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31st Piece Overturns the Board RAW novel - Chapter 484
제483화
“이건….”
“…어?”
아그라스를 포함한 4인은 문이 열리며 드러난 새로운 광경에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더 내려가야 한다고?”
무수히 많은 계단이 있었다.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이곳보다 더 낮은 곳에 무언가 있다는 것일까?
한소미가 망설이는 일행에게 말했다.
“시간을 지체할 순 없어요! 확인해야 해요!”
일행이 잠시 멈칫했지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소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이 돌발 모험엔 시간제한이 있었다.
강설과 빙하아귀가 거인 왕 홈에게 쓰러지기 전까지 해내야 한다는 시간제한이.
신디오가 혹시 몰라 전령을 성채에 내버려 둔 후, 한소미에게 붙었다.
“달려요!”
타다다닷-!
수많은 계단을 거의 미끄러지듯 내려가는 그들. 나선형의 계단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이 계단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그리고 그 끝에는 무엇이 있을지 알지 못했지만, 투쟁의 시대에 거인들과 맞서 싸웠던 시리온에게서 넘겨받은 것이니 분명 이 싸움에 도움이 될 거라 확신했다.
“헉… 헉….”
“다 와 가는군요. 이렇게 깊은 지하라니 뭐가 숨겨져 있는 걸까요?”
“조용히 해, 당장 죽이기 전에.”
“끄응….”
아그라스는 콘지에게 혼이 나 입을 삐죽 내밀었다. 당장 큰 싸움만 아니었다면 목숨을 잃었어도 이상하지 않은 존재였다, 그는.
“문! 또 문이….”
“아니… 이건 꼭….”
일반적인 문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니, 일반적인 문일 리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앞에는 해자(垓字)가 흐르고 있었고 그 너머에 도개교처럼 보이는 문이었기에.
“성? 갑자기 성이라고?”
“지하에 뭐가 있는….”
그때였다.
쿵…
끼기기기기기긱…
도개교가 내려왔다.
“…사람이 있는 거야?”
“여기에 이 일에 대해 아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가보자고!”
도개교를 날 듯이 넘어 안으로 뛰어 들어간 그들.
철컹-!
철컥…
철컥…
“아… 이런.”
“산 사람이… 있기는 하네.”
지하의 왕국이라니, 듣도 보도 못한 광경. 그저 보물창고 정도를 생각했건만.
“시리온! 그 영감탱이가….”
한소미가 인상을 찡그렸다.
눈앞에 석궁을 장전한 난쟁이들이 가득했다. 석궁은 당연하게도 한소미 일행에게 겨누어졌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떠오르는 밤이었다. 회중시계를 들고 정장을 차려입은 토끼가 토끼굴 너머 새로운 세계로 안내한 듯한 이 상황.
“난쟁이 말… 할 줄 알죠?”
“…전혀?”
“그럼 문은 어떻게….”
“쉿! 떠들지 마! 가까이 오잖아!”
일촉즉발의 상황.
난쟁이 중 화려한 의복을 입은 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뭐라 말했다.
“뭐라 말하는데?”
당연히 한소미에게 쏠린 시선.
한소미가 울상을 지었다.
하나도 알아듣을 수 없는 말.
하아…
난쟁이가 한숨을 쉬더니 병사에게 뭐라 전달했다.
그 상태로 시간이 흘렀다.
잠시 후, 성 내부에 있는 전원에게 들릴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 낙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통역 마법을 허가합니다.
난쟁이가 한소미에게 다시 말을 붙였다.
“아아, 제대로 전달이 되고 있는가?”
“오! 말했다! 난쟁이가 말했어!”
“말은 아까부터 하고 있었네만.”
“급해! 우리를 도와….”
“잠깐, 그대들이 대화를 나눌 상대는 내가 아닐세.”
“…에?”
“나는 확인만 할 뿐이야. 그대들이 낙원에 해가 될 자들인지 아닌지.”
“그런….”
뭔가 이야기가 이상하게 돌아갔다. 척 보기에도 적지 않은 수의 난쟁이들이 사는 게 분명한 낙원.
한소미에게 메시지가 떠올랐다.
[세상에 감춰져 있던 새로운 세력을 발견합니다!]
[낙원 : 재의 후손의 실체를 확인합니다.]
[미지의 세력입니다.]
[신비 혈맥을 발견합니다!]
