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cademy’s Weakest Became A Demon-Limited Hunter RAW novel - Chapter (153)
“…흐얏!”
하트 모양 장신구를 단 붉은 단발머리 여학생, 셰라 헥토리카는 독특한 소리를 내며 퍼뜩 정신을 차렸다.
처음 보는 천장. 침대에 누워 있는 건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처럼 침대에 누워 있는 여러 학생.
이곳은 옥토버스관 임시 병실인 듯했다.
셰라는 이불을 집고 상체를 일으켰다. 명치 쪽에 큰 충격이 들이닥치며 정신을 잃었던 게 마지막 기억. 그녀는 가슴팍과 복부 사이를 손으로 문질렀다.
약간의 통증은 있지만, 그리 아프지 않았다. 기절한 사이에 아카데미 의료진의 회복 마법이라도 받았던 모양이었다.
“루체 엘타니아….”
떠오르는 건 몰포나비 머리 장식을 한 로즈골드색 머리칼의 여학생.
마법학부 2학년 수석, 루체 엘타니아. 전설의 마수, 뇌신조-갈리아를 수족처럼 부리는 여자. 그녀와의 전투에서 셰라는 패배했다.
속성이 불리했다는 점은 둘째 문제다. 강하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루체는 학생의 범주를 아득히 뛰어넘었다.
물론 도로시 하트노바처럼 세계에서 손가락 안에 꼽히는 수준은 아닐 터. 그러나 엄청난 재능을 타고났다는 점은 분명했다.
“마족은?”
“영웅이 나타나서 끝장냈다더라. 아까 그 느낌이 그 분의 마력이었나 봐.”
“그걸 못 봤네, 아….”
학생들의 대화를 듣고 셰라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기절한 사이에 마족이 출현했었단 말인가. 그걸 검은 괴물이 해치웠고…?
자괴감이 셰라에게 들이닥쳤다.
“후아….”
셰라는 이불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어깨가 부르르 떨려온다.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기는커녕 일개 학생한테 패배하고 뻗어 버리고 말다니.
아무리 자신이 팔라딘 중 최약체라지만, 스스로가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한동안 그녀는 수치심과 죄책감 탓에 얼굴을 들지 못했다.
한편. 메르헨 아카데미 지상 대피 시설, 건물 옥상.
[니옹.]작은 중절모를 쓴 보라색 고양이 마수, 괴묘-체셔는 옥상 난간에 앉은 채 바람을 맞고 있었다.
엘트라 해에 몰아치고 있는 차가운 은빛 바람을 바라보며 씨익 웃는 괴묘.
검은 괴물. 그의 강함은 가히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관찰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괜히 마법에 휩쓸려 헛된 죽음이나 맞이하지 않았으면 다행일 것이었다. 이제는 서리를 머금은 바람 탓에 시야도 제대로 확보되지 않는다.
애당초 그는 대마법사. 발산 중이지 않은 마력까지도 감지할 수 있을 터. 다가 갔다간 무조건 들켰겠지. 앨리스도 섣불리 접근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까닭이 그것이었다.
목적도, 그 무엇도 불분명한 저 미스터리한 적에게, ‘우리가 네놈을 지켜보고 있다’라는 사실을 들켰다간 여러모로 곤란해질 테니. 무슨 해코지를 당할지도 알 수 없었다.
저 규격 외의 적을 상대로는 은밀하게, 신중하게 움직일 수밖에 없을 터.
그렇다고 악감정을 갖고 움직이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괴묘는 검은 괴물을 좋아하기까지 했다.
자신은 앨리스의 사역마. 그녀를 방해하는 검은 괴물은 해치워야 할 적. 그 관계가 괴묘에게는 재밌는 오락거리이기 때문이었다.
[어떡할래, 앨리스? 저런 걸 상대로, 어떻게 원하는 걸 이룰 거니?]괴묘의 입꼬리가 귀까지 이어졌다. 큼지막한 입을 헤실거리자 하얗고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났다.
괴묘의 목소리는 대피 시설 중심부, 집무용 책상에 앉아서 엘트라 해 방면을 지켜보고 있던 제 주인, 앨리스 캐럴에게 전해졌다.
앨리스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창밖, 빙판으로 변해 버린 바다와 은빛 바람을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 * *
엘트라 해에 출현했던 심해괴수 마족, 심현의 이그푸스를 해치우자 물고기 마족 군세는 모조리 소멸했다.
마력으로 창조된 하수인이 아닌 기존의 생명체 하수인이 주인의 최후를 따라가는 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엔 영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마족은 아직 연구 대상이다. 연구자들은 그 새롭게 관측된 현상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겠지.
딱히 중요하게 파고들 문제는 아니었다. 물고기 마족들은 이그푸스가 나눠 주는 어둠 속성 힘으로 살아가던 거였으니까. 옛날에 설정집에서 읽었던 내용이다.
