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cademy’s Weakest Became A Demon-Limited Hunter RAW novel - Chapter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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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49 손
동부 지역 엘타니아 백작령은 황국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알리카르 해안가를 아우르고 있었다.
엘타니아 가문의 저택 옥상에 앉아 있으면, 저 멀리 햇빛을 반사해 보석처럼 반짝이는 알리카르 해안가가 한눈에 들어왔고.
밤에는 푸른빛을 발산하는 발광 플랑크톤 군단이 밀려든 탓에 오로라가 일렁이는 해안가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린 루체는 낮이나 밤의 풍경이 아닌, 그 사이의 노을빛 풍경을 좋아했다.
석양의 가두리가 수평선과 입맞춤을 할 때면.
세상을 평등하게 비추던 태양도 이토록 허무하게 떠나버리는구나, 싶었기에.
하물며 헨젤 오빠나 과자집 마녀는 어떠할까. 인간의 생애란 그토록 덧없는 것이리라.
루체의 두 눈엔 생기가 없었다. 다시는 사람에게 마음을 열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은,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엔 너무도 무거운 것이었다.
하지만 언젠가 누군가에게 다시 마음을 열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소중한 사람을 더 아끼지 못해서 후회하지 말자며.
못 지켜서 후회하지 말자며.
루체는 석양의 장엄한 빛을 바라보며 속으로 되뇌곤 했다.
* * *
이성을 되찾았다.
[ 루체 엘타니아 ]심리 : [ 당신이 그릉이라고 의심하고 있습니다. ] [심리 간파]는 현재의 심리 상태를 비춘다. 루체가 내게 손을 잡자고 한 까닭이 상태창에 나오는 것이다.
그제야 루체가 여기까지 찾아온 연유를 알게 되었다.
뇌신조 토벌전이 끝났을 때, 나는 루체를 공주님 안기로 받아냈었다. 그때 내 손은 루체의 팔뚝과 다리를 짚고 있었고.
루체는 그때의 그릉 손과 내 손을 비교하려는 속셈임이 틀림없었다.
‘그때 깨어 있었나?’
당시 정신이 없었던 데다가 시야마저도 부옇게 보여서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루체가 기절한 상태가 아니었다니…. >메르헨의 마법 기사> 7년 경력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중요한 건 아직은 ‘의심’ 단계라는 점. 루체가 정신이 들긴 했었어도 내 모습을 명확히 살피지 못했다는 방증이었다.
당장에 내 손을 잡아보고 내가 그릉인지 아닌지 비교해 보려는 꼴만 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가.
게다가 뇌신조는 중천 세계에서 했던 말대로 훌륭하게 내 비밀을 지켜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조금 불안했는데, 눈치 좀 있는 녀석이라 다행이었다.
“내 손은 갑자기 왜?”
“그냥….”
“루체, 손잡는 건 좋아하는 사람이랑 해야지. 성별 다른 친구끼리 하는 게 아니지….”
나는 루체가 자아해낸 미묘한 기류를 없애기 위해 꼰대 같은 말투로 말했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이라는 논법을 아는가. 평소에 내가 이리 지적하면 루체는 ‘왜?’, ‘왜?’, ‘왜?’라고 되물으며 내 지적을 논파하곤 했다.
그래서 웬만해선 지적을 자제하는 편이었지만, 이번 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보수적인 마인드를 함양한 사람으로 빙의해 이 위기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우리 이미 손 포갠 적….”
그 도입부가 들려온 순간, 루체에게 ‘왜 남녀 친구가 손을 잡으면 안 되는지’를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아챘다.
남녀가 손을 잡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는 모양이었으니.
“너, 좋아하는 사람 없어?”
나는 루체의 말을 끊어냈다.
“…생긴 것 같아.”
[ 루체 엘타니아 ]심리 : [ 그릉을 떠올리며 설레고 있습니다. ]
끝이다. 그릉은 루체 정실 루트 확정이다. 이제 내가 그릉이란 사실이 밝혀지면 엿 된다.
하물며 루체 정실 루트는 반 배정 평가 때 그녀를 구해주는 것만으로도 조건 성립인데.
나는 뇌신조 토벌전 때도 그녀를 받아줬던 탓에, 루체 정실 루트에 완전히 대못을 박고 각인까지 완벽하게 날인해 버렸다.
