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31st Piece Overturns the Board RAW novel - Chapter 495
제494화
세상은 변했다.
한날한시에, 빛과 함께 세상이 뒤집혔다. 판데아는 새로운 운명, 그리고 한 번 다녀갔던 손님들을 맞이했다.
낡은 마(魔)와 그만큼 낡은 대적자들이 섭리를 거슬러 다시금 이 땅에 모습을 드러냈고 그를 위해 대륙의 이름과 행성이, 이름이 같은 판데아는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내어주어야 했다.
미래를 위해 바쳐야 할 모든 힘을 현재를 위해 사용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가?
전혀 자연스럽지 않았다.
불사의 재등장과 함께, 이야기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말았다. 판데아에 머무르는 생명들도, 그것을 지켜보는 광기 어린 자들도, 그들에게서 비롯된 광기를 거두어가는 상인들까지도.
“으으음….”
“선배!”
강설의 광기를 도맡아 거래했던 광기 상인 쟈넷이 악귀 가면을 쓴 채로 전망대에 올라 있었다.
그녀가 있는 곳은 심판관의 땅에서도 조금은 특별한 장소였다.
이곳에서는 가느다란 선 같은 것이 거미줄처럼 여기저기로 뻗어 있었다.
그것은 심판관의 대지에서 뻗어 나와 온 우주로 퍼졌다. 새하얀 신앙과 붉은 광기가 심판관의 대지로 모여들게 만드는 기반이다.
매번 큰 거래를 따내고 마는 쟈넷을 졸졸 쫓아다니는 광기 상인 오리아. 오리아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광기 상인인 하트와 함께 나타났다.
“하트, 오리아.”
“드디어 심판관님의 위대한 업적을 눈에 담고자 하시는….”
“대단하지 않아?”
“그렇죠? 역시! 온 우주에 교역망 ‘거미줄’을 만들어낸 건….”
“아니, 업적보다도 말이야.”
쟈넷은 악귀 가면 사이로 슬쩍 보이는 눈동자로 거미줄을 응시했다.
“세상을 팔아넘기는 자들이 이렇게나 많다니, 놀랍지 않아?”
“…에휴, 전 또 출세할 마음을 잔뜩 품으신 줄 알고 기대했잖아요.”
“선배가 어디 그럴 분이야? 실력 하나로 이 자리까지 왔는데 넌 또 어디까지 올라가길 바라는 거야?”
“하긴… 이번에 얘기 들어보니까, 영원의 회랑과 아카식에 접근할 권한까지….”
쟈넷이 빙긋 웃었다.
“승진이야, 승진. 오늘은 그 기념으로 부른 거고.”
“좋은 데 데려가 주는 거예요?”
“말만 해. 나 요즘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가서 누가 좀 짓눌러줘야 해. 내 주머니 좀 털어 가.”
“야호! 신도에서 한잔해요!”
“오리아! 선배가 아무리 통이 크다고 해도 그건 무리야! 너 왜 이렇게 경우가 없어?”
그렇게 말하며 슬금슬금 쟈넷의 눈치를 살피는 하트.
“신도는 물론 괜찮은 분위기에 무척 고급이지. 우리 같은 뜨내기 상인들은 엄두도 못 낼 가격일 거야. 아마 선배가 아니면 평생 발도 붙이지 못할걸? 하지만, 그래도 상도덕이 있는데….”
“좋아, 오늘은 신도에서 마시자.”
“구두를 핥을까요?”
“저를 타고 가실래요?”
하트와 오리아가 무릎 꿇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쟈넷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됐고, 내 이야기나 들어 줄래?”
“얼마든지! 귀를 찢어 네 개로 만들까요?”
“당장 하트 관자놀이에 구멍을 뚫어서 예비 귓구멍을 만들게요!”
“야! 너도 해!”
쟈넷은 교역망을 보며 중얼거렸다.
“저 교역망에 가담한 신들은… 어떻게 됐을까?”
“어… 막대한 힘을 약속받았겠죠? 그야 신앙과 광기를 순수한 힘으로 변환할 수 있는 건 심판관님의 대지가 유일하잖아요?”
