부가 발동했습니다.]
[정해진 영역 밖으로 도망칠 수 없습니다.]
[승부사는 영역 안에서 모든 능력치가 20% 상승합니다.]
[높은 전의 상태입니다.]
[추가로 모든 능력치가 10% 상승합니다.]
유태림은 이제껏, 승부를 발동한 상태에서 패배해 본 기억이 없었다. 그녀는 승부를 발동하며 강설의 측면으로 파고들었다.
“조….”
누군가의 외침.
그리고 들려온 파공음.
후웅…
‘뒤다!’
이미, 강설의 검은 손이 그녀의 뒤로 파고들었다.
턱-!
이변은 없었다.
여지없이 그 손에 붙잡힌 채로 차가운 돌바닥에 비스듬히 내리꽂혔다.
콰앙.
커헉…
그녀는 잠시 착각했었다.
그녀가 여태 승부에서 무패였던 건 그녀가 절대적으로 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길 만한 상대에게만 승부를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땅에 처박히는 소리는 제법 컸지만, 김세현보다는 부상이 덜했다.
아마, 상대의 마음이 약해졌기 때문이라 여겼다. 그녀도 눈치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상대는 압도적인 강자였고 이제는 살길을 모색해야 했다.
그 와중에 눈에 띈 것이 이런 약한 심성이라니, 파고들어야 했다.
하지만 이것 또한 그녀의 착각에 불과했다.
뚜두둑.
“꺄아아아아아악!”
유태림이 땅을 짚은 손 위로 강설의 장화가 얹어졌다. 소리와 통증으로 보아 골절이 분명했다.
유태림은 성대가 손상될 정도로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
유태림도, 김세현도 전투 속행 불가능.
한쪽 손이 뭉개진 유태림도 유태림이었지만, 김세현은 아직도 한쪽 손이 그의 어깨로 가 있었다.
“아, 안 떨어져… 이거 뭐야, 씨발….”
“누가… 누가 좀….”
김세현의 오른손에 끈적한 무언가가 남아서 아예 어깨에 붙은 단검에서 손을 떨어트리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것만으로도 기괴한 장면이었지만 눈물과 콧물 범벅이 된 채로 함께 바닥을 기어 다니는 유태림도 현장의 잔혹성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현장에서 그들을 도울 사람은 없었다.
10명에 달하는 패거리가 저마다의 이유를 가지고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태반은 강설의 검은 손에 붙잡혀 공중에 떠올랐다가 바닥에 내리 찍힌 자들이었다.
쿠우우웅!
으지직!
“끄아아악!”
오른팔이 부서진 남자, 발목이 돌아간 여자 등.
그나마 자비를 베풀어 죽이진 않았지만, 이후에 신관의 치유가 행해지더라도 후유증이 남을 만한 부상이었다.
“헉… 헉! 후욱… 씨발 비켜!”
기골이 장대한 사내가 수하들과 함께 현장에 난입했다.
겨울인데도 대낮부터 상의를 벗고 있는 남자는 그 상체가 온통 문신으로 가득했다.
족히 190은 넘어 보이는 키에 근육과 살집이 뒤섞인 덩치까지. 험상궂은 얼굴은 상황을 파악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게… 다 뭐야? 김세현, 이거 뭐야?”
“아파… 씨발… 도와… 도와줘… 경수야. 저, 저 새끼가….”
“…누가 이런 거야?”
“저, 저 새끼라고!”
“알았어.”
한눈에 보기에도 비슷한 느낌의 세 사람.
강설은 혹시 아우데닌의 커뮤니티에 한동안 떠돌던 일리아의 패악질 3인조의 이야기가 이들의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야. 너 뭐 되냐? 네가 지금 뭔 짓을 한 줄 알아?”
“꼭 알아야 하는 거면 알려주고.”
“이 새끼가 지금….”
그때, 갑자기 일어난 폭력 사태를 관망하던 관중 중 1명이 말했다.
“저, 저 사람 기억났다! 그 사람이잖아, 그….”
“누구? 누군데?”
“고행자잖아! 미궁 깬 사람!”
“고행자? 아우데닌에 있는 거 아니었어?”
“연합 들어간 거 아니야?”
고행자라는 이름이 흘러나오자 주변이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다.
애먼 사람의 불행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이제 사태의 향방이 어디로 흘러갈지에 대해서 떠들어댔다.
“고행자면… 연합 사람이겠네. 와… 쟤네 어떡하냐?”
“쟤네 그럼 지금 연합이랑 붙는 거야? 아무리 그래도 상대가 안 될 텐데….”
“이러면 연합이 일리아까지 발 걸치는 거 아니야?”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차 커졌다.
아무리 장경수가 흥분한 상태일지라도 연합이 뒤에 있다는 말에는 식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연합 개개인은 약했지만, 덩치로는 일리아의 그 어떤 조직도 아우데닌 연합과 게임이 되지 않았다.
장경수가 뒤돌아 김세현을 쳐다보았다.