[신비 혈맥은 일반적인 세력보다 높은 확률로 특수한 힘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
이래저래 해서 새로운 업적과 칭호까지 개방하게 되긴 했으나, 전혀 기쁘지 않았다.
당장 이 난쟁이들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대들 중 누군가, 잿가루 성채에서 낙원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네.”
“그게 왜….”
“그건 마지막 남은, 낙원으로 향하는 유일한 방법이지. 또한… 낙원을 뒤흔들 만한 사건이기도 하고.”
난쟁이가 진중한 표정으로 물었다.
“묻겠네, 잿가루 성채에서 이곳으로 향한 것이 맞는가?”
“맞다니까!”
한소미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다급한 상황에서 뭣 때문에 다들 이토록 느긋한 것일까. 그것이 그녀를 분노케 했다.
“있잖아, 우리도 해야 할 말이 있어.”
“하지 말게.”
“이….”
“내겐 해도 소용없다니까. 내게 그대들을 성으로 안내할지를 정하는 것 외의 권한은 없네.”
“…뭐?”
“그대들은 지금부터 왕궁으로 들 것이니 필요한 말만 하는 게 그대들을 위해 좋을 것일세.”
왜인지, 이상하게 돌아가는 상황. 시간은 없는데 왕궁이니 뭐니 골치만 아프게 했다.
“소미 양.”
“신디오, 이 난쟁이들….”
“침착해요. 왕궁은 아마도 저걸 말하는 듯해요.”
스윽…
고개를 돌리니 왕궁이 보였다. 굉장히 가까운 위치. 뛰어가면 1분도 안 되어 닿을 거리였다.
“뭐랄까… 장난감 궁전 같네.”
“…지하이기 때문이겠죠.”
아그라스가 조용히 웃었다.
“그런 거였군요. 잿가루 성채는 그저 망루에 불과했던 건가요?”
“뭐?”
“지하에 전부 꽁꽁 감춰두다니, 난쟁이답군요.”
시리온이 잿가루 성채 지하에 감춰둔 것. 그건 무기도, 기관도 아닌 난쟁이 그 자체였다.
‘어째서, 그렇게 말한 거지?’
무기와 기관이 잠들어 있다 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온 것인데, 정작 뜬금없이 난쟁이 왕국이라니.
“안으로. 예를 갖추게.”
“그런 거 모르는데….”
“…그럼 그냥 묻는 말에 대답만 잘하면 되니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게나.”
척…
척…
난쟁이 무장들이 좌우로 나뉘어 섰다. 불편하게도 한소미 일행은 그 사이의 길을 걸었다.
작게 만들어진 왕좌에 누군가 앉아 있다.
“어….”
한소미가 놀라 입을 쩍 벌렸다. 왕좌에 앉은 이가 아는 이였기에.
“시리온?”
“…아버지를 아는가?”
“시리온이 아니야?”
“나는 선왕의 후계자 바미온. 그대가 어떻게 아버지를 알고 있지?”
“만난 적이 있으니까.”
그 순간, 왕궁이 들썩였다.
“뭐, …뭐?”
“살아계신단 말인가?”
“왕께서 살아계시다니!”
한소미는 손을 휘저었다.
“아니, 아니. 시리온은 죽었지. 아마도 오래전에.”
“…….”
“그렇다면 그대가 아버지를 만났다는 건….”
“그러니까, 좀 복잡해…. 아니, 이걸 내가 왜 얘기하고 있는 거지?”
한소미가 인상을 찡그렸다가 얘기가 진행되려면 어쩔 수 없다고 여겼는지 이어서 설명했다.
“그러니까….”
별무덤에서 있었던 일.
재액의 마법사 마라둠이 성채를 초토화했던 과거로 날아가 그의 악행을 멈춘 일. 또한 시간의 틈에서 시리온을 만난 일까지.
“그, 그 말을 믿으라는….”
“농간입니다! 이건 저 인간 여자의….”
“그마아안!”
콰아앙-!
바미온이 왕좌의 손잡이를 후려치자 왕궁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그런가, 아버지인가.”
바미온의 표정은 뭐라 할 수 없이 서글퍼 보였다.
“어느 날, 마라둠… 그자가 나타났다. 고룡과… 거인과 싸워도 끄떡없던 병사들이 놈의 흉악한 마법에 무릎 꿇었지.”
그가 한소미를 바라보며 물었다.
“…마라둠은 죽었는가?”
“죽었어.”
무장과 대신들이 기겁했다.
“마라둠이 죽었다면….”
“세상으로 나갈 수 있다.”
