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cting genius began RAW novel - chapter 23
“···고오맙다.”
*
한편, 촬영장에서 세팅을 하던 조연출은 잔뜩 신난 얼굴이었다.
‘드디어 이 장면을 찍을 때가 왔구나.’
오디션에서 한유일이 ‘선기현’을 연기했을 때 보였던 연기.
바로 이태우와 선기현이 크게 붙는 씬이었다.
‘···.’
이태우를 맡은 지은호는 살짝 긴장한 상태였다. 지금까지의 촬영 내내 그는 책상 위에 누워서 자는 연기를 하거나 멀리서 다른 인물들에게 넌지시 이야기하는 장면이 대부분이었다. 특히 한유일과는 직접적으로 얼굴을 마주하고 연기한 적이 거의 없었다.
그중에서 가장 걱정되는 것은 따로 있었다. 그가 직접 대사를 하며 느끼는 것과 ‘실제 대사 아래 감춰진 감정과 생각’이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 느낌이 든다는 점이었다.
다시 말해, 지은호는 대사의 서브텍스트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까 봐 걱정이었다.
‘일단 해봐야 알겠네.’
그는 대기실에서 나오는 한유일을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모든 배우들이 준비를 마친 이후, 음향과 카메라에도 빨간 불이 켜졌다.
“51에 1에 1!”
김규오 연출은 헤드셋을 낀 채 날카롭게 외쳤다.
“액션!”
.
.
.
빈 동아리실.
함께 당번 청소를 하게 된 선기현과 이태우는 각자 청소도구를 들고 먼지를 쓸고 있다.
“···야.”
먼지를 쓸던 이태우가 천천히 허리를 편다. 그리고 선기현을 향해 다시 말한다.
“넌 왜 볼 때마다 그딴 표정을 짓고 있냐.”
그러나 선기현은 못들은 척 계속해서 바닥을 쓴다.
“야! 안 들리냐? ”
싸늘하게 식은 선기현의 눈이 이태우를 바라본다.
굳이 입을 열지 않아도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하지?’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태우는 기분이 한층 더 상한 채로 선기현을 노려본다. 그때 선기현의 입이 열린다.
“그럴 만하니까.”
“뭐?”
“그럴 만하다고.”
이태우가 쥐고 있던 청소도구들이 바닥에 떨어진다. 기현은 쓰레받기와 빗자루가 떨어져 울리는 소리를 듣고도 그리 놀라지 않는다.
“나는 내가 못 할 말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하.”
그 대사를 들은 이태우는 순간, 이 모든 것이 연기임을 잊고 진심으로 열이 받는다.
“···내가 그렇게 싫냐?”
짜증과 억울함,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 대한 분노.
그리고 옅은 슬픔이 함께 묻어나는 물음.
그리고 그 기저에 깔린 마음은,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였다.
그럼에도 선기현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는다.
“그래. 솔직히 말할게.”
방금 전까지 이태우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던 선기현이 똑바로 고개를 든다. 그리고 이태우의 눈을 똑바로 본다.
이태우는 자신도 모르게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난 네가 싫어.”
선기현은 차가운 얼굴로 말을 잇는다.
“무엇이라도 되는 듯이 큰소리 치고 겨우 잡아 둔 학급 분위기 망치고, 공부하려는 애들 방해하고. ···이번 시험이 너한텐 아무 것도 아닐지도 모르지만, 나한텐 아니야.”
선기현의 말을 듣는 이태우의 눈이 이글거린다.
자신은 가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한다. 그래서 낮에는 잠을 잘 수밖에 없다.
한시도 마음 편히 놀아본 적 없다. 돈이 없으니까.
다른 애들은 심심해서 나가는 노래 대회에 돈 때문에 참여해야만 한다.
그건, 정말, X같은 일이었다.
“좋겠네, 잘나서.”
이태우가 선기현을 향해 한 걸음씩 가까이 다가간다.
“살면서 지금까지 힘든 것도, 어려운 것도 없었지? 얼마나 편하냐. 그냥 저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한심하단 표정만 지어보이면 되는데?”
선기현의 표정이 일렁인다.
“···뭐?”
와, 이러니까 흔들리긴 하네?
이태우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한다.
