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cademy’s Weakest Became A Demon-Limited Hunter RAW novel - Chapter (162)
* * *
메르헨 아카데미 야외 수련장은 이용하는 사람이 적었다.
생활동과 거리가 멀다는 점, 다른 수련장들에 비해 시설이 빈약하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곳에서 한 남자가 햇볕을 내리쬐며 수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웃통을 벗은 채 머리 위로 양손을 들고 무릎을 구부렸다 펴길 반복한다.
그 양손 위에는 3m는 되는 큼직한 바위가 받쳐진 채였다.
땀으로 흠뻑 젖은 상체. 스쿼트를 반복할 수록 사나운 근육이 아우성쳤다.
진녹빛 머리칼의 3학년생, 4성좌 중 흑호의 정예 멤버. 베르가 레이펠트였다.
“베르가 선배! 선배만의 귀염둥이 후배가 왔어요!”
“제이니냐.”
4성좌 중 흑호의 멤버이자 2학년 여학생 제이니가 다가와 장난스럽게 경례하자, 베르가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대답했다. 묵직한 음성이었다.
스쿼트를 멈추지 않는 베르가.
“왜 온 거냐?”
“공지 전달하러 왔죠.”
“빨리 말하고 돌아가라.”
“헤헹. 냉정하네, 정말.”
제이니는 능숙하게 애교 섞인 웃음소리로 분위기를 무마했다.
“그나저나 평소보다 큰 바위네요? 이제 대련 평가라 신나신 거죠, 그렇죠?”
대련을 좋아하는 베르가에게 매 학기 대련 평가는 줄곧 고대하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싸우고 싶었던 학생과 강제로 싸울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 주니까.
하지만….
“딱히 그렇지도 않다.”
“네? 왜요?”
베르가는 들고 있던 바위를 앞으로 휙 던졌다.
쿠웅!
무거운 바위가 지면에 떨어지자 큰 충격음이 울리고 모래 먼지가 피어 올랐다.
금세 흩어지는 모래 먼지 속, 땀 범벅인 베르가의 근육질 상체가 그의 호흡을 따라 들썩였다.
제이니는 음흉한 표정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관심 없으니까. 지금은 그놈 콧대만 꺾어 주고 싶을 뿐이지.”
“그놈? 아.”
베르가가 ‘그놈’이라고 일컫는다면 단 한 사람뿐이었다.
마법학부 2학년생. 청은발의 후배, 아이작.
작년, 베르가는 아이작이 내지른 바위 주먹 한 방에 기절하는 굴욕을 맛보고 말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때하고는 확연히 달랐다. 자신의 근육은, 자랑처럼 여기던 방어력은 더욱 크게 발달되었으니.
더 이상 방심하지 않고 자만하지 않으리라. 다시 아이작과 대련한다면 필시 자신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 과거의 굴욕을 청산할 수 있을 것이었다.
베르가는 그리 확신하고 있었다.
“지금 이 시기. 대련 평가가 시작되기 전에 놈과 다시 대련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쯤이면 감정이 가라앉았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흥분할 일도, 흑호의 명예를 더럽힐 일도 없겠지.”
“명예요? 와, 작년에 제가 했던 말 마음에 담아 두고 계셨구나. 선배는 참 여린 구석이 있네요. 쪼잔하게 뒤끝도 있고요.”
장난스럽게 감탄하는 제이니.
“…혼나고 싶나?”
“헤헹.”
제이니는 머리를 긁적이며 애교스러운 웃음소리를 흘렸다. 이 웃음 한번이면 베르가의 분노는 단숨에 잠재워진다.
베르가는 어이가 없다는 듯 그녀를 노려보고는, “귀여우니 됐다.”하고 옷걸이에서 교복 셔츠와 재킷을 집어 한쪽 어깨에 걸쳤다.
“그러고 보니 아이작, 그 사람. 최근에 무녀한테 대련 신청 받았대요. 꽤 잘 나가나 봐요?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무녀든 뭐든, 관심 없다.”
베르가는 제이니를 제치고 지나갔다.
“어디 가시게요?”
“말했을 텐데?”
아이작에게 대련을 신청하러 가는 걸까.
