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cademy’s Weakest Became A Demon-Limited Hunter RAW novel - Chapter (330)
〈 330화 〉 천의 날개 토벌전 – 막간 (4)
* * *
“루체 요즘 열심히 단련하더라.”
교정에 도열된 가로수들에 순백의 눈꽃이 피어났다.
도로시를 만나 벤치에 앉은 채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의식불명 상태였던 동안 루체가 도로시, 앨리스를 상대로 많은 대련을 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들었다.
여전히 단련에 박차를 가하는 중인 듯했다.
“걔도 재능 하나는 이 나라에서 손에 꼽힐 정도니까. 엄청 강해지지 않을까 싶어.”
“그렇겠죠.”
할짝. 할짝.
도로시는 손에 쥔 아이스크림을 긴 혀로 연신 핥아 댔다.
“근데 선배, 안 추워요? 한겨울에 아이스크림은 뭡니까…?”
“뭘 모르네, 회장. 아이스크림은 겨울에 먹어야 제맛이라구.”
검지를 치켜세우며 의기양양하게 설명하는 도로시.
이해할 수 없지만 도로시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그래서, 할 얘기란 게 뭐예요?”
“그건…, 있지.”
내가 그 말을 꺼내길 기다렸는지, 도로시는 아이스크림을 내려다보며 의미심장한 얼굴로 뜸을 들이다 이내 이야기를 꺼냈다.
“명계에서 겪었던 일, 이야기해 줄 수 있어?”
역시.
예상했다.
“나 사실, 너 돌아오고 난 뒤로 머릿속에 뭔가 많은 게 들어왔거든.”
“예?”
그건 무슨 말이지?
“회장, 혹시 나 만났었어?”
도로시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마녀 모자 아래, 말괄량이처럼 장난기가 많던 그녀의 두 눈은 어느새 진중하게 변해 있었다.
예상 밖의 질문에 그만 헛숨을 집어삼켰다.
“많은 일이 있었던 거지? 당연한 얘기겠지만.”
“네. 아무래도 그랬죠.”
그러고 보니 1회차 도로시는 도로시의 폭주를 걱정하지 말라고 했었지?
확인해 볼 것이 생겼다.
“선배, 잠시만 손 좀 잡을게요.”
“응? 갑자기?”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도로시의 손을 잡은 뒤 눈을 감았다.
한때 초월자의 격을 얻고 별빛 마력을 다루었던 경험 덕분인지, 별빛 마력을 다룰 순 없어도 느낄 순 있었다.
‘얌전하게 정제되어 있어….’
놀라웠다.
희미하게 1회차 도로시의 별빛 마력이 느껴졌다. 그 힘 자체를 내가 사용해봤기에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도로시의 별빛 마력을 꼭 붙든 채 안전띠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정말로 폭주할 일 없겠네.’
눈을 뜨며 조용히 호흡했다.
1회차 도로시가 남긴 마력의 잔재가 눈앞의 도로시에게로 흘러들었다.
원리는 모른다.
다만 계명의 루시페르가 모든 것을 되돌리는 힘을 발휘한 적이 있으니, 내게 남아 있던 1회차 도로시의 마력 잔재가 드디어 돌아가야 할 곳으로 돌아간 게 아닐까.
그리 받아들이는 편이 좋을 것이었다.
확신이 들었다. 이건 이제 폭주할 위험이 없는 마력이었다. 도로시가 우려했던 대재앙이 별 탈 없이 해결된 것이었다.
“니히히, 회장. 누나 손 잡고 싶었어?”
내가 심각해지자 도로시는 분위기를 풀 목적인지 장난스레 물었다.
“선배. 전부 얘기해 줄게요.”
“…응.”
모두 이야기했다.
1회차 도로시가 내게 남겼던 메시지, 명계에서 겪었던 일.
도로시가 이제 폭주할 일이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전했다.
그리 긴 이야기를 쏟아내는 동안, 도로시는 일말의 질문조차 하지 않고 경청했다.
“그런 거였구나….”
“전부 이해돼요?”
“복잡하긴 한데, 중요한 건 다 알아들었어.”
마침내 이야기를 끝내자 그녀는 마녀 모자를 푹 눌러 써서 제 눈을 가렸다.
“그래서 그렇게 힘들어했구나, 회장.”
