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31st Piece Overturns the Board RAW novel - Chapter 506
제505화
“가만… 차, 차멜리라면….”
“설마… 차기 교황 후보?”
아바니와 신바가 벌떡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차기 교황이라고?’
강설은 그녀가 성국 바라노아의 순혈주의자 세력을 등에 업었다는 것 정도만 알았지, 그렇게까지 중요한 인물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관심이 없었을 뿐이겠지만.
“여행자들이로군요. 혹, 제 방문이 여독을 푸시는 데 방해가 되었나요?”
“아, 아아아아니에요! 그럴 리가….”
“이, 이쪽으로 앉으세요! 여기가 따뜻해서….”
상인들의 머릿속에서 주판 튕기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어떻게든 안면을 트기만 하면 언젠가 그 인연을 써먹을 수 있을 터.
강설이 차멜리를 바라보자, 그녀는 짧게 답했다.
“저와 같은 인물이 바라노아에는 수십이나 존재해요. 그러니 아무것도 아닌 지위죠.”
그렇다면 이해가 되었다.
성국 바라노아의 힘을 일반적인 왕국 정도로 판단해서는 안 되었다. 이제까지의 성국은 축적한 힘을 민생을 위해, 혹은 포교 활동에만 사용했었다.
언뜻언뜻 드러났던 그 꺼림칙한 힘은, 절대로 작지 않았었다.
그리고 시대 전쟁 이후로 들려온 소식에 의하면, 바라노아가 주변국들을 집어삼키며 확장에 열을 올리고 있다 했다.
이제까지 쌓아온 힘을 외부로 표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바라노아가 아무리 썩어빠진 국가라지만 의아함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바라노아를 둘러싼 주변국들의 세력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
실제로 강설에게 바라노아를 거점으로 활동했던 말이 있었으니, 그건 확실했다.
바라노아가 내재한 힘이 강하긴 했지만 성국을 견제하는 주변국들의 힘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확장 공세를 이어간다는 건…
‘모종의 거래가 있었든가… 혹은, 바라노아가 내 예상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지게 됐든가.’
전자의 이유라면 그다지 신경 쓸 필요는 없었으나 후자의 이유라면 조금은 경계해야 했다.
성국의 잘나신 작자들은, 상당히 괴악한 면모를 지녔으니 말이다.
아무튼, 차멜리가 교황 후보이기는 했지만 그리 막강한 힘을 쥐지는 못했다는 것은 단편적으로도 드러났다.
마차 한 대, 시중을 드는 이들도 적어 보일 뿐만 아니라 호위하는 순례자 또한 그 수준이 높지 않았다.
스윽…
“차멜리 님, 이러실 때가 아닙니다. 지금도….”
게다가 함부로 대화에 끼어들기까지.
“제 지난 여정 중, 어느 때보다 지금이 중요하다는 걸 모르시나요?”
“그게 무슨…?”
“…아니에요, 물러나 계세요.”
“전 교구장님의 안전을 책임질….”
차멜리가 싱긋 웃으며 강설에게 물었다.
“제 안전, 곁에 있는 동안은 괜찮은 거겠죠?”
강설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물론입니다.”
“들으셨죠? 잠시만 물러나 주시겠어요?”
“……그러시다면, 자리를 피해드리겠습니다.”
차멜리가 강설에게 다가가며 귓속말했다.
“따로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강설이 잠시 아바니와 신바를 보았다.
아바니와 신바는 대충 돌아가는 상황으로 차멜리가 강설과 단둘이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한다는 걸 눈치챘다.
끄덕, 끄덕, 끄덕…
차멜리가 그들을 보지 않는 사이에 맹렬히 끄덕여지는 고개.
스윽…
강설이 먼저 일어난 차멜리를 따라나섰다. 수풀 속으로 들어가는 듯했으나 그리 먼 곳까지 향하지는 않았다.
“이곳에 오기 전, 한 주술사를 만나 점괘를 들었어요.”
“점괘라… 그런 것도 믿으십니까?”
“이상한가요?”
“일단은.”
“이상하군요. 하긴… 일단은 신자니까요.”
차멜리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여행 중에 귀한 사람을 만나게 될 테니, 조급해하지 말라더군요.”
“…….”
“모든 게 순리대로 흘러가리라고.”
“귀한 사람이란 게….”
“글쎄요… 제가 거쳐 간 인연 중에 귀한 사람이라 부를 만한 인연이 단 몇밖에 떠오르지 않네요.”
“…살아있었군요, 차멜리.”
강설은 차멜리와의 재회가 가져오는 감정이 평범하지 않음을 눈치챘다. 어딘가, 단정 지을 수 없는 오묘한 감정이었다.
“…그러게요.”
“같이 계시던 분들의 면면이….”
“조금 달라졌죠?”
“…많이.”
그녀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오랜 세월 절 보살펴주신 분들은… 전부 죽었거든요.”
“…….”
“제가 걸음마를 떼기 전부터 곁을 지켜준 고마운 분도 먼 곳으로 떠나셨어요.”
이유를 묻진 않았다.
