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31st Piece Overturns the Board RAW novel - Chapter 501
제500화
스으으으으으…
희뿌연 안개.
강설은 주변의 인기척에 귀 기울였다. 누가 옆에 앉아있는지,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또, 지금 그들과 함께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
“강설.”
그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
“응?”
“너희들을 만난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
아, 기억이 날 것 같다.
“뭐?”
“너희들을 만나, 우리는 변했어.”
혜명이다.
혜명과 미아, 용쟁의 과업 중에 만났던 인연들.
분명, 이곳에서 특별한 그림과 기억을 남겼다.
그런데, 뭔가를… 잊고 있는 것 같은데.
“어떠냐, 강설. 너희도 우리를 만나 조금이라도 변화를 이룬 거야?”
피식…
“글쎄… 어떨까?”
다시 이때로 돌아간다면, 꼭 확인해야만 하는 것을.
별안간, 강설의 고개가 건너편으로 향했다.
추억이라 부르는 한때를 화폭 안에 담는 화공에게로.
스윽…
슥…
붓질을 이어나가는 화공.
강설은 자신도 모르게 조금 일어나 고개를 꺾었다.
이름도 모르고, 누구인지도 모르는 화공. 얌전히 그림만을 남기고 사라진, 정체불명의 존재.
‘봐야 해!’
강설은 지금 이 장면이 꿈이라는 걸 자각했다. 당연하게도 꿈에서 바라는 일이 이뤄질 리가 없었다.
분명 그럴 리가 없다.
한데…
‘…뭐?’
상대는 아주 편안하게 얼굴을 보여주었다.
노인의 얼굴.
강설은 상대가 어째서 얼굴을 보였는지 눈치챘다.
그것만으론,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상대의 얼굴이 계속해서 변하고 있었다.
아이의 얼굴이 되었다가, 청년이 되었다가, 이제는 여인이 되었다가.
딱 하나, 바뀌지 않는 건 그의 눈일 것이다.
눈만큼은 그대로였다.
상대가 숨결을 내뱉었다.
“…아직인가.”
“…뭐?”
그 순간, 꿈이 정지했다.
대화를 나누는 강설과 상대를 제외하곤 모두 석상처럼 굳었다.
인물도, 배경도.
푸스스스스스…
흩어지는 꿈.
“허어억….”
강설이 숨이 넘어갈 듯 호흡을 거칠게 하며 벌떡 일어섰다.
“후우….”
사실, 강설은 이것과 같은 꿈을 2년 전에 꾸었다.
불사가 시대를 뒤틀었을 때다.
한 번 경험한 꿈이기에 그리 당황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스윽…
자리를 걷은 그는 찬장에서 조각난 잎을 꺼냈다.
운 좋게 발견한 자생지에서 따온 잎이었다. 그것이 곧 차로 우러났다.
차를 한 모금 마신 강설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슬슬, 겨울이 물러나고 있었다.
아직은 쌀쌀했지만, 새순이 눈을 뚫고 나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2년.
그날로부터 2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강설은 얼마 전 만났던 쟈넷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시간선 붕괴라….”
쟈넷은 시간선 붕괴에 대해 이것저것 설명했었다.
– 과거가 바뀌었을 수도 있고, 미래가 의도되었을 수도 있어요.
– …그런 게 가능한 겁니까? 신이 아닌 이상….
– 아뇨, 신조차도 불가능해요. 신도 시간에는 손댈 수 없어요. 시간은 그 자체로 거대한 존재라 신이 그것을 손대려 하면 거꾸로 잡아먹힐 뿐이에요.
그녀는 이 말을 하며 떨었었다.
그만큼 시간선 붕괴에 대해 염려하고 있는 듯했다. 우르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조금 더 친절한 설명을 기대할 수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곁에 없었다.
– 그게 시간의 신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죠.
– 자연적으로 수복할 순 없는 겁니까?
– 원래는 가능해요. 시간은 그런 존재니까. 하지만… 이건 달라요.
– …다르다?
쟈넷은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벌려 소리를 내었다.
– 의도했어요, 누군가가.
– 음…
– 의도적으로 특정 시간대를 헤집어 놓아 상처가 얼마나 큰지조차도 알 수 없게 되었어요.
– 제게 미칠 영향은?
– 글쎄요… 지금으로선 아무것도 알 수 없네요.
결국, 명확한 답은 얻지 못했다.
강설은 옷걸이에 걸린 천을 바라보았다. 곧, 그 정보가 쏟아졌다.
[새로운 밤]
등급 : 광기
적정 레벨 : 75 – 85
방어력 : 160
저항력 : 145
내구력 : 300/300
무게 : 0.1kg
작은 까마귀를 위한 선물.
기본 능력 : 최대 그림자 공간에 비례한 모든 능력치 상승.
