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cting genius began RAW novel - chapter 3
자신이 학생 공연 따위에 회전문을 돌게 될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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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로미오 (2)
쨍-
로미오가 손에 들고 있던 칼을 떨어뜨린다. 그는 지친 몸을 끌고 힘겹게 걸음을 옮긴다.
차갑게 식어버린 자신의 아내, 줄리엣을 향해서.
줄리엣, 줄리엣···. 속삭이듯 중얼거린 그는 줄리엣의 맥박을 재본다.
얄궂게도 그의 연인은 더이상 심장이 뛰지 않는다. 로미오는 덜덜 떨며 줄리엣의 얼굴을 하염없이 쓸었다.
이혜진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전혀··· 다른 사람 같아.’
정말 저 사람이 나한테 공연을 보러오라고 표를 준 그 사람이 맞나? 정말로?
이혜진은 숨을 참은 채 그의 손끝과 떨리는 눈가를 바라보았다.
로미오는 품에서 독약을 꺼내 입에 털어넣는다.
두려움과 공포, 슬픔이 모두 녹아있는 눈으로.
동시에 암전이 찾아왔다. 그제야 이혜진은 조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허어···.’
이렇게 가까이서 누군가 연기하는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 생각보다 더 역동적이고, 강렬한 경험이었다.
‘신기해.’
이혜진은 두근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눈을 깜박였다.
이윽고 새로운 장이 시작되었다.
어둠 속에서 시끄러운 도시의 소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차가 지나가는 소리, 사람들이 지나가는 소리, 광고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들이 섞인 채 흘러나온다.
무대에 천천히 조명이 들어오자, 여전히 똑같은 곳에 쓰러져있는 로미오가 보인다. 누워있던 로미오가 천천히 눈을 뜬다.
로미오를 발견한 누군가가 그에게 다가간다.
“저기요, 왜 이런 데 쓰러져 있어요? 술 먹었어요?”
“당신은··· 누구지? 처음 보는 차림인데.”
“네? 그냥 지나가던 사람인데요.”
“줄리엣, 줄리엣은?! 줄리엣은 어딨소!”
로미오는 다급하게 손을 뻗는다. 허우적대던 그의 손이 행인의 멱살을 쥔다. 갑작스레 멱살이 잡힌 행인은 당황하며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친다.
“뭐야, 도와주려 했더니 재수 없게···.”
“잠깐, 잠깐만···!”
얼떨떨한 얼굴로 천천히 일어난 로미오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본다. 곧 그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꺠닫는다.
아무리 걸어도 익숙한 풍경이 나오지 않는다.
돌들로 이뤄진 길도, 아름다운 낮은 건물들도, 언제나 흥미로운 소식들로 가득하던 광장도, 폰테 피에트라(Ponte Pietra)도 보이지 않는다.
로미오는 그제야 깨닫는다. 여기는 베로나가 아니다.
“이곳은··· 대체···. 여기는 어디란 말인가.”
그렇게 15세기의 이탈리아의 베로나에서 살아가던 로미오는 갑작스레 21세기 서울 한복판에 떨어지고 만다.
로미오는 계속해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다. 무대에 실제 배우가 등장하진 않았다. 그러나 로미오는 정말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는 듯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붙잡고 여기가 어딘지를, 베로나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물었다.
‘무대에 아무도 없는데도 자연스럽게 느껴질 수 있구나.’
이혜진은 조용히 감탄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거절 당하던 로미오의 눈에, 전단지를 돌리고 있는 줄리엣이 들어온다.
줄리엣을 본 로미오의 얼굴에 처음으로 녹아든 건 놀라움이다.
그 다음에는 그리움, 반가움이 차례로 섞이기 시작한다.
마치 물 위에 여러 색의 물감을 방울방울 떨어뜨리는 듯, 그의 얼굴에 생기가 돈다.
“줄리엣!”
로미오는 갈라진 목소리로 그토록 그리던 이름을 외친다.
‘···!’
이혜진은 손으로 입을 막았다. 거침없이 달려나간 로미오가 줄리엣을 한번에 안은 탓이었다.
“신이시여, 당신이 살아있다니···.”
로미오는 세상 모든 것을 다 얻은 것 같은 행복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기쁜 마음으로 둘을 바라보고 있던 이혜진의 표정은 순식간에 달라졌다. 이어지는 광경은, 그녀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면이었다.
“뭐야, 이 미친놈은!”
찰진 소리와 함께, 로미오의 사랑스러운 줄리엣은 그에게 강렬한 따귀를 선사했다.
“···!”
당연히 로맨스일 거라고 생각하고 극을 보던 이혜진은 당황했다. 여주인공에게 뺨을 맞고 경찰서에 끌려가는 로미오라니. 그 와중에 로미오는 꿋꿋하게 자신이 줄리엣의 남편이라고 주장한다.