그는 선기현 앞에 가까이 얼굴을 가져다댄다. 그리고 피식 웃으며 말을 잇는다.
“왜? 나는 내가 못할 말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기현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준 이태우는 뒤를 돌아 문으로 향한다.
입술을 깨문 채 주먹을 꾹 쥐고 있던 선기현이 천천히 입을 연다.
“넌··· 아무것도 몰라.”
쾅.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닫힌다.
둘 사이에 쉽게 넘을 수 없는 벽이 세워지는 소리였다.
.
.
.
“···컷!”
김규오의 외침이 들리자 숨죽이고 있던 스태프들이 모두 깊은 숨을 내뱉었다.
‘와 씨···.’
조연출은 지은호와 한유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그의 기대보다도 더 괜찮은 컷이었다.
유일과 은호가 모니터링을 위해 모니터 앞에 서자, 김규오는 씩 웃으며 말을 걸었다.
“은호 씨, 리딩 때보다 훨씬 좋은 것 같은데요?”
“···감사합니다.”
모니터링을 한 지은호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촬영 전에 했던 걱정을 무색하게 만드는 촬영본이었다.
그러나··· 묘한 기분이 들었다.
‘왜지?’
“좋네요! 이제 각자 바스트컷만 땁시다. 이대로만 가죠.”
그 뒤로, 지은호는 한유일과 같은 연기를 연달아 하며 깨달았다.
‘아.’
어렵게 여겨졌던 서브텍스트가 저절로 체화되었다.
바로 자신의 앞에서 대사를 치고 있는 상대역 때문이었다.
한유일은 자신이 미세하게 다른 연기를 보일 때마다 순식간에 반응했다. 몰입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연기였다. 기본적으로 연기 실력과 여유가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지은호의 불완전했던 연기가 자연스러워진 것 역시 그 덕분이었다.
‘···대단하네.’
김하랑이 마음에 들어하는 배우라는 건 알고 있었다. 경력이 짧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찍은 모든 작품들의 평이 좋다는 것도.
지은호가 상념에 빠져있을 때, 연출부 스태프는 둘을 간이 대기실로 안내했다.
“다음 장면도 두 분 촬영이니까 여기서 쉬고 계세요!”
현재 촬영장소가 각자의 대기실과는 거리가 조금 있는 탓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
지금껏 지은호와 한유일, 이 둘만 남겨진 적이 없던 탓인지 분위기는 매우 어색했다. 슬쩍 보니, 한유일은 심각한 얼굴로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 씬 대사를 외워보는 거겠지.’
지은호 역시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반복하며 속으로 대사를 다시 외웠다. 조용히 숨쉬는 소리만 들리던 공간을 깨운 건 한유일이었다.
*
대기실에 들어왔을 때부터, 한유일은 브윈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블랙씨의 지은호는 리더입니다. 만 25세이며, 막내인 김하랑과는 4살 차이가 납니다. 인기가 가장 많은 멤버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블랙씨의 팬명은 ‘코랄’···】
‘팬명이 뭐냐.’
【팬들을 부르는 애칭입니다. 유일 님도 나중에 팬들을 부르는 애칭을 정할 수 있습니다.】
‘···난 아이돌도 아닌데?’
【요즘은 배우들도 팬명을 자주 정하며, 이는 팬과 연예인 사이의 유대감을 공고히 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또한···】
‘그만. 일단 알겠다.’
잠시 정적이 흐르나 싶더니, 브윈이 또 다시 말했다.
【유일 님, 다음 촬영은 노래 씬입니다. 미리 준비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후에 촬영이 예정된 씬은 주인공들이 처음으로 노래를 부르는 씬이자 뮤지컬 웹드라마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는 장면이었다.
【이번 촬영에선 현장음을 최대한 살릴 예정인 듯하나, 후시녹음은 필수적이니 너무 부담은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도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해야지.
유일은 지은호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숙인 탓에 귀를 덮는 갈색 머리카락이 지은호의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그는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하며 대사를 외우고 있었다.
“저기, 괜찮으시면 같이 연습 하실래요?”
“!”
“바쁘시면 거절하셔도 괜찮습니다.”
“아뇨. 좋습니다.”
빠르게 답한 지은호는 대본을 내려다보았다.