“드, 드디어….”
이상한 반응.
한소미가 물었다.
“이게… 무슨 소리?”
“우리는… 패잔병들이다.”
다시 조용해지는 왕궁.
“그럴싸하게 멀쩡한 척하지만, 사실은 그저 살아남았을 뿐인 겁쟁이들이야. 그날… 마라둠이 성채를 찾은 그날… 선왕께서 명하셨다.”
– 모두 대피하라! 낙원으로! 어서!
– 아버지!
아직 어렸던 바미온은 시리온의 손에 등 떠밀려 낙원으로 향하는 문까지 다다랐다.
– 바미온, 절대로 문을 열지 마라. 낙원으로 향한 난쟁이들은 네가 지켜야만 한다.
– 아버지! 아버지는….
– 마라둠은 간악한 자다. 저 힘은 우리의 육체를 늙어 병들게 하여 용기와 선의를 빛바래게 한다. 오늘 우리는… 시간에게 패했다.
당시의 패배 선언.
멸망을 앞에 두고 시리온은 훗날을 꿈꿨다.
– 하지만 그 패배 또한 영원하지 않으니! 놈이라고 해도 낙원으로 향하는 문을 강제로 열 수는 없어. 놈을 해치울 만한 방법을 마련하게 된다면… 그때가 되면… 망설이지 말고 난쟁이들을 이끌고 지상으로 와라, 바미온.
어린 바미온의 눈에, 시리온의 웃음이 담겼다.
– 그땐, 네가 왕이다.
바미온이 눈시울을 붉혔다.
“아버지의 마지막은… 어떠했지?”
“내가 만난 건, 시리온이 아니야. 아니… 시리온인가?”
시간의 틈에 남겨진 환영.
그것을 시리온이라 말하는 게, 과연 옳은가?
한소미는 잠시 고민했으나, 간단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시리온은 훌륭했어!”
“…어떤 부분이 말이냐?”
“용감히 싸웠고 어… 대접도 나름 훌륭했고… 친절했어.”
“아버지가 네게 낙원으로 향하는 방법을 일러주신 거겠지. 어째서일까? 어째서….”
그들이 마라둠을 쓰러트렸기에? 마라둠을 피해 숨은 난쟁이들의 존재를 누군가에게 알리기 위해?
“아버지는 그대에게 무엇을 말했는가?”
“이곳에… 기관과 마법이 있다고, 우리가 그것을 거머쥘 거라 말했어.”
“…뭐?”
“아니! 그보다 할 말이 있어!”
“…할 말?”
한소미가 손을 휘저어가며 성채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설명했다. 세 거인 왕이 일부지만 부활했으며 힘을 되찾으려 하고 있다.
부활은 잿가루 성채에서 치러졌으며 성채는 산산이 조각나고 대적자들이 세 거인 왕에 맞서 싸우고 있다고.
“도와줘, 부탁해.”
“홈… 거인 왕….”
대신들이 떠들었다.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홈은 그 옛날 시리온께서도 버거워했던 자! 서둘러 바깥세상의 문을 닫아야 합니다!”
“썩 꺼져라! 인간 녀석들… 어디 열등한 종이 입을 놀려….”
바미온이 현기증을 느꼈는지 머리를 부여잡고 손을 휘저었다.
“모두 나가 있게.”
“도와줘! 부탁이야!”
“…그대들도.”
“잠… 놔!”
끌려 나가는 한소미 일행.
콘지와 신디오가 끌려 나와 한숨 쉬었다.
“…틀렸네.”
“바미온이라는 자만 설득하면 될 것 같은데….”
“상황은 어때요?”
신디오가 전령의 눈을 빌려 전투를 확인했다.
“…수가 많이 줄었어요. 상황은….”
입술을 깨무는 그녀.
한소미가 이를 꽉 깨물고 왕궁을 노려보았다.
“겁쟁이들….”
“문이 닫히면 우리도 나가기 어려워질 거야. 서둘러 나가야 해.”
아그라스가 킥킥대며 웃었다.
“히히히… 아무래도 시대를 끝내는 건 거인 왕이었나 보군요. 처음부터 줄을 잘못 선 것 같아요.”
“너 한마디만 더 하면….”
한소미가 웅얼거렸다.
“난쟁이들은 날 좋아하는데, 이상하네….”
“…네?”
“다들 날 좋아했다고요.”
“어… 시대에 따라 뭐 그런….”
