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31st Piece Overturns the Board RAW novel - Chapter 470
제469화
다음 날, 헤카이는 변함없이 불 꺼진 방 안의 제단 앞에 무릎 꿇었다.
그만의 의식이다.
“토톰보의 숨이 다해갑니다. 보금자리가 필요합니다. 가르침을 주십시오.”
구름의 원신 호라이가 답을 주었다.
– 구름 위다.
“…역시, 같은 답이군요.”
변함없이 같은 대답.
호라이는 언제나 현상을 유지하길 원했다. 변화에서 찾아오는 충격을 회피하는 것처럼.
“…형님.”
방 안에는 한 명이 더 있었다. 헤카이의 아우인 헤쿰이었다. 그는 벽에 기대어 헤카이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헤쿰.”
“…….”
“네가 바란 결과가 이것이냐?”
회의는 엉망진창이 되었고 부족의 미래는 알 수 없는 혼돈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갔다.
알지 않아도 되었던 선택지가 하나 추가된 것만으로도.
“정녕… 모두를 파멸로 이끌 작정이냐.”
“…지상으로 가자.”
“지상… 지상. 나도 아버지의 대지가 좋다. 땅을 딛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야. 하지만… 준비가 안 됐어.”
“모든 걸 준비하고 시작할 수는 없어. 결단만 늦출 뿐이야. 뜻이 맞는 동료가 있다면….”
“입 닥쳐! 실수 한 번이면 이제 높새 날개는 사라진다. 선조께서 괜히 겁쟁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도 구름 위에 숨었는지 잊은 것이냐?”
“…시간이 흘렀잖아.”
헤카이가 제단을 가리키며 말했다.
“호라이는… 아버지께서는….”
“형님….”
헤쿰이 슬픈 표정을 지었다.
“호라이는 죽었잖아.”
“……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럴 리가….”
부족의 미래가.
부족의 생명들이.
너무 무겁다.
그래서 설령 죽어버린 신이라도, 섬기고 마는 것이다. 잠시 의지할 뿐이라고, 딱히 대답을 기대하는 건 아니라고.
너무나도 현실감 있는 마음의 울림에, 가끔씩 그 목소리가 진짜라고 착각하고 만다.
당연하지.
너무나 좋은 말만 해주니까.
그래서 이 목소리가 악마의 속삭임이라는 것을 가끔은, 잊어버린다.
“아….”
제단에 비친 모습은 구름의 원신 호라이가 아니었다. 흐느끼며 버티는 헤카이의 얼굴이었다.
그 뒤로, 다가온 헤쿰의 얼굴이 비친다.
“함께 해내자, 형님. 이건….”
헤카이가 제단에 묻는다.
“호라이시여, 오늘도 묻습니다.”
“말하라.”
“헤카이의 판단이 틀린 겁니까?”
오늘도 호라이는 답을 주었다.
“틀리지 않았다, 헤카이. 구름 위다. 구름 위만이 유일한 낙원이야.”
헤카이는 스스로 호라이의 몫까지 말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제단을 걷어찼다.
콰아아아아앙-!
“입 닥쳐, 빌어먹을 가짜 신아아아!”
콰아아아앙-!
콰아아아아아앙-!
“형님!”
“놔! 놔라! 헤쿰!”
콰아아앙-!
헤쿰이 나가떨어졌다.
“큭….”
“…힘이 드는구나.”
“…….”
“너무나 무거워, 모두의 삶이.”
“…미안합니다, 형님.”
헤카이가 쓰러진 헤쿰을 보고 말했다.
“…아니, 차라리 잘 됐어. 생각해봐야, 답은 없거든. 그래! 간단하잖아. 처음으로 돌아가는 거야.”
쿵…
쿵…
헤카이가 걸음을 옮겼다.
약속 시간이 되었다.
“처음으로, 돌아가는 거라고.”
헤카이는 미리 와 기다리고 있는 강설 일행에게 불쑥 말을 건넸다.
“장소를 옮기지.”
“…장소를?”
“그래, 모두가 볼 수 있는 곳으로.”
“어째섭니까?”
헤카이가 이를 갈며 말했다.
“자신들의 운명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정도는 그들도 알아야 하니까.”
휘이익-!
헤카이가 카쿠이의 고삐를 잡아채 순식간에 부락의 가장 큰 봉우리로 향했다.
* * *
후우우웅…
후우우우웅…
카쿠이 무리가 중앙 거주지 한복판에 착륙했다.