[S#54. 학교 운동장+동아리실 (낮)동아리실에 앉아있던 선기현, 조용히 읊조리듯 노래(2. 겨울싹)를 시작한다.
이어서 운동장에서 혼자 농구공을 튀기던 이태우가 이어서 부른다.
마지막 가사는 함께 부르며, 서로 다른 공간에 있는 기현와 태우가 등을 기대고 있는 듯한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촬영팀 버전의 콘티는 훨씬 복잡했겠지만, 시나리오에 나와있는 첫 ‘노래씬’은 이게 다였다.
시나리오를 들여다보던 지은호는 대본에 따로 붙어있는 악보를 꺼냈다.
“노래도 하실 거죠?”
“그럼요.”
고개를 끄덕인 한유일은 가볍게 목을 풀었다.
그리고 시작하겠습니다, 라는 말과 함께 곧바로 노래를 시작했다.
[거울을 바라보면자꾸 눈물이 나요]
“···!”
깔끔하고 탁 트인 목소리. 거기에 듣기 편안하면서도 부드러운 음처리였다.
지은호의 반쯤 감긴 눈이 동그래졌다.
[세상은 거대하고난 길을 잃기만 해요]
‘···잘하네.’
수준급의 실력이었다. 아이돌 노래보다는 뮤지컬에 어울리는 발성.
트레이닝을 받았다고 해도 놀라웠다.
지은호는 한유일을 이어서 노래를 불렀다.
[거울 속에 보이는초라하고 작은 아이]
지은호는 성량이 큰 편은 아니었지만, 낮고 울림이 좋은 목소리가 강점이었다.
다음은 둘이 함께 부르는 화음 파트였다.
한유일은 브윈과 몇번이고 연습했던 것을 떠올리며, 한음 한음 신중하게 불렀다.
[겨울은 너무 춥고나는 아직 잠들지 못해요]
지은호의 목소리가 제법 든든하게 화음을 받쳐주자, 한유일은 그 위에 멜로디를 쌓아갔다.
[나는 아직 잠들지 못해요]“···.”
음악이 끝났다.
지은호는 악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생각했다.
‘좋네.’
드라마 수록곡이라든지, 뮤지컬 곡이라든지 하는 사족을 빼고 들어도 좋은 노래였다.
다시 반쯤 감긴 눈으로 돌아온 지은호가 느릿한 말투로 말했다.
“···잘하시네요.”
“아닙니다.”
정작 한유일은 브윈이 아니었다면 보컬능력과 박자감을 쉽게 올릴 수 없었을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앞으로도 맡겨만 주세요, 유일 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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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노래 연습을 맞춰둔 효과는 확실했다. 노래씬 촬영이 순조롭게 끝나자 촬영장은 화기애애하게 달아올랐다.
“아, 딜레이 안 되어서 너무 좋네.”
“수고하셨습니다~”
“두 분 다 너무 잘하셨어요!”
“드라마 잘 돼서 나중에 배우님들 다같이 여행 보내드릴 수 있으면 좋겠네요~”
유일은 스태프들끼리 농담 반, 진담 반 대화를 하는 것을 들으며 조용히 웃었다.
웹드라마 치고는 오랜 촬영기간이었음에도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드디어 월명대에도 종강이 찾아왔다.
한유일이 과제에서 해방되었음과 함께, 의 방영 날짜가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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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 인 하이스쿨 (4)
블루챗 헤비 유저 HM.
일명 ‘하랑맘’은 블랙씨의 데뷔무대를 처음 본 순간부터 김하랑과 사랑에 빠졌다. 변덕이 심한 HM의 성격을 아는 주변에서는 ‘언제까지 그러나 보자’고 말하는 이들이 대다수였으나, 의외로 HM의 사랑은 시간이 갈수록 단단해져만 갔다.
잠이 들기 직전 딱 한 시간. 그 한 시간은 퍽퍽한 공시생활 중 HM이 유일하게 기쁨을 느끼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김하랑을 보는 재미로 살아가는 HM에게 또 다른 떡밥이 던져졌다.
‘드라마··· 드라마라니···. 우리 하랑이가 언제 이렇게 커서 연기를 다하고···.’
