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cademy’s Barbarian RAW novel - Chapter (392)
후일담: 울란 바토르(完)
1.
바야흐로 겨울이 끝나가는 계절.
아직 개학까지는 시간이 좀 남았건만 아르센의 대강당은 수많은 인파로 북적였다.
오늘은 1년에 오직 한 번뿐인 날.
바로 졸업식이 열리는 날이라서다.
“하아.”
졸업식이 진행되는 가운데.
이를 바라보던 에단 아르노프 교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대강당에 모여있는 이들 중 가장 후련한 표정과 함께였다.
“정말이지, 오래 살고 볼 일이군.”
“그러게요. 설마 이런 날이 올 줄이야.”
에단의 곁에 있던 스텔라 나탈리아 교수 역시 감회가 새로운 얼굴이었다.
그간 가르치던 제자들이 졸업을 맞이하면서 감정이 복받친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절대 졸업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던 인물이 눈앞의 단상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울란.”
졸업생 대표, 울란 바토르.
작년 노아 다르셴에 이어 아르센에서 두 번째로 졸업하게 된 야만족 출신의 학생.
그야말로 최강이라고 불러도 손색없을 정도로 괴물 중의 괴물. 울란에 관한 회상을 마친 에단은 풀썩 웃음을 내뱉었다.
“이제부턴 대륙이 소란스러워지겠군.”
“반대로 여긴 조용해지겠고요.”
스텔라도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가 별안간 입을 꾹 닫고는 단상 위의 울란을 지그시 응시했다. 여러 감정이 뒤섞인 눈빛과 함께, 그녀가 입술을 달싹였다.
“사실 전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았어요.”
“음? 무슨 소리지?”
“울란과 아카데미에서 함께 보냈던 시간이 썩 나쁘진 않았단 소리예요.”
“……제정신으로 하는 소린가?”
“말이 그렇다는 거죠. 시원하면서도 묘하게 섭섭하다는 느낌, 선배도 알잖아요?”
그 말에 에단은 일순간 입을 닫았다.
무슨 뜻인지 이해해서였다. 다만 공감의 시간은 짧았다. 다시 울란을 바라본 에단은 나지막한 투로 대답했다.
“그래도 보내줄 땐 보내줘야지. 저 녀석을 품기에 아카데미는 너무 좁으니까.”
“그건 그래요.”
스텔라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교수들과의 대화와는 별개로 졸업식은 순조로웠다. 사회를 진행하던 학생회장이 재치 있는 말투로 진행을 이어나간 덕분이다.
“자, 그럼 다음 순서는 졸업생 대표가 나와서 연설할 시작할 차례…….”
그러던 그 순간.
돌연 학생회장이 입을 닫았다. 울란을 힐끗거린 그는 헛기침과 함께 말을 정정했다.
“크흠! 일정표에 적힌 바로는 그렇습니다만 이건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올해 대강당의 유리창을 교체할 계획은 없으니까요.”
농담이 섞인 말에 학생들은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5년 전의 입학식을 기억하는 교수들은 누구도 웃지 않았지만.
그렇게 울란의 연설이 생략되고, 사회를 맡았던 학생회장은 울란과 함께 단상에서 내려왔다. 그러면서 속삭이듯 말했다.
“졸업 축하드립니다, 선배님.”
“고맙다.”
“뭘요. 아, 그보다 어디로 가실 건지 저한테만 살짝 귀띔해주시면 안 됩니까?”
“그건…….”
“뭐, 아마 제국으로 가시겠지만요.”
울란이 대답하려던 찰나, 학생회장은 멋대로 짐작을 끝낸 듯 멋쩍게 웃었다. 울란 역시 그대로 입을 닫은 채 걸음을 옮겼다.
그로부터 얼마 후.
몇몇 교수들의 우려와 함께 시작된 아르센 아카데미의 졸업식은 이렇다 할 사고 없이 무사히 마무리됐다.
2.
한편 졸업식이 한창이던 무렵.
대강당의 입구 부근은 인파가 몰려 발을 디딜 틈을 찾기가 힘들었다. 졸업을 축하하러 온 가족이나 친구들이 모여서였다.
거기에 구경꾼들도 꽤 있었다.
왜냐면 졸업생의 주변인 중에는 종종 유명한 거물들이 섞여 있을 때가 많아서다.
다만 오늘은 유독 구경꾼이 많았다.
당연하리라. 평생 한 번 보기도 힘든 거물 중의 거물이 한곳에 모여있었기에.
이러한 구경꾼들의 시선을 가장 먼저 사로잡은 거물은 군청색 머리카락의 청년.
