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cting genius began RAW novel - chapter 14
– 지금 시간 보이시죠? 열시라네요. 열시! 근데 제 퇴근 시간은 여섯시거든요?!
“알아.”
– 아, 아시는구나~ 혹시 모를까봐 알려드렸죠. 근데 저 지금 제 최애 드라마 보고 있거든요? 워라밸 좀 지켜주시죠? 내 꿀같은 휴식 한번만 더 방해하면 진짜 퇴사할 거예요. 네?
남자는 날선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장재이. 지금은 상사가 아니라 오빠로서 전화한 거야.”
– 뭐야, 징그럽게.
한층 더 차가운 반응이 돌아왔으나, 남자는 자신이 할 말만 늘어놓기 시작했다.
“내가 보석 하나를 발견한 것 같거든.”
– 아씨, 상사로 전화한 거 맞잖아. 미쳤어? 나 진짜 노동청에 신고한다?!
“신인 배우 계약서 하나 준비해야겠다.”
– 진짜 가지가지···.
“최대한 빨리 미팅 날짜도 잡고.”
– ···.
“대답.”
– 아악! 그거 좀 하지 말라고···! 징그럽게 진짜!
수화기 너머의 상대는 한바탕 욕을 퍼부은 뒤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 ···근데, 정말 그 정도야?
“그래. 그 정도다.”
– 누군데 그래?
어느새 여자의 목소리에 은근한 흥미가 감돌았다.
– 오빠는 주제에 눈만 겁나 높아서 잘생긴 것만으로는 안 되잖아. 아직 소속사 없는 신인배우면··· 웹드 쪽인가? 아니면 연극?
여자가 은근슬쩍 질문을 던지 시작했다. 자신의 휴식을 방해했다는 분노를 호기심이 이긴 듯했다.
남자는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내일 알려줄게. 네 말대로 지금은 업무시간 아니니까.”
– ···뭐?! 남의 귀한 시간 뺏어놓고 이걸 말 안 해? 진짜 미친 X 아냐, 이···
뚝.
경쾌하게 전화를 끊은 남자는 기분 좋은 얼굴로 등을 기댔다. 곧 쇼팽의 녹턴(Nocturne In E-Flat Major, Op.9, No.2)이 차 내부를 가득 채웠다.
“좋네.”
방금 를 관람하고 나온 이 남자는 JJ엔터테인먼트의 대표, 장재현이었다.
*
공연을 끝내고 나온 유일과 정수호는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며 대기실로 향했다.
“고생했다.”
“고생하셨어요, 형.”
진하영이 연극을 보고 난 뒤 또 일주일이 흘렀다.
그 말인즉슨, 이제 남은 공연이 단 1회차라는 뜻이었다.
유일이 입었던 헨리 의상을 정리하던 스태프들이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
“아··· 너무 아쉽다. 이제 율헨리를 못 보다니.”
“벌써 내일이 막공인 게 안 믿겨요···.”
“···저도요.”
무대화장을 대충 지운 유일은 대기실을 빠져나왔다. 끊임없이 말을 거는 브윈을 무시하며 걷던 그는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그림자에 걸음을 멈췄다.
“안녕하세요, 한유일 배우님.”
낯선 목소리에 유일은 고개를 들었다. 높이 올려 묶은 머리와 큰 키, 짙은 쌍커풀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아,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JJ엔터테인먼트의 장재이 실장이라고 합니다.”
유일의 앞을 막아선 여자, 장재이는 싱긋 웃으며 명함을 내밀었다.
‘···이 친구였단 말이지.’
그녀는 자신의 명함을 받는 한유일을 꼼꼼하게 살폈다.
자신의 상사이자 정신 나간 오빠인 장재현이 대뜸 계약을 해야한다고 주장했던 배우.
그가 바로 눈앞에 서 있는 유일이었다.
‘표 구하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이야.’
직접 자신의 눈으로 봐야 직성이 풀리는 장재이 실장은 표를 구하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그렇게 해서 겨우 구한 취소표가 14회차 공연이었다.
공연을 보기 전까지 의심의 끈을 놓지 못했던 그녀였으나, 막이 오르자마자 깨달았다.
연기하는 모습을 보면 반할 수밖에 없는 배우였다.
