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31st Piece Overturns the Board RAW novel - Chapter 556
제555화
투둑…
투두두두두…
빗줄기가 성 내에 마련된 정원을 적셨다. 정원은 지붕 없이 날씨를 느낄 수 있는 더할 나위 없는 장소.
강설은 지금, 그곳에서 빗줄기를 맞으며 서 있었다.
움찔…
움찔…
반년 동안이나 잠들어 있었기에, 신체는 물론이고 마력의 흐름 또한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분명, 전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활력이 샘솟았다.
[‘그윈’의 유지(遺志)를 이어받았습니다.]
[죽은 이의 능력을 전승합니다.]
[지속 : 천재성을 이어받습니다.]
[당신은 지속 : 천재성을 이어받습니다.]
[‘레그리프’의 유지(遺志)를 이어받았습니다.]
[죽은 이의 능력을 전승합니다.]
[지속 : 곡예사를 이어받습니다.]
[당신은 지속 : 곡예사를 이어받습니다.]
[까마귀의 직업 효과로 능력의 효과가 상승합니다.]
[귀신의 손이 가진 체질 효과로 능력의 효과가 상승합니다.]
……
[지속 : 천재성]
– 마력을 사용하는 모든 능력이 일정량의 영감을 가져옵니다. 이따금 번뜩이는 천재성이 발동하면 대량의 영감을 획득하며 이는 새로운 능력으로 변환됩니다.
[지속 : 곡예사]
– 아슬아슬 상태와 위태위태 상태에서 매우 높은 확률로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만약의 경우에도 최악의 상황만큼은 회피할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이로써, 20번째다.
20개에 달하는 유지(遺志).
“…….”
이만큼의 유지가 강설에게 남겨졌다는 건 그가 그만큼의 죽음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울컥하는 느낌이었지만, 어쩐지 울음은 나오지 않았다.
투두둑…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그의 울음을 대신했기 때문인지도.
그 어떤 죽음도 막지 못한 것에 죄의식을 느끼면서도, 그들이 죽어가며 남긴 뜻에 힘을 얻기도 했다.
강설의 마음은 이곳 판데아에 막 발을 디뎠을 때, 갈대처럼 흔들렸다.
바람이 불면 흔들리며 아파했고 폭풍이 오면 꺾인 듯 그 숨이 끊어질 것처럼 괴로워했다.
지금에 와서는 어떠한가.
수많은 죽음과 맞부딪히며 끌어안으며 쌓아 올린 그의 마음은.
난공불락의 요새와도 같다.
성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적들이 넘지 못할 해자로 그것을 둘러싸고 모든 감정을 태연하게 내려다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이 걸어야 하는 길이 마땅한가? 흔들리지 않는 게 과연 인간의 마음인가?
강설은 여전히 그 답을 모른다.
앞으로 정해진 것은 하나뿐.
멈추지 않고 나아가야 한다는 것.
그의 발걸음을 채운, 스물의 삶을 위해서라도.
다시금 현재로 돌아와 생각해 보면, 이번 고르고지아 원정대를 통해 얻은 보상은 없다시피 했다.
[서사시 : 약속의 결말 조건을 달성합니다.]
[서사시 : 약속이 결말에 다다릅니다.]
서사시 ‘약속’
당신은 조력자 마엘의 제안으로 신대륙 고르고지아의 원정대에 참가했습니다.
원정대는 강력한 전력으로 구성되었으나, 고르고지아의 환경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선 낙관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당신의 원정대는 우여곡절 끝에 고르고지아에 도착했지만, 불의의 사고를 겪었고 각자가 다른 사건을 경험했습니다.
그중에서도 당신의 경험은 매우 특별합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게 분명한 첫 용 니에르를 만났고 그에게서 수수께끼 같은 예언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신비로운 순간은 찰나일 뿐. 역사상 최강의 흑마법사 불사가 고르고지아에 잠든 메스프의 유물, 영혼함을 손에 넣었고 그의 독주를 막기 위해 당신은 전장으로 뛰어들어야 했습니다.
당신뿐만이 아닙니다.
모든 원정대가 불사의 이름과 맞서 싸웠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실로 경이로운 존재였고 자신을 향한 모든 저항을 잠재웠습니다.
결국, 그녀의 계획대로 영혼함에 잠든 힘은 거대한 태양의 제국 몬트라를 깨우기 위해 사용됐습니다.
당신은 살아남았지만, 패배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이것이 당신이 역사에 남긴 마지막 종적일까요?
아직, 호사가들의 침은 마르지 않았고 양피지에는 여백이 남았습니다.
왕이시여…
서사시가 마무리되었다는 메시지도 꽤 오래전에 떠올랐었다는 걸 확인하는 강설.
당연하게도 불사에게 패했기에, 물질적인 보상은 획득할 수 없다. 그럼, 이 모든 것은 헛고생이었을까?
츠즛…
츠즈즈즛…
강설은 용솟음치는 기운을 느끼며 그렇지 않다 판단했다.
