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31st Piece Overturns the Board RAW novel - Chapter 542
제541화
촤아아아아…
원정대가 항해를 시작한 지도 벌써 꽤 되었다. 단정히 하는 걸 귀찮아하는 자들은 뭍에서 잘랐던 수염이 벌써 거뭇거뭇을 넘어 수북해졌다.
“슬슬 대비해야 하긴 하겠군.”
옆에 있던 자빌이 수평선을 바라보며 한 얘기.
“음….”
“적란운이다. 공교롭게도 원정 전 미리 얘기했던, 위험 해역이 나타나는 시점과 딱 맞아떨어지지.”
위험 해역.
원정대보다 먼저 신대륙에 도전했던 자들의 소식은 전부 이 근방에서 끊어졌다.
그들의 모습은 폭풍과 함께 사라졌고, 소식 역시 들려오지 않았다.
즉, 이 근방에서 어떤 문제를 맞닥뜨렸을 확률이 매우 높았다.
그리고 이제 원정대가 그 문제를 마주할 시간이 왔다.
“이 배에 타 있는 건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뱃사람들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여기가 그 노련한 뱃사람들을 잔뜩 잡아먹은 곳이니, 긴장은 늦추지 말자고.”
“…그러지요.”
강설이 탄 배의 선장이 자빌의 얘기를 듣고 기분이 나쁜 듯 돌아서며 말했다. 그러나 자빌의 이야기는 직설적이긴 했지만 전부 맞는 말이었다.
“어떤 배도 건너간 적 없는 해역이라….”
“탈리아드는 건넜다.”
“아, 한 무리 있군.”
자빌이 선실로 휘적휘적 걸어 들어갔다.
아마도, 큰비를 맞닥뜨리기 전 휴식을 취해두려는 듯했다.
강설도 이제 좀 혼자만의 시간을 누릴 수 있게 됐는가 싶어 주변을 돌아보는데, 가까이 오는 이들이 있었다.
“자빌은?”
“…들어갔다.”
퐁.
레그리프가 조그마한 병을 열었다.
꿀꺽… 꿀꺽…
그녀는 항해 내내 취해 있었다.
지금 저 병 안에 든 것도 럼이었고.
“술 냄새….”
“이히히… 몸은 이래도 분명히 성인이라고, 나! 나이도 찰 만큼 찼고. 어쩌면 우리, 비슷한 나이가 아닐까?”
“내 쪽이 확실히 위다.”
“…그래? 아님 말고.”
스윽…
레그리프의 술병을 슬쩍하려던 그윈의 손이 그녀에게 붙잡혔다.
“…제정신이야, 그윈?”
“나도 성인인걸.”
“거짓말하지 마, 넌 아직 성인 아니야.”
“…어차피 우리밖에 모르는 건데 그냥 넘어가지.”
“안 돼. 누나 말 들어.”
“으음….”
레그리프가 자빌이 언급했던 적란운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폭풍이네! 드디어 오나?”
“여기서부터가 진짜라는 거겠지.”
“나 살짝 무서운 것 같아.”
“다행이군. 난 너무 무서운데. 살짝 무서운 거라면 괜찮다.”
강설이 진지하게 농담을 던지자, 남매가 피식 웃었다.
고르고지아에 도착했을 때, 강설은 아군과 적군을 선택할 수 있었다.
지금 눈앞의 남매도 그 선택지 중 하나였다.
“자빌과는 어떻게 만난 거지?”
“응? 자빌?”
강설은 오랜만에, 둘의 얘기를 듣고 싶었다.
“둘은 남매라고 하지 않았나? 자빌과 굳이 함께 다니는 게 신기해서 그래. 일단은… 평범한 자는 아니니까.”
“아하하하! 맞아, 자빌! 불사 탈리아드의 심복이었던 남자이자 불사가 사라지면서 함께 사라진 사람.”
레그리프가 코를 찡긋했다.
“그리고 겉만 보면 덩치 큰 괴팍한 녀석이지. 사실은, 같이 다니게 된 데에는 사연이 좀 있어.”
“사연?”
“도움을 받았거든. 일방적으로.”
“도움이라… 목숨을 빚졌나?”
“비슷해! 그윈, 그래도 우리 자빌이랑 꽤 오래 같이 다녔지?”