“뭐, 뭐야?”
“헤카이다!”
“자, 장로들까지!”
“헤카이가 거주구엔 무슨 일로….”
“저건 어제 그 인간들이잖아! 죽인 게 아니었나?”
강설은 헤카이를 따라 내려서면서도 기묘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인간. 그래, 강설이라고 했던가?”
“…….”
“어째서 이런 원시적인 방법으로 너희를 시험하는지, 생각해 본 적 있나?”
숙련된 모험가인 강설이니 그 이유쯤 금방 생각해냈다.
“뭐, 호라이의 방법이었을 것 같습니다?”
“큭큭… 눈치 하나는 제법이군. 아버지 호라이께선 분쟁을 이런 유치한 방법으로 중재하셨다고 한다. 모두, 군말 없이 그의 뜻을 따랐지.”
헤카이가 양팔을 활짝 펼쳤다.
“상상이나 되나? 이따위 유치한 싸움으로 모든 걸 결정했다니.”
“…….”
“그래도, 역시… 이것뿐이야. 처음으로 돌아간다.”
그는 웅성거리는 트롤들을 향해 말했다.
“내가 이 남자에게 지면 우리는 의회에 반하는 행동을 해야 한다. 거인과… 용에게 말이지.”
“그런….”
마지막 말을 끝으로, 자세를 취한다.
“잘 지켜봐라. 너희의 미래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이젠… 지쳤어.”
“헤카이….”
“헤카이여….”
강설도 자세를 취했다.
‘마력은 배제하는 싸움이라… 그냥 개싸움이잖아.’
어떤 미사여구를 붙여도 그냥 개싸움이다. 그러나 동시에 높새 날개의 유구한 전통이기도 했다.
‘어디… 실력 좀 볼까….’
후우우우웅-!
순식간에 밀어닥치는 헤카이의 주먹.
빠아아악-!
팔뚝으로 막아냈지만, 얼얼할 정도의 충격. 덩치 차이가 심하니 체급으로 나눌 것도 없었다. 일방적인 폭력이 될 것이라 예측하는 관중들.
하지만, 강설은 진지한 표정을 짓고 헤카이의 격투 방식을 눈에 익혔다.
후우웅-!
후우우우웅!
‘오른손잡이? 아니, 의도적이다. 양손잡이야. 그렇다면….’
속아 넘어가 주는 척 측면으로 파고드는 강설.
휘이익…
역시나, 헤카이는 팔을 뻗어 몸을 감는 동작을 취해왔다. 상대적으로 몸이 큰 쪽이 작은 쪽과 싸울 땐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주로 떠오르게 되어 있다.
잡기만 하면, 죽일 수 있다.
헤카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파아앗-!
강설의 옷깃을 스치고 지나가는 큼지막한 손가락.
부우웅…
강설이 팔꿈치로 뻗어온 손의 팔뚝을 정확히 노렸다.
빡-!
“크으윽….”
근육에 심대한 타격을 주는 일격. 이어, 끔찍한 속도의 발차기가 얼굴로 날아들었다.
흡-!
헤카이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뒤로 뺐다. 강설이 방금까지 그의 머리가 있던 자리에 뻗은 발을 거두어들이며 말했다.
“좀 짧았나.”
“…….”
헤카이는 방금의 움직임과 자신감이 우연이라 생각했다. 인간은 트롤을 앞에 두고는 움츠러들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애초에 그는 박투술의 달인이었다. 부족에서도 제일가는 전사인 것을.
“움직임이 기괴하군.”
“그런 말은 자주 듣는 편입니다.”
“전사와 전사의 싸움이다. 나는 지금 부족장이 아니야.”
“그러면 이쪽으로.”
“큭큭….”
헤카이가 자세를 낮췄다.
어정쩡한 높이로 서 있어 봐야 턱을 비롯한 급소만 노려지기 쉬웠다.
파아앙-!
파아아아앙-!
강설과 헤카이가 공수를 교환했다.
서로가 유효타는 날리지 못했지만, 싸움은 합이라도 맞춘 것처럼 딱딱 맞아떨어졌다.
“제법이야.”
“너도.”
퍼어어억-!
헤카이의 무릎이 강설의 복부를 차올렸다.
“커허억….”
부우웅…
“방금은 별로였어.”
강설이 공중에 뜬 상태로 히죽 웃었다. 그도 약간이지만 불이 붙었다.