잘생긴 외모도 외모였지만, 그보다 주목을 받은 것은 청년의 신분에 관해서였다.
“야, 저기 팔라딘 마스터 아니야?”
“엘로덴의 검이 여긴 무슨 일이지?”
“졸업생 중에 지인이 있나?”
성국 엘로덴의 팔라딘 마스터.
성녀의 호위 기사, 이안 마르커스.
이전 팔라딘 마스터를 뛰어넘는 재능과 실력을 지녔다고 명성이 자자한 존재로서, 한창 명성을 떨치고 있는 거물이다.
한편 이안은 구경꾼들의 수군거림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여유로운 얼굴로 대강당을 바라볼 뿐이었다.
이안의 표정에 변화가 생기게 된 건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를 두드린 직후부터다.
“이안?”
종종걸음으로 다가온 은발의 소녀.
커다랗게 뜬 황금색의 눈동자와 함께 뾰족하고 길쭉한 귀를 가진 신비한 존재.
별의 대마법사, 딜리아 아르펜.
장장 4년 만에 보는 동료의 등장에 이안은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하하, 오랜만입니다. 딜리아.”
“생각보다, 일찍, 왔네?”
“예, 휴가를 받았거든요. 그나저나 딜리아는 여전하군요. 4년 전과 비교해서 달라진 게 거의 없어 보입니다.”
넉살 좋게 인사를 건넨 순간.
갑자기 딜리아의 눈이 차가워졌다.
“……무슨, 뜻으로, 하는, 소리야?”
“무, 물론 좋은 의미입니다!”
그와 함께 실언을 자각한 이안은 어색하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다행히 딜리아는 이안의 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보다, 라우레아는?”
“어제 과음을 해서 좀 늦는답니다.”
“걔는, 변한 게, 없네.”
나직이 한숨을 내쉬는 딜리아.
이후 이안과 대화를 주고받던 무렵, 별안간 배후에서 누군가가 불쑥 말을 걸어왔다.
“다들 안녕.”
인기척 없이 들려온 목소리.
딜리아는 깜짝 놀란 듯 귀를 쫑긋거렸고, 이안도 몸을 움찔거렸다. 다만 그도 잠시, 그는 상대를 확인하고는 화색을 지었다.
“스벤! 그간 잘 지냈습니까?”
“그냥 평범히 지냈어.”
묘인족 사냥꾼, 스벤 아이작.
세른 왕국의 귀족이 된 그는 이름 대신 신궁(神弓)이라는 별호로 더 유명했다.
실제로 스벤이 존재감을 드러낸 순간, 장내에선 일순간 소란이 일어날 정도였으니까.
“그나저나 슬슬 졸업식도 끝나가는 거 같은데 아직 이거밖에 안 온 거야?”
“아, 그게…….”
스벤의 질문에 이안이 자초지종을 설명하려던 순간, 돌연 정문 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잠시 후, 아까보다 훨씬 늘어난 구경꾼들과 함께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말 끝나기가 무섭게 왔군요.”
피식 웃음을 터뜨리는 이안.
그의 중얼거림과 함께, 인파를 헤치고 모습을 드러낸 이가 있었다.
등까지 내려오는 황금색 머리카락과 청록색 눈동자의 미녀. 그녀는 손을 흔드는 이안을 발견하고는 곧장 이쪽으로 다가왔다.
“와, 다들 오랜만이네.”
검희(劍姬), 이벨라 엘레아드.
루벤 제국의 여섯 번째 검으로 불리며 아버지인 이스탄 엘 데오르그를 진작에 뛰어넘었다고 알려진 마스터의 강자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그녀와 관계없는 자들에게 한정된 말일 뿐, 이 자리에 모인 용사들에게 그녀는 단지 전우에 불과했다.
짧은 해후의 시간이 끝난 뒤.
이벨라의 시선은 자리에 함께 있던 딜리아에게로 향했다. 뒤이어 짧은 눈싸움을 시작으로 이벨라가 입술을 달싹였다.
“각오는 하고 왔겠지?”
“갑자기, 무슨, 소리야?”
“결과에 승복하고 얌전히 공국으로 돌아갈 각오가 됐냐고 묻는 거야.”
“흥. 누가, 할, 소리를.”
딜리아가 코웃음을 쳤다.
이벨라 역시 차가운 미소를 머금은 채, 낯빛만큼이나 싸늘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기대되네. 조금 있으면 길고 긴 악연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 테니까.”
허공에서 맞부딪치는 시선.
그 강렬한 격돌을 바라보며 이안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라우레아가 보내왔던 편지를 떠올렸다.