물론 김하랑이 자신의 혈육과 동갑이긴 했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김하랑은 죽을 때까지 블랙씨의 막내이자 ‘우리 애’일 테니까.
언제나처럼 두근대는 마음으로 핸드폰을 켠 HM의 눈앞에, 오튜브 알람이 떠올랐다.
[(메이킹필름#1) 싱 인 하이스쿨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어···!’
홀린 듯 알람을 누른 HM은 상기된 얼굴로 유일과 하랑, 별과 혜나와 은호가 스티커 사진을 찍는 듯 다닥다닥 붙어있는 썸네일을 클릭했다.
– 싱 인 하이스쿨 촬영현장
곧, 자막과 함께 배우들의 얼굴이 등장했다.
– 배우님들, 이거 메이킹필름 카메라에요! 인사 한번 해주세요!
“악···!”
HM은 입을 틀어막았다. 김하랑과 또 다른 배우의 얼굴이 화면 가득 보였다.
‘아 씨, X존잘···.’
HM은 눈을 반짝이며 영상에 집중했다.
시험 준비를 할 때와는 비교하기 어려운 집중력이었다.
– 반갑습니다.
– 우왕! 안녕하세요~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배우와 달리, 하랑은 카메라를 향해 아이돌다운 상쾌한 인사를 건넸다.
– 두 분 진짜 친해보이시네요!
메이킹 필름 감독의 말에 김하랑은 헤헤 웃으며 한유일을 가리켰다.
– 당연하죠, 유일 형이 제 선생님이거든요!
– 뭐래.
당황하는 배우를 놀리는 게 재미있는 듯, 하랑은 장난스럽게 말을 이었다.
– 여러분, 소개할게요! 제 연기 선생님이십니다!
– ···이거 다 장난인 거 아시죠.
배우의 타박에도 김하랑은 해사하게 웃으며 카메라에 대고 속삭일 뿐이었다.
– 사실 형이 진짜 선생님 맞아요!
“끄어억.”
HM의 입에선 누군가 명치를 때릴 때 나오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치사량의 귀여움이었다.
게다가 하랑의 곁에 있는 배우 역시 잘생겼다. 부드러움과 차가움이 함께 보인달까. 표정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지는 얼굴이었다.
‘이름이··· 한유일이랬나.’
하랑의 팬이 아니라면 절로 먼저 눈길이 갈만한 외모였다.
HM은 몇 번이고 영상을 돌려보았다. 그리고 카메라에 대고 속삭이는 하랑의 모습이 보일 때마다 똑같이 심장을 부여잡았다.
흥분한 채로 블루챗에 글을 쏟아내던 HM의 머릿속에 문득 의문 하나가 들었다.
‘근데 이거, 아직 촬영 중인 거 아닌가? 방영까지는 한참 남았을 텐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찾아보니 아직 촬영 중인 작품이 맞았다. 다만 방영일이 한달도 채 남지 않았을 뿐이었다.
HM은 푹풍처럼 블루챗 게시물을 업로드하기 시작했다.
[@HM_0110 와 싱인하 이제 한달 남았네] [@HM_0110 눈 감았다 뜨면 한달 뒤였음 좋겠다ㅅㅂ 현기증 날 것 같아요]HM은 실시간으로 늘어가는 리챗 수와 함께,싱인하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어 잠들었다.
*
“이모, 저예요.”
평소보다 조금 더 이르게 도착한 촬영장.
유일은 대기실에서 진하영과 통화 중이었다.
– 어, 유일아. 몸은 괜찮지?
“그럼요. 완전 괜찮죠.”
일하느라 고생이 많다는 유일의 말에, 진하영은 목소리를 높였다.
– 아니야. 너야말로 학교 다니면서 배우일하느라 고생이 많았지.
“그래도 아르바이트보단 훨씬 나은데요, 뭐.”
물론 몸은 더 힘들긴 했다. 체력이 동나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져서 운동도 다시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학점이 꽤 괜찮게 나왔다는 점이었다. 앞으로 그 학점을 유지할 수 있는지는 미지수였지만 말이다.
“전 정말 괜찮아요.”
– 그래. 건강 조심하고. 밥도 잘 챙겨 먹고.
이전과는 달리, 모든 게 다 괜찮았다.
1년 전과 비교하면 많은 것들이 달라진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