이제 그에게 새로운 장비, 혹은 비슷한 능력이 몇 개 주어진다고 해서 그것을 성장이라 할 순 없었다.
강물에 소나기가 내린다고 해서 강물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기에.
근본적인 무언가가 뒤바뀌어야 했다.
강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더 큰 세계를 마주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는 고르고지아에서 강물이 바다로 흘러드는 길목과 마주했다.
진짜 힘을 말이다.
불사 실로이는 감히 그가 넘볼 수 없을 정도의 대단한 실력자였다.
경계의 무기나가 남긴 봉인, 그리고 황금 왕 후키를 비롯한 원정대 전원, 강설 자신과 우르까지 합세하여 몰아붙였지만 그를 쓰러트릴 순 없었다.
그만큼 대단한 자다, 불사는.
그러나, 강설은 분명 그와 싸웠다. 그리고 살아남았다.
황금 왕의 순수하고,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마력을 억지로 통제해냈으며 도전자와 맞서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성찰했다.
힘.
지혜.
그리고 각오다.
도전자, 그에 맞설 도전자가 되는 것.
강설은 끝끝내, 그것을 이뤘다.
도전자에 오르며 알게 된 건, 무리(武理)의 궁극에 도달한다는 게 어떤 의미를 내포하는 것인지다.
서리 대공, 피의 성자, 외팔이 검성.
그리고 불사까지.
전설의 말은 모두 한 분야의 정점에 도달한 자들이다.
그들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방대한 능력들을 지녔고 그 능력과 권능은 하나하나 강력했다.
그러나, 그들의 능력이 모두 시간을 들여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휘오오오오오…
강설은 그림자에 보다 가까워졌다. 이전이었다면 준비 작업이나 각오가 필요했던 능력들은 이제 숨 쉬듯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새로운 능력을 고안해내는 건 영감이 있다면 어떤 순간에서도 가능했다.
그것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지만, 육체와 정신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서라면 충분히.
그는 이제, 불사와 마주 볼 자격을 얻었다.
그리고…
치이이이이이…
그의 그림자가 맥동하자, 쌍둥이 기사가 빗줄기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반년만의 조우.
그들 역시 달라져 있었다.
특히나, 카루나 쪽은.
“…….”
[쌍둥이 기사가 완벽한 균형에 다다릅니다.]
[흰 나무의 힘이 강해집니다.]
[쌍둥이 기사가 들끓는 힘 상태에 도달합니다.]
[그림자의 왕의 영향을 받습니다.]
……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힘은, 범상치 않았다.
강설만큼 강하다고 말할 순 없었지만, 적어도 그 턱밑을 겨누고 있는 힘이었다.
‘흰 나무의 힘인가….’
판데아를 지탱하는 흰 나무.
수호자는 흰 나무가 가진 힘에 대해 언급했고 그 책임 또한 무겁다 말했다.
둘은 이상하리만치,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흔들리고 있었다.
강설, 카렌 그리고 카루나.
셋은 가장 오랫동안 함께한 관계이기에 보다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각자가 떠올리는 생각, 각자가 느끼는 감정을 일정 부분 공유했다.
카루나가 마지막 남은 자신의 파편을 되찾은 순간부터 시작된 의심은 그의 누이인 카렌에게로 그리고 그들이 섬기는 왕인 강설에게로 향했다.
마지막 흑기사는 생전 몬트라가 비밀 일부에 다가갔었고 그의 기억 역시 지금은 카루나가 짊어졌다.
“카렌….”
“…카루나.”
카루나가 비를 맞으며 카렌의 눈을 슬프게 바라보았다. 그들 역시, 강설과 함께 깨어났으니 흑기사 사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나 마찬가지.
감정이 아직 수습되지 않았다.
“어쩌면, 몬트라는… 그리고 진은….”
“그만… 무슨 말을….”
“우리가 마주한 자들 중 최악의 존재일지도 몰라.”
“너, 어떻게 그런 말을… 그 자식인 거지?”
팍-!
카렌이 카루나의 목을 졸랐다.
“그 자식이 뭘 멋대로 지껄인 거냐고! 왜 멋대로 판단….”
“몬트라는 스스로 멸망을 선택한 거야.”
“……”
“그리고 그게 다름 아닌 진의 뜻이었으며 그의 뜻을 받들어 제국을 지운 건….”
카루나는 거침없이 그가, 그리고 이전의 흑기사가 도달한 진실에 대해 쏟아냈다.
“레인…이야.”
“개소리하지 마아아아아!”
철퍽-!
빗물이 고인 정원에 카루나를 쓰러트리는 카렌.
그 위에서 쌍둥이의 목을 조르며 말했다.
“그 자식, 정신이 나가버린 게 틀림없어! 아! 그래… 그런 거야. 카루나 분명 너도….”
“카렌.”
“너도 그 자식의 끔찍한 생각에 물든….”
“누이여.”
“…….”
“나야.”
“…….”
“녀석은… 이제 내가 되었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 카렌이 벌벌 떨며 몸을 일으켜 뒤로 돌았다.
