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31st Piece Overturns the Board RAW novel - Chapter 304
제303화
갑작스럽게 관장에게 아니, 전(前) 관장에게 지목당하여 직위를 물려받은 강설.
그는 당황하며 관장을 바라봤다.
기이잉…
철컹…
관장이 성치 않은 몸을 부르르 떨며 일어서려 했다.
“깨, 깨어났습니다!”
“이런! 산티오! 준비해!”
“자, 잠깐! 근데….”
관장은 어설픈 자세로 강설을 내려다보고는, 그와 눈을 맞추었다.
당황스러운 상황에 모두 엉거주춤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는데…
관장의 눈이 마치 영사기라도 된 것처럼 빛을 쏘아 보냈다.
강설의 눈을 향해.
츠으으으으으…
“막아야 하는 거 아닌가?”
“가만… 적대적인 행동은 아닌 것 같습니다.”
브론도 동의했다.
“단순히… 뭔가를 보여주는 것 같은데?”
“그, 그럼 기다려봐야겠군….”
강설은 그들이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만상이 쏘아내는 빛을 맞이했다.
‘이건….’
누군가의 기억이다.
시점으로 보았을 땐, 관장의 기억인 듯했다.
기억이라고 표현하기도 좀 그런 게, 관장은 기계장치이니 기록이 맞을 것이다.
시야에 인간의 모습이 잡혔다.
– 너는 앞으로 만상의 관장이다.
‘모든 것?’
– 그야말로, 모든 것이다. 만상은 그 어떠한 순간에도 살아남아 가치 있는 것들을 보호할 것이다.
기록 속의 남자를 바라보며 강설은 몇 가지를 추론했다.
‘만상이 인간이 만든 거라고? 그런데 왜 그 기록이 없는 거지?’
이런 위대한 발명품을 인간이 만들었다면, 분명 그 업적을 널리 알리는 게 맞지 않을까. 어째서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은 것일까.
– 만일, 우리가 실패한다면… 아니,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남자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슬픈 미소라는 건 이런 걸 말하는 듯했다.
– 너의 소임을 다하라, 만상이여. 모든 것을 지켜보고, 기록하라.
끼기긱…
강설이 주변을 둘러보니 밤이라도 찾아온 것처럼 온통 어두웠다.
시커먼 공간엔 관장과 자신밖에 없었다.
이 가련한 기계장치는 아직도 뭔가 남았는지, 강설을 들어 올렸다.
마치 어른이 아이를 들어 올리는 것처럼, 강설을 들어 자신의 어깨에 얹었다.
지이잉…
“…아!”
관장을 중심으로 세상이 펼쳐졌다.
아주 작은 세계.
활자들의 세상이다.
세계 전역에서 활자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이것은 다른 이에게 알리기 위한 누군가의 기록들이었다. 자신이 경험한 것, 생각한 것들을 알리기 위한 활자들이 차곡차곡 모여들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강설은 판데아를 보았다.
전쟁에 휘말린 수많은 사람.
전이자와 원주민들이 서로를 혐오하며 분쟁을 유발하는 곳.
먼저 앞서 나간 인류들.
‘…이건.’
환상적이라는 말로도 다 표현이 안 되는 순간들. 이것은 시청자들 또한 느끼고 있었다.
– 내가… 내가 지금 뭘 보는 거지?
– 소름;; 나 지금 온몸에 소름 돋았어.
– 미쳤어. 이건 미친 거야….
– 미디어가 나아가야 하는 방향이 이거 아니냐?
– 수신료의 가치 돌았네 ㄷㄷ
모든 것이 작게 보였다.
먼지만 한 것들을 위해 먼지만 한 존재들이 아웅다웅했다.
본디, 개미를 바라보는 인간의 심정은 별다를 게 없었다. 대부분 하찮다고 여기거나, 무관심으로 일관할 뿐이다. 과연 그들이 추구하는 모든 것이 과연 하찮을까.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만상 도서관의 관장이라는 신분이 되었다 하여 마치 신이라도 된 듯 공허한 상상을 했다.
강설은 관장을 내려다보았다.
끼긱…
만상이라 이름 붙여졌지만, 그저 관리자에 불과한 존재. 차가운 기계장치다.
심지어 오랜 시간을 버텨낸 탓에 가진 권한도 거의 다 소진하여, 이제는 할 수 있는 것도 많지 않았다. 오죽하면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지만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그러나, 비록 그의 겉모습은 낡았을지라도 그의 의무와 질서는 녹슬지 않았다.
만상 도서관을 다스리는 신의 위치에서, 의무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자신을 만든 자들과의 연결은 이미 끊어진 지 오래.