아무튼, 그렇게 엘트라 해 마족 침략 사건은 이름 없는 영웅의 활약으로 끝이 났다.
심현의 이그푸스가 처치된 뒤.
옥토버스관의 출입구 수십 개를 봉쇄했던 결계는 위기 상황이 종료됐다고 판단되어 자동으로 풀렸다.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선 이안이 심해괴수를 쓰러뜨리면, 그는 자신을 도와주러 왔던 시험감독관과 함께 옥토버스관으로 되돌아간다. 그 장면을 떠올려서 결계가 풀릴 걸 예상할 수 있었다.
덕분에 나는 인적 없는 출입구에 들어가 옥토버스관 내부를 떠돌아다니던 척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다 적당한 때에 시험감독관과 마주쳐서 집결지로 안내받았다.
[천리안] 덕분에 시험감독관들의 경로를 살피고 자연스러운 상황을 연출하는 건 아주 간단했지.엘트라 해를 채웠던 빙판은 내가 빙결 해제로 없앴고, [서리바람]은 시간이 지나자 알아서 사그라졌다.
옥토버스관은 비상용 대피 시설답게 간이 의료시설이 있었다. 시험감독관과 함께 임시 병실 앞 복도를 지나던 중, 돌연 익숙한 실소 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하!”
고개를 뒤로 돌려 웃음소리의 주인을 눈에 담았다.
“트리스탄?”
피투성이 교복과 몸을 칭칭 감은 붕대. 다리를 온전히 움직일 수 없는지 나무 막대기에 의지하는 금발의 동급생, 트리스탄 험프레이였다.
나는 덤덤하게 트리스탄과 눈을 마주쳤다. 녀석은 평소처럼 턱을 치켜세우며 오만한 미소를 지었다.
“마족이 처치될 때까지 뭣도 모르고 옥토버스관을 헤맸던 것이냐?”
“뭐…, 그렇지.”
“몸 상태도 멀쩡한 걸 보니 딱 봐도 시시한 전투만 하고 온 모양이구나! 안타깝도다! 이 몸과는 다르게 제대로 성장할 기회를 놓쳤으니 말이다!”
크흐흐! 하고 거만하게 웃는 트리스탄.
“오늘로, 이 몸은 새로운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니 곧이다!”
메르헨 아카데미에는 향상심 덩어리인 사람이 많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 녀석처럼.
“금방 추월해 주마, 아이작!”
그 자신감 넘치는 대사를 끝으로, 트리스탄은 삼류악당처럼 “크하하하!”하고 웃어대며 등을 돌렸다. 이내, 사레들려 콜록콜록 헛기침했다.
그대로 그는 나무 막대기로 땅을 짚어가며 절뚝절뚝 복도를 가로질렀다.
E급 평민. 그냥 평민. 그리고 아이작.
내가 B 클래스 1등이 된 후로, 트리스탄은 나를 이름으로 불러 주기 시작했다. 자신보다 내가 앞서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었다.
“…그래, 열심히 해라.”
나는 고개를 돌리고 다시 시험감독관과 함께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리 트리스탄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며 거리가 멀어지는 동안, [천리안]으로 녀석을 살폈다.
실실 웃고 있던 트리스탄의 표정은 점점 돌처럼 굳어갔다.
이윽고 그는 아랫입술을 짓씹고, 나무 막대기를 쥔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붕대를 휘감은 눈가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을 연신 훔치고, 고개를 숙인 채 숨소리를 애써 집어삼켰다.
[심리 간파] 덕분에 녀석의 심리 상태를 헤아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목표인 나를 보고 나서, 자신이 알렉사에게 졌다는 사실이 더욱 실감이 나서.
트리스탄은 가슴속이 북받쳐 오를 만큼 분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
[천리안]을 거두었다.트리스탄의 목표는 나다. 그러니 지금은, 더 이상 녀석의 얼굴을 봐서는 안 됐다.
내 앞에서 삼류악당처럼 오만방자하게 웃어대는 얼굴만을 봐주는 것이, 나를 따라잡으려는 저 녀석에 대한 예의일 테니까.
……
피해를 입은 학생이 있는지, 아카데미에 얼마만큼의 피해가 있었는지, 학사 측은 면밀하게 조사를 진행했다.
어른으로 구성된 전투 병력들이 아카데미를 지켜 준 덕분에, 학생들은 합동 전술 평가로 다친 경우 말고는 모두 멀쩡했다.
결과적으로 사망자는 0명. 아카데미에 별다른 재산상 손실도 없었다.
그러나 이번 심해괴수 사태를 수습하는 데 아카데미 인력들이 얼마나 고생할지는…. 뭐 애도밖에 표할 수 없는 일이었다.
