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31st Piece Overturns the Board RAW novel - Chapter 549
제548화
촤아아아…
촤아아아…
차가운 물이 피부에 닿자 강설은 눈을 번쩍 떴다.
콰르으응!
하늘이 분노한 듯, 벼락을 쏟아내며 물보라와 안개로 누군가의 환영을 만들어냈다.
– 일어나라! 메스프의 긍지가 네게 주어졌거늘, 어찌하여 망설이는가! 파괴하라! 마음껏 유린하라!
황금 왕 후키의 환영이었다.
모든 일을 어그러트린, 메스프밖에 모르는 제멋대로인 녀석. 강설은 자신이 왜 아무것도 없는 모래사장에 누워 있게 된 것인지 전혀 떠올리지 못했다.
혼절 후, 긴 수술 끝에 깨어나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전혀 모르는 상황과 같았다.
그저,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과 무거운 마음만이 밀려오는 파도와 함께 강설을 괴롭혔다.
메스프 따위, 알 게 뭐야.
콰르르으응-!
후키의 환영은 이내 다른 모습으로 변모했다. 같은 크기의 환영이 수도 없이 생겨났다.
“…….”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키리, 토키, 유현과 다른 말들.
강설에게 인상이 강하게 남은 말들의 환영은 다른 환영보다 세밀하게 표현됐고 그렇지 않은 말은 흐릿하여 이목구비조차 보이지 않았다.
모두 18명.
그들의 시선이, 부담스럽다.
이제는… 그래, 귀찮아졌다.
콰르르응-!
말들은 사라진다.
그리고 그 자리에, 최근에 만난 첫 용의 환영이 자리한다.
– …언제쯤 자유에 다다를 수 있는 거야, 우리는?
무슨 소리일까.
– 백야가 도래하면, 너와 ……가 말한 세상이 정말로 가까워지는 거야?
니에르.
– 그러면 좋겠네, 정말로… 좋겠어.
어째서?
– 너희가 그런 세상을 바라니까. 나는 아직 어려 잘 모르지만, 너희는 나에게 세상을 알려줬어. 그런 너희가 바라는 세상이라면… 나도 그런 세상이 왔으면 좋겠어.
콰르르으으응-!
첫 용 니에르의 환영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온몸이 근육으로, 그리고 검은 저주로 뒤덮인 트롤의 뒷모습이 나타났다.
“…가지 마.”
쟈마드다.
모래사장의 강설은, 떠오르는 말을 솔직하게 내뱉었다. 당시에는 말할 수 없었던 진심을.
“내 곁에 남아.”
스으으…
환영이 뒤를 돌아본다.
– 강설, 그렇다면 지금의 넌 내 의문에 답을 줄 수 있는가?
쟈마드는 그의 의문을 던진다. 파도가 모래사장에 도달해 부서지듯 의문은 강설에게 도달하자 부서져 그 소리 역시 사라졌다.
강설은, 답할 수 없었다.
적어도 지금은.
– 네가 내 의문에 답할 수 없다는 걸 나는 안다. 그러니 나는 떠날 것이다. 고민할 것이고 혼란스러워할 것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답을 찾지 못한다면… 그때 네게 다시 물을 것이니… 우리의 만남은 그리 머지않을 것이다.
푸스으으으…
쟈마드의 환영 역시 사라졌다.
“…그래, 다들 떠나.”
나도 지쳤으니까.
이제 일이 어떻게 되든, 아무래도 상관없어졌어.
외롭고 고된 길이다.
강설은 그렇게 좌절에 부딪히게 된다. 그 목표가 거대할수록, 상황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을수록 맞이하는 좌절은 더욱 커지며 더욱 잔인해진다.
그리고 모든 일이 부질없음을, 권태와 허무를 심어놓는다. 그대의 목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허상과도 같은 것이라 말한다. 종국엔, 여기까지 어떻게 달려왔는지 어떤 희생을 치렀고 어떤 각오로 임해왔는지조차 지워 버린다.
촤아아아…
강설은 어느새 턱 끝까지 차오른 수위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강설.”
환청은 끝나지 않은 것인가.
익숙하고 신뢰할 수 있는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네 환영인가. …우르.”
강설이 몸을 뉘었다.
그가 물속으로 가라앉는다.
흐릿한 수면 위 풍경에, 새하얗고 곱슬머리 장발을 한 남자가 비췄다.
남자가 손을 뻗었다.
파아아악-!
“케헥… 쿨럭….”
“…멍청한 자식.”
“…우르?”
우르다.
그가 냉담한 표정으로 강설을 마주했다.
쏴아아아아…
놀랍게도, 그가 강설의 곁에 서자 물은 쉽사리 다가오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가 강설의 곁에 털썩 앉았다.
“내가 안 왔으면 넌 마력에 익사해서 죽었을 거다.”