특수 능력 : 착용 시 그림자의 일부로 취급. 어울림 장비 착용 부위의 수만큼 어울림 효과가 강화된다.
실제로 착용하면 능력치가 얼마나 상승했는지가 표시되는 망토.
“신경 써준 거겠지.”
쟈넷 나름의 배려일 것이다. 다만, 강설의 취향보다도 그녀의 취향이 듬뿍 담긴 듯했다.
특수 능력이 지나치게 화려했다.
망토는 착용하는 순간, 천의 질감이 아닌 그림자의 질감으로 바뀐다.
또 화려해서 사용할 수 없다고 하기엔, 특수 능력의 효과가 압도적이었다.
강설은 그림자를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경지에 오른 자. 그 때문인지 망토를 신체 일부처럼 다룰 수 있었다.
그것이 가져다주는 압도적인 효율에 가끔 놀라곤 한다. 일상에서도 그러한데 전투가 벌어졌을 땐 또 어떤 수준일지….
강설은 일상복을 벗고 부드러운 가죽 장비를 착용했다.
몇몇 부위의 장비가 2년 전과 달라져 있었다.
그건 그의 동반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일어났어?”
“응, 늦잠인가?”
“그 정도까진 아니야. 약속도 없는데 뭐.”
카렌이 코를 찡긋하며 맞이했다.
그녀 역시 군데군데 갑주가 달라져 있었다.
“오늘이군요.”
카루나가 정중히 인사했다.
“응, 오늘이지.”
기한을 정해두고 머무른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이곳을 떠나는 시기 정도는 가늠해두었다.
“모두 잘 있을 겁니다.”
탄시아도 쟈마드도.
그리고 우르도.
우르가 부활했다는 건 얼마 전 눈치챌 수 있었다. 소환사와 소환수의 계약이 끊어졌다.
쟈마드 역시 마찬가지.
“그 말이 맞을 거야.”
“혹시 몰라, 우르는 도망갔을지도?”
“글쎄….”
카렌의 농담에 강설이 시큰둥하게 대꾸하자 그녀도 웃었다.
“글쎄라는 말이 적당하겠네, 그 자식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죽음을 맞이했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부활했다.
우르는 끝끝내, 혼자서 계약을 끊어내고 봉인마저 풀어낸 것인가.
그럼 알카트론의 악마가 깨어났으니, 세상은 도탄에 빠질까? 세상이 조용한 것을 보니,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러니 지금은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것이 좋을지도.
지금은 다른 중요한 게 있었다.
‘불사….’
행성의 잠재력을 연소해 마를 불러낸 자.
강설은 불사가 무슨 꿍꿍이인지 눈치챘다.
‘녀석은… 도전자 이상의 존재가 되려는 거야.’
그건 불가능하다.
아니, 분명 불가능했었다.
강설의 전설적인 말들이 어째서 전부 도전자 상태로 승천에 도달하려 했겠는가.
‘그만한 시대력을 모을 수 없어.’
그의 전설적인 말들이 한 시대를 휩쓸고 지나갔다. 위대한 모험들도 경험했고 강력한 적들도 쓰러트렸다. 모두 그렇게 도전자의 위치에 올랐다.
하지만, 한 시대에 담기는 힘의 총량이란 뻔했다. 오히려 한 시대에 도전자가 열이나 탄생한 것부터가 기적과도 같았다.
‘하지만 이번엔….’
불사가 세상을 완전히 뒤집어엎었다.
낡은 시대를 불태워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냈다.
막대한 시대력을 품은 괴물 같은 존재들이 별의 힘으로 부활해 다시금 세상에 돌아왔다.
강한 힘을 가졌다는 건, 그만큼 많은 시대력을 품고 있다는 의미.
‘놈은 시대력을 남김없이 긁어모을 생각이야.’
미친 짓이다. 스스로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세상을 불태운다니. 강설이 불사였을 때는 상상조차 못 했던 수법이었다.
‘하나… 그것이 실로이, 너였던 건가.’
자유를 되찾은 실로이의 생각이라면 그것이 바로 불사의 본 모습이었다.
과격하고 거친 방법.
힘만이 진리를 표방한다면, 그녀는 충분히 그것이 가능했다.
강자니까.
씨익…
‘그렇게 놔둘 줄 알고?’
– 사랑해, 아버지.
그녀의 마지막 말이 맴돌았다.
지난 2년간.
시대 전쟁, 최전선에 서서 병기를 휘둘렀던 시간. 싸움이 끝나면 병기는 녹아 농기구가 되어 삶을 일궈야 한다.
강설의 지난 2년이 그런 시간이었다.
스르륵…
그의 손안에 그림자로 만들어진 주사위가 회전했다.
파아악…
그것을 꽉 쥐자 주사위는 가루가 되어 흩어진다.
