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31st Piece Overturns the Board RAW novel - Chapter 576
제575화
“말이 운명으로 인도한다는 건가….”
“확신하지는 못하겠어.”
“언령보다는 운명의 마법이라고 말하는 게 더 그럴싸하겠어.”
“…….”
팅-!
아스모돈은 인장을 튕겼다.
“그래서 이름 붙였지. 이 인장의 이름. 운명의 인장이야.”
“오, 제법이야.”
“잠깐, 그런데 말이 운명의 하수인이라면… 내가 누군가에게 하는 말이 그 누군가의 운명을 좌지우지한다는 건가?”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 일단은 압도적인 마력이 부여되지 않으면 그만한 현상을 불러올 수 없고 아주 조금 운명을 고정할 뿐이야.”
“어렵다, 어려워.”
씨익…
아스모돈이 웃으며 설명했다.
“그래도 주의해야 하는 건, 운명의 힘을 잘못 사용하는 경우야.”
“그게 어떤 경운데?”
“자신에게 사용할 경우.”
“…아.”
“자신을 믿지 못하고 내면에서부터 무너지면, 운명은 그에 가까워져.”
“…정말이야?”
“실험까지 해보진 않았는데, 앞에 가설이 전부 맞았다면 이것도 맞아. 뭐, 이쪽도 방대한 마력 혹은 그에 준하는 뭔가가 필요한 건 마찬가지지만.”
유리코가 흥분해서 말했다.
“이로써 언령 마법이 가진 뿌리의 단서가 밝혀진 건가? 마도의….”
“…밝히지 않을 거야.”
“……어?”
아스모돈은 유리코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유리코, 운명이 존재한다는 것, 무슨 뜻인지 몰라?”
“……아!”
확신할 순 없다.
그렇지만 운명의 그림자라도,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
“유리코.”
“확실히… 거기까진….”
“하하…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마. 내 생각은 언제나 달라질 수 있으니까.”
유리코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이번엔 내가 발견한 걸 보여줄게.”
“이런, 내가 너무 신이 났나? 네가 발견한 것에 비하면 내 발견이 너무 거대해서 부담스러울 텐데. 하하하하!”
익살스럽게 웃는 아스모돈.
유리코가 열등감에 사로잡힌 자라면, 그 웃음도 속 편하게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도사이기 이전에 친구였기에 충분히 웃어넘길 만한 농담이었다.
그리고, 유리코는 아스모돈에 뒤지지 않는 천재였다.
“이곳은 좁아, 지하로 가자.”
“…그 정도야?”
“그래, 니에르도 따라와. 재밌는 걸 보여줄게.”
“응!”
아스모돈의 연구실은 지하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지하 연구실은 지상의 몇 배는 될 정도로 천장이 높았고 공간 역시 방대했다.
보통은, 위험이 따르는 실험을 이곳에서 진행하곤 했다.
툭.
바닥에 내려놓는 신비로운 구체.
“어? 그거….”
“그래, 아버지와 비에릭 경이 남긴 물건이지.”
“…연구 기록을 해석한 거야?”
“연구 기록은 엉터리였어. 비슷하게는 접근했는데, 처음부터 잘못 계산된 술식 때문에 새로운 답을 찾느라 고생 좀 했지.”
“대체 뭘 발견했길래 이렇게 혓바닥이 긴….”
파직-!
파지지지지직-!
유리코의 눈이 마력으로 타올랐다.
인간임에도, 엄청난 마력.
후우우우웅…
구체가 떠오른다.
파직…
파지지지직-!
“이건….”
아스모돈의 표정이 굳었다.
위험하다.
파지지지지직…
점차 구체가 뿜어내는 힘이 커져만 갔다.
“그만, 유리코. 넌 대체….”
“으으으아아아!”
파지지지지지직-!
구체가 개방된다.
마치 호수에 비친 달처럼, 어딘가로 향하는 아지랑이가 형성된다.
“하아… 하아….”
“……말해줘, 유리코. 이건 뭐야?”
유리코가 숨을 고른 후에 말했다.
“시간의 실체화야.”
“…거짓말이지?”
“이 안에 있는 게 온통 시간이야.”
“…….”
“이걸 이용하면 나는 시간을 만지고 볼 수 있어.”
“…이해할 수 없어.”
“나 역시 아까 네가 보여준 마법을 그렇게 평가했는걸.”
최초의 마도사 우르 이후, 한 시대에 나타난 두 천재 마도사가 벌인 기괴한 일.
유리코가 웃었다.
“네가 운명을 엿보았다면.”
씨익…
“난 시간을 훔쳤어.”
운명론자와 시간 도둑.
둘은 오늘의 단출한 이 시연이, 또 무언가를 만들어낼 것만 같다는 불안감과 설렘에 사로잡혔다.
* * *
유리코는 개인 연구실을 정리했다.
카곤 의회 소속, 마도회로부터 막대한 예산을 이미 진행해 둔 가짜 연구 계획으로 수급했다.