“그냥 걱정이 컸죠.”
이제 다 끝난 일이다.
어쩌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그래….”
도로시는 잠시간 아무 말도 안 하더니, 뜬금없이 남은 아이스크림 덩어리를 한입에 우걱 집어먹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아이스크림을 목구멍으로 넘긴 뒤 시린 머리를 부여잡고 잠깐 고통에 신음하다, 숨을 후욱 들이마시고 크게 소리쳤다.
“아, 슬퍼어!!”
“……!”
두 주먹까지 불끈 쥐고 내지른 포효가 노도처럼 교정에 메아리쳤다.
“서, 선배?”
도로시는 내 앞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입술을 짓씹고 울 듯 말 듯 하는 얼굴. 괴로워 보였다.
별안간 그녀는 상체를 굽히고 내 어깨를 껴안았다. 그녀의 말랑한 뺨이 내 뺨에 맞닿았다.
“갑자기 왜…?”
당황해서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
“너 자꾸 누나 슬프게 할래? 누나 화병 나서 죽는 꼴 보고 싶어?”
“예? 아, 아뇨….”
왜 내가 꾸중을 듣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도로시는 포옹을 풀고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서, 훌쩍이는 듯하면서도 결의에 찬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사선을 이룬 눈썹만 보면 마치 화가 난 것 같았다.
“오늘 얌전히 누나랑 있어. 나 한 맺힌 거 많아! 안아주고 완전 쓰담쓰담해 줄 거야.”
“갑자기요?”
“먹고 싶은 거 말해. 누나가 다 사줄게! 하고 싶은 것도 오늘 전부 다 하자. 원하는 거 다 들어줄게!”
도로시는 간절하게 애원했다.
“누나가 뭐든 할 수 있게 해줘, 제발…!”
“그럴 필요는 없는데요….”
어째 도로시는 입을 다물더니 눈을 반쯤 뜨고 나를 노려보았다.
“…회장, 왜 갑자기 야한 생각 해?”
“제 감정 좀 읽지 마요. 선배가 단어 선택을 잘하셨어야죠.”
도끼눈을 뜨고 도로시에게 따졌다.
밤에 루체가 전해줬던 자극 때문인지 나도 모르게 야한 상상이 들었다. 불가항력이었다.
심리란 건 읽을 때는 편해도 읽힐 땐 굉장히 부끄러워지는구나.
적어도 내 심리를 읽었더라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그것이 최소한의 배려이지 않겠는가.
돌연 도로시의 시선이 갈피를 못 잡고 우왕좌왕했다.
“괘, 괜찮아. 상관 안 해. 누나가 쫄 것 같아? 우리 다 성인이잖아. 무, 뭐부터 해볼래?”
“그만합시다….”
도로시는 엉뚱한 방향으로 각오한 것 같았다.
……
“흥미로운 것. 정말로 흥미로운 것…!”
약속했던 대로, 헤겔 마탑의 꼭대기 연구실에서 아리아 릴리아스에게 명계에서 겪었던 일들을 이야기해주었다.
그녀는 내가 의식을 잃었던 동안 그 이야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고 했다.
처음 보는 아리아의 격정적인 반응이 무척 신기했다. 저 사람도 저렇게 웃으면서 흥분할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아리아는 내가 전해준 이야기를 염동력으로 띄운 책과 펜으로 빠르게 기록했다.
“명왕, 얼음 호수…! 정말 흥미로운 얘기밖에 없는 것! 우효! 좋아아!”
“……?”
어?
“방금 평서문 쓰셨죠?”
“…무슨 말인지?”
급속도로 차분해진 아리아가 태연하게 시치미를 뗐다.
“‘좋아’라면서요. 선생님, 평서문 쓰셨죠?”
“잘못 들은 것.”
생각해 보니 저번에 헤겔 마탑의 직원에게서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아리아는 어미를 ‘것’이라고 끝내면 굉장히 이성적이고 지적으로 보인다고 생각한다고.
아무래도 흥분해 버린 까닭에 그간 철저히 지켜오던 콘셉트마저 깜박한 것 같았다.
그녀는 염동력으로 띄운 책을 덮고 고급스러운 함에 집어넣었다.
“그나저나, 이제 어쩔 계획인지?”