게다가 연기만 뛰어난 게 아니었다.
외모 역시 준수하고, 키나 체형도 제법 연예인 티가 났다. 길 가다 보이면 한번쯤 돌아볼만한 얼굴이라고나 할까. 아이돌 지망생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대체 지금까지 어디서 숨어있다 나온거야···?’
연기 실력만 받쳐주고 앞으로 구설수만 없다면 장재현의 말대로 보석이 아닐 수 없었다.
장재이는 눈을 빛내며 미소를 지었다.
“연극 정말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혹시 잠깐 시간 되시나요? 차라도 한 잔 사고 싶은데.”
.
.
.
몇 분 뒤, 둘은 가까운 카페에 앉아있었다. 한유일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좌석마다 얇은 커튼이 드리워진 덕에 프라이버시가 보호되는 곳이었다. 매번 지나다니는 대학로인데도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다.
【필요하신 줄 알았다면 찾아드렸을 겁니다. 주변 카페 탐색도 가능하니, 언제든 물어봐 주십시오.】
한유일은 한숨을 삼키며 먼산을 바라보았다. 생각할수록 쓸데 없는 기능이 많은 사전이었다.
【칭찬 감사합니다.】
‘···.’
브윈이 뜬금없이 자기 PR을 하고 있을 때, 디카페인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던 장재이가 입을 열었다.
“JJ엔터테인먼트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 있어요?”
“아, 네. 들어본 적 있습니다.”
【JJ엔터테인먼트는 요즘 들어 인기를 얻고 얼굴도장을 찍고 있는 신인배우들 몇 명이 속해있는 회사입니다. 10년 이상의 유명 엔터테인먼트 실장 경력을 지니고 있는 남매가 만들었다고 합니다.】
‘남매?’
【설립된 지 몇 년 되지 않은 회사이긴 하지만, 소속 배우들에 대한 대우가 좋은 편으로 유명합니다. 대표가 감이 좋다는 평도 있습니다.】
그때, 장재이의 눈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릴게요. 저는 한유일 배우님이 저희 엔터테인먼트와 함께 일했으면 해요.”
“···!”
“이래 봬도 저희 회사, 소속 배우들한테 정말 잘하거든요. 원하시면 가계약서도 보내드릴게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
당당한 태도였다. 유일이 거절할 경우는 생각도 하지 않는 듯이.
“···제안 감사드립니다, 실장님. 괜찮으시다면 좀 더 고민해본 뒤 말씀드려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그렇게 답한 장재이는 씩 웃으며 덧붙였다.
“곧 뵐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전 유일 배우님이 정말 마음에 들거든요.”
*
【- 막공인거 너무 슬픈데
[율뱀 볼 생각에 설레··· 근데 너무 슬퍼···근데 설레··· 무한굴레임 진짜]┗ 120 : ㅁㅊ 나도
– 다들 바닥에서 최애뱀 누구야
[나는 율뱀쇼뱀이 약간 유머러스하다면 율뱀은 진짜 인간 아닌 것 같음]
┗ 125 : ㅇㅈ
┗┗ 567 : 나는 유머러스한 캐 좋아해서 쇼뱀이 더 좋은데 솔직히 둘다 너무 잘함;;
┗ 857 : 율뱀 쇼뱀 둘다 최애야 이렇게 고르기 힘든 캐슷 첨임
– 더도말고 덜도말고 딱 이렇게 돌아왔음 좋겠다
[쇼랑 율이 아닌 헨리랑 뱀파이어 생각할 수가 없음]┗ 134 : ㄹㅇ제발
┗ 164 : 바닥에서 최대 단점 = 15회차임
┗┗ 236 : 222222
┗┗ 825 : 33333 솔직히 2543250회차는 해야하는 거 아니냐
┗┗ 196 : 4444444 눈물남
┗ 125 : 솔직히 이렇게 반응 좋은데 재연하지 않을까
– 바닥에서 막공인거 실화냐
[나 지금 울고 있음]┗ 156 : 오늘 첫공임 아무튼 그럼
┗ 367 : 하 진짜 후회돼 첫공부터 쭉 달릴걸··· 이렇게 취향인 극 처음이라 눈물남
┗ 035 : 초연 반응 좋으니까 재연하겠지? 제발···
┗┗ 126 :ㄹㅇ 이 캐슷 그대로 재연가자
┗┗ 367 : 삼연 사연까지 가야함ㅠ
┗┗ 196 : 제발..통장은 준비되어있다고 유엠케
┗┗ 글쓴이 : 이렇게 빈다 유엠케···ㅠㅠㅠㅠ】
연극 매니아 커뮤니티에서는 팬들이 연극 제작사 유엠케이를 다양한 방식으로 붙잡으며 울고 있었다.
