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31st Piece Overturns the Board RAW novel - Chapter 288
제287화
유화.
그녀는 날붙이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것들이 발산하는 날카로움을, 부드러움을.
유화는 강설이 육성했던 검객 중 가장 강한 검객은 아니었으나, 가장 아름다운 검객이었다.
검에 대한 그녀의 이해는 그것이 단순히 살육을 위한 무기가 아닌, 그 너머의 무언가에 도달해 있었다.
“웃기지 마라아아아!”
팔 한 짝을 통째로 잃은 구렁이 귀신.
아직 네 개의 팔이나 남아 있었지만 이미 균형이 깨졌다.
네 개의 팔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끝났군. 멍청한 녀석, 그 이름이 아깝구나. 더 즐기고 싶었건만.”
두억시니가 중얼거리자, 설홍의 몸이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스르르륵…
[설홍이 칼의 노래 : 꿈 베기를 사용합니다.]
[참격의 공격 범위가 크게 증가하며 절삭에 실패해도 검의 내구력이 감소하지 않습니다.]
촤아아아아악…
순식간에 귀신의 모든 팔이 잘려 나갔다.
팔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설홍이 그 모든 검을 불러왔다.
“어… 어어어어….”
팔을 모두 잃은 귀신은 아연실색하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 눈에 절망이 비쳤다.
스으으으…
설홍의 주변으로 귀신이 휘두르던 모든 검이 떠올랐다.
강설은 설홍의 모습을 보고 아주 오래전 일을 떠올렸다. 천상에서 칼의 무희 유화의 진로를 결정하던 당시를.
– 아깝지 않아?
– 뭐가 말이에요?
– 유화 말이야. 지금 이 정도까지 육성했잖아. 근데 용궁으로 들어가는 건 좀… 그냥 계속 떠돌게 하면 분명히….
– 글쎄요….
– 응?
– 그건 제 생각일 뿐이니까요. 아무래도 이편이 훨씬 더…
강설은 그의 바람을 말에게 강요하지 않으려 했다. 말이 원하는 것이, 그가 원하는 것이니.
– 유화가 행복해 보이네요.
유화의 바람은 어디까지 닿게 되는 것인가.
‘…저건!’
[설홍이 절기 : 촌극을 사용합니다.]
[칼의 노래 : 인연에 영향을 받는 모든 날붙이가 자유의지를 가지며 일시에 공격을 퍼붓습니다.]
[이때, 공격 속도가 50% 증가하며 공격을 가할 때마다 날붙이의 내구력이 2%씩 소모됩니다.]
[20%의 내구력이 소모될 때까지 계속됩니다.]
허공에 떠올랐던 다섯 자루의 검이 귀신의 육체를 가운데 두고 난도질을 시작했다.
푸슉!
푸슈슈슈슈슈슉!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는 검.
순식간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고깃덩이로 변한 무언가가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초월 급에 육박하던 강자가, 유화의 깨달음을 얻은 설홍에게 무참히 패배했다.
짝…
짝…
휘장 너머의 두억시니가 손뼉을 쳤다.
“제법이야, 제법. 이 정도면 걸어볼 만하겠어.”
스스스스스…
휘장이 걷혀갔다.
“야차를 찾아온 거겠지?”
휘장이 걷히고, 그 안에 모습을 숨기고 있던 두억시니의 생김새가 드러났다.
흉악한 치열과 거대한 몸집은 어디로 사라지고 웬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덧니로 착각할 수도 있는 앙증맞은 송곳니, 초롱초롱한 눈망울까지.
그러나 외모와는 달리, 느껴지는 힘은 심상치 않았다.
“따라와라, 야차를 사냥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자를 알고 있으니.”
* * *
“삶은 괴롭기만 하구나….”
지금으로부터 아주 오래전 칸이 홍천의 치세를 이어가고 있을 당시였다.
이미 숱한 후예들을 남겼고 칸의 정세 또한 반석 위에 오른 듯 안정적이었다.
용의 숨을 원한 자는 그 끝에 용의 피를 마셨고 지금은 황좌에 앉은 시체가 되었다.
무료함.
권태와 안락함은 악룡의 타락한 숨결에도 무너지지 않았던 홍천의 무릎을 꿇렸다.
“삶은 순환하되, 홀로 멈춰 있구나.”
별 같은 총기는 대륙으로 흩뿌려졌고 타오르던 불길은 이제 잿더미가 되었다.
그 안에 온기는 남아 있지만, 이제는 불꽃이라 부를 수 없는 자.
용제 홍천은 아직 죽지 않았으나 살아가지도 않았다.
살아온 세월의 모든 순간을 헤아릴 수 없겠지만, 그래도 기억에 남는 순간들은 존재했다.
예를 들어, 달마다 돌아오는 문화적 여흥이라든가.
“금일, 칸에서 가장 유명한 여인이 알현할 예정입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조금 젊어 보이는 방휴의 얼굴.
홍천은 방휴의 가치를 ‘칸에 쓸모있는 재상’이라 평가했다.
방휴는 홍천에게 진심이었다.
사력을 다해, 활기를 불어넣어 주려 했다.