제이니는 “아하. 뭐, 그럼. 파이팅.”하고 주먹을 불끈 쥐고 베르가를 응원했다.
떠나가는 베르가의 뒷모습, 넓은 등판을 홀린 듯 바라보는 제이니.
이윽고, 그녀는 “아차.”하고 망각하고 있던 사실을 떠올리곤 다급히 소리쳤다.
“베르가 선배, 공지 있다니까요!”
제이니는 뜀박질로 베르가를 뒤쫓았다.
한편, 마법학부 수업동.
오르핀관, 야외 벤치.
청회색 머리의 1학년 남학생, 아벨 카르네다스는 벤치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마법학부 친구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대련 연습과 마법 단련을 위해서였다. 마법 기사 지망생으로서 마법 단련에도 소홀히 할 수 없으니까.
그러나 지금, 아벨의 머릿속에선 별개의 생각이 맴돌고 있었다.
이번 학기 대련 평가 소식을 듣자마자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마법학부 2학년 선배인 아이작이었다.
학부가 달라 대련 신청은 못 하겠지만, 아이작과 다시 결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합동 전술 평가에서 그에게 패배했던 기억이 내내 승부욕을 자극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의문이 들었다.
‘왜 무녀는 아이작 선배한테 신청권을 2장 다 쓴 건지….’
미야. 마법학부 1학년 수석. 동방국의 무녀이기에 전교에 소문이 널리 퍼져 있는 인물이었다.
그녀가 아이작에게 대련 신청권을 2장이나 쓴 건 명백한 관심의 표현.
좋은 관심은 아니겠지만, 어떤 의미에서건 아이작이 그녀의 흥미를 크게 자극한 것이 분명했다.
“아이작 선배한테 뭔가 있나?”
아이작은 독특했다.
마법학부면서도 기사학부 못지 않은 신체 능력을 가졌으니. 아니, 기사학부 내에서도 상위권을 차지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마력량에서 뒤처지는 인물은 아니었던 데다, 전투 감각은 존경스러울 정도.
별의 마녀, 화록청의 마법사 같은 별칭을 가진 선배들은 잘 알고 있었으나.
오히려 마법 기사 지망생으로서 아벨은 아이작 쪽에 더 큰 흥미와 존경심을 느꼈다.
“응?”
별안간 오르핀관 위층에서 학생들끼리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같은 주제로 떠드는 듯했다.
아벨은 고개를 더욱 뒤로 젖혀 오르핀관 창문을 쳐다보았다.
* * *
메르헨 아카데미 학생회 소속 집단, 선도부.
아카데미의 품위와 질서를 지키기 위해 마련된 소규모 집단이다.
특히 엑스트라 NPC 중 한 명이었던 선도부장 에린은 명령조가 습관이 되어 있었다.
“학생회장님께서 아이작을 불러…?”
“아이작을 학생회에 들이시려는 거 아니냐?”
“설마…. 학생회라니, 아니, 진짜…?”
“왠지 아이작이라면 그럴 법한데.”
학생회라는 사실만으로 선도부장 에린은 학생들의 주목을 받는 편.
이쪽으로 동급생들의 시선이 집중됐던 탓에, 내 이름이 그들의 입에서 오르내렸다.
상관없었다.
내가 소문에 민감했던 건 처음부터 끝까지 앨리스 탓이었지.
아예 당사자인 앨리스 때문에 나버린 소문이라면 신경 쓸 이유가 없는 것이다.
“절 왜 부르는데요?”
태연하게 물었다. 에린은 3학년 선배라 존댓말을 써야 했다.
“따라오면 알아. 너한테 희소식일 거야. 가자.”
“싫은데요?”
내가 왜?
“…어? 방금 뭐라고…?”
“저 바빠요. 단련 못 미룹니다.”
“……???”
얘 당황했네. 학생회장이란 이름만 대면 만사가 형통할 줄 알았나 보다.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서도 고지식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봐도 어설픈 애야.
우릴 쳐다보던 학생들은 기겁했다.
복도를 감도는 침묵.
날 해치려는 사람이 날 부르는데 어떻게 희소식이냐.
당연히 도망치는 게 상책이지.