펄럭…
새 망토를 둘러매자 그림자가 넘실거렸다.
“이제, 시작하자.”
* * *
당연히 시대 전환 이후에도 멀쩡하게 유지되는 도시도 있었다. 기적적으로 크게 피해를 받지 않고 살아남은 도시.
보통 이런 도시들은 주변에 큰 피해를 받은 지역과 가까이에 있었다.
“원정은 그럼 오늘 밤에 출발하는 거야?”
“맞아.”
“굳이 밤에 출발할 이유가 있어?”
“왜, 쫄기라도 했어?”
“누, 누가 쫄았다고. 그냥 합리적인 의문이잖아.”
“우리 목표는 생존자 구조니까. 이곳에 장비가 도착하는 시간이 밤이고 의뢰인이 최대한 빨리 출발해줬으면 한다고 했거든.”
“잠은 언제 자고?”
“적당한 연극이야. 뭐 출발은 서두르는 것처럼 하고 실제로는 낮에 자리를 잡고 휴식해도 되는 거니까.”
“아하… 그러면 이해가 되네.”
급하게 구성된 원정대.
사정이 꽤나 특이했다.
“근데 애초에 구출할 수는 있긴 한 거야? 암흑천지에 갔다가 생환한 사람은 없잖아?”
“없긴 왜 없어. 동방에도 있고 남쪽에도 있었는데.”
“정말?”
“그래, 살아 돌아올 수 있다는 게 확실해지니까 다들 뛰어드는 거지. 근데 애초에 이걸 왜 묻는 거야?”
“왜긴! 우리가 암흑천지로 향하니까지!”
“네가 그걸 왜 걱정해? 넌 암구(暗球) 밖에서 색적만 담당하는데.”
“…그렇지? 근데 막연하게 불안해서 말이야.”
“걱정 안 해도 괜찮아. 저번에도 비슷한 일을 맡았었으니까. 그때도 무사히 돌아왔어.”
“…투입된 모험가들은?”
여자의 질문에 남자는 입맛만 다시다가 대답했다.
“뒈졌지.”
“오….”
대화는 끊어졌다.
이곳은 남부와 서부를 경계 짓는 위치. 원래는 스비렌이라는 왕국에 속한 메유라는 도시인데, 사정이 좀 특이했다.
2년 전, 시대 전쟁 최후의 날 스비렌의 왕도와 큰 대도시들이 암흑천지에 휩쓸린 것이다.
졸지에 본국을 잃은 메유는, 뭐 어떻게든 살아남았다. 지각 변동으로 새로운 지형과 마물이 잔뜩 등장하거나 큰 피해를 받은 다른 도시들이 있으니 징징대봐야 아무에게도 위로받지 못할 것이다.
메유가 암흑천지와 무척 가까운 위치이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위험을 찾아다니는 모험가들이 대거 쏟아져 들어왔다.
특히 대륙 곳곳에 암흑천지가 등장한 지 얼마 안 되는 초기에는 말이다.
그 악명이 널리 퍼지기 전엔 꽤 호황을 맞았다.
물론… 얼마 안 가 모험가 태반이 절멸하는 수준에 다다르자 암흑천지로 향하는 발길은 차츰 줄어들었다.
메유에서 생계를 꾸려나가던 모험가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둘.
떠나든가, 살 방도를 찾든가.
살 방도는 당연하게도 암흑천지와 관련된 일들이다. 그곳에 몸을 던지는 건 자살희망자들이고 보통 그곳까지 향하는 일에 힘을 보태는 일 정도다. 최근 암흑천지가 넓어지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기는 한데, 휩쓸리지만 않으면 문제없었다.
대화를 나눈 모험가 나이로라는 여인과 파벨이라는 남자도 그랬다.
나이로가 발을 떨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스으으으…
메유에 어스름이 당도했다.
노을과 불안감을 싣고.
“응…?”
푸드드득…
“왜 그래?”
“저것 좀 봐.”
“호… 망할….”
“…불길한 징조인가?”
수십 마리의 까마귀 떼가 마을로 날아들었다.
저마다 지붕을 점한 채로 울었다.
까아아악…
“스비렌에서 까마귀는 길조였어….”
“이건 암흑천지에 휩쓸린 국왕이 봐도 눈살을 찌푸릴 광경 아니야?”
“어… 그렇긴 하지.”
“나와, 슬슬 준비하자.”
“…응.”
암흑천지로 향하는 원정대가 마을을 떠날 때쯤, 메유에 일단의 모험가들이 도착했다.
그중 한 사람이, 마을에 발을 들이자 특수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림자의 왕이 메유에 당도합니다.]
[지고의 경지를 넘어선 자만이 왕의 존재를 눈치챌 수 있습니다.]
……
메시지를 확인한 강설이 피식 웃었다.
“이런 게 있을 줄이야… 앞으론 주의해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