“…아, 아!”
강설은 그제야 지금 자신이 왜 이곳에 와 있는지, 일이 어떻게 된 건지 떠올려낼 수 있었다.
“후키 이 개자식이….”
“성질을 낼 기운은 있어 보이는군, 모두 포기한 줄 알았는데.”
“……돌아온 거야?”
강설이 우르의 눈을 바라보았다.
우르 역시 그의 눈과 마주했다.
마도사는, 강설이 상처 입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어째서 그 상처를 입게 된 건지도.
쟈마드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아까의 환영 역시도….
우르는 지금, 강설이 가장 듣고 싶은 말을 꺼냈다.
“그래, 돌아왔다.”
“…….”
그것이 크게 구멍이 난 강설의 상처를 꽤 빠르게 채워 갔다.
“여기는, 어디지? 불사는?”
“넌 기절했고, 이곳은 네 무의식… 정도 되겠군. 정신은 찰나다. 이곳은 마력으로 만들어진 허상이며 네 안의 불협화음.”
“…무슨 소린지 못 알아듣겠는데.”
“짧지만, 대화를 나눌 시간 정도는 존재한다. 그래 봐야 밖은 눈을 깜빡일 정도만큼의 시간이 흐를 테니.”
강설이 우르에게 물었다.
“불사를 봤어?”
“밖에 있는 험악한 여자가 불사라면, 그렇다.”
“…강하지?”
“내가 본 인간 중 가장 강하다.”
“아즈란보다도?”
“내가 본 아즈란은 그의 파편일 뿐 실체가 아니다. 그리고 지금 밖에 있는 녀석은 명백하게 실체다. 다만… 실체가 여럿 존재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있지만.”
또 다른 질문.
“이길 수 있을까?”
“이길 수 없다.”
잔혹한 현실.
“너와 나라도?”
“물론. 지금의 우리는 어떤 수를 써도 녀석을 이길 수 없다. 내가 이전의 힘을 갖추었다면 얘기가 달랐겠지만.”
우르의 자신감은 늘 굉장하다.
부럽기도 했지만, 지금은 상대의 전력에 대해 정확히 가늠하는 게 더 중요했다.
“불사는 하늘에 도전했던 녀석이야. 우르, 네가 과거에 대단했던 마도사라는 건 알지만….”
“불사인지 뭔지 하는 녀석에게 밀릴 거라는 거냐?”
“…….”
우르가 웃음을 터트렸다.
“큭… 크하하하하하! 강설, 넌 무언가 착각하고 있다.”
“…뭐?”
“그래, 네가 경험한 나는 고작해야 그런 수준이겠지. 하지만, 네가 알지 못하는 나 역시 존재함을 간과하고 있구나. 하늘에 도전… 승천을 말하는 것이겠지?”
강설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고 있지?”
“강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나? 어째서 인간에게 마법과 이성이라는 불을 건넨 내가 알카트론, 그 저주받은 무저갱에 봉인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강설은 우르를 봉인해 둔, 무저갱의 언령을 떠올렸다.
– 우리는 선이 아닌 이성으로 우리 내면의 악을 짓누른다.
– 모든 죄악의 근원이여.
– 다시는 고개를 들어 빛을 보지 못할 것이다.
– 알카트론과 함께 잊혀라, 우르.
제국, 카곤이 그를 봉인한 것이 맞다면 분명 그는 어떤 죄를 저지른 것이다.
그가 저지른 잘못이 대체 무엇이기에 영원토록 무저갱에 봉인되어야만 했을까.
강설은, 하나의 가능성을 상상하고 만다.
“설마, 넌….”
“하늘의 문을 두드린 최초의 인간.”
우르, 그의 눈이 먼 과거를 추억한다. 이제는 얼룩져버린 지난날을.
“그것이 나다.”
“그런….”
판데아에서 최초로 승천에 도전했던 인간. 별에서 마도를 창조한 원류이자 시초의 마도사, 우르.
“카곤은 네 생각보다 더 엉망진창인 제국이었다. 그들은 썩었고, 감히 신에게 도전했다는 이유로 나를 끌어내렸다. 다시는 나와 같은 불경한 짓을 저지르는 자가 나와선 안 된다는 이유에서… 큭큭….”
“…어째서 승천에 실패한 거야?”
우르가 시선을 돌렸다.
이곳이 아닌 어딘가를 인식한 듯한 눈치.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는 게 좋을 것 같군. 이대로라면 네 목이 먼저 떨어질 테니깐 말이야.”
“…….”
“밖에 있는 녀석은 내가 상대해본 마법사 중 가장 강하다. 이길 수 없어. 적어도 지금은.”
강설이 고개를 숙였다.
우르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싸울 순 있다.”
“…뭐?”