에린의 심리를 읽어 보면, 앨리스가 나를 학생회 멤버로 들이고 싶다고 언급한 듯했다. 참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인다.
“아이작, 너. 잠깐 단련 못한다고 회장님을 무시하는 건 너무…!”
“죄송하다고 전해주세요.”
그대로 에린을 지나쳐 발걸음을 재촉했다.
앨리스는 내가 이름 없는 영웅이라고 의심하고 있다.
저번에 우산을 같이 쓰고 걸었을 때, 난 그런 대단한 인물이 아니라는 티를 펄펄 내긴 했지만.
사람에겐 직감이란 게 있고 그녀는 그 직감에 예민한 편이다. 한번 틔운 의심의 싹을 쉽게 거두지 않는다.
그러니 2학년 1학기 마지막 파트, 「앨리스 토벌전」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가능한 한 앨리스와 접점을 만들지 않는 편이 좋겠지.
비명에 가까운 탄식을 내뱉는 학생들. 미친 거 아니냐는 소리가 들려왔다.
상관없었다. 어차피 앨리스 일로 엮이면서 노이즈가 생기는 건 예정된 일이었으니.
기왕이면 ‘나는 단련충이니 괜히 단련할 시간을 뺏지 마라’라는 인상을 심어 주는 편이 좋지 않겠는가.
그 순간, 음습한 마력이 느껴져 발걸음을 멈추었다.
[주인.]머릿속에 들려오는 빙설룡-힐드의 목소리. 교복 셔츠의 목깃 안에 녀석은 작은 불빛 형태로 숨어 있었다.
녀석의 역할은 내가 이 아카데미에서 가장 경계하는 마수를 감지하는 것.
‘나도 느꼈어.’
이 정도로 대놓고 티 내면 감지 못하기가 더 어렵다.
[니오옹. 너무한 거 아니니?]별안간 복도 창가 쪽에서 남자도, 여자도 아닌 기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머리에 작은 중절모를 쓴 뚱뚱한 보라색 고양이 마수, 괴묘-체셔가 어느새 창가에 앉은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중요한 이야기니까, 꼭 따라와 줬으면 하는데.]강요하는 느낌이네.
평소에 괴묘는 날 감시하는 낌새는 없었으나, 이번 만큼은 내가 앨리스의 부름에 잘 따르려는지 확인하러 온 모양이었다.
“학생회장님의 사역마…!”
“어떡해, 귀여워!”
환호하는 학생들.
얘네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반응이 가볍게 변했다.
괴묘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칭찬들을 듣고는 흠흠, 하고 헛기침하더니 의기양양하게 허리를 꼿꼿이 폈다.
자신감 넘치는 미소. 저런 성향은 왠지 도로시를 닮았어.
그 와중에 나를 향해 묵직한 기운을 뿜어댄다. 거절하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
…곤란하네.
괴묘까지 나선 마당에 거절할 깜냥은 없었다.
녀석의 기분까지 상하게 하는 리스크를 짊어지고 싶진 않았으니까. 후폭풍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얜 완전히 기분파잖아. 행동 패턴을 예측하기 어렵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차피 목격자는 차고 넘친다. 벌써 앨리스가 본성을 드러내 나를 해치려고 들지는 않으리라.
애당초 내가 이름 없는 영웅이라는 확증을 이미 얻었다면 얼마든지 날 은밀하게 해치려고 했겠지. 대놓고 승산 없는 싸움을 걸어오지는 않을 터.
물론 표면상 그렇다는 얘기고, 지금 내가 앨리스와 싸우면 반드시 패배할 것이었다.
어쨌든, 앨리스는 서서히 나를 조여올 작정일까. 이번엔 학생회 영입 제안으로.
나야, 앨리스가 토벌될 때까지 계속 시치미를 떼면 되는 일이지.
…생각을 마쳤다. 괴묘-체셔와 마주 보다가 등을 돌리고 에린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나를 멀뚱히 쳐다보고 있었다.
……
“회장님, 데려왔습니다.”
아카데미 행정의 중심지, 바르토스관.
똑똑. 선도부장 에린이 학생회실 문을 두들겼다. 안쪽에서 “들어와.”라는 온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가.”