마치, 홍천이 쇠하면 칸이 쇠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 어떤 것도, 무료하기만 하구나. 일생을 연마한 기술도 한낱 눈요기에 불과하다니, 인간의 삶은 어찌 이리 짧단 말인가.”
그 삶에서 희노애락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 남은 것은 번민과 허무함이 전부였다.
용을 죽인 후, 홍천도 죽었다.
아니, 죽었어야 했다.
이토록 부질없이 연명할 줄 알았더라면.
스스스스스스…
안개가 깔렸다.
이 넓은 무대를 지켜보는 건 홍천과 방휴뿐.
그렇게 생각하니 이런 무대에 설 누군가의 노력이 아깝게 느껴졌다.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살아있는 이에게 가, 선보인다면 분명 박수를 받을 것이다. 하나, 자신이 보내줄 것은 기껏해야 애쓴 데에 대한 연민일 것이다.
타아아악-!
곡을 시작하는 박의 소리가 크게 흘러나오고, 곧 무대에 여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홍천의 감겨가던 눈꺼풀이 내려가는 것을 멈추었다.
현 소리가 무대를 채웠다.
듣기 좋은 소리가 분명했지만, 홍천에게는 소음에 불과했다.
무대에서 움직임을 이어나가는 여인의 몸놀림에 비한다면은.
“이럴…수가….”
얼음이 녹고 있었다.
살을 에는 추위의 겨울이 가고 싹이 피어나는 봄이 보였다.
여인에게서, 계절이 보이는 것이다.
계절은 곧 시간의 흐름이자 만물의 번영을 상징했다.
한낱 여인의 몸짓에서 뭔가를 느낀 홍천이 벌떡 일어섰다.
“춤을… 춤을 멈추어라….”
뚝…
현 소리가 멈췄다.
그러나, 무대 위의 여인은 계속해서 춤을 추었다.
그야말로 영혼이 추는 듯한 검무(劍舞).
방휴가 소리쳤다.
“용제께서 춤을 멈추라 명했다!”
그러나, 춤은 계속되었다.
무대의 시작을 알리는 박을 쳤던 남자가 읍소했다.
“용제시여, 춤을 시작한 이상 멈출 수 없습니다.”
“…어째서냐.”
“그녀는 절대로 무대가 끝날 때까지 춤을 멈추지 않습니다.”
용조차 그녀의 춤을 멈출 수는 없었다.
홍천은 이 순간 깨어났다.
살아있다.
검으로 피어난 꽃에 생명이 어림을 느꼈다.
방휴가 홍천의 용안을 돌아본 후 머리에 땅을 찧었다.
“요, 용제시여….”
희노애락을 소실해버린 사내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져 흘러내렸다.
이제는 흩어져가는 잿가루 속에서 불씨를 발견했다.
현의 소리도, 호응도 없이 무대에서 춤을 추는 여인의 몸짓은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것.
유화는, 하늘이 내린 여인이었다.
땀으로 범벅이 된 유화가 마지막 동작을 끝으로 그 춤을 멈추었다.
용제 홍천은 그녀에게 벌을 내려야 마땅했다. 지엄한 명을 무시한 채 끝까지 춤을 추었으니.
하나, 홍천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움직였다.
짝… 짝…
짝… 짝… 짝…
저절로 박수가 나왔다.
기술의 영역을 넘어선 무언가.
“…이름이 무엇이냐?”
홍천이 살아생전 처음으로 무희의 이름을 물었다.
무희는 웃었다.
“유화입니다.”
칼의 무희 유화.
“좋은 이름이구나.”
시간은 흘러 유화가 떠나고 홀로 남은 용제는, 숨을 헐떡이며 양초의 밀랍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는 꺼져가는, 아니 꺼질 게 분명한 불꽃을.
“유화야… 유화야….”
몽롱한 불빛은 마치 그의 남은 삶을 보여주는 듯했다.
“너는 여전히 내 꿈속에서 춤을 추는구나….”
* * *
같은 시각, 귀계는 현계보다도 더 바쁘게 돌아갔다.
치우가 싱글벙글 웃으며 걸어 다니는 두억시니를 보며 말했다.
“꼬맹이였어?”
“무엄하다! 감히 축생 따위가!”
“축생이라니! 야!”
“시끄럽구나, 모두 경박하게 행동하지 말아라.”
치우와 드잡이질을 하는 귀혼.
강설도 두억시니의 작은 실체를 본 후엔 실소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
“다 연극이었던 겁니까?”
“도술이라 하는 게 더 그럴듯하겠구나. 깜빡 속았지?”
“실체가 아니었다니….”
“실체이되 실체가 아니지. 여아와 거인의 모습 중 무엇이 내 본모습인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
“…….”
“알고 싶더냐?”
커다란 가마에 올라타 흔들거리며 움직이는 그들. 가마가 지나갈 때마다 흉악하게 생긴 귀신들이 전부 고개를 넙죽 처박았다.
‘위세가 대단하네. 역시….’
귀계의 주인다운 위상.
이곳 귀계에서는 감히 두억시니를 거스를 자가 없어 보였다.