유일은 브윈이 띄워주는 창을 통해 팬들의 반응들을 보며 멋쩍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타 커뮤니티도 보시겠습니까?】
‘아니, 됐어.’
벌써 반 시간이 넘게 지났다. 이대로 보다간 곧 무대 올라갈 시간이 될 것 같았다.
“유일 씨,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메이크업을 해주던 스태프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한유일은 그저 어색하게 웃어보일 수 밖에 없었다.
“···그냥, 마지막 공연이라 기분이 이상하네요.”
“으으, 그렇죠! 저도 기분 이상해요.”
스태프는 그렇게 웃으며 메이크업을 마무리했다. 비슷한 타이밍에 메이크업을 마친 정수호가 씩 웃으며 다가왔다.
시시콜콜한 장난을 치다가도 대본을 훑어보던 그들은 곧 연극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스태프들의 목소리에 몸을 풀었다.
정수호는 한유일을 툭치며 속삭였다.
”준비 됐지?”
“네.”
한유일은 그에게 마주 웃어보인 뒤 숨을 크게 들이 쉬었다.
극장 내에선 안내 멘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무대 위에서 눈을 뜬 순간, 그는 다시 인외의 존재가 되었다.
끝없는 삶을 살면서 지쳐갔던, 외로움을 몰랐던 뱀파이어로.
.
.
.
“···이런 마지막은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거칠지만 부드러운, 뱀파이어의 것이라고는 믿기 힘든 음성이 무대를 울린다.
그리고 수없이 봐 왔던 어둠이 극장을 감싼다.
“···.”
한유일은 조용히 몸을 일으켜 무대 뒤로 향했다.
발이 가벼웠다. 아니, 온몸이 가벼웠다. 그와 반대로 가슴은 터질듯이 쿵쾅댔다.
뜨겁고도 차가운 상이한 두 감각에 몸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몇 번이고 겪은 마지막이지만, 여전히 똑같은 설렘이었다.
‘···마지막.’
정말 마지막이다.
처음 소이진에게 연락을 받았을 때부터 연극 연습을 거쳐 처음 무대에 섰던 순간이 스쳐지나갔다.
“···배우님!”
누군가 한유일을 붙잡았다.
“지금 나가셔야 해요!”
무대 스태프가 유일의 팔을 살짝 잡은 채 속삭였다. 한유일은 한 걸음 씩 무대를 향해 걸어갔다.
박수소리가 극장을 울리고 있었다.
한유일은 무대에 서서 관객석을 바라보았다. 관객석에 앉아있는 수많은 이들이 보였다.
유일은 그 얼굴들 하나하나와 시선을 맞추려 애썼다. 어둠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따뜻한 미소는 알아볼 수 있었다.
그때였다.
관객들 중 일부가 일어나서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파도가 치듯, 한 명씩 자리에서 일어서기 시작했다.
”···!”
누군가는 휘파람을 불렀고, 누군가는 고함을 질렀다.
한유일은 멍하니 관객석을 바라보았다.
극장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있었다.
반짝이는 눈과 상기된 얼굴로, 손이 빨갛게 부어오를 만큼 열정적으로 손뼉을 치면서.
“감사··· 합니다.”
한유일의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아무리 눈을 깜박여도 소용 없었다.
“감사합니다···.”
유일은 무대에 같이 서 있는 정수호에게, 무대 뒤에 서 있는 스태프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시간 반이 넘도록 온마음을 다해 무대 위의 이야기를 지켜본 관객들에게 인사를 보냈다.
두 눈에서는 투명한 물이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마지막 커튼콜이 끝났다.
그때까지만해도 한유일은 모르고 있었다.