“…응.”
강설은 남매는 믿어도 자빌은 믿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에 대해서 더 많은 정보가 필요했다.
“너희는 그럼 그의 뜻대로 움직이는 거인가?”
“에이, 그 정도는 아니고. 저주에 해박한 친구라 도움이 돼서 같이 다니는 거야. 우리는 우리 나름의 목표가 있어. 자빌과는 서로 가는 길이 비슷한 거지! 우리는 우리의 목표를 위해 움직이고 그런 와중에 겸사겸사… 자빌의 숙원에도 관심을 주고 그런 거야.”
“너희만의 목표라… 너희의 목표….”
강설이 싸늘한 눈으로 남매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 팔의 문신 때문인가?”
멈칫.
남매가 바로 답하지 못하고 뜸을 들이다 물었다.
“언제 본 거야?”
“출항 전날, 부주의하더군.”
“아하! 그때 좀 취했었나?”
자빌과 남매는 출항 전날 강설을 찾아와 얘기를 나눴다. 그들 역시 고르고지아에 발을 들인 후 황금 왕에게 노려질 위험도 있었고 다른 자들에겐 털끝만큼도 신뢰를 얻지 못했으니 고립될 수도 있다는 판단에서 강설과 손을 잡고자 했다.
강설은 상대가 자빌뿐이었다면 뿌리쳤겠지만, 남매는 적어도 강설의 말이다.
뿌리칠 수 없다.
오히려 더욱 끌어안지 않는 게 다행이지.
“…….”
끄덕.
그윈과 레그리프가 소매를 걷어 각자의 양팔을 난간에 얹는다.
남매는 확실히 남들과 달랐다.
레그리프는 왼팔, 그윈은 오른팔이 기괴한 문신으로 가득했다.
그림인 것 같기도, 문자인 것 같기도 한 문신.
‘이 색감….’
자빌의 얼굴에 새겨진 X자 형태의 문신과 똑같았다. 자빌이 남매에게 손을 쓴 것이다.
“이건….”
“우린 저주받았어. 원래는 더 끔찍한 모습인데 자빌이 또 다른 저주로 억눌러 놓은 거야.”
“…이 저주가 아니면 둘은 어떻게 되지?”
“하하! 바로 뭐 문제가 생기거나 하진 않아. 가끔 발작을 일으키거나 사회적으로 크게 실례를 하는 정도?”
“누나와 나는 자빌의 저주가 없더라도 어느 정도 힘을 통제할 수 있었어. 그게 자빌 덕분에 더 수월해진 거고.”
“야! 너 왜 이 사람한테 반말해!”
“누나가 먼저 반말했잖아!”
“나는 나고! 너는 너잖아!”
“남매는 거울이야!”
“거울 반대편에 있으면 너는 존댓말을 해야지!”
“웃기시네!”
줄곧 싸늘하던 그윈이 그의 누나와 입씨름을 할 때면 활기가 돌았다.
강설은 둘의 그 모습을 보며 기이한 감정을 느꼈다. 아직은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을.
‘…물어봐야겠어.’
강설은 이미 답을 아는 질문을 이들에게 던져야만 했다. 그 사건이 이들에게 어떤 의미로 남았는지 알기 위해서.
“…둘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거지?”
“어떤 일? 아아… 팔?”
그윈과 레그리프가 서로를 바라보며 머뭇거린다.
레그리프가 히죽 웃으며 문신이 새겨진 팔로 강설의 팔을 덥석 잡았다.
“…무슨 의미지?”
그녀는 말한다.
“있잖아, 악마를 본 적 있어?”
* * *
– 그윈, 넌 천재야! 그러니까 여기 남아서 더 멋진 삶을 살아.
– 누나! 가지 마!
– 히히… 혼자서도 씩씩하게 잘 있어야 해! 누나가 대모험가가 되었을 때 네 덕을 봐야 하니까.
– 그럼 마지막으로 한 번만 안아줘.
– …질척대기는.
남매는 끌어안았다.
후우웅…
그윈의 손이 레그리프를 매만지자 수작을 부린 그윈만 느낄 정도의 작은 빛이 흘러나왔다가 사라졌다.
소년이 말했다.