“늦었지만 환락성에 온 것을 환영하마. 내 차 선생을 소개해 주려면 가까운 곳까지 가야 하니 그동안 궁금한 것들에 답해주도록 하마. 너무 깊은 질문은 하지 말도록 하여라, 가는 동안 다 이야기해주지 못할 테니.”
이제야 환영을 받고, 이제야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줄곧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던 치우가 두억시니에게 파고들어 물었다.
“윽….”
“귀신 3 장군이 어째서 귀왕인 거야? 화그무의 부활을 준비하는 거야? 어둑시니가 부활한 것도 네 짓이고?”
“질문은 한 가지씩이 좋겠지만, 짧은 시간 축생에게 예절을 가르치기엔 무리겠구나. 설명해주마.”
강설이 궁금해하는 것과 다른 의문을 품고 있었던 치우.
두억시니는 그의 의문에 답했다.
“귀신 3 장군은 너희 인간들이 지어낸 말이다. 나와 어둑시니, 그리고 그슨대는 화그무가 일어나기 전에 셋이 함께 이 귀계의 일부를 다스렸다.”
“이미 왕이었구나.”
“그렇다 볼 수 있지. 힘은 세 조각으로 나뉘었지만. 그런 우리에게 나타났던 것이 악룡 화그무였다. 놈은 우리를 힘으로 굴복시키고 현계로 향하게 했지.”
“그럼 넌 아직도….”
“끝까지 들어라. 끝없이 힘을 탐하던 어둑시니와 그슨대와는 달리, 난 현계에 별 관심이 없었다. 인간은 별미이긴 하다만 이미 오랜 세월을 살아온 내게는 물릴 대로 물린 존재들이야. 그래서… 기회를 노렸다.”
이것은, 강설도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세간에 두억시니에 대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이유 또한 이 사실과 연관되어 있었고.
“어둑시니와 그슨대가 현계에 한눈을 판 틈을 타 나는 귀계로 되돌아가 경계를 걸어 잠갔다. 그들은 현계에 유리되었으며 귀계에 넘치는 힘과 권력은 모두 내 차지가 되었지. 어떠냐? 이제 내가 어둑시니와 그슨대와는 다른 존재라는 걸 이해하겠느냐?”
“그럼 화그무와는….”
“관련 없다. 난 그 도마뱀을 싫어해. 만나면 도망밖에 더하겠느냐?”
“어둑시니가 부활한 것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거야?”
“나는 모르는 일이다. 어둑시니는 평생 봉인되어있는 쪽이 내게는 좋은 일이지.”
치우가 물었다.
“네 목적은 뭐야?”
“당장엔, 너희의 목적과 같지.”
두억시니가 히죽 웃었다.
“야차를 사냥하는 것.”
강설은 그녀에게 물었다.
“야차의 검… 그 힘을 억누를 수 있습니까?”
“지금 그 때문에 이곳까지 온 것 아니더냐?”
콰르르르르릉!
천둥이 울려 퍼졌다.
밖을 내다보니 나무 한 그루가 낙뢰에 얻어맞고 불에 타고 있었다.
“벽조목(霹棗木)이다. 차 선생이 좋아하겠군.”
“그 소개해 주신다는 차 선생이란 자는 누구입니까?”
“선생이 내어주는 차는 극상의 맛이지. 어떨 때는 술보다도 그 맛이 훌륭해. 너희들에게도 맛보여주실 것이다. 얘기는 거기서 마저 하지.”
끼이이이익…
낙뢰라도 떨어지면 바로 폭삭 무너질 것 같은 집. 신기하게도 누군가 이곳에서 사는 듯했다.
“오… 차 선생! 안에 계셨구려.”
달그락…
안에서 차를 준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은 혼자 오지 않으셨군요.”
강설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서 들어본….’
두억시니가 웃었다.
“귀계에 쓸 만한 인간들이 흘러들어왔지 뭡니까. 내 차 선생에게 소개시켜 드리고 차라도 얻어 마실까 하여 왔습니다.”
그 두억시니가 존댓말을 사용하는 상대.
“앉아 계시지요. 차는 언제라도 내어드릴 수 있습니다.”
곧, 목소리의 주인이 장내에 등장했다.
스으으…
다탁에 찻잔을 내려놓고 찻물을 쪼로로 부어주는 차 선생.
그윽한 향이 실내에 번졌다.
향은 곧 기억을 불러오는 법.
향수가 코끝에서 뇌리로 퍼졌다.
“여전히, 차를 드시지 않는 겁니까?”
온화한 미소와 함께, 이 집의 주인이 강설에게 물었다.
낯익은 얼굴.
고생을 겪은 듯, 조금 초췌해 보이긴 했지만 신비로운 기운이 그에게서 피어났다.
[강력한 조력자 ‘하문’이 이번 모험에 등장합니다.]
[강력한 조력자 ‘하문’이 이번 모험에 당신의 아군으로 합류합니다.]
오르고의 후예 하문.
노비라에서 작별 인사도 하지 못한 채 헤어졌던 그가, 이곳에 있었다.
“…오늘은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강설이 찻잔으로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