“애초에 신들만 이 교역망에 가담한 게 아니니… 이제 광기밖에 남지 않은 행성의 생명체들도 주요 공급원이잖아요.”
“…그렇지.”
“예를 들면… 이번에 선배 고객 중에 그 남자에게도 광기가 쏟아져 들어오잖아요.”
“맞아요! 대체 언제 쓰려는 거야. 아마도 선배한테 물건을 사겠죠? 그럼 우리 또 신도 가는 거예요?”
쟈넷이 묻는다.
“왜 모든 행성의 마지막은 광기로 얼룩지는 걸까?”
“그야… 더는 아무도 믿지 않으니까요? 원시 행성일수록 신앙의 힘은 강하지만, 반대로 신앙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짓들은 뭐 광기나 신앙이나… 라고 할 정도. 발전이나 싸움을 거듭한 행성은 결국에 불신 단계에 이르러 신앙이 멸종하고 광기만을 짜내죠.”
믿음이 사라진 행성.
대개, 초신성 상태에 들어선 행성들이 이러한 말로를 걷는다.
“광기는 불순물이 많지만, 그 양이 방대하고… 신앙은 순수에 가깝지만, 양이 적죠. 뭐 근데… 교역망이 이 둘을 순수한 힘으로 변환해 이득을 취하는 구조라.”
심판관만이 가진 능력.
신앙과 광기를 정제하여 힘 그 자체를 생산해낸다.
본디 가진 신앙보다 더 큰 힘을 원하는 신들에겐 그만큼의 힘을 약속하고, 타락한 자들에게서 만들어지는 쓸모없는 광기를 일정 대가를 지불하고 수거해간다.
“기묘하죠? 광기를 지불하는 생명들도 희망 없는 행성에 살고 있는데, 정작 그들의 볼거리로 팔아 넘겨진 행성도 초신성 단계에 접어들었어요.”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라….”
“어쩔 수 없죠. 그런 신을 섬겼던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탓할 수밖에.”
“심판관님의 밑에서 일하는 우리도… 결국은 그걸 부추기는 것과 마찬가지지만.”
떳떳한 자가 없는 거래.
쟈넷은 거미줄 사이에서 유독 빛나는 실을 바라보았다. 판데아와의 교역로.
“어마어마한 빛이죠? 초신성 단계에 접어들면서 더 많은 이들이 광기를 보내는 까닭에… 행성을 팔아넘긴 신들에게 가는 힘의 양도 어마어마해요.”
“조만간 우주 평의회에서 보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오리아가 말했다.
“선배, 왜요? 정든 거예요?”
“정들긴… 그냥 궁금해서.”
“궁금?”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조만간 따로 알아봐야겠어.”
“뭘요! 궁금해요!”
“신도에 가자.”
“아무것도 상관없어졌어요. 얼른 가죠!”
오리아와 하트가 쟈넷을 과하게 에스코트하며 이동했다.
* * *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판데아에 벌어진 일이 그러했다.
대륙 전체가 지각 변동을 일으켜 많은 것들을 창조하고 동시에 파괴했다.
후우우우우우우웅…
휘겔텅을 시작으로 연방, 그리고 대부족의 땅이었던 비통치 구역까지.
통칭 ‘북부’라고 불렸던 땅은 이제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으로 바뀌었다.
그 결과, 많은 부족과 이종족들이 판데아 이곳저곳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판데아를 통틀어 이런 현상이 계속되고 있었다.
“후우….”
모든 도시가 사라졌다.
눈이 멈추지 않는다.
생명이 이룩한 위대한 건축물들은 진작 눈의 무게를 못 이겨 부서지거나 아예 눈 속에 파묻혀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카스트랭은 빙하아귀를 품고 달렸던 게 마지막 질주였으며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땅은 도리어 누구의 땅도 아니게 되었다.
아니, 애초에 생명은 그 땅을 잠시 빌릴 뿐이다. 이것이 자연에게 돌려주는 과정이라 말하는 자들에게 지금 이 풍경을 보여주면 모두 입을 다물 것이다.