헤카이의 주먹이 강설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팍-!
연체동물처럼 팔에 달라붙어 헤카이의 목까지 순식간에 도달한 강설.
헤카이의 등 뒤로 몸을 옮겨 그의 목을 졸랐다.
“…잡았다.”
“어…딜!”
헤카이가 몸을 뒤로 힘껏 젖혀 강설의 등을 땅에 내려찍었다.
콰아아아앙-!
“끄으윽….”
“놔라!”
충격으로 힘이 풀린 강설의 팔을 빠져나와 도리어 그에게 올라타려는 헤카이.
강설이 벌떡 몸을 일으켜 뻗어오는 팔을 회전하며 당겼다.
부우우웅…
헤카이의 몸이 떴다.
쿠우우우웅!
“컥….”
그 역시 땅에 내리꽂혔다.
능력을 배제한 채, 육체만으로 싸움에 임한다. 강설조차 승패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기괴한 재생력을 가졌지만, 불시의 일격에 기절하는 순간 패배가 결정된다.
그로서는, 절대로 질 수 없는 싸움이었다.
유술로는 쉽사리 결판이 나지 않겠다는 생각에, 헤카이가 방법을 바꿨다. 타격으로 강설의 뼈를 부숴 무릎 꿇리는 편이 빠르겠다는 판단에서다.
후우웅…
강설이 주먹을 피하지 않고 마주 주먹을 뻗었다.
빠각-!
주먹과 주먹이 맞닿자, 둘 모두 화들짝 놀라 주먹을 뺐다.
“으으윽….”
“아악….”
강설은 전신의 뼈에 무리가, 헤카이는 주먹에 감각이 없을 정도의 통증이 찾아왔다.
후우우웅…
후우우웅…
주먹과 주먹의 파공음 말고는, 그 어떤 소리도 차단되었다.
헤카이는, 지금 그가 생각하고 있지 않음을 생각하고 있었다.
“왜 웃지.”
“그냥… 모르겠다.”
뻐어어억-!
말하는 사이, 강설의 주먹이 헤카이의 볼에 작렬했다.
“컥….”
“허점….”
팍-!
헤카이의 발이 강설의 발을 걸고 넘어트렸다.
“허점!”
“이….”
단순한 박투 경기였지만, 관중들은 넋을 놓고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그만큼 순수한 육체와 육체의 부딪힘은 크나큰 울림이 있었다.
빠아아악-!
빠아아악-!
동시에 얼굴에 주먹이 틀어박힌 두 결투자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호라이가… 옳았군.”
“방금 나도 그 말 하려고 했는데.”
“히히….”
후우우웅…
빠아아악!
헤카이의 얼굴에 한 방.
후우우우웅…
빠아아아아악!
강설의 얼굴에 한 방.
무지막지한 맷집과 무지막지한 파괴력을 동시에 가진 존재들이기에 쉽사리 결판은 나지 않았다. 단지, 처음보다 공격이 적중하는 횟수가 많아졌다.
촤아악…
터진 살이 피를 토해낼 때, 각자의 일행은 손을 꽉 움켜쥐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말하지 않아도 알 정도의 상처다.
“강설….”
“형님….”
“헤카이….”
승부의 결과를, 찰나지만 짐작하게 만든 순간이 있었다.
후우우웅…
빠아아아악!
강설의 턱에 헤카이의 주먹이 꽂히자, 그의 눈에 흰자위가 드러났다.
“안 돼! 강설!”
그러나 눈은 금세 초점을 되찾아와 목표를 노려보았다.
후우웅…
빠아아아아아악-!
회전하며 차올린 발이 헤카이의 턱 인근에 꽂혔다.
쿠우우우웅…
헤카이가 휘청이다가 뒤로 넘어갔다. 다시 중심을 찾으려 땅을 짚은 순간, 그의 부어오른 두 눈에서 뜻 모를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가, 땅을 기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였다.
“엄니가… 부러졌어.”
헤카이의 한쪽 엄니가 부러져 땅에 뒹굴고 있었다. 마치 그의 처지처럼.
“왜 울지.”
“그냥….”
알 것 같다.
이 설움.
“…질 것 같아서.”
지면 안 된다는 굳은 의지와는 달리, 다리는 후들거리고 귀에서 들리는 이명은 끊어지지 않았다.
미안하고, 괴로웠다.
그때, 헤카이의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헤카이! 멍청한 자식! 일어나!”