울란이 아카데미를 졸업하는 날, 그가 누구의 고백에 응할지 대답하겠노라는 내용.
그때 스벤이 짧게 중얼거렸다.
“종지부를 찍는 게 악연이 될지 이곳이 될지는 두고 봐야 아는 거 아냐?”
“……재수 없는 말 하지 마세요.”
울란에게 선택받지 못한 여성들이 난동을 피운다면 이는 현실로 변하리라.
듣기만 해도 불길한 소리에 이안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 익숙한 음성이 들렸다.
“휴, 쟤들은 여전히 기운이 좋네.”
한숨과 함께 등장한 여성.
청록색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다가온 그녀는 자연스럽게 이안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나는 저렇게까지 다툴 기력도 없는데.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나이가 아니라 술을 마셔서겠지.”
“후후, 그것도 맞는 말이네.”
전직 성녀, 라우레아 로 샤르펠.
그녀는 스벤의 대답이 마음에 드는 듯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이안 역시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입니다, 성녀님.”
“그러게. 이젠 성녀가 아니지만.”
“혹시 성국으로 돌아오실 생각은…….”
“없어. 알면서 왜 물어봐?”
“성왕께서 물어보라고 하셔서요. 어쨌든 그럼 그렇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멋쩍게 뺨을 긁적이는 이안을 바라보며 라우레아는 안됐다는 눈빛을 보냈다.
“넌 여전히 고생이 많네.”
“알면 돌아와서 좀 도와주십시오.”
“싫거든.”
가벼운 투로 대답하는 라우레아.
이안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성녀라는 무거운 굴레를 벗어던지고 이제야 비로소 또래 여성처럼 보이는 모습에 미묘한 안도감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그때.
다시금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앗! 다들 여기 계셨네요.”
새하얀 로브를 걸친 인물.
로브보다도 흰 머리카락과 산토끼처럼 새빨간 눈동자를 가진 묘령의 여성. 그녀의 등장에 이벨라와 딜리아의 눈이 커졌다.
“페, 페르티샤?!”
“뭐야? 너, 여기에, 와도, 돼?”
그야 당연히 놀랄 만도 했다.
페르티샤 이브 알 루벤.
그녀는 작년 가을, 루벤 제국의 차기 황제로 즉위했으니까. 어쩌면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을 통틀어 가장 거물이라 할 수 있었다.
“네! 호위도 있으니 걱정 없어요.”
한편 페르티샤는 해맑게 웃으며 함께 있던 검은색 로브의 사내를 가리켰다. 황제의 호위 기사인 황실의 검, 작센 율 오르덴이었다.
“용케 외출을 허락하셨네요.”
“……몰래 나가시는 것보다는 낫잖나.”
“아하하, 고생하시는군요.”
한숨을 내쉬는 작센을 향해 이안은 어색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이걸로 다 모인 건가?”
“응? 아직 노아가 안 왔는데요?”
그때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페르티샤가 아직 자리에 없는 노아를 언급했다. 그 말에 이벨라와 딜리아는 미간을 찡그렸다.
“뭐야? 이 근처에 살지 않나?”
“그런데도, 지각하는, 거야?”
“원래 가까운 곳에 살수록 왠지 모를 여유가 생겨서 지각이 잦아지긴 하잖아요.”
페르티샤가 노아를 변호하듯 말했다.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말이긴 해서 이벨라와 딜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 이어지는 페르티샤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저도 국정에 자주 늦어서 이해해요!”
“아니, 그건 늦으면 안 되지!”
“……작센 경, 진짜 고생 많으시군요.”
황당한 얼굴로 소리치는 이벨라와 함께, 이안은 다시 한번 작센을 위로했다.
그렇게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다시 이야기꽃을 피워 나가던 무렵.
지각생이 모습을 드러냈다.
“휴, 다들 미안해. 너무 늦었지?”
붉은색 안경을 쓴 흑발의 여성.
창백할 만큼 흰 피부와 여기 모인 이들과 견줄 정도로 청초한 미모를 자랑하는 이.
작년 봄, 아르센 아카데미의 대학원생이 된 이방인, 노아 다르셴이었다.
“하하, 괜찮습니다. 보아하니 졸업식도 이제 막 끝난 것처럼 보이니까요.”
“울란보다 일찍 도착하면 되지 뭐.”
이안과 스벤이 그녀를 반겼다.
한편 이벨라는 노아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걱정된다는 듯 말을 건넸다.
“그보다 괜찮아? 몰골이 말이 아닌데?”
“으, 잡무를 처리하다 보니 그만…….”
“그러게 왜 사서 고생이야. 그냥 나 따라서 우리 백작령으로 오라니까.”