앞서 행인으로 등장했던 배우가 경찰로 등장했다. 셋이서 만담을 하며 일일 시트콤 같은 상황을 만들자, 관객석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이혜진 역시 쿡쿡 웃으며 엉뚱한 짓을 계속하는 로미오를 바라보았다.
‘아, 웃기다 진짜.’
지나치게 무겁지 않은 가벼운 극이기에 전개가 느려도 피로감보다 즐거움이 컸다. 어느새 그녀는 ‘한유일’이 아니라 ‘로미오’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울이라는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로미오는 그녀가 자신이 알던 줄리엣과 얼굴을 제외하곤 모든 면에서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에 충격받는다.
로미오가 ‘줄리엣’이라고 부르는 여자는 줄리엣이 아닌 김주희였으며,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자신이 꿈을 꾼다고 생각하는 로미오는 온갖 방법으로 이전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애를 쓰고, 결국 높은 곳에서 떨어지려는 마음까지 먹는다. 그때, 어디선가 나타난 주희가 소리를 질러 그를 붙잡는다.
짧은 소란이 지나간 뒤, 둘은 겨우 안전한 곳에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저기요.”
“···.”
“그쪽은 제가 왜 당신 아내라고 생각해요?”
주희의 말에 로미오는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자신의 연인과 너무나 닮은, 그러나 자신의 연인이 아닌 그녀를 오랫동안 바라본다.
“나는 알 수 있으니까. 내 눈에 당신은 분명 줄리엣이오. 나의 아내, 나의 사랑···.”
그는 천천히 손을 올린다. 그러나 그의 손은 주희에게 닿지 못한다.
“···아니, 알고 있소. 당신은 그녀가 아니오.”
“다행이네요. 알고 있어서.”
“그래서 죽으려고 하는 거요. 그녀를 만나기 위해선 죽음의 신께 가는 수밖에 없으니.”
주희를 바라보던 로미오의 맑은 눈동자에서 톡, 하고 투명한 눈물이 떨어진다.
“···!”
혜진은 또 다시 입을 틀어막았다. 자칫하면 욕설 섞인 감탄사가 새어나갈 것 같았다.
‘미친 거 아냐?’
혜진은 저런 표정으로 코앞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라면, 그가 무엇을 요구하든 몽땅 가져다 바칠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을 보던 주희는 인상을 팍 찌푸린다.
“···개소리.”
매끄러운 이마 아래 정갈하게 난 눈썹이 움찍, 하고 움직인다. 놀란 로미오가 눈을 몇 차례 깜박인다.
“···방금, 뭐라고···”
“하 참나, 세상에 목숨보다 소중한 게 어딨는데요. 어이가 없어서···. 우리 엄마 살아있었으면 그쪽 등짝부터 때렸을 거야.”
퉁명스러운 주희의 말에 로미오는 입을 떡 벌린다. 낭만에 젖은 15세기 이탈리아인에겐 너무나 현실적이고도 딱딱한 말이었다. 로미오는 살아움직이는 시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주희를 바라보았다.
“저기요, 정신 차려요. 여기 서울이에요. 눈뜨고 코베어가는 서울. 사랑타령할 시간 있으면 일을 해요.”
“일?”
“노동을 해서 대가를 받으라고요. 지금 돈도 없고 집도 없다면서요.”
그렇게 로미오는 하층계급의 일이라고만 생각하던 노동을 시작하게 된다.
처음에는 골때리는 실수를 저지르며 실소를 터뜨리게 하던 로미오는, 자신의 적성을 찾게 된다.
바로 중세 컨셉 카페에서 직원으로 일하게 된 것!
그곳에서 로미오는 자신을 좋아해주는 사람들을 만나고 인정받는다. 그리고 비로소 누군가의 연인이 아닌, 다양한 꿈을 지닌 한 사람으로서 살아가게 된다.
“당신은 내 은인이오.”
로미오의 따뜻한 말에 주희는 고개를 젓는다.
“솔직히 말하면, 로미오 씨가 제 은인이에요.”
“그게 무슨···”
“당신이 옥상에 올라가서 떨어지려던 그날, 사실 저도 거기 죽으려고 올라갔어요. 인생이 너무 힘들어서.”
로미오의 놀란 눈을 피하며, 주희는 입을 연다.
“그때 당신한테 엄마 어쩌고 하면서 했던 말도 다 나한테 하는 말이었어요. ···근데 그렇게 말하고나니까 정말 살고 싶더라고요.”
주희는 천천히 말을 잇는다.
“또···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죽으려던 사람이 일도 하고 잘 살아가는 거 보니까··· 저도 잘 살고 싶어졌고요.”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던 로미오가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다.
“당신은 내가 지금껏 보았던 어떤 기사들보다 용기있고, 강하오.”
그리고 그는 커다란 손을 내밀며 묻는다.