“…헤쿰.”
“굼벵이 녀석아! 어서 녀석의 못생긴 얼굴에 주먹을 날리라고! 죽여! 아예 죽여버려!”
강설을 데려온 건 헤쿰이었지만, 정작 헤쿰은 어째서 자신을 응원하고 있는지 헤카이는 모르겠다.
저 얼빠진 녀석에게 동요하는 자신도.
“헤카이! 일어나라! 그게 무슨 꼴이냐!”
“맞다! 헤카이! 아직은 아니야!”
지지 않기만을 바라는 장로들.
“져도 돼! 그래도 싸워라!”
“지는 건 괜찮아! 제대로 한 방은 먹여야지!”
모두 어떻게 돼버린 걸까.
승패가 가장 중요한 싸움에서, 승패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다니.
으지직…
헤카이가 무릎을 짚고 일어섰다.
“기다려준 거냐.”
“…….”
“평온해 보이는군. 질 수도 있다는 이 상황이… 무섭지 않나?”
강설은 히죽 웃었다.
“늘 있던 일이야.”
헤카이는 사내를 이길 수 없다는 걸 확신했다.
“부럽군, 나는 처음인데.”
으지직…
헤카이가 주먹을 날렸다.
빠지이익-!
강설은 피하지 못했다.
아니, 피하지 않았다.
대신 그처럼 주먹을 되돌려보냈다.
콰지이익!
난타전의 순간이 찾아왔다.
최후의 기력을 짜내는 순간이.
콰지이이익!
콰지이이이이익!
파육음과 파열음만이 작렬했다.
콰직!
콰지이이익!
어째선지, 지켜보는 이들이 더 괴로워했다.
콰지이이익!
콰지이이이이이익!
콰직…
퍼어억…
지옥에서 악마들이 싸운다면, 꼭 이런 장면일 것이다.
콰직…
퍽…
얼굴이 새파랗게 물든 두 전사.
한쪽이 꺾일 때까지 계속되는 싸움.
풀썩…
헤카이가 무릎을 꿇었다.
“미안… 모두, 졌다.”
“…….”
“미안하다… 미안해.”
침묵하는 관중.
헤카이가 물었다.
“원하는 걸… 말해….”
“…우리와 함께 의회와 맞서줬으면 한다.”
“…조건이 달라진 것 같은데.”
“이만큼 싸웠잖아. …손해 볼 순 없다.”
“개자식들. 죽으란 거잖아. 내가 지지 말았어야 했는데….”
헤카이가 고개를 돌리자, 높새 날개의 부족원들이 보였다.
“그렇게… 됐다.”
부족원들의 거센 반발이 예상되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다.
“뭐, 어쩔 수 없지.”
“훌륭했다, 헤카이!”
“지상인가! 그래… 올 게 왔군.”
“…뭐?”
장로들이 헤카이의 어깨를 두들겼다.
“하하하! 헤카이! 꼴 좋구나!”
“그 얼굴은 뭐냐! 으하하! 왜 울상인 거야!”
그들은 헤카이를 일으켰다.
“헤카이, 우리는 네 생각만큼 약하지 않다.”
“…….”
“더는 혼자서 짊어질 필요 없다. 여기까지만이라도 충분해.”
“나는… 잘 해낸 거요?”
“그래, 헤카이. 네가 시간을 벌어준 거다. 모두, 각오를 다질 시간을.”
후우웅…
후우웅…
카쿠이를 탄 부족원들이 헤카이를 공중과 지붕에서 내려다보았다.
“우리의 낙원을 구걸해서 얻어낼 수는 없지.”
장로 중 위치가 가장 높은 대장로가 봉우리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쳤다.
“높새 날개는 지상으로 향한다!”
헤카이는 생각했다.
호라이는 죽었지만, 여전히 높새 날개와 함께한다고.
“호라이시여… 이 헤카이가 옳….”
꾸우우우우웅…
토톰보가 바람을 내뿜자, 구름이 밀려나며 지상이 드러났다.
그들이 멀리했으나, 평생을 그리워한 땅이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평안히 잠드소서.”
강설이 헤카이에게 다가오자, 그가 말했다.
“강설… 네게 해줄 말이 있다. 급한 문제야.”
강설은 어느새 상처를 거의 다 회복한 상태로 그의 말을 기다렸다.
“세 거인의 부활 의식이 곧 치러진다.”
그토록 막으려 했던 순간이, 코앞까지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