끼익…
끼이이익…
다 부서진 몸으로 강설에게 뭔가를 전달하는 관장에게선, 그럴 리 없겠지만 아쉬움 같은 감정의 찌꺼기들이 느껴졌다.
아즈란과 밤까마귀에게 대패해 스스로는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 강설에게 관장 자리를 넘겼지만, 그것이 후련하지는 않은 듯했다.
관장은, 여전히 관장이고 싶어 했다.
의무를 다하고 싶어 했다.
다만, 스스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기에 다른 이의 손을 빌려야 했다.
그 적임자가 바로 강설이었고.
‘그런데 어째서 나지?’
당장 이 자리에는 두 대마법사 조네와 산티오도 있다. 브론은 책에서 흘러나온 인물이기에 해당이 되지 않을 것이고.
강설은 시커먼 공간에서 관장의 몸을 쓰다듬었다.
끼이익…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아쉬움이 남은 눈빛으로 조용히 고개를 숙이는 관장.
흘러나오는 빛은 이제 사그라들었고, 관장은 이제 그 상태로 움직이지 않았다.
* * *
며칠 뒤.
강설이 이어받은 만상의 힘을 이용해 8층으로 되돌아온 그들은 각자 흩어져 제 할 일을 했다.
층을 넘나드는 것 정도는 관장이 가진 힘 중 극히 일부였다.
아무튼, 조네와 산티오도 노력 끝에 뭔가를 얻었다.
두 대마법사는 비록 얼어붙은 진리는 아니었지만, 경지에 도움을 줄 다른 책들을 찾아낸 것이다.
“끄응… 아쉽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군.”
“수확이 있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거겠죠. 실제로 위기를 여러 번 경험하고 나니 마력의 질과 양도 전보다 훨씬 늘어났습니다. 이대로라면 아마 곧 이전의 경지를 뛰어넘을 것 같습니다.”
“그래? 흠흠… 나도 얼른 되돌아가서 이번 일정을 되돌아봐야겠어.”
“다시 꼼꼼히 살핀다면, 분명 경지가 크게 상승할 겁니다.”
“그래. 잘된 일이지.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군.”
조네는 성채의 가장 높은 장소인 첨탑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강설은 그곳에 있었다.
“심란하겠지?”
“당연한 말입니다. 갑자기 만상을 손에 넣었는데요.”
“자네도 들었잖아? 권한은 쥐뿔도 없다며? 그저 허울뿐인데 영원히 만상에 갇혀 지내야 한다며.”
“그거야 만상의 직위를 내려놓으면 그만이니 괜찮을 테지만….”
“아무래도 그 문제 때문일 거야? 그렇지?”
“…그런 것 같습니다.”
“…바보 같은 결정을 내리기 전에 만나봐야겠어. 자네도 같이 가자고.”
“저까지요?”
“암! 저 친구가 판단을 내리는 걸 주저하는 이유가 뭐겠어? 응? 그것도 부족한 게 없는 젊은이가 말이야!”
“그거야 아마도….”
“연륜이지. 흐흐, 이 대마법사의 지혜를 조금 나눠줘야겠구나.”
음흉한 표정을 짓는 조네와 한숨을 쉬며 따라나서는 산티오. 그들이 향한 곳은 강설이 8층으로 돌아온 후 두문불출하는 첨탑이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이 내가 먼저 얘기를 꺼내면 자네가… 응?”
“…마침 나와 있군요.”
첨탑을 오르자 그들의 눈에 강설이 보였다. 강설은 아련한 눈빛으로 성벽에 기대어 설산의 끄트머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허, 허흠… 멋 부리기는. 어이! 자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나!”
“정말 신이라도 된 듯한 분위기군요.”
강설이 조네와 산티오로 시선을 돌렸다.
피식…
미미하게 미소 짓는 강설.
“…놀리지 마십시오.”
그는 조네와 산티오를 바라보며 물었다.
“작별 인사를 하러 오신 겁니까?”
“어… 그렇지…가 않아. 곧장 떠날 건 아니고… 아마도 자네가 결정을 내리는 걸 보고 떠날 것 같네.”
“그렇군요.”
“나중에 천칭이 소식을 물어보면 그래도 아는 선에서는 답해야 하니까요.”
강설이 만상에 오르고 알게 된 사실 하나.
만상이 현재 어디에 있든, 이용객은 처음 출입한 곳으로 나가게 된다.
즉, 조네와 산티오는 만상에서 빠져나가게 되면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알 수 없다.
강설은 귀계로 돌아가고, 대마법사들은 현계로 갈 테니까.
교차로는 이곳, 만상 도서관이니 작별도 이곳에서 하게 될 것이다.