무대 너머에서부터 자신을 집요하게 따라붙는 시선이 있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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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입니다
“다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진짜 최고였어요!”
연극이 끝난 뒤, 팀은 대학로의 한 술집을 통째로 빌렸다. 큰 술집은 아니었지만, 연극에 참여한 인원들이 둘러앉고 편하게 먹고 마시기엔 충분한 곳이었다.
“무엇보다, 여기 안주가 맛있거든요.”
오디션 이후로 보기 어려웠던 소이진 작가가 밝은 얼굴로 잔을 내밀었다.
그녀의 곁에 앉은 서미희 연출이 함께 잔을 부딪쳤다. 이미 여러 차례 잔을 들이킨 직후라, 서미희 연출의 얼굴은 꽤나 붉어져 있었다.
“유일 씨도, 건배~”
한유일은 웃으며 잔을 부딪쳤다.
“고생하셨어요, 연출님.’”
“크크, 맞아. 나 고생 많이 했어요.”
유쾌하게 웃으며 잔을 한번에 들이킨 서미희는 정수호와 새로운 건배를 하기 위해 앉은 자리를 떠났다.
서미희 만큼 붉은 얼굴의 조연출이 눈썹을 내린 채 고개를 숙이곤 유일에게 속삭였다.
“유일 씨··· 이제 괜찮아요?”
“네?”
“아까 커튼콜 할 때 유일 씨 탈수되는 줄 알았잖아요.”
“아아! 맞아. 눈물이 진짜 비처럼 주룩주룩···”
“유일이 보니까 나까지 눈물 나더라.”
“···.”
민망하다.
오고 가던 잔들에 취하기 직전이었던 한유일은 술이 한번에 깨는 듯했다.
“···그렇게 심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요.”
“에이···!”
“완전! 대박! 심했어요!”
한유일의 마음을 모르는 조연출은 손뼉까지 짝짝 쳐가며 덧붙였다.
【···흉하지는 않았으니 걱정마십시오.】
‘···.’
어쩐지 그 위로가 더 기분이 나빴다.
한유일은 앞에 놓인 오이 조각을 집어 먹으며 마음을 다스리려 노력했다.
“아, 맞다아아!”
정수호와 건배를 하고 만족스러운 얼굴로 잔을 채우던 서미희가 불현듯 외쳤다.
“선배 하나가 있는데에··· 뒷풀이에 꼭 참여하고 싶다고 사정사정해서 그냥 오라고 했거든요··· 까먹고 여러분한테 말을 안 했네. 미안해요! 미안합니다아!”
연출의 우렁찬 인사에 테이블에 앉은 이들이 관대하게 답했다.
“아이~! 괜찮아요~”
“뭘 새삼스럽게! 연출님이 원래 그렇죠 뭐!”
“근데 연출님, 누구에요?”
질문을 받은 서미희는 킬킬 웃으며 답했다.
“어어, 있어요. 돈 많고 재수 없는 사람.”
“뭐야, 연출님 부자 선배도 있었어요?”
“누군데요?”
“선배면 국예대 연출과인가?”
스태프들이 흥미로운 얼굴로 저마다 대화를 하던 그때, 문이 열렸다.
처음 유일의 눈에 보인 것은 큰 키와 떡 벌어진 어깨였다. 몸에 딱 맞는 정장을 입은 남자가 빠른 걸음걸이로 술집에 들어섰다.
“반갑습니다.”
진한 이목구비의 남자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장재현이라고 합니다.”
한유일은 초면의 남자를 살폈다. 쌍꺼풀 짙은 눈에 높은 코와 얇은 입매···.
‘···왜 묘하게 낯이 익지?’
【어제 한유일 님을 찾아왔던 장재이 실장의 오빠입니다.】
“···!”
묘하게 낯이 익었던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유일이 여유롭게 생각을 이어나갈 틈은 없었다. 브윈이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동시에, JJ엔터테인먼트의 대표이기도 합니다.】
한유일은 눈을 크게 뜬 채 장재현 대표를 바라보았다.
이미 그를 알아본 주변 사람들은 속닥이고 있었다.
“저 분이 누군데요?”
“엔터 대표셔.”
“어디 엔터요?”
“그, J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