시대 전쟁, 혹은 바라노아에서의 비사. 무엇이든 간에 이미 벌어진 일이었으니까.
강설은 차멜리의 얼굴에서 그늘을 거두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일행이 아까부터 신변에 큰 신경을 쓰고 있는 듯한데,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쫓기고 있어요, 지금.”
“…네?”
배시시 웃는 그녀.
“외부인에게 자세히 말씀드릴 순 없지만, 교국 내부의 알력 때문이에요.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권력 싸움.”
“복잡한 일이군요, 하지만….”
과거의 강설은 그녀를 단순히 바라노아에서 멀리 떨어진 교구의 수장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어느새 그녀는 전보다 대단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성장하셨군요.”
“저, 성장…한 건가요?”
“이제 당당히 본국에서 노회한 늙은이들과 싸움을 벌일 실력이 되시는 거니까요.”
“아하하하! 뭔가요, 그게….”
그녀는 강설과의 대화가 만족스러운 듯 연신 웃었다.
“그래도… 기분이 좋은데요, 그 칭찬.”
하지만, 웃어넘기는 건 여기까지.
강설은 미소를 지우고 말했다.
“도움이 필요한 겁니까?”
“…도와줄 수 있나요?”
“…….”
강설은 순간 멈칫했다.
이전까지의 강설이 자유로운 존재였다면, 지금은 한정된 자유를 가진 존재였다.
불사의 계획을 막기 위해, 또한 승천을 각오하고 시대력을 끌어모으기 위해.
이제는, 전진해야 할 때였다.
바라노아에 얽힌 사건이 무엇이든 간에, 그의 길과 반대되는 것이라면 함부로 끼어들 수가 없다.
또한, 이 일이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라면 더더욱.
“형제님.”
“그렇게 불리는 건 오랜만이군요.”
“다른 이름이 있었던가요?”
“…강설.”
차멜리는 놀랍다는 표정을 짓고 말했다. 강설이 누군가에게 스스로 이름을 밝히다니.
“변하셨네요, 많은 부분이.”
그녀는 달빛을 바라보며, 강설에게 물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때를 기억하시나요?”
기억한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우데닌, 고행의 미궁. 당신은 저와 마주하기 전부터 이미 일대의 유명 인사였죠.”
고행자라 이름 붙여졌던 그 시절.
강설은 차멜리를 만났었다.
“흑기사 토벌 건과 알카트론 원정까지… 이제는 모두 너무 예전 일처럼 느껴지네요.”
“그만큼 시간이 흘렀으니까.”
수년의 시간.
초짜 모험가는 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왕이 되었다.
“어떤가요?”
“…무엇이?”
“흐른 시간만큼, 우리는 앞으로 한 발짝 내디딘 걸까요?”
알았다.
강설은 차멜리를 만난 후에 느꼈던 기묘한 감정이 무엇인지, 그 근원에 다다랐다.
흘러간 시간에 대한 그리움이다.
“마엘과는….”
“아! 마엘! 하필이면 자리를 비웠을 때 제가 도움을 청했나 봐요. 하지만 다행히도 급하게 지원을 약속했어요. 정말… 고마운 친구죠.”
마엘, 차멜리.
모두 그리웠던 이름이다.
“그렇군요….”
“시간이 흘렀음에도 세상은 여전히 버겁네요. 저는 약자일 뿐이고 시류는 어지러워요. 전보다 더 큰 혼란들이 민중을 괴롭히고 있어요. 아마… 모두가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거예요. 한데….”
그녀는 강설의 흔들림없는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만은, 여전히 폭풍 속을 거니는군요. 방랑자여.”
차멜리가 단호하게 말했다.
“도움이 필요하냐고요? 필요해요. 하지만… 억지로 시간을 내줄 필요는 없어요. 당신의 힘은 세계에 더 이로운 방향으로 쓰이는 편이 좋을 테니까요.”
[성국 바라노아의 차기 교황 후보가 된 차멜리. 당신과 오래전 인연이 있던 그녀가 도움을 청해왔습니다. 모든 일을 판가름할 큰 도움을 줄 수도, 혹은 간단한 일을 돕는 정도로 그칠 수도 있습니다. 이 결정은 매우 중요한 결정이기에 신중하게 답해야 합니다.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1. 차멜리, 당신의 어려움을 지나칠 수 없습니다.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돕겠습니다.
2. 차멜리, 안타깝게도 나에겐 지금 시급하게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도와주지 못해 미안합니다.
……
* * *
강설은 차멜리가 스스로 헤쳐나갈 수 있을 정도의 시련 앞에 그녀를 데려다주기로 했다.
유물회의 지원 병력과의 접선 장소까지만 호위해주기로 한 것이다.
원래 생각했던 경로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 정도.
“흐흠… 차멜리 님 이건….”
“네?”
“걸어가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습니까? 추격자들에게 언제 뒤를 내주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다그닥…
다그닥…
차멜리가 탄 마차의 말들은 달리지 못했다. 애초에 그녀의 마차는 빈자리가 없었기 때문에 강설이 비집고 들어갈 틈조차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호위인 강설이 도보로 걸었으며 마차 또한 그 속도에 맞추었다.