“녀석이 하려는 일에, 잔뜩 심통을 부려볼 수는 있다. 불행인지 행운인지 네 몸을 집어삼킨 이 거대한 마력을 이용한다면.”
우르가 말하는 방법은 어딘가 대책 없어 보이고 어딘가 허술해 보였다.
“그러다 보면, 길이 보일지도 모르지. 어때? 이만하면….”
그러나.
“네가 걸어온 길과 그리 다를 바 없는 것 같은데. 내 쓸데없는 참견이냐?”
강설 역시 그러한 길을 걸어왔다. 끝도 없는 투쟁의 길.
“…이 폭풍. 난 다스릴 수 없어.”
“다스려 본 적 없을 뿐이다. 밖에 있는 도전자가 두렵다면, 너와 함께하는 나를 믿어라. 그리 처참한 꼴은 당하지 않을 테니.”
감히 통제할 수 없을 정도의 강한 마력. 뒷일은 신경 쓰지 않고 정신없이 모든 걸 쏟아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피식…
강설이 웃는다.
우르 역시 그에 따라 미소 짓는다.
“강설, 너와 난 다르다. 아마 이렇게 함께하는 기회는 다신 오지 않을 거다.”
“섞일 수 없으니까.”
“…맞다. 우리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왔고 본질적으로 다르다. 하나, 이번만큼은 어설프게나마 하나를 흉내 낼 수 있을 거다. 최초이자 마지막이 될 화려한 그리고 낭비가 심한 불꽃놀이다.”
우르가 손을 내민다.
악수를 권하는 모양새.
“그러니까… 어울려다오.”
“…….”
“나 혼자서 즐기기엔, 아쉬울 만큼 멋진 순간일 테니.”
슥…
두 손이 포개어진다.
우르와 강설이 서로를 마주 보며 악귀처럼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같은 곳을 바라본다.
* * *
콰르르으으으으응-!
우르가 합세한, 강설의 주변으로 극심한 변화가 일어났다.
천둥으로 만든 악기가 연주되는 듯, 마력의 충돌과 발산 그리고 폭발의 불협화음.
콰아아아아아아아앙-!
혼란스러운 마력이 강설의 몸을 찢었고 반대로 강설의 그림자가 마력을 휘어 감았다.
섞일 수 없지만, 섞여서도 안 되지만 그럼에도 쏟아지는 마력으로 뒤섞이고야 마는 존재.
그림자로 된 헤진 로브를 걸친, 이목구비는 후드에 전부 가려져 시커먼 어둠만을 뿜어내는 기괴한 인영이 탄생했다.
작고 초라했지만, 그 초라함 속에서 요동치는 마력을 관측할 수 있는 자라면 이 존재가 얼마나 위험한지 단박에 알아챌 것이니.
휘오오오오…
[밤까마귀 형상을 취합니다.]
……
[밤까마귀는 도전자 상태입니다!]
[밤까마귀 : 악공 상태입니다.]
[권능 :그림자의 왕과 권능 : 시초의 마도사가 뒤섞입니다.]
……
“하아아… 하하하….”
“큭큭….”
입이 없는 악공의 목소리가 겹쳐서 울려 퍼졌다. 아직 완벽하게 합일하지 않았다는 방증.
그러나 곧, 목소리는 하나로 합쳐졌다.
“이거… 해 볼 만 하겠어.”
악공이 언령을 발동했다.
〔이제, 움직여도 좋다.〕
콰아아아아앙-!
멈췄던 전선이 다시금 되살아났다.
전장 전체를 잠시 멈출 정도로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 우르의 언령. 그러나 그가 강설과의 합일을 방해받지 않기 위해 무리했다는 것을 아는 건 조율자와 불사뿐이었다.
우르의 마력은 다중 통제 언령의 사용으로 거의 고갈 수준까지 치달았지만, 황금 왕의 죽음이 남긴 순수한 마력에 비하면 아주 사소한 문제일 뿐이었다.
마력에 특화된 종족, 그것도 왕의 지위에 걸맞은 존재가 온몸을 불사르며 남긴 유지다. 값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마력의 창고가 터져나갈 듯 채워져야만 했다.
불사 그리고 악공이 서로의 존재를 마주했다.
“…….”
“…….”
실로이가 푸념했다.
“…비샤랑 그라보만이라도 데려가야겠네.”
그녀가 얼굴을 굳히고 세상의 마력을 독식한 듯한 저 추레한 존재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궁리했다.
그사이, 악공의 첫 번째 소리가 울려 퍼졌다.
후우우우우우웅…
귀를 찢을 듯한 마력의 불협화음.
그러나, 이 역시 누군가에겐 음악이었다.
[밤까마귀 : 악공이 권능 : 야상곡을 사용합니다.]
……
휘오오오오오오…
밤을 집어삼키는 듯한 위험한 권능.
실로이가 입매를 비틀며 말했다.
“비샤까진 무리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