“그럴 바엔, 차라리, 공국이, 낫지. 백작가의, 계약직보단, 공무원이, 안정적이잖아.”
연달아서 대답을 내놓은 이벨라와 딜리아는 다시 서로를 노려보며 티격태격했다.
다만 아까보다 오래가진 않았다.
굳게 닫힌 대강당의 문이 열렸기에.
“이제 끝난 거 같네.”
스벤의 중얼거림을 끝으로 얼마 후, 대강당에서 졸업생들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모두의 눈에 생기를 돌게 만드는 반가운 얼굴도 함께 등장했다.
오늘 이 자리의 주인공.
울란 바토르였다.
3.
대강당에서 조금 떨어진 곳.
원형 탁자를 가운데에 둔 채, 모두가 둘러앉았다. 울란은 바쁜 와중에도 자신의 졸업식에 참석해준 동료들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다들 오랜만이군.”
“그러게 말입니다. 4년 만이네요.”
“너도 참 변한 게 없다.”
이안에 이어 스벤도 풀썩 웃었다.
설마 이런 날에도 웃통을 까고 있을 줄은 몰랐다는 것처럼. 잠시 후, 울란은 모두와 함께 그간의 회포를 풀었다.
수많은 추억과 이야깃거리가 오갔고 마침내 끝을 맞이하던 무렵. 울란은 모두를 한자리에 불러 모은 용무를 꺼냈다.
“모두에게 할 말이 있다.”
그 순간, 장내가 침묵했다.
뒤이어 맴도는 팽팽한 긴장감. 어쩌면 심연과의 결전보다 강렬한 느낌이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울란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그동안 무수히 고민했던 일에 이제야 비로소 결단을 내렸다. 그래서 내 생각을 모두에게 들려주고자 이 자리를 만들었다.”
강한 각오가 깃든 목소리.
이를 느낀 걸까? 이벨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응, 준비되면 말해줘.”
“울란의 뜻에 따를게.”
“후후, 나 기대해도 되지?”
“현명한 판단을 기다릴게요!”
그녀의 말에 이어 딜리아와 라우레아, 페르티샤도 저마다 대답을 보탰다.
노아는 고개만 끄덕였지만, 눈빛만큼은 다른 네 소녀만큼이나 강렬하게 빛났다.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채.
울란은 잠자코 눈을 감았다.
‘그간 많은 일이 있었지.’
이후 여기에 도달하기까지를 회상했다.
심연과 맞섰던 나날들.
아카데미에서 보냈던 생활과 다섯 소녀에게 차례대로 고백을 받던 추억들. 유급의 위기와 비로소 맞이하게 된 졸업의 순간까지.
수많은 과정을 지나며 울란은 지난 삶과 다르게 다양한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던 와중에 노아가 이런 조언을 건넸다.
「단순하게 생각해요.」
언젠가 노아와 함께 산책하던 날.
그녀는 울란에게 이렇게 말했다.
「딱히 모두를 배려하지 않아도 되니까 울란의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여요. 그러는 편이 저를 포함한 모두에게도 더 좋으니까요.」
노아의 조언은 상당한 도움이 됐다.
덕분에 울란은 고민의 굴레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그가 추구하는 걸 깨달았으니까.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내린 결정을 모두에게 들려줄 차례다. 두 눈을 뜬 울란은 곧장 입을 열었다.
“나는…….”
적막한 분위기 속에서.
모두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길게만 느껴지던 찰나의 순간이 지나간 뒤, 굳은 결의가 묻어나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대학원에 가고자 한다.”
그리고 그 순간.
모두가 석상처럼 변했다. 표정도, 목소리도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나오지 않았다.
“……뭐?”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이벨라가 여전히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러자 울란은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
“마지막 학기의 부전공으로 들었던 마법 강의가 제법 흥미로워서 말이지. 그래서 마법학부 대학원에 지원할 생각이다.”
속사포처럼 이어지는 대답.
이벨라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자, 잠깐! 잠깐만 기다려봐.”
“설마 할 말이라는 게…….”
“울란의 진로에 관한 거였어요?”
멍하니 되묻는 소녀들을 마주한 채.
울란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래. 진로는 중요하니까.”
“중요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그 순간, 참지 못한 이벨라가 폭발했다.
폭발한 건 그녀만이 아니었다.
딜리아와 라우레아, 언제나 생글생글 웃고만 있던 페르티샤도 눈에 쌍심지를 켰다.
단번에 차갑게 얼어붙은 분위기 속에서 울란은 눈치를 심연에 처박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듯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음? 뭐가 아니란 거지?”