팔라딘은 나를 막아 내는 데 실패했다. 하트 팔라딘은 루체에게 당했고, 다이아몬드 팔라딘은 트리스탄이 막아 냈지. 스페이드와 클로버 팔라딘은 다행히 경로가 겹치지 않았다.
새삼스럽지만, 변수란 건 언제나 차고 넘친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다이아몬드 팔라딘, 알렉사가 벽을 뚫고 갔던 건 예상 밖이었기에 미처 대비할 수 없었어. 트리스탄에게 크게 신세 진 셈이었다. 앞으론 좀 더 계획적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으리라.
그리고 당연한 얘기지만, 알렉사는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었다.
왜 시험장에서 벽을 부수고 시험감독관을 폭행했는지 취조받겠지. 그래 봤자 아카데미가 ‘앨리스 캐럴이 내통자다’라는 진위에까지 도달할 것 같지는 않았다.
알렉사라면 성격상 묵비권을 행사하고 개전의 정이 없다는 이유로 징계를 세게 받을 것 같거든. 아, 초범이라는 사실이 고려될까. 앨리스의 입김이 작용할 수도 있겠고…. 상황을 지켜봐야 알겠지.
도로시와 카야는 아카데미를 지키는 데 이바지한 공로로 표창장을 받았다.
상장은 둘째 문제고, 벌점이 확 줄어들었다며 도로시는 내게 실컷 자랑해댔다. 그래도 벌점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카야는 상장을 받았다는 사실에 뿌듯해하며 며칠간 헤벌쭉, 거렸다. 모두 귀여웠다.
결국, 마족이 출현했다는 사실에 자퇴를 결심한 학생이 몇 명 속출했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아카데미가 위기를 대처했던 방식, 그리고 아카데미의 수호자인 이름 없는 영웅을 보고서 계속 재학하기로 했다.
메르헨 아카데미라는 이름값, 졸업장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게 주된 이유.
그 외에도 이름 없는 영웅을 동경한다든지,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일단 강력한 마족이 들이닥쳐도 안전하리라고 확신하게 된 연유가 컸다.
참고로 메르헨 아카데미는 잦은 마족 출현 사태 때문에 아카데미 자체의 위치를 옮기는 방안도 논의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장소에서 이만한 시설을 갖춘다는 게 단기간에 뚝딱 해결될 일이 아니었기에, 적어도 악신이 나타나기 전까지 아카데미 위치가 바뀔 일은 없을 터였다.
[ 상 태 ]이름 : 아이작
Lv : 113
성별 : 남
학년 : 2
칭호 : 능숙한 2학년
마력량 : 33800 / 33800
– 마력 회복 속도(A-)
저녁. 나비 정원 구석.
어떻게 눈에 안 띄는 외진 길을 지나면 이런 탁 트인 정경이 나오는지, 무슨 의도로 이런 식으로 만들어졌는지 모르겠는 장소.
나는 그곳 잔디밭 위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생각을 정리하려고 온 것이었다.
땅거미가 내려앉으니 반딧불이 무리가 발광하며 스멀스멀 제 모습을 드러냈고.
서늘한 바람이 온화하게 불어와 피부를 가볍게 쓰다듬고 지나갔다.
그럼 이제.
‘정리해 보자.’
이번 합동 전술 평가와 심해괴수 사태로 높은 경험치와 흑해 여제의 반지를 얻었다.
레벨은 총합 3이 올랐다. [일취월장]의 효과 덕분에 스탯은 총 12 얻었고. 업적 [심해군주]를 클리어하며 [물 속성 원소 저항력] 30을 추가로 얻었다.
12 스탯은 모두 [대 인간 전투력]에 투자했다.
◆ 대 종족 전투력
– 대 인간 전투력(C+) : 32/100
◆ 원소 저항력
– 물 속성 원소 저항력(B+) : 51/100
참고로 루체의 물 마법을 하도 얻어맞았던 탓에 [물 속성 원소 저항력]은 이미 조금 올라 있던 상태였다.
여기서 원소 팔찌까지 낀다면 꽤 든든한 수치다. 팔라딘 중에선 클로버가 물 속성이니, 그 녀석의 물 마법 한두 방 정도론 쉽게 나가떨어지지 않겠지.
‘그리고….’
고개를 들면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이 보였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은하수가 흐르는 듯했던 화이트의 회중시계 문자판이었다. 멈춰 있던 시침.
‘고장 나 있었어.’
화이트의 회중시계는 그녀의 어머니가 준 선물이었다.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선 그것이 무엇인지는 떡밥만 솔솔 뿌려졌었지. 에이미 할로웨이가 [심색 분별]로 화이트의 심색이라고 착각한 무언가를 보고 오싹해 하는 장면이 그 예시다.