– 대모험가가 돼서 데리러 와야 해.
– 네가 대마법사가 돼서 날 찾아와야지.
– 난 마법사가 아닌데….
– 아, 그랬지.
남매가 지금보다 조금 어렸을 적의 일이다. 그러니까, 정신이 아닌 외형이.
그들의 외형이 바뀌지 않은 지가 꽤 되었다는 걸 유념한다면 꽤 과거의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레그리프와 그윈은 천재였다.
그저 그런 천재가 아닌, 진짜 천재들.
그들의 부모 역시 그들을 은퇴 전에는 대단한 사람들이었다고는 하나, 제대로 확인된 바는 없었다.
남매가 아주 어렸을 적,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으니까.
레그리프와 그윈은 서로에게 부모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형제였다.
삶의 반쪽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그들의 부모는 다행히 남매에게 죽지 않을 만한 재주를 남겼다.
레그리프는 감각을 타고났다.
그러니까, 비범한 사람의 감각보다도 더욱 예민한 감각. 그녀는 그 감각을 전투에 접목시켰다.
그녀는 칼날이 상대의 피부를 파고들 때, 어디까지 들어갈 것이라는 걸 손끝에 전해지는 감각만으로 알 수 있었다.
심장을 꿰뚫기 직전까지만 칼을 쑤셔 넣을 수도 있었고.
그녀의 움직임은 한편으론 예술적이었으며 한편으론 그만큼 잔인했다. 카마 형태의 짧은 낫 한 자루와 팔꿈치에서 손목 정도 오는 길이의 단도를 주로 다뤘으며 어렸을 적부터 모험가로 두각을 드러냈다.
이건, 강설이 손을 대지 않았음에도 꽃피운 레그리프의 재능이었다. 어린 그녀는 강했다, 그것도 무척.
그녀가 어렸을 적부터 이렇게 치열하게 살았던 이유가 험난한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서였던 것만은 아니었다.
동생, 그윈 때문이다.
그윈은 천재다.
레그리프는 이렇게 평한다.
자신이 천재라면, 그윈은 초천재라고!
그윈은 레그리프와 정반대의 재주를 타고났다.
은퇴한 마녀가 그를 거두었다.
술에 찌들었으며 폭력적이기도 했고 시도 때도 없이 돈을 요구했다.
상종 못 할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실력만큼은 진짜였다. 대마법사에 버금갈 정도로.
레그리프는 그에게 계속해서 돈을 바쳤다. 동생은, 자신과는 다르게 대단한 마법사… 음, 마녀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그윈의 천재성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레그리프가 그윈을 떠나기 전부터 이미 그의 스승인 마녀가 그윈을 버거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녀는 나중에 알게 되었다.
어찌 됐든, 레그리프는 떠났고 위험한 모험에 종종 참여했다. 썩은 심장부로 들어가 마물에게 납치된 사람들을 구하기도 하고, 유적 사냥꾼들에게 붙어 기괴한 유적도 돌파했다.
그녀는 강했고, 강설은 그녀가 완벽하게 날뛸 수 있도록 이끌었으며, 어떤 위험한 모험도 문제 될 것 없어 보이게 했다.
그날도, 분명히 그런 날이 계속될 거라고 예상했다. 레그리프와 강설 모두.
[자신을 제외한 모든 아군이 사망했습니다.]
……
모든 건 검은 상자 때문이다.
규모가 엄청난 유적지의 도굴 작업 도중, 이름난 도굴꾼들과 그들을 지키던 실력 있는 호위가 전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공교롭게도 레그리프는 그 자리에 있었다.
– 굴복하라….
검은 상자에서 튀어나온 건, 검은 무언가다. 찐득한 액체 같기도 한 질감.
기운은 음험함을 넘어 사악했다.
파아아악-!
검은 상자에서 흘러나온 기운은 마침내 레그리프를 휩쓸었다.
꾸직…
그녀의 팔이 검은 기운에 물들었다.
“으… 으….”
– 굴복하라…
정신이 아득해진다.
하지만, 그녀의 정신은 검은 상자에 잠든 악마에게 쉽사리 몸을 내줄 정도로 약하지 않았다.
그녀는 비슷한 나이의 다른 존재들보다 훨씬 강한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살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해왔고, 할 수 있었다.