“고행자? 너… 뭔 짓하고 돌아다니는 거야?”
“모, 몰랐어… 으윽… 유태림도 같이한 거야!”
“아파아아… 아파아….”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유태림, 아직도 손과 어깨가 딱 붙은 김세현까지.
장경수는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빌어먹을…. 그냥 김세현이 적당히 벌려 놓은 사고나 수습하면 될 줄 알았는데….’
재수가 아무리 없어도 하필, 이 근방에서 가장 이름 높은 모험가와 시비가 붙다니.
“경수야… 어, 어떡하지?”
“으으으으….”
장경수가 마침내 판단을 내렸다.
그는 강설의 앞으로 걸어갔다.
“붙으려나 봐!”
“쟤네 엿 됐다, 와….”
그리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 친구들이 사람을 잘못….”
“비키시길.”
“…예?”
“제가 볼일이 있는 건 저쪽입니다.”
“그게….”
강설이 장경수를 지나쳐 김세현에게 다가갔다.
“오, 오지 마….”
그는 넘어진 채로 발을 버둥거리며 뒤로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강설에게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빌게! 빌면 되잖아.”
“늦었어.”
“제발… 이렇게….”
강설은 김세현의 아까 전 대답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잘 안 들리는데?”
“누가! 누가 좀 도와줘… 누가, 이 미친 새끼 좀….”
김세현의 외침에는 아무도, 답이 없었다.
아까 전 조경택이 겪었던 상황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상황. 기이하게도, 강설은 그런 상황을 똑같이 연출했다.
“지금부터 네 이를 뽑을 거다. 이건 변하지 않아.”
“그러지 마… 경수야! 경수야, 이 새끼 죽여….”
으드득…
장경수는 상황을 지켜보기만 할 뿐, 이를 앙다문 채로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섣불리 행동을 취했다가 도리어 강설의 화를 더 돋울 것이라 판단해서였다.
‘그랬다간 다 죽는다….’
장경수는 그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강설의 숨소리마다 분노가 느껴졌다. 그를 거스를 그 어떠한 행동도 해서는 안 되었다.
힘은 더 큰 힘에 짓눌리는 법. 단순하리만치 확실한 세계의 순리였다.
“세현아, 참아라…. 죽기 싫으면….”
“뭐? 이… 야!”
강설은 김세현의 어깨를 잡고 그의 이 하나를 그대로 뽑아버렸다.
뻐억…
“끄… 끄아아악!”
“오늘, 일리아를 떠나라.”
“씨발… 시바알… 아파아….”
강설의 눈과 김세현의 눈이 마주했다. 어쩐지 처음과는 다른 시선들.
미궁에서 마주한 토키의 마지막 말이 강설에게 새로운 선택지를 연 것은 맞았다.
– 살아가는 동안 될 수 있으면 가끔은 선행을 하게.
이제는 조급함이 아닌, 선을 기조로 하여 한층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생긴 그.
하지만, 그 선함의 볕이 닿는 곳에 악인들의 자리는 없었다.
그의 눈이 지옥 불을 피웠다.
“다시 마주치면, 남은 이를 전부 뽑아주마.”
“…….”
“이제는 잘 들리겠지?”
그의 목소리가 수백 명이 모인 자리에 고독하게 울렸다. 그 목소리를 들은 자들은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 알았어. 그럴게.”
장경수가 친구들과 일행을 부축하며 쓸쓸히 자리를 떠났다.
조경택이 강설에게 다가왔다.
아까보다 한결 편안해 보이는 게, 순례자들의 치유를 받아서인 것 같았다.
“형….”
“경택아.”
“고마워요, 형… 진짜… 진짜 억울하고 화났었는데….”
차멜리가 다가와 말했다.
“형제님들, 회포는 나중에 푸시고 다치신 분께서는 안정을 취해야 하니 순례자들과 함께 움직이시죠.”
“아… 예.”
“그리고 스노우맨 님은 일단 저와 바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약속에 늦었거든요.”
“경택아, 갔다 와서 보자.”
“네? 네, 형.”
그렇게 조경택 일행을 순례자들과 함께 떠나보내고 강설과 차멜리는 약속 장소로 찾아갔다.
약속 장소는 그리 멀리 있지 않았고 사건이 일어난 광장에서도 보이는 자리에 있는 건물이었다.
“만약에 너무 늦어서 떠나셨으… 저기! 저기 계시네요.”
창가 쪽으로 고개를 향한 채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사람.
상대는 등에 엄청나게 커다란 활을 메고 있었고 후드 안쪽으로는 긴 머리가 슬쩍 보였다.
차멜리가 상대에게 다가갔다.
“저, 자매님….”
“습… 네, 네?”
“저희가 사정이 생겨서 조금 늦었네요. 죄송해요.”
상대는 차멜리의 사과에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돌려 강설을 쳐다보았다.
강설은 피하지 않고 상대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 후로 찰나와도 같은 시간이 흐르고.
여인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밤까마귀?”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