마차가 걸어오는 사람을 위해 속도를 맞추다니, 남들이 본다면 지극히 어리석은 행동일 것이다.
“그리고… 어째서 저 사람들까지….”
“우연히 길이 겹쳤다네요.”
아바니와 신바, 그리고 그들의 호위인 클루지까지.
그들 역시 마차를 따라 이동하고 있었다.
흐히힝…
보따리를 멘 노새까지 데리고.
순례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강설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기에.
“대체 저자가 누구길래 이런 얼토당토않은 행동을 하시는지….”
“유물회와의 접선 장소까지 호위. 그것만으로 이번 일정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예요.”
“…그 정돕니까?”
“내친김에 마을이라도 들렀다 가는 건 어때요?”
신참 순례자 한 명이 고개를 맹렬히 끄덕였다.
“조, 좋아요.”
“…자매!”
“읍….”
마차 안에서 웃음꽃이 피었다.
그들은 오후쯤, 마을에 도착했다.
차멜리가 강력하게 주장한 탓일까, 경계하던 순례자들도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분위기에 휩쓸렸다.
당연히 강설은 물론이고 아바니 일행까지 마을에 머무르게 되었다.
아바니는 강설과 차멜리 모두에게 말했다.
“아하하! 저희는 여기서 조금 묵다가 가시는 방향과는 다른 곳으로 향할 것 같아요.”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이었어요! 저희 이름 꼭 기억해주세요!”
“교구장님께서는….”
“아바니, 신바. 자매님들과의 오늘의 만남을 기억할게요.”
“시간 남으실 때 혹시 기도도….”
“신바!”
아바니가 화들짝 놀라 소리치는데 차멜리는 웃을 뿐이었다.
“얼마든지요. 여행자의 행운을 기도드릴게요.”
식사를 할 만한 곳으로 찾아 들어가니 주인이 성의 없이 맞았다.
“앉으슈, 무엇으로 드릴까?”
“간단한 채소와 마실….”
으적… 으적…
순례자들이 주인에게 주문하는데 강설은 옆자리에 로브를 쓴 남성이 먹고 있는 음식에 관심이 갔다.
주인이 강설에게 묻자, 그가 답하려 했다.
“댁은?”
“이분이 먹는 것과 같은 걸로….”
그때, 가만히 식사하던 남자가 중얼거렸다.
“이건 최악이에요! 먹지 마욧! 다른 걸 시켜야 해!”
“뭐? 이 자식이….”
“이딴 걸 돈 주고 팔다니, 양심이 너무 없는 거 아닌가요!”
주인이 남자의 앞에 선 다음 말했다.
“말 다 했어?”
“틀린 말이었나요?”
“아니, 사실 그 요리는 자신 없었어. 그러니까 다른 거 시키라고 했잖아.”
“젠장할… 이렇게 요리를 못 할 줄 누가 알았나? 혹시 눈 감고 만든 거예요?”
“뭐? 하하하하하! 신랄한데!”
“해야 하는 말을 했을 뿐이에요! 이러다 당신 망한다고. 난 걱정하는 거예요!”
“어차피 이 마을엔 가게도 몇 없어서 괜찮아. 이리 줘, 다른 걸 내줄게. 돈은 안 받고.”
“아니에요! 먹던 거 마저 먹지요. 대신에 옆에 앉은 이 친구에게나 잘해줘요. 제기랄, 나 같은 불행한 미래를 맞이하지 않게.”
“…그러지.”
강설은 옆자리의 남자에게 관심이 갔다.
끼이이익…
“어? 여기서 또….”
“으… 창피해.”
아바니와 신바도 이미 작별을 했지만, 마땅히 식사할 곳을 찾지 못한 듯했다.
강설 일행과 눈인사를 나눈 그들은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작은 마을의 작은 가게.
그곳에 많은 이들이 모였다.
평범한 상인 일행.
정체 모를 남자.
바라노아의 차기 교황 후보와 순례자들.
그리고 거기에 강설 일행까지.
강설은 이 공간에서 이유 모를 안락함을 느꼈다. 오늘 역시 평범한 날 중 하나일 뿐일까.
강설이 로브의 후드를 깊게 눌러쓴 남자에게 물었다.
언뜻언뜻 그의 살과 이목구비의 일부는 보였지만 그 전체적인 인상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를 가시는 길입니까?”
“글쎄… 나는 지금 어디로 가는 걸까요? 누가 좀 알려줬으면 좋겠네요… 친구를 만나면 물어봐야겠어요.”
알 수 없는 대답에 강설이 질문을 바꿔보려는 찰나.
“친구를… 오래전에 멀리 떠난 친구를 찾고 있지요. 분명히 이 몸을 사무치게 그리워하고 있을 텐데 말이지요!”
“그렇군요.”
“…….”
대화가 잠시 끊어진다.
말투가 특이하긴 했지만, 귀로 듣는 건 거슬리지 않았다.
“친구분은 그럼 어디에….”
남자가 말했다.
“그것도 친구에게 물어봐야겠어요.”
괴상한 남자와의 괴상한 사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