인생을 걸어볼 만한, 무언가를 찾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흥분 때문이었다.
설득하고, 납득시킬 시간은 없다.
오직 빛을 향해 도달할 시간만이 필요할 뿐.
그렇게 살아가기에도, 삶은 짧았다.
언제까지 영감이 계속될지, 확신할 수 없었기에.
“유리코, 거기 정리해둔 거 확인했어?”
“아침에 봤어.”
아스모돈의 연구실이 이제는 그의 연구실이었다.
그들은 성장했다.
연구실의 보물인 니에르 역시도.
니에르의 정신세계는 방대했다.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지식을 먹어 치웠다.
한 번 배운 것은 잊지 않았고, 그것을 별 어려움 없이 떠올렸다.
수명은 이미 죽은 푸오에게서 전달받은 바 없기에 알 수 없지만, 이 힘이라면 언젠가 세상을 거느릴 수도 있을 것만 같다고 둘은 생각했다.
건축 양식, 역사, 도덕과 윤리.
법과 문화, 사상과 경제.
끝도 없는 지식이 니에르에게로 스며들었다.
지식은 부패를 낳기 마련이다.
왜곡된 시야와 편견, 고집의 씨앗을 뿌린다.
하지만, 니에르에게는 그것이 없었다.
지식은 지식으로 받아들일 뿐, 유리코와 아스모돈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귀여운 용이었다.
“있잖아, 유리코.”
“응.”
고오오오오…
“이 안을 들여다볼 수 있을까?”
“가능하지, 실제로 들어가지만 않는다면.”
“실제로 들어가지 않고 어떻게 가능해?”
“우리와 감응하는 뭔가를 너무 멀지 않은 시간에 던지는 거야.”
“우와, 정말 썩은 생각이네.”
“괜찮지?”
이 실체화된 시간은 둘에게 이름을 부여받았다.
시간의 문 호로스.
그것이 이 기괴한 유물의 이름이다.
“근데 이만큼 방대한 시간에 개입한다는 건, 시공 축 전체를 어그러트릴 수도 있어. 시간과 공간은 내 경지에선 아직 분리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
“그럼 어떻게 되는데?”
“정해진 시간 좌표로 뭔가를 보낸다고 해도 그 뭔가가 전혀 엉뚱한 곳, 엉뚱한 시간에 떨어질 수도 있다는 거야.”
“오! 재밌겠다!”
“……너.”
“응?”
“나랑 같은 생각이구나?”
두 마도사는 광기와 호기심 중 무엇이 작용하고 있는 것인지 헷갈렸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았다.
마도사였기에.
지식에 대한 열망은, 모든 가치를 무너트린다.
아스모돈이 말했다.
“사실, 이 얘기를 꺼낸 이유는 시간 좌표 중 하나가 계속해서 마음에 걸려서야.”
“아, 나도 느꼈어.”
“카곤의 기운과 묘하게 일치하는 부분이 있는 그 시간! 너도 느꼈어?”
“응.”
“혹시… 그 시간은 운명이 아닐까?”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은데 확실한 게 하나도 없어서 그럴 수가 없는 게 분하다.”
아스모돈은 턱을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와 운명적으로 묶인 시간이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어쩌면….”
“또 다른 우리이거나 아니면….”
“그래, 신 아닐까?”
“신이 존재한다고?”
“하하하하! 시간과 운명이 존재한다는 걸 확인했는데 신이라고 존재하지 않을 리 있어?”
“…틀린 말은 아니네?”
광기는 스며든다.
“확인하자.”
“그래, 확인하는 수밖에.”
신의 존재를.
그들이 존재함을.
“우리와 감응하는 건… 뭐가 좋을까….”
유리코의 말에 아스모돈이 말했다.
“도플갱어 실험!”
“그거? 완벽하게 실패했잖아.”
“마물인 도플갱어를 인간으로 만드는 건 실패했지. 대신, 그 이론을 이용해 호문쿨루스가 만들어졌잖아.”
“호문쿨루스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뼈와 살점에 강제로 복제된 인격을 집어넣는 것.
복제 인간과 다를 바 없었지만, 마도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윤리는 진즉 집어던지는 카곤의 특성상 이미 상용화가 된 기술이었다.
단, 복제하는 인격은 절반만큼이다.
호문쿨루스 자체에 제한이 걸려 있었기에 그 이상은 무리.
“…제한을 해제하자. 감응 확률을 끌어올리려면 어쩔 수 없어.”
“그랬다가 의식을 차리면?”
“의식을 봉인하고 집어 던져야지, 미로에.”
“그거 살인이야.”
“깨어나지 않으면 피해자는 없어. 사람… 안 죽여봤어?”
“…꽤 죽여봤지.”
마도사는 항상 깨끗한 일만을 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카곤을 위해선, 무엇이든 해야만 했었다.
“우리의 목적이 완벽한 인간을 만드는 게 아니잖아. 이 시간이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지 확인하는 신호기가 필요한 거지. 아! 잠깐… 그랬다가는….”