신디오가 어처구니없는 소리에 할 말을 잊고 머뭇거릴 때, 무장이 찾아왔다.
“왕궁으로 들라 하신다.”
모두 화들짝 놀라 눈을 부릅떴는데, 무장의 말이 이어졌다.
“그녀만, 나머지는 대기다.”
한소미를 가리키는 무장.
그녀가 뒤돌며 말했다.
“역시! 난쟁이들은 나를 좋아해!”
남겨진 신디오와 콘지가 중얼거렸다.
“…진짠가?”
저벅…
저벅…
아까는 위압감으로 가득한 왕궁이었는데, 무장과 대신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상태에서는 어색할 정도로 조용했다.
한소미가 다가가자, 바미온이 말했다.
“거기, 멈춰라.”
“윽….”
“겁쟁이라고 생각했겠지. 우리를….”
“어… 어떻게 알았지?”
“크하하하하! 역시나, 나갈 때 표정이 꼭 그렇더구나.”
어차피 들킨 김에 대놓고 말했다.
“겁쟁이 같아.”
“맞아, 겁쟁이다.”
바미온이 왕좌에 앉아 웃었다.
“그날, 재액을 피해 도망친 우리는 모두 겁쟁이다. 대신들도 겁쟁이… 무장들도 겁쟁이… 백성들도 겁쟁이… 그리고 짐도 겁쟁이에 불과하다.”
처연하게 웃었다.
“도망치고… 숨어버린 겁쟁이들. 그저… 오랫동안 살아남았을 뿐인… 나이만 많은 겁쟁이.”
한소미의 기대감과는 달리, 선뜻 나서주지 않은 난쟁이들.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지?”
“…응.”
“아버지였다면, 3초도 고민하지 않고 답했을 것이다.”
“…….”
“망치를 들고 뛰쳐나가셨겠지.”
한소미는 시리온을 떠올리고 피식 웃었다.
“짐은 선왕과는 다르다. 나약하고, 고민만 많은 늙은이지.”
“하지만….”
“끝까지 듣도록. …짐의 넋두리를 들어다오.”
한소미가 입을 꾹 다물었다.
“아버지가 그대에게 말했다. 기관과 마법이 있다고. 이 문을 열면, 난쟁이가 튀어나온다는 말은 하지 않으셨지. 나는 그 뜻을, 이해했다.”
“…뭐?”
“그 말은 그대에게 전한 것이 아니다. 내게 전한 것이다. 망설이고 있을 내게, 떠올리라 말한 것이겠지.”
시리온이 한소미에게 말한 것.
난쟁이를 구하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시간에게서 해방된 순간조차도, 지상으로 향하기를 망설일 이 바미온 혹은 우리에게… 망설이지 말라는 의미였던 거다.”
“…어라?”
쿵…
한소미는 그제야 바미온이 단단한 갑옷을 입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벌떡 일어선 바미온.
“듣거라!”
“예!”
무장들이 우르르 나와 무릎 꿇었다.
“듣자 하니 우리의 기관 지식과 마법을 원하는 듯하다. 그렇다. 우리는 이 힘으로 고난의 시기를 버텨냈다.”
“…….”
“선왕께서 보낸 시간의 해방자가 말한다. 도움이 필요하다고.”
쿠우우웅-!
화르르륵-!
시리온이 쥐었던 망치와 흡사하게 생긴 망치가 바미온의 손에 들렸다.
“내어주도록 하겠다. 무장하라.”
“예!”
대신들이 질겁하며 뭐라 말하려던 순간…
“이렇게 급하게 결정할….”
“아니 될….”
“저들의 말만 믿….”
바미온이 투구를 썼다.
“시간은 우리를 낙원이란 감옥에 가두었다. 떠올려라, 우리가 두려워한 것은 시간이다.”
스으윽…
선왕과 똑 닮은 생김새.
그의 용맹 또한 이어지리다.
“거인 따위가 아니다.”
– 그때가 되면… 망설이지 말고 난쟁이들을 이끌고 지상으로 와라, 바미온.
투구 속에서 강렬하게 빛나는 눈빛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그땐, 네가 왕이다.
강설 일행에게 별무덤에서 벌어졌던 하나의 사건.
한소미만큼은 원정대와 합류할 수 있게 안배한 우르.
오랫동안 존재한 낙원.
각기 다른 사건이지만 결국, 모두 하나의 이야기다.
바미온이 깊게 숨 쉬며 말했다.
“짐은 오늘, 왕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