“아닐 거야. 진이… 진이 그럴 리가 없어. 분명 뭔가 잘못된 거야….”
카루나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래. 그러니까 알아야 해, 우리는.”
“…무엇을?”
“몬트라 최후의 날.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훨씬 이전부터 준비된 일에 대해.”
“…….”
“우리의 황제였던 진 아우뎀 몬트라에 대해.”
다가서야 한다.
모든 추억과 빛나던 영광을 진흙 속에 내던져 영원히 찾지 못하게 될지라도.
그들은 다가서야 한다.
부스럭…
인기척이 들렸다.
따악…
휘오오오…
쌍둥이 기사가 강설의 안으로 갈무리되었다.
이제 정원엔 그 혼자 비를 맞고 있었다.
스윽…
뒤돌아보는 강설.
설홍이 그곳에 서 있었다.
“…설.”
휘오오오…
강설의 싸늘한 눈빛이 설홍의 숨을 턱 조여왔다.
“으… 으으….”
텁…
설홍이 그녀의 목을 붙잡았다.
숨을 쉴 수 없었다.
“…….”
강설이 강해진 기운의 조절에 미숙했음을 깨닫고 서둘러 기운을 회수했다.
“하아… 하아아아….”
스윽…
어느새 설홍의 앞에 다가온 그가 손을 내밀었다.
“…괜찮으십니까?”
설홍은 달라진 그의 힘에는 적응하지 못했지만, 그의 포근한 그늘만큼은 여전함을 느꼈다.
싱긋 웃으며 말하는 설홍.
“반드시, 나눠야 할 말이 있다.”
“…….”
“시간이… 없어.”
* * *
황폐화된 대지.
발이 푹푹 빠지는 사막이 하루가 다르게 넓어지고 있었다.
이미 판데아의 서부는 초토화되어 죽음의 땅이 되었고 남부의 일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인류 문명의 절반 정도가 사라진 것.
막강한 결계와 장벽으로 죽음의 군대를 틀어막고 있는 대제국 칸의 그늘 아래 숨어든 생존자들도 있지만 칸 역시 이와 같은 영토를 지켜내기 위해 많은 생명을 잃어야 했다.
그렇다면, 죽음의 군대가 가진 특징은 무엇일까. 대체 얼마나 강하기에 판데아 생명의 불씨를 꺼트리기 직전 수준까지 이르렀는가.
이들은 망자다.
죽음에서 되돌아온 자들이며 생전의 살점이 그대로 붙어 있어 살짝 어두워진 피부색을 제외한다면 외견상 인간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쟁 초기에서나 통용되던 특징이었다.
망자들은 전투를 거치며 죽음을 맞이할 때마다 추악하게 변했다. 이들은 뼛조각까지 전부 불태우지 않으면 반드시 되살아났다.
그땐, 내장을 흉측하게 드러내고 움직였다. 살점 역시 제대로 붙어 있는 곳이 드물었다.
심지어는 뼈로만 이루어진 병사 역시 있었다.
이들은 이성이 없다.
그저 전장으로 향할 뿐.
그 옛날, 대륙을 지배했던 몬트라의 군대는 이처럼 추악하게 변모했다.
이들은 그들의 안에 깃든 사령의 힘 때문인지, 일반적인… 그러니까 훈련이 제대로 된 병사보다 약간 더 튼튼했다.
그리고 그 작은 차이와 좀처럼 수가 줄어들지 않는다는 장점이 인류의 절반을 사라지게 만든 결정적인 이유였다.
재밌는 점은, 신기하게도 이 죽음의 군대를 손쉽게 막아내는 국가가 아직 존재한다는 것이다.
칸과는 다른 방식으로.
콰지이이이이익-!
철퇴가 망자의 머리를 으깼다.
“우으으.”
철퇴를 휘두른 자는 망자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거대했다.
이와 같은 덩치의 존재가 거대한 초소 앞에 무려 넷씩이나 존재했다.
“우으으으으?”
조잡하고 거대한 망원경으로 멀리서 초소로 접근하는 존재를 알아채는 보초.
“우아아아아!”
보초는 자신이 본 것을 설명하기 위해 양팔을 허우적거리며 그들의 언어로 말했다.
그리고, 입을 꾹 다물었다.
분명히 망원경으로 저 멀리서 접근하던 검은 인간을 보았건만, 그 인간은 지금 초소의 앞까지 찾아와 멀뚱멀뚱 보초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으으?”
눈을 비비며 자신의 머리를 쿵쿵 때려보는 보초.
“문을 열어줬으면 한다. 왕에게 볼 일이 있어.”
“왕? 똑똑이? 어… 근데….”
보초가 납작 숙여 양팔로 땅을 짚으며 강설에게 말했다.
킁킁…
“말했다아… 건더기이….”
강설은 지금, 죽음의 군대를 순수한 힘으로 막아내는 새로운 오우거의 땅에 도착했다.
“그래, 예전에도 비슷하게 불렸던 것 같은데.”
그가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