아스모돈이 망설였다.
“정해진 시공 좌표까지 도달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늙어 죽을 수도 있겠는데….”
“그럴 리는 없어. 그곳까지 도달하는 시간 값을 조정하면 돼. 좌표가 틀리지만 않는다면 언젠가 도착한다는 거잖아? 도착한다는 ‘사건’이 반드시 발생한다면….”
언젠가 도착한다는 말.
“그건, 당장 내일 도착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거야.”
“그럼 마지막! 이것까지만 정하자.”
“뭔데?”
“…둘 중 누구의 인격으로 할까?”
“당연히….”
또 다른 자신을 죽이는 일.
망설이게 된다.
“…나로 하자.”
유리코의 뜻이다.
“모든 건, 내가 마도사가 되었기에 벌어진 일이잖아.”
“…그렇네?”
“그러니까, 내가 책임져야지.”
“…그러지 마. 나도 최선을 다할게.”
……
유리코와 아스모돈, 32세.
후우우웅…
미리 만들어진 어린 생명에, 유리코의 인격을 심었다.
어린 생명의 한쪽 뺨에 인장이 빛났다.
아스모돈이 만든 운명의 인장이다.
그는 자신이 가진 것 외에 새로운 인장을 호문쿨루스에 새겼다.
“작별 인사나 하자.”
“이름이라도 지어줘야 하는 거 아니야?”
“음… 그런가?”
“그래. 아가야, 네 이름은… 음… 아! 생각났어!”
“뭔데?”
“오늘 아침에, 우리가 뭘 했더라?”
“눈이 왔었지? 밖에 나갔고. 또 뭘… 아….”
“어때? 딱 맞는 이름이지?”
“…그러네.”
아스모돈과 유리코가 함께 말했다.
“네 이름은 이제부터 눈사람이야. 잘 부탁해!”
“잘 부탁할게!”
“좋아… 준비됐지?”
“전송!”
파지이이이이이익-!
호문쿨루스가 떠올라 미로로 사라진다.
생명이, 시간의 문을 통해 어딘가로.
하루가 지났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났다.
유리코와 아스모돈, 33세.
둘은 카곤 의회 대광장에 마련된 거대한 시계탑에 올라갔다.
가끔, 둘은 이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가슴이 답답해질 때면 이곳을 찾았다.
썩 괜찮은 경치에 불안한 마음은 전부 사라졌다.
발전한 마도 제국의 풍경이 그들의 마음을 시큰하게 했다.
“실패네.”
“…뭐, 모든 연구에 성공하는 마도사는 없어.”
“…….”
“유리코?”
“있잖아, 아스모돈. 요즘 가끔 이상한 꿈을 꿔.”
“그래? 꿈?”
유리코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따금, 누군가 나를 내려다보는 꿈을.”
“거참 불쾌하겠네.”
“하아… 연구가 틀어져서 그런 거겠지.”
“있는 연구비 다 하룻밤에 탕진하고 미로로 뛰어들까?”
“아서, 죽을 거야. 아니 죽는 게 낫다고 느낄 거야.”
“…그 정도야?”
“수천, 수만 갈래 아니 그보다 더한 조각으로 찢긴다고. 네 전부가 그 안에서 죽어야 비로소 진짜 죽음을 맞이할 거고….”
“뭐, 그렇게 복잡하면 그냥 편하게 죽자.”
피식-
지끈…
싱겁게 웃던 유리코가 갑자기 머리를 부여잡았다.
“으으으윽….”
“유리코? 왜 그래?”
– 뮤타니 가문의 힘이 너무 강해진 것 아니에요?
– 한 번 교육할 필요가 있겠어.
– 잠깐! 거긴 내 말이 있어, 내 말이 죽고 난 이후로 미루자고!
– …그럼 너무 늦는데.
머릿속에 스며드는 지엄한 음성.
“으아아아아아아!”
거품을 물며 헐떡이는 유리코.
“유리코!”
털썩…
유리코가 난간 밑으로 떨어지려 했다.
파아아악-!
아스모돈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유리코! 손 놓지 마!”
“허억… 허억….”
난간에 매달려, 아스모돈의 손을 붙잡은 유리코.
그는 시계탑 너머로 비춘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넌… 누구야….”
“무슨 소리를….”
유리코의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눈사람 가면을 쓴 노인이 게임판 위에 자리한, 유리코와 똑 닮은 말을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
노인이 중얼거렸다.
– 떨어지면 안 돼! 유리코!
“언제부터… 대체 언제부터….”
내 삶을 지배한 거야.
“넌… 언제부터….”
원인과 결과가 혼돈 속에서 뒤섞인다.
카곤이 맞이할 시간선 붕괴.
눈사람은 살아남았다.
인간도 되지 못한 존재가 살아남아, 유리코의 신이 되었다.
눈사람이 중얼거렸다.
– 어서, 도망쳐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