“나를 친구로 받아주겠소?”
“···뭐야, 우리 친구 아니었어요?”
“이제부터는 더욱 강력한 친구가 된 것이오.”
주희는 그 말에 피식 웃어보인다.
“좋아요. 친구.”
그녀는 로미오의 손을 마주잡고 담백한 악수를 한다. 환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는 둘의 얼굴이 보이고···
···서서히 암전.
*
얼마 지나지 않아 무대 위에 다시 조명이 켜졌다. 첫 암전부터 배우들이 인사를 모두 마칠 때까지, 관객석에서 오랫동안 박수소리가 울려퍼졌다.
박수를 치는 이 중에는 극회의 선배이자 대학로에서 작가로 활동 중인 소이진도 있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이 연극이 마음에 들었다.
중간중간 적절하게 들어있는 유머코드와 감동적인 마무리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로미오의 배역이 이보다 더 찰떡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연극이 끝나자마자 사람들 틈에서 껴있는 허지유를 붙잡았다.
“어, 이진 언니!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지유야, 걔 누구야?”
“아아 유일이요?”
다짜고자 던진 질문에도 지유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마치 자기 애를 자랑하듯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이번에 새로 들어왔어요. 한유일.”
“연기과야?”
“국문학과래요. 신기하죠?”
“앞으로도 연기할 거래?”
“그것까진 못 물어봤는데··· 아, 유일아!”
그리고 허지유는 땀을 식히며 무대 뒤에서 나오는 한유일을 붙잡았다. 안경 너머 반짝이는 눈으로 한유일을 바라보던 소이진은, 짧은 파마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유일에게 다가왔다.
“연극 너무 잘 봤어요.”
한유일은 얼결에 고개를 숙이며 생각했다.
‘···뭐랄까, 엄청 작가처럼 생기셨네.’
【정확하시군요. 이분은 소이진 극작가입니다. 연극 , 뮤지컬 를 집필하였으며, 각각 올해 말에 대학로에서 재연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정확한 공연장의 위치를 알고 싶으시면···】
‘됐다.’
한유일은 브윈을 무시하며 소이진을 바라보았다. 동그란 안경과 짧은 히피펌의 머리가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연기는 어디서 배웠어요?”
유일은 짧은 고민 끝에 답했다.
“어··· 독학했습니다.”
“독학했다고요? 발성연습이랑 움직임 연습까지 다? 그걸 혼자 했다고요?”
“음, 네.”
‘···놀랍네.’
소이진은 표정을 숨기며 유일을 바라보았다. 연기과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연기자 지망생일 거라고는 생각했다.
‘무대 연기라고 과장하지도 않고, 발성도 깔끔하고··· 전문적으로 연습한 티가 나는데.’
그런데 독학이라니.
작게 감탄사를 흘린 이진은 찬찬히 한유일의 발끝부터 얼굴을 훑기 시작했다.
‘거기에 키도 크고, 비율도 좋네. 얼굴도 준수한 편이고.’
“···유일 씨, 혹시 연극쪽으로 올 생각은 없어요?”
“네··· 어, 네?”
무심코 답하려던 유일은 놀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이진은 여전히 진지한 얼굴이었다.
한유일은 자신의 번호를 받고 기분 좋은 얼굴로 돌아가는 이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잘됐군요. 좋은 시작입니다. 유일 님.】
그렇게 첫공을 끝낸 극회팀은 다같이 빈 극장에서 이른 저녁을 주문해 먹었다. 큼직한 계란 샌드위치를 베어먹은 유일에게, 브윈이 말을 걸었다.
【유일 님, 이젠 예매율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뭐? 왜?’
그때, 곁에서 햄치즈 샌드위치를 먹던 제작부 팀원이 벌떡 일어섰다.
“허··· 헐! 대박!”
“왜? 무슨 일이야?”
“설마 누가 또 예매 취소했어?!”
“그게 아니라···”
그녀는 곧바로 핸드폰을 내밀었다. 핸드폰 화면엔 방금 전 추가된 예매내역이 빼곡했다.
“와, 뭐야?”
“실시간으로 예매율 늘어나는 거 봐!”
“미친!”
놀란 극회 팀원들의 목소리 사이로, 브윈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30분 전, 블루챗에 이혜진 님이 쓴 에 대한 새로운 게시물이 올라왔습니다. 보시겠습니까?】
‘뭐야, 그런 것도 돼?’
그러자 순식간에 눈앞에 반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X발!’
유일은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입술을 꾹 깨물어야만 했다. 시야를 가리며 떠오른 회색빛 창 위에, 하얀 글씨가 떠올랐다.