사방이, 온통 눈이다.
시대 유성 에라곤이 불사의 힘에 의해 붕괴하며 그 자리에 있던 모두를 대륙 어딘가로 흩어놓았다.
그만큼, 그날 있었던 사건은 대륙 전체를 뒤흔들 만한 일이었다.
“후우…….”
사박…
사박…
입김을 내뿜으며 누군가 눈 위를 걷고 있었다. 설피(雪皮) 형태의 가죽을 신발에 덧댄 노파가 천천히 눈 위를 걷고 있었다.
어찌나 느리게 걷는지, 걸으면서도 몸에 눈이 잔뜩 쌓여 계속해서 털어내야 했다.
야아옹…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그녀의 지게에 올라 있었다. 눈이 쌓이는 것이 싫은지 중간중간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눈을 털어냈다.
합이 잘 맞는 한 쌍이었다.
노파는 지게를 짊어졌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제법 묵직한 크기의 단지 3개가 일렬로 지게에 올려져 있었다.
아무래도 지게는 단지를 옮기기 위한 수단인 것 같았다. 단지는 노파에겐 꽤 의미 있는 물건인지 그녀는 혹시나 떨어트릴까 애지중지하며 걸었다.
미야아옹…
팟-!
그녀가 등에 짊어졌던 고양이가 갑작스럽게 튀어 나갔다.
“…휴니야. 어딜 가니?”
노파가 한숨을 내쉬며 고양이를 쫓았다.
팍-!
파파파파파팍-!
휴니라는 고양이는 삐쭉 튀어나온 건물의 잔해 옆을 헤집었다.
미야아아아옹!
“홀홀홀… 그곳에 뭔가 있는 모양이구나. 내 힘이 필요하니?”
야아옹…
“어떻게… 힘을 빌려줄까… 말까… 고민이 되는구나.”
미야아아앙!
“화, 화내지 말아라. 장난을 좀 친 거야. 착하지….”
후우우우웅…
노파의 손에 봄이 왔다.
따스함이 감돌며 손바닥에 꽃들이 피어났다.
스르르으윽…
휴니가 파헤치던 눈더미도 서서히 녹았다.
미야아옹…
이젠 되었다는 듯이 휴니가 노파에게 올라탔다.
이제 노파도 이 게으른 고양이가 왜 재촉했는지 알게 되었다.
“오호라… 이건 놀라운 수확이야, 휴니야.”
휘오오오오오오오…
새파란 서리 구슬이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하긴… 이만한 힘이 대지를 뒤흔들어 나를 깨웠는데 결정 하나 발견하지 못하는 게 이상한 일이었지.”
노파가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껴안았다.
“돌아가자, 휴니. 이 정도면 봉인을 잠시나마 견뎌 줄 양일 테니.”
딱딱하게 굳은 푸른 구체를 보자기에 감싸 품에 넣고 이동하는 노파.
사박…
사박…
그녀는 방향조차 분간되지 않는 눈밭을 걸어갔다.
그녀가 만든 임시 거처는 꽤 멀리에 있었다. 하지만 오후 내내 걷다 보니 어느새 도착했다.
나름 고지대에 만들어진 판잣집.
판잣집이 있는 위치는 주변을 암석들이 철통같이 막고 있어 눈의 영향을 덜 받았다.
툭툭…
눈을 털고 들어가는 노파.
끼이이이익…
“무거워라….”
투우웅…
노파는 지게를 내려놓고 무엇이 들었는지 밝혀지지 않은 단지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원래 이 판잣집은 버려진 집이었다. 누구도 찾지 않는 위치에,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집인 듯했다.
노파는 그래서 이 집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 또한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고, 누구도 찾지 않는 이였으니까.
스으윽…
머리칼을 빗질하는 그녀.
거울에 그녀의 얼굴이 비친다.
백골(白骨).
새하얀 해골이 그곳에 있었다.
누군가의 끔찍한 사령술로 깨어난 것일까? 혹, 어둠의 의식을 통해 이 땅에 돌아온 것인가?