살아야만 한다.
아직 어린 동생을 위해.
그녀가 죽는다면, 동생은 혼자가 된다.
– 굴복하라…
“…버텨주마, 악마야.”
무섭다.
“내 동생이… 대마법사가 돼서 날 구하러 올 거야. 그때까지….”
버텨주마.
그런데, 전할 수 있을까?
“…구해줘, 그윈.”
그녀의 목소리는 닿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 전해질 것이다.
[모험가 레그리프는 이제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나갈 것입니다.]
[비록 가슴 뛰는 모험은 끝이 났지만, 그의 삶은 계속됩니다.]
……
강설은 그녀를 구할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없다.
그윈을 움직이는 것만이 상황을 바꿀 수 있다. 그 무엇보다 빨리, 의심을 품지 않고 레그리프에게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하지만, 그윈에게 레그리프가 처한 상황을 어떻게 전달하지?
이와 같은 의문이 강설을 머뭇거리게 했다.
“…누나가 위험해.”
강설은 그윈의 이상 행동을 눈치챘다. 서둘러 그를 움직였다.
그윈은 이미, 강설이 전하기 전부터 레그리프의 위험을 눈치챘다.
– …구해줘, 그윈.
이미 이별할 때, 그가 적절한 조치를 취해 둔 것이다.
소년은 어렸지만, 이미 그 실력은 그의 스승인 마녀, 그리고 판데아에 흩어져 있는 다른 대마법사를 넘어섰다.
결단은 빨랐다.
레그리프가 붙잡힌 곳까지, 얼마나 빨리 향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린 몸이었지만, 길을 헤메지도 않았다. 강설이 그를 안내했으니.
“버텨줘… 레그리프.”
마침내, 그윈이 그곳에 도착했다.
검은 상자가 있는 곳에.
“…누나.”
레그리프는 아직, 죽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검은 기운이 그녀를 반쯤 감싸고 있었다.
초인적인 정신력.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좋지 않아 보였다.
“레그리프!”
“이 목소리… 안 돼, 그윈… 안 돼… 오지 마….”
강설은 고뇌했다.
검은 상자에서 터져 나온 힘에 그윈이 함께 대항한다면, 가능성이 있지는 않을까.
그윈이 마법을 배운 스승은 마법사가 아니라 마녀이기에,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만일 이 선택이 실패로 치닫는다면 둘 모두를 잃는다.
강설은 머뭇거렸다.
그러나 그건, 의미 없는 고민일 뿐.
선택은 불가능했다.
그 어떤 선택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오지 말라니까!”
그윈은 통제 불능 상태로 검은 상자를 붙잡았다.
휘오오오오…
그의 반신이 레그리프와 마찬가지로 검은 기운에 물들었다.
– 굴복하라….
“…누나.”
“그윈….”
그윈이 그의 누이에게 웃어 보였다.
“할 수 있어.”
“…….”
“해내자, 우리.”
휘오오오오…
레그리프의 검게 물든 반쪽 얼굴이 검은 상자에 갇힌 악마의 감정을 드러냈다.
악마는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나 남은 반쪽의 얼굴 역시도 웃고 있었다. 레그리프였다.
“…깊숙이 들어갈 거야, 각오는 해둬.”
“언제나 각오는 돼 있어. 난 천재거든”
“…꼬맹이 주제에.”
“누나가 할 말은 아니야.”
촤륵…
촤르르륵…
검은 상자로 빨려 들어가는 둘.
레그리프가 광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으하하핫! 실력 좀 보자, 어디!”
“원한다면!”
남매는 검은 상자 안으로 서서히 사라졌다.
“우린… 반드시 돌아올 거야.”
콰직…
콰지지지직…
유적은 무너지고, 검은 상자 역시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렇게 강설은 남매를 잃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셋은 거대한 배 위에 서 있다.
“…어때, 재미없는 이야기지?”
강설은 자신도 모르게 남매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뭐, 뭐 하는 짓이야?”
“말해두겠지만, 나는 어린애가 아니….”
그는 오래전 일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에 감사했다.
그리고 그날의 비밀스러운 약속을 떠올리며,
– 우린… 반드시 돌아올 거야.
둘에게 인사를 건넸다.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