[@jinnnny님들 제발 시간 되면 월명대 극회 정기연극 ‘이상한나라의로미오’ 꼭보세요 내용도 내용인데 연기가 미쳤음; 참고로 난 오늘 저녁 공연 또 보러 갈거임ㅅㅂ 아직도 여운오짐..하 내용은 아래에 정리할게요]
그리고 글 아래로는, 게시물을 공유한 인원을 보여주는 리챗수가 실시간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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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브윈의 예측은 정확했다.
첫공 이후로 예매 수는 점점 늘어나더니, 마지막 날의 저녁 공연에서는 빈자리 없이 빼곡하게 관객석이 차있었다.
덕분에 스태프들은 대흥분 상태였다. 지금까지 올렸던 모든 극회 연극 중에서도 역대 급으로 관객이 많았던 공연이었다. 이미 본 연극을 또다시 보러온 이들도 많았다.
“대박, 완전 꽉 찼어요!”
마지막 공연 15분 전, 무대 팀원 한 명이 긴장 섞인 쌍 따봉을 날리며 말했다. 유일이 작게 중얼거렸다.
“이렇게 관객석이 가득 찰 줄은 몰랐는데.”
“나도.”
이민지가 작게 답했다. 사흘째 줄리엣의 드레스 의상을 입고 있는 그녀는 긴장이 역력한 얼굴로 웃었다.
“우리 마지막까지 화이팅하자.”
“그래.”
그리고 둘은 조용히 주먹을 마주쳤다.
‘손이 되게 차갑네.’
【긴장 때문으로 보입니다. 현재 이민지 씨의 심박수는 평소보다 20%가량 높습니다.】
‘···하다 하다 남의 맥박까지 재냐?’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한유일이 한숨을 쉬고 옷매무시를 고치고 있을 때였다.
“근데··· 넌 진짜 안 떤다.”
이민지가 속삭이듯 덧붙였다.
“지금도 하나도 안 떨고 있잖아. 공연 직전인데.”
“아냐. 나도 긴장은 되는데.”
“야, 나는 지금이 세 번째 극인데도 설 때마다 다리가 후들거리거든? 가끔 대사도 잊고···.”
그녀는 민망한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제도 내가 공연 망칠 뻔했잖아. 기억 안 나?”
한유일은 기억을 더듬었다. 어제저녁 공연에서 이민지는 옥상에 올라가 떨어지려는 로미오의 따귀를 차지게 때렸다.
-미친놈!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는 대사를 까먹고 말았다.
그때 한유일이 맞은 뺨을 만지는 척하며 손으로 슬쩍 입을 가린 뒤 다음 대사를 속삭여주지 않았다면, 그 이후로 몇 분이고 적막이 흘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젠 정신없어서 못 말했는데··· 고마웠어.”
“뭐, 별것도 아닌데.”
그렇게 답한 유일은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잘 안 떠는 편인가?’
생각해보니 허지유의 앞에서 오디션을 볼 때, 그리고 무대 위에 서서 연기할 때도 심장이 평소보다 심각하게 빠르게 뛴다든가, 다리가 후들거린다든가 했던 적은 없었다.
그저 설렘과 약간의 흥분감이 물에 가루가 퍼지듯 몸속을 은은하게 채울 뿐이었다.
【한유일 님은 천성적으로 외부의 영향을 크게 받는 분이 아니십니다. 쉽게 긴장하지 않는 것은 연기에 있어서 매우 유리한 요소 중 하나입니다.】
‘브윈.’
【네, 유일 님.】
‘방해금지 모드.’
【···알겠습니다.】
더는 브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유일은 한결 개운한 표정으로 몸을 풀 수 있었다.
그렇게 마지막 공연의 막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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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은 연습 때부터 수백 번 말했던 자신의 마지막 대사를 읊었다.
“이제부터는 더욱 강력한 친구가 된 것이오.”
“치. 좋아요, 친구.”
이 무대에서의 마지막 암전이 찾아왔다.
관객들은 불이 켜지고, 배우들이 인사를 끝낼 때까지 박수를 멈추지 않았다.
유일은 자신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사람들 한 명 한 명과 찬찬히 눈을 맞췄다. 사람들은 반짝이는 눈으로 모두 열정적으로 손뼉을 치고 있었다.
“잘생겼다!”
“이민지 예쁘다!”
“로미오 사랑해요!”
용기를 낸 외침에 이민지와 한유일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아.’
그 순간, 유일은 마음 깊은 곳에서 몽글몽글한 무언가가 올라오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가슴이 간지러웠다.
입을 벌리면 거품이 빠져나올 것만 같은 기분.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단순한 아쉬움이라기엔 강렬했다.
‘이대로 무대를 떠나고 싶지 않다.’
그대로 발이 무대에 뿌리를 내린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연극은 끝났다. 무대를 뜨겁게 밝히던 조명도 꺼졌다. 이제는 퇴장해야 할 시간이었다.
유일은 무거운 걸음을 옮겨 무대를 빠져나왔다. 그는 땀을 닦으며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