흐흐흥…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돌아와야 할 자였다.
판데아가 뒤집힐 때, 그녀 또한 깨어났다. 온갖 마(魔)가 깨어나니 그중에 그녀도 있던 것일지도.
미야아옹…
푸른 구슬을 이리저리 굴리는 고양이.
“휴니, 못써. 홀홀….”
부스럭…
“휴니….”
부스럭…
“자꾸….”
미야아아아아옹!
휴니가 깜짝 놀라 뛰어올라 머리를 빗는 노파에게 달려들었다.
“에구머니나! 깜짝이야. 휴니!”
휙-!
휙휙-!
휴니의 앞발이 한쪽을 가리켰다.
구슬이 있는 방향이었다.
“왜 그러니, 대체… 뭐가 문제….”
“으하아아아암-!”
“…….”
노파의 행동이 멈췄다.
지금, 푸른 구슬이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작은 팔 같은 것이 툭 튀어나왔으니….
“…구슬이 말을 해?”
구슬 역시, 노파를 보고 놀랐다.
“…해골이 말하다니요!”
서로에게 충격적인 상황.
노파는 구슬을 어떻게 이용할지 생각하며 그렸던 여러 가지 계획을 전부 지웠다. 정말로 오랜만에, 말동무를 만났기 때문이다.
“홀홀홀… 소녀는 흑요정 비쉬라고 한단… 해요.”
“…….”
구슬에겐 이목구비가 없었지만, 반응은 곧바로 전해져왔다.
“…할머니?”
“노오오오오오옴!”
머리가 산발이 된 비쉬가 씩씩대며 말했다.
“깨트린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할… 소녀… 소녀 비쉬야….”
“홀홀홀… 이번만 봐 드리지요, 작은 구슬. 그나저나… 어떻게 말을 하는 거지?”
“나도 모르겠어요… 깨어나 보니 이곳인데요?”
“저런….”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의지할 곳도 없어요….”
구슬이 슬퍼하는 듯하자, 비쉬가 미소 지었다. 정확히는 미소를 지었다고 착각했다.
그녀는 백골이었으니, 표정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몇 가지, 네 존재에 대해 생각할 것들이 있구나.”
“네?”
“세상이 이렇게 되기 전, 바로 이 땅에서 왕이 되기 위한 싸움이 벌어졌던 모양이구나.”
“저런….”
“왕을 아느냐?”
“몰라요.”
“근데 왜 아는 척을 해?”
“어라? 그러게요?”
“녀석… 아무튼, 그때 근방에 온통 이상 현상이 가득했으니 너도 그것에 휘말린 것이 아니겠느냐? 아마… 왕의 파편일지도….”
“으으으….”
“왜 그러느냐?”
“속상해서요.”
“무엇이?”
“제가 온전한 존재가 아니라 누군가의 파편이라는 게요.”
비쉬는 점점 이 구슬이 마음에 들었다.
“다른 가능성은요?”
“언 땅에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 거지.”
“그거… 좋은데요?”
“홀홀… 그편이 좋으냐?”
“네! 특별한 것 같아서요!”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이 뭐든 아는 척을 하는구나.”
“할머니면서 소녀인 척하는 것보다는….”
“노오오오오오옴!”
“비쉬가 그렇다는 건 아니고요… 비쉬는 소녀잖아요?”
얼굴에 양손으로 꽃받침을 한 해골 마법사 비쉬가 웃었다. 웃었다고 착각한 것이지만.
“네가 마음에 든다.”
“저도 할, 비쉬가 마음에 들어요.”
노파는 작은 구슬을 가진다.
눈 속에 파묻혔던 물건을 가진다.
“내가 널 가져도 되겠니?”
“아껴줄 건가요?”
“물론이야. 소녀는 물건을 아끼거든.”
구슬이 잠시 고민하다 양팔을 번쩍 들었다.
“그럼 좋아요!”
이로써 둘은 서로를 가진다.
“이름은… 딸랑이가 좋겠구나.”
“…할머니.”
“노오오오오오오오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