“그냥 넘어가시네….”
더 묻지 말자.
잠시 고민하다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해야 할 건 똑같아요. 악신, 토벌해야죠.”
아리아는 염동력으로 고급 함을 금고에 집어넣고서 나를 빤히 응시했다.
창밖 햇빛이 아리아의 무감정한 얼굴을 비추었다.
“아이작.”
“네.”
“나는 네 편인 것.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이야기할 것.”
안경을 한 차례 들치고 선하게 미소 지었다.
“네. 감사합니다, 선생님.”
……
“지금부터 메르헨 아카데미 졸업식을 거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겨울방학이 끝나가니 스멀스멀 봄 기운이 몰려왔다.
사전 안내대로, 황실의 지원 아래 메르헨 아카데미 제2캠퍼스가 완공되며 교직원들과 학생들은 그곳으로 짐을 챙기고 떠났다. 제2캠퍼스 활성화와 시범 운용을 위해서라는 게 표면적 이유였다.
방학 동안 아카데미를 떠나 있던 대부분의 학생들은 곧바로 제2캠퍼스로 복귀하면 되었다. 아카데미에 남겨뒀던 일부 짐들은 미리 학사가 잘 정리해 옮겨 놨기 때문이었다.
제2캠퍼스는 기존의 제1캠퍼스가 있는 섬과는 거리가 많이 떨어진 곳으로, 대륙 한복판에 있었다.
그리 대규모 이주 작업을 거친 뒤, 꽃잎이 흩날리는 제2캠퍼스 광장에서 졸업식이 진행되었다.
졸업생 대표로 3학년 수석이었던 도로시 하트노바가 나서서 연설문을 낭독했다.
“……우리는 메르헨 아카데미의 일원으로서 세계의 발전에 이바지할 것을 이 자리에서 맹세합니다.”
마녀 모자 대신 학사모를 쓰고, 졸업복을 입은 도로시의 모습은 새삼 가슴을 울리는 듯했다.
졸업식이 끝나자 광장은 떠들썩해졌다.
선물과 꽃다발로 가득한 광장에선 졸업생 가족이나 선후배들이 모여 저마다 사진을 찍었다.
“회장, 누나 먼저 졸업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도로시는 많은 꽃다발을 별빛 마력으로 띄운 채 내게 손가락 브이(V) 표시하면서 기쁘게 웃었다. 굉장히 화사했다.
나는 환하게 웃었고, 내 옆의 루체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축하해요, 선배. 이제 백수네요.”
“드디어 떠나네. 함께 해서 짜증 났고 다신 보지 말자.”
“느흐흐. 이것들, 건방진 소릴 하는구만?”
도로시는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리고 친구야, 이 언니는 졸업만 먼저 하는 것뿐이지 일단 아카데미에 남아있을 예정이거든? 완전히 떠나는 게 아니야.”
“…쯧.”
“냐하하! 혀 차는 거 봐! 재수 없어!”
고개를 옆으로 휙 돌리며 아쉬워하는 루체를 삿대질하며, 도로시는 깔깔 웃었다.
“애기야, 안녕.”
“아, 앨리스.”
졸업복을 차려입은 앨리스 캐럴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도 많은 꽃다발을 염동력으로 띄운 채였다.
도로시와 루체는 앨리스를 노려보았으나, 앨리스는 산뜻한 미소로 나만 바라보았다.
“이거 받아. 전(前) 학생회랑 얘기하는 것 같길래 주는 게 늦어졌다.”
“어머, 고마워라.”
들고 있던 꽃다발을 앨리스에게 건네자 그녀는 싱긋 웃으며 받아들였다.
그녀는 내 꽃다발 만큼은 염동력으로 띄우지 않고 소중히 껴안았다.
“예쁘구나…. 애기 덕분에 행복하네.”
앨리스는 순수하게 웃으며 뺨을 붉혔다.
사방이 꽃다발로 가득 차니 아름답다기보다는 답답해졌다.
가히 아카데미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두 사람답게 꽃다발을 셀 수 없이 받은 모양이었다.
“상투적인 대사로군.”
“칫, 여우 짓.”
“다 들린단다, 얘들아?”
도로시와 루체가 고깝게 앨리스를 노려보며 험담하자 앨리스는 웃으며 다그쳤다.