“고백이요, 고백! 졸업하면 저희의 고백에 대해 대답해주겠다고 말했잖아요.”
“아, 그것 말이로군.”
울란이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이제야 깨달은 것처럼.
그러자 장내는 다시금 긴장감으로 맴돌기 시작했다. 아까만큼은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울란이 제대로 상황을 파악했으니까.
기대감과 긴장감의 시선 속에서─.
울란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사실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니 언젠가 대학원을 졸업할 때…….”
“묶어!”
이벨라의 외침을 신호로.
울란의 팔다리는 온갖 마법과 주술로 인해 결박됐다. 삽시간에 그를 제압한 소녀들은 눈을 반쯤 뒤집은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
“……우리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4년이야. 아니, 심연에 맞서 싸웠던 시기까지 포함하면 장장 5년이 넘어.”
“그런데 여기서 또 기다리라고?”
“못 기다려요! 그러니 당장 선택해요.”
“애당초 대학원은 아카데미처럼 시간만 채워서는 평생 졸업 못 해요! 사람 살려!”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른 소녀들이 폭주하면서 장내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이러한 광경에 스벤은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난장판이네.”
“그러게 말입니다. 그래도…….”
“……?”
“내심 마음이 좀 놓입니다.”
“무슨 소리야?”
“만약 울란이 다섯 중 한 명을 선택했다면 이 관계는 부서졌을 테니까요.”
선택받지 못한 누군가는 울란에 대한 마음을 접을 테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럼에도 울란을 차지하고자 무슨 짓이든 했으리라.
그러한 관계는 파국만을 맞이할 터.
따라서 이안은 울란이 결정을 유보해준 것에 대해 안도했다. 물론 그리 생각하는 건 이안뿐이었고, 스벤의 생각은 좀 달랐다.
“이미 부서진 거 같은데?”
스벤의 손가락이 가리킨 아수라장.
그곳에는 언제나 울란의 결정만을 기다리던 소극적인 소녀들의 모습은 존재하지 않았다.
폭주로 이성을 잃고 날뛰는 괴물들만이 존재할 뿐. 그러던 그때, 붙잡혔던 울란이 속박을 풀고 달아나자 상황은 더욱 격해졌다.
“도망친다! 놓치지 마!”
“무조건 잡아!”
눈을 뒤집고 울란을 쫓는 소녀들.
이 광경을 구경하던 스벤은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슬슬 말려야 할 거 같지 않아?”
“돕겠습니다. 저희 때문에 아카데미가 폐허로 변하면 여러모로 곤란할 테니까요.”
눈앞에서 폭주 중인 다섯 소녀는 저마다 무력의 정점에 도달한 괴물들. 다섯 중 하나만 폭주해도 아카데미에선 막을 자가 없다.
뒤늦게 이를 깨달은 스벤과 이안의 만류로 인해 상황은 금세 진정됐다.
그로부터 얼마 후.
수일간의 사투와 협상 끝에 울란은 비로소 원하는 것을 쟁취할 수 있었다.
4.
에단은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웬일로 마법학부에서 도움을 요청해서 교수 연구실을 찾았는데, 그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인물을 맞닥뜨렸기 때문이다.
“……네가 왜 여기에 있지?”
마법학부의 대학원생을 뽑는 면접.
그곳에 분명 지난달에 졸업했을 울란이 버젓이 앉아있었기에. 에단의 질문에 울란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꾸했다.
“대학원생으로 지원했소.”
“제발 좀 나가!”
“난 아직 배울 게 많소.”
“없으니까 나가!”
“그걸 정하는 건 당신이 아니라…….”
“그냥 좀 나가라고!”
울란의 졸업으로 인해 대륙이 소란스러워질 줄 알았는데 아카데미가 터지게 생겼다.
에단은 어떻게든 울란은 이곳에서 내쫓고자 목에 핏대를 세워가면서까지 소리쳤다.
물론 씨알도 먹히지 않았지만.
“싫소.”
단호한 투로 돌아온 부정.
울란은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이곳이 좋으니까.”
“이, 이 미친……!”
울란의 말과 함께 에단의 얼굴은 점점 새빨갛게 물들어갔다. 그러더니 뒷말을 마저 내뱉지도 못한 채 그대로 쓰러졌다.
“교수님! 정신 차리세요, 교수님!”
“가서 빨리 들 것을 가져와!”
발칵 뒤집힌 연구실.
면접이 진행될 분위기는 아니었기에 울란은 거품을 물고 기절한 에단을 뒤로한 채, 연구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앞으로가 기대되는군.”
이제부터 새로운 형태로 시작될─.
아카데미의 나날들을 꿈꾸며.
《아카데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