루체는 한 번만 구해져도 마음에 치명상을 입는 캐릭터다. 그런 그녀를 두 번이나 구해줬으니…. 이제 그녀의 마음은 그릉의 정체만 밝혀지면 폭주기관차처럼 내달릴 터였다.
하지만 루체가 숨김없이 진심을 털어놓은 덕분에, 지금은 내 쪽이 유리해진 상황.
“나야?”
“그건 아닌데…, 아마도….”
나는 일부러 루체가 작은 목소리로 내뱉은 ‘아마도’를 못 들은 척 말을 이어갔다.
“내가 아니면 뭐…. 아무튼 축하할 일이긴 한데, 그럼 왜 나랑 손잡고 싶은 건데? 그것도 ‘그냥’?”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루체를 몰아붙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그릉이란 사실이 밝혀지면 엑스트라 배드 엔딩 N.13이 어느 날 저승사자처럼 들이닥칠 위험이 생기니까.
그렇다고 루체와의 친구 관계를 접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미 모든 것이 늦어 버렸다.
생각해보자. 섣부르게 내가 그릉이 아니라는 사실을 부정하거나, 뒤엎으려고 들면 되려 루체 쪽의 의심을 사고 말 터.
루체는 모든 걸 기억할 수 있는 두뇌를 가지고 있다. 즉, 내 언행에 모순점이 보인다면 필시 그녀는 추궁해 들어올 것이고, 나는 무조건 그릉이란 사실을 들키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회피가 좋겠다.
루체가 ‘아이작과 그릉은 같은 인물인가, 아닌가?’하고 아리송한 의문을 품은 상태를 유지하게 만드는 게 관건이다.
확신만 못 갖게 하면 된다. 루체의 마음이 내 쪽으로 방향을 특정 짓지만 못하게 만들면 된다.
그렇게 천천히, 천천히. 내가 그릉이 아니라고 귀납적 추론으로 확신할 수 있을 만한 근거들을 차근차근 쌓아나가자.
적어도 악신 네피드를 쓰러뜨릴 때까지.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서 루체 정실 루트를 타고 악신 네피드를 쓰러뜨리면, 엔딩에서 루체와 행복한 가정생활을 이루는 장면이 나왔다.
루체와의 행복한 가정생활은 둘째 치고. 중요한 건 최종 보스를 쓰러뜨릴 때쯤이면 엑스트라 배드 엔딩 N.13을 맞이할 위험이 사라진다는 얘기다.
“사람 마음 가지고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뒷목을 문지르며 나지막이 섭섭해하는 투로 말하자, 루체는 고개를 들고 곤란해하는 기색을 보였다.
“미, 미안해.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루체의 목소리엔 미약한 울먹임이 담겨 있었다.
[ 루체 엘타니아 ]심리 : [ 당신에게 미움 받을까 봐 걱정하고 있습니다. ]
죄책감이 들었다.
몰아붙여서 미안하지만, 그래도 내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
“아니다, 내가 좀 과했다. 미안해.”
“…….”
“그래도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까 좀 더 있다 가라. 저쪽 호수에서 같이 수다나….”
성공적으로 화제를 돌렸다고 생각했다. 여러 이야기로 루체를 혼잡하게 만들 계획도 순식간에 머릿속에 짜 놓았고.
그래서 발을 옮기면서 그 계획을 차차 수행해나가려고 하던 참이었는데.
등을 돌리고 발을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 내 오른손에 무게감이 느껴졌고.
매끄러운 살결의 감촉이 내 손가락을 타고 흘러들었다.
나는 깜짝 놀라 발을 멈추고 뒤쪽을 쳐다보았다.
루체가, 내 손을 붙잡고 있었다.
“…허락받을 생각 없었어. 조금 미움 받더라도…, 네 손을 잡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었어.”
루체는 고아한 말투로 그리 말하면서, 곱상하고 낭창낭창한 손가락으로 내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들었다.
“굳은살이 있네.”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루체는 그대로 고개를 들었다.
풀벌레 소리만이 요란했다. 발광 램프로 이루어진 가로등의 불빛은 아스라이 빛나는 달빛을 집어삼키고 우리를 환히 내리쬐고 있었다.