얘네들은 언제쯤 친해질까. 애초에 친해질 수 있을까. 감이 안 잡히니 쓴웃음만 입가에 담겼다.
우리 네 사람이 뭉치자 주변 학생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다. 도로시의 친구들도, 앨리스를 섬겼던 학생회도 섣불리 다가오지 못하고 눈치만 보았다.
“너도 결국 졸업하네.”
“응, 애기 덕분이네.”
앨리스는 여전히 달아오른 얼굴로 내가 준 꽃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서로 목숨을 걸고 앨리스와 싸웠던 때가 떠올랐다.
본래 「앨리스 토벌전」에서 자살할 예정이었던 그녀도 어떻게든 잘 살아남아 졸업복까지 입게 되었다.
내 입가에 흐르는 건 결국 미소였다.
도로시와 앨리스가 함께 졸업하는 광경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아, 애기야. 잠깐 귀 좀.”
앨리스는 내 귓가에 고개를 내밀더니, 루체에게도 안 들릴 만큼 조용히 속삭였다.
“주인님, 같이 살래? 내가 평생 보필해 줄게.”
끈적한 음색과 따뜻한 숨소리가 귀청을 적셨다. 기분 좋은 오싹함이 등줄기를 타고 기어올랐다.
끼 부리는 것 하나는 끝내준다.
“…백수 안 받는다.”
손가락으로 앨리스의 이마를 밀어냈다.
앨리스는 앗, 하고 고개가 뒤로 밀려났으나 이내 제 이마를 쓰다듬으며 장난스레 미소 지었다.
“아이작, 뭐 들었어?”
“그냥 농담.”
루체가 경계하듯 앨리스를 노려보며 내게 묻자 대충 대답했다.
“뭐라 했어, 앨리스?”
“딱히 특별한 말은 안 했단다. 참, 도로시.”
앨리스는 싱긋 웃으며 도로시에게 다가가 팔짱을 꼈다.
“뭐 하는 거야?”
도로시는 흠칫 놀랐으나 앨리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우리 동거하지 않을래?”
“뭐?”
“어차피 너도 여기 남아있어야 하잖니? 같이 지내면 괜찮지 않을까, 하고. 너라면 괜찮을 것 같단다.”
「최종막, 악신 토벌전」이 끝날 때까지 도로시와 앨리스는 아카데미 안에서 지내기로 했다. 아직 계약의 메피스토라는 변수가 남아 있는 까닭이었다. 학사 건물만 이용하지 않는다면 아카데미 안에서도 지낼 곳은 많았다.
그나저나 앨리스의 태도가 영 심상치 않았다.
‘그러고 보니….’
여태껏 봐온 결과, 앨리스는 내가 좋아하는 여자들이 싸울 기미를 보이면 먼저 나서서 중재하고 그녀들의 화합을 도모하려는 느낌이었다.
뭐랄까, 엄마 느낌?
그 와중에 저 두 사람만큼은 사이가 특히 안 좋다고 생각하는데….
간간이 앨리스는 천연덕스럽게 도로시에게 다가가 친밀감을 표했다. 미운 정이라도 든 것일까.
“니히히.”
도로시는 태평하게 웃으면서 앨리스와 마주보았다.
“내가 돌았니? 무슨 목적으로 그런 헛소리를 지껄이는지 모르겠네? 네가 언제 날 그렇게 좋게 봤다고?”
“이런, 안쓰럽게도…. 우리 사랑스러운 도로시는 좋게 말해도 말귀란 걸 알아듣지 못 하는구나?”
아. 메피스토가 습격해 올지도 모르니 만일을 대비해서 같이 지내자는 얘기였을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두 사람이 동거하는 그림은 도저히 상상이 안 간다.
“싫어! 내가 왜! 저리 가!”
“귀여운 반응이네. 히히.”
도로시는 고양이가 하악질하듯 경계심을 내비치며 앨리스의 팔짱을 풀어내려 애썼지만, 앨리스는 쉽게 팔을 놓아주지 않았다.
이런 좋은 날에 서로 마법까지 쓰면서 싸우긴 싫은지 순전히 힘만 쓰는 모습이었다.
한때 메르헨 아카데미의 최대 전력이자 양대 산맥이었다는 명성조차 무색한, 평범한 여성들의 투닥거림 같았다.