조네가 은근슬쩍, 아니 대놓고 구레나룻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 심란한가?”
산티오가 입을 쩍 벌리고 조네를 꾸짖었다.
“조네, 보통 일반적인 사람은 그렇게 직접적으로 바로 묻지는 않습니다.”
“시, 시끄러워! 너!”
조네가 강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대답해라, 작은 천칭. 너, 결정을 내리는 게 그렇게 힘들어?”
강설이 조네를 보며 물었다.
“우연으로 인해 만들어진 생명이라 할지라도 생명은 생명이니까요, 그들의 삶을 제가 결정지어야만 하는 건….”
강설의 고민은, 바로 빙하아귀의 처우 문제였다.
이들은 활자에서 탄생한 존재들.
원래의 세계에선 이미 사라진 자들이다. 그들이 살아난다는 건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굼뜨긴… 신이라도 된 것처럼 굴더니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린 거 아니냐? 너, 정말 네가 신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럼 조네는 타인의 생명을 결정짓는 게 한 인간이 할 법한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만! 둘 다….”
조네가 악을 썼다.
“멍청아! 너 여태껏 얼마나 죽였어!”
“……네?”
“살아오면서 얼마나 죽였냐고!”
“…….”
“저기서 눈덩이나 굴리고 있는 놈들보다 많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성채에 가득한 빙하아귀의 머릿수보다도, 강설이 여태껏 전투를 치러오며 거둔 생명의 수가 많을 것이다.
“그것 봐! 넌 인간을 우습게 보고 있어!”
“예?”
“너와 만나서 죽은 녀석들이 죽은 이유가 뭔 줄 알아?”
“그건… 각자 다른 이유가….”
“각자 다르긴! 공통적인 이유가 있잖아!”
“…….”
조네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널 만나서다. 모두 재수 없게 널 만나서 뒈져버린 거지.”
“…….”
“인간이라도, 누군가의 모든 걸 결정지을 때가 있는 법이야. 사소한 인연으로, 사소한 접촉으로 타인의 삶이 결정되기도 해. 알겠어? 신은 특별한 게 아니야. 사고방식이 다른 것뿐이라고. 삶을 결정짓는 거? 인간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알았어?”
“…그렇군요.”
강설은 한 방 먹었다는 듯이 조네를 바라보았다.
“난 말이야, 마부와 귀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다.”
“…….”
“처음 태어났을 때 돌 맞아 죽을 뻔했어. 마부인 아버지는 얼굴도 못 봤고. 아마 저수지에 빠져 죽었다고 했나…. 세상의 저주를 받고 태어났다고 볼 수 있지.”
“조네, 저도 몰랐습니다.”
“엥? 산티오, 너한테도 얘기를 안 했던가?”
“예. 저는 조네가 길바닥 출신인 줄 알았습니다.”
“이 자식이! 사생아라도 귀족은 귀족이야!”
“아, 그렇군요.”
조네는 계속 이야기했다.
“아무튼, 생각해 봐라. 그렇게 저주받은 출생인 내가 지금은 어엿한 어른이 돼서 세상을 구하고 있지?”
조금 이상한 구절도 있었고 잘 이해도 가지 않는 말이었다. 산티오가 그 점을 꼬집었다.
“조네, 그러니까 요점을….”
“앞뒤가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한다는 거다!”
“네?”
강설을 향해 조네가 소리쳤다.
“모든 일은 기묘하게 얽혀있어서,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지 않아. 그러니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돼. 어차피 뒷 일은 다른 놈들이 같이 떠안을 거니까.”
“…….”
“인간이 그렇거든, 역사가 증명하잖아? 무슨 일이 있어도 이 기이한 족속들은 그럭저럭 살아간다고. 남이 벌인 실수도 정이 넘치는 것들이 우르르 달려와서 뒤처리도 해주고 말이야.”
“조네.”
“문제가 생기면, 나랑 이 양 머리가 도와주러 오마. 그러니까 네 결정을 내려라.”
“처음으로 마음이 맞는군요. 좋습니다, 저도 도우러 올 테니 안심하고 결정을 내리십시오.”
강설이 끄덕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이제 생각이 좀 정리가 됐습니다.”
“정말? 이 조네의 조언이 쓸모가 있었나?”
“충분히요. 덕분에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럼 우리는 언제쯤 이 지겨운 도서관을 나갈 수 있는 거야?”
그 질문에, 강설이 답했다.
“오늘입니다.”
“…뭐?”
“지금, 빙하아귀를 불러 모을 겁니다.”
빙하아귀와 만상 도서관의 운명이, 바로 지금 결정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