그 밝은 불빛 아래서, 루체는 앞머리 탓에 그늘진 눈매로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너…, 그릉이지?”
엑스트라 배드 엔딩 N.13 「새장」 엔딩.
그 엔딩은 주인공을 향한 루체의 호감도가 게이지를 뚫었을 때 발생한다.
루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주인공을 납치하고 감금해 지극정성으로 보살핀다.
매일 밥을 먹여주고, 씻겨 주고, 품에 안아주고, 키스를 퍼부어주며.
내밀한 음색으로 자기가 품고 있는 감정을 속삭인다.
─ ‘사랑해, ■■■.’
─ ‘네가 좋아. 사랑해, 정말 사랑해….’
루체의 사랑 속에서 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악신 네피드가 부활해 세상은 멸망한다.
그렇게 꽁꽁 감춰져 있는 루체의 음습한 습성을 알고 있는 나로선.
루체를 두 번이나 구해 버린 그릉의 정체를 들키는 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해야 했다.
나와 루체의 관계는 친구 관계.
루체가 선을 지킬 줄 몰라 살짝 이상야릇한 기류가 오가게 되더라도, ‘우리는 친구다’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관계가 딱 적당했다.
“그게 뭔데?”
“너 그릉이냐고…?”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
나는 곧바로 열연 모드로 들어가 시치미를 뗐다.
학창 시절에 배우를 지망해 온갖 연극이란 연극은 다 해봤던 나다. 연기력 만큼은 수준급이라 자부한다.
루체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내 표정을 보고는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검은 괴물. 너도 알잖아.”
“그거…? 그게 왜 ‘그릉’이야?”
“나한테 그렇게 말해줬으니까. 정말 그릉… 아니야?”
“바보야.”
루체는 흠칫 고개를 떨었다. 일평생 처음 들어 보는 ‘바보’란 표현이 그녀를 자극한 듯했다.
“그 괴물이 어떻게 나냐. 그러면 내가 맨날 그 개고생을 하고 있게?”
나는 매일 열심히 수련만 하는 찐따 아이작이잖아. 그 주지의 사실을 모르고 있진 않겠지.
…내가 좀 슬퍼지는 건 기분 탓일까.
“…….”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루체.
그러나 내 연기에서 빈틈이라곤 눈곱 만큼도 찾아볼 수 없을 터였다.
표정 연기, 제스처. 모두 완벽했으니.
“그렇긴… 하지. 오해해서 미안해.”
루체는 눈을 내리깔았다. 한 수 접어준 모양새였다.
뇌신조 토벌전 때 얼마나 정확히 내 손의 감촉을 느꼈는지는 모르겠으나.
굳은살에 반응하고서도 내가 그릉이라고 확신하지 못하는 걸 보면 명확한 감촉은 못 느꼈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게다가 심각하게 설득할 것도 없었다. 그릉과 내 마력량 차이와 실력차를 상기시켜 주면 그만한 증거가 또 어디 있을까.
루체도 그 판단이 합리적이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얘는 나를 곧장 대마법사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추정하고 질문해 버리는 어디의 누구 같은 바보가 아니니까.
하지만 겨우 이 정도로 의심을 종식시켰다고는 볼 수 없었다. 그릉을 향한 애정을 품게 된 루체다. 꺼진 것 같아도 열이 남아 있는 불씨처럼, 한 번 떠오른 의심은 조그마한 단서라도 발견되는 순간 맹렬히 타오를 것이다.
언제라도 방심할 수 없었다.
“근데 그런 괴물을 좋아한다는 건 또 신박하네. 루체 답다고 해야 할지…. 무슨 일 있었는지 궁금하다. 저쪽에서 얘기해주면 안….”
대뜸 루체는 “아이작.”하고 내 말을 끊어냈다.
“어, 왜?”
또 뭐지.
왠지 루체는 수줍어하는 소녀처럼 뺨을 붉힌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얌전히 손가락을 꼼지락대는 꼴을 보니, 영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침착하자.’
이제까지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 어떤 시련이 닥쳐와도 나는 담담하게 넘어설 뿐.
이내, 루체의 대양을 담은 듯한 눈동자가 똑바로 내 눈을 향했다.
“혹시 나, 연애하는 법 좀 가르쳐 주면 안 될까?”
이거….
꽤 힘든 싸움이 될 것 같은 조짐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