“두 사람, 이제 어쩔 거예요?”
내가 묻자 도로시와 앨리스는 힘겨루기를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다.
“글쎄…. 애기랑 같이 사는 것 말곤 생각 안 해봤는데.”
앨리스는 눈을 위로 뜨고 고민에 잠겼다. 그 말에 루체가 살벌한 기운을 흘리며 앨리스를 응시했다.
“난 생각해 둔 게 있지!”
도로시가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가슴을 펴며 의기양양하게 자랑하자 우리의 시선이 그녀 쪽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니히히, 하고 싱글벙글 웃었다.
* * *
“에휴….”
이브 로펜하임. 20세.
졸업복을 차려입은 그녀는 광장 옆 건물들 사이, 어두운 골목에 웅크리고 앉아 한숨만 푹푹 내뱉었다.
학사모는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처럼 위태롭게 쓰고 있었으나, 그조차도 신경을 못 쓸 만큼 그녀는 슬픈 감정을 느꼈다.
고개를 돌리면 광장 한 가운데, 많은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이들이 보였다. 그들은 찬연한 햇빛 아래, 무척이나 빛나고 있었다.
그중 가장 빛나는 사람을 꼽자면, 단연 자기 동생 아이작이었다.
“아이작….”
친구는 가족이 왔기에 먼저 떠나버렸다.
아이작은 이브가 접근조차 못할 정도로 빛나고 있었고, 그의 주위엔 자신 따위가 넘볼 수 없는 막강한 천재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절로 열등감만 들었다.
로펜하임이란 성씨를 가졌어도 그 가문의 누구도 이브를 반기지 않았으니, 이브의 졸업을 축하해줄 가족은 어디에도 없었다.
‘난 이게 맞는 거겠지?’
무릎에 고개를 파묻는 이브.
부정의 여지도 없이, 그녀는 아이작이 자기도 졸업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주고 다가와주길 바랐다.
이브는 아이작과 자기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이런 날에 아이작에게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심리적 거리감 탓이었다.
단지 의무적으로 자길 챙겨줬다고 생각했다. 자신이었어도 이딴 누나는 거들떠도 안 봤을 것이었다.
꽃다발도 없다. 자신은 우중충한 구석에 있는 편이 맞으리라. 이브는 그리 생각했다.
“누나, 여기서 뭐해?”
“……!”
얼마 안 가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들려오자 이브는 깜짝 놀라 고개를 휙 들었다.
햇빛 아래, 아이작이 당황한 얼굴로 자길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날에 뭐 하는 건데? 아싸야?”
“아이작…? 으앗!”
아이작은 이브의 손을 잡고 끌어당겨 그녀를 햇빛 아래로 옮겼다.
밝은 햇빛이 이브의 하얀 얼굴을 비추었고, 그녀는 더욱 가까이서 아이작의 빛나고 사랑스러운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아이작은 이브가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랑하는 동생을 위해 그를 내치고 느껴야만 했던 죄책감이 얼마나 컸을지는 가늠할 수 없었으나,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고생했어, 졸업 축하해.”
아이작은 이브에게 큰 꽃다발을 건넸다.
그녀는 꽃다발을 조심스레 받더니 한동안 얼떨떨한 기색을 보였다.
“나도 내년에 따라갈게. 그땐 같이 살자.”
“어…?”
이브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아이작은 그녀가 당장 갈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그녀가 자신을 책임지고 살겠다고 다짐했던 것처럼, 자신도 베풀어주기로 결심했던 것이었다.
“그, 그래도 돼…? 나 같은 거랑 같이 지내도 돼…?”
이브는 몸을 부르르 떨며 기쁨에 젖어들었다. 지나치게 기쁘니 눈가에 눈물까지 맺혔다.
“나 같은 거는 뭐야…. 어쨌든 당연한 거 아니야? 가족이잖아.”
아이작이 어이가 없다는 식으로 대답하자 이브는 헤실헤실 웃으며 눈가에 슬그머니 맺힌 눈물을 훔쳤다.
“그런 이유라면 뭐…. 헤헤. 이사 준비해야겠다.”
두 사람은 실실 웃었다.
그날, 그들은 많은 사진을 찍었다.
모든 사진 속, 이브는 무척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