참고로 화이트의 심색은 대체로 포근한 느낌이다. 내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살갑게 대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어쨌든 시계는 2학년 2학기 파트에 이르러서 갑자기 고장 나고, 3학년 1학기 파트에 이르러서 그 정체가 드러난다.
그 시계의 정체가 드러났을 땐, 어머니가 자기 딸에게 어떻게 그리 잔인할 수 있는지 감탄만 나오는 충격적인 스토리가 펼쳐졌다. >메르헨의 마법 기사>를 처음 플레이했을 땐 그 광기에 절로 감탄과 욕설이 튀어나왔지.
‘미리 알아서 다행이네.’
왜 회중시계가 벌써 멈췄는지 명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건, 회중시계의 정체가 조기에 드러날 수도 있게 됐다는 점. 회중시계가 고장 났을 때 특정 조건이 충족되면 무시무시한 재앙이 들이닥치니까.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서 그 재앙에 대적하려면 섭리마저 비틀 수 있는 힘이 필요했다. 빛 속성의 최종 무구, ‘창명검’처럼.
그러나 그 무기는 2학년 2학기 파트에나 가야 얻을 수 있었으니.
지금으로썬 회중시계의 재앙을 불러오는 ‘특정한 조건’이 충족되고 있는지 상시 감시하면서 대책을 마련해야겠지.
참고로 회중시계를 부수거나 바다로 던지면 최악의 결과를 야기한다. 회중시계는 평소처럼 화이트가 가지고 있는 편이 가장 나을 터.
‘그 다음엔….’
고개를 들고 흑해 여제의 반지를 들어 달빛에 비춰 보았다.
흑청색 마석이 달린 박힌 반지. 때깔 한번 곱네.
루체가 이 반지를 착용하면 물과 번개의 힘이 증폭되는 건 물론이고, 원소의 색도 무게감 있게 짙어진다. 게다가 [흡마] 같은 스킬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전장에서 여왕처럼 군림하게 되겠지.
나중에 생길 루체의 오글거리는 별명, 흑해 여제처럼.
어쨌든, 나는 이 반지를 루체에게 줘야 한다. 그녀가 왼손 약지에 끼워서 잘 써먹을 수 있도록 설득도 해야 하고.
일단 이 마도무기를 어디서 구했는지는 당연히 거짓말을 짜놨다.
겨울방학에 암갑귀의 골렘들이랑 며칠 동안 쉬지 않고 겨뤄보려고 잠시 아카데미를 떠나는 척한 적 있는데.
그때 밖에서 운 좋게 구해 왔다고 하면 될 일이겠지.
이 반지의 성능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는다면, 감정사 해리슨 할아버지를 들먹이면 될 거고.
“음.”
장난스럽게 줄까?
아니, 애매했다. ‘왜 굳이 왼손 약지에 끼는 마도무기 반지를 구해 온 건데?’라는 근본적인 의문이 해소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나도 몰라. 그냥 그런 무기래.’라고 얘기하면 괜찮지 않을까? …아니. 그것도 영 시원찮네. 찝찝한 결말이 그려진다.
전 회차의 나는 이 반지를 루체에게 어떻게 전했을까.
일단 반지를 얻었는지부터 잘 모르겠지만 뭐, 얻었겠지.
아무튼, 음습한 본성을 지닌 루체에게 뭐라 하면서 반지를 줬길래 악신 토벌전까지 엑스트라 배드 엔딩 「새장」을 피해 갔을지 의문이었다.
그때,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
냉큼 주먹을 쥐어 반지를 손안에 숨겼다. 혹시 모르니 누군가한테 들키고 싶지 않았으니까.
이내 발걸음 소리가 점차 가까워지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작, 뭐해?”
고개를 뒤로 돌렸다.
몰포나비 머리 장식. 땋아 내린 로즈골드색 머리칼의 교복 차림 여학생. 곱상한 미모에 절로 헛숨이 집어삼켜진다.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인 채 의문스러워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는, 마법학부 2학년 수석 루체 엘타니아였다.
“루체….”
갑자기 얘가 왜 나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주 있는 일이라 이상할 건 없었다. 그냥 내가 보고 싶어서 찾아오는 경우가 태반이었거든.
어차피 내 쪽에서 찾아갈 계획이기도 했어. 시간 절약되고 좋지, 뭐.
전 회차의 나는 성공적으로 루체에게 반지를 건넸겠지. 즉, 그녀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나도 그 해법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무슨 일이야, 루체? 나 보러 왔어?”
표정을 가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벨라의 안경을 한 차례 들치고, 만면에 능청스러운 미소를 담아냈다.
…그런데 어째 얘 표정이 의미심장한데.
“아이작.”
루체는 진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방금 반지, 뭐야?”
“…….”
맞다.
얘 시력 개사기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