에린은 문을 열면서 자리를 비켜 주었고.
[니오옹! 체셔 입장~. 앨리스, 아이작 데려왔어!]나는 괴묘-체셔와 함께 학생회실 안으로 들어갔다. 곧 에린은 고개를 숙이고서 문을 닫았다.
천장엔 호화스러운 발광 램프가 걸려 있었고, 주변엔 목재로 된 고급 가구들이 즐비했다. 멋스러움과 고풍스러운 디자인이 절묘하게 잘 어우러지는 장소였다.
‘여기 빙의되고 오는 건 처음이네.’
학생회실은 실제로 보면 이런 느낌이었구나. 멋있네.
훑어본 건 잠시뿐.
커튼이 따스한 바람에 살랑거렸다. 커다란 아치형 창문 앞에 놓인 집무용 책상.
자리에 앉아 있던 연금발의 여학생은 나를 보더니, 깍지 낀 손으로 턱을 괴고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안녕, 애기야. 잘 지냈어?”
상냥한 목소리.
햇볕을 등지고 웃는 모습이 꼭 해바라기 같았다.
“앨리스 선배….”
앨리스 캐럴이었다.
학생회장이자 「앨리스 토벌전」의 최종 보스.
치열한 사투 끝에 이안 페어리테일과 그의 동료들에게 패배하고.
마지막으로 모든 걸 포기하기라도 한 듯 허무한 미소를 지은 채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리는 흑막.
도로시에 이어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서 반드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학생이었다.
상태창이나 심리는 읽히지 않았다. 그녀의 고유 특성 [붉은 여왕의 역설] 때문이었다.
긴장감을 감추고, 나는 연기력을 발휘해 자연스러운 미소로 화답했다.
“저야 잘 지냈죠. 겨울방학 땐 고마웠습니다.”
“아냐, 나도 그러고 싶은 기분이었거든.”
착하고 재미없는 선배가 내뱉을 법한 형식적인 대답이었다.
“아, 거기 앉아. 차 마실래?”
“아뇨, 괜찮아요.”
앨리스가 가리킨 응접용 소파를 무시하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큼지막한 집무용 책상을 사이에 두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뭐하고 지냈어?”
곧바로 친한 척, 떠보기인가.
“단련하면서요. 선배는 학생회장 일로 바쁘셨죠?”
“응. 서류에 깔려서 뭉개질 것 같아.”
“그거 안타깝네요.”
은근히 장난기가 담긴 목소리로 대답하는 앨리스에게 상투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래도 이번 학기가 임기 마지막이잖아요. 마족이다 뭐다, 힘든 일 많았어도 잘 해오셨으니까 끝날 때까지 잘 하시겠죠.”
“애기는 말을 참 예쁘게 하는구나.”
앨리스는 웃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끼익, 거리며 뒤로 밀려났다.
“근데 왜 부르셨어요? 저만 따로.”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앨리스는 집무용 책상 앞으로 나오더니 내 앞에 서서 책상에 슬쩍 엉덩이를 걸쳤다.
부탁이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서 좋았다. 분명 학생회에 들어오라고 제안하겠지.
나는 성장세가 뚜렷한 학생이며, 지금은 마법학부 2학년 A 클래스에 버금가는 실력을 갖추고 있다.
현 실력과 잠재력을 놓고 보자면 4성좌나 학생회에서 탐낸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당연히 거절해야겠지만.’
괜히 어딘가에 소속돼서 단련할 시간을 허비할 순 없었다.
뭐, 학생회에 오라는 달콤한 제안을 거절하기 위한 명분도 이미 준비해 놨다.
얘기는 대충 끝마치고 빠르게 돌아가자.
“뭔데요?”
“별건 아니고.”
내가 묻자, 앨리스는 만면에 느긋한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그녀의 고갯짓을 따라 햇볕에 비치는 곱상한 연금발이 스르르 교복을 스쳤다.
이어지는 그녀의 말은 너무나도 뜻밖이어서.
나는 차마 표정 관리를 할 수 없었다.
“오늘 나랑 데이트하지 않을래?”
“…예?”
굉장히… 별것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