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cting genius began RAW novel - chapter 30
준비할 시간은 충분했다.
한유일의 여유로운 표정을 본 손지수는 남몰래 웃었다.
그의 매니저를 흠칫하게 할 만한 싸늘한 눈이었다.
‘내가 제대로 보여줘야겠네.’
지금까지 그가 콧대 높은 신인들을 어떻게 꺾어왔는지 말이다.
*
‘···아.’
어쩌다 이렇게 됐지?
직장인은 아이패드를 앞에 둔 채 멍하니 생각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다 그 연극 때문이야.’
그 연극만 아니었더라도 자신이 같은 작품을 찾아보진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꿀같은 휴일에 드라마 캡처 같은 걸 하며 시간을 보내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간이 절대 아깝게 느껴지진 않았다.
“하··· 기현아···”
직장인은 캡처본을 보며 앓는 소리를 냈다.
직장인은 이번 드라마를 보며 한유일은 ‘뱀파이어’나 ‘소년’ 같은, 특이한 역이 아닌 학생 같은 역할도 수월하게 소화하는 배우였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나이가 많이 어리다는 점이 직장인의 양심을 찌르긴 했지만···.
“솔직히 이렇게 연기해놓고 좋아하지 말라는 건 범죄지.”
직장인은 이상한 논리로 자신을 납득시킨 뒤 다시 영상을 켰다.
그때, 알림 하나가 울렸다. 블루챗 알람이었다.
한유일의 덕질을 위해 시작한 SNS였는데,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무엇보다 같은 마음으로 같은 배우를 파는 이들이 모여 있다는 사실이 직장인을 기쁘게 했다.
직장인은 빠르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러자 기사를 리챗한 블루챗 게시물이 보였다.
[@jinnnny (사진) 내 배우 새 작품 찍는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https://www.yshnews.star/1123]게시물을 통해 타고 들어간 뉴스 링크에선 한유일이 구찬익 감독의 신작, 에 캐스팅 되었다는 내용이 있었다.
‘또 새로운 작품을 한다고···?’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보다 집에서 뉴블릭스를 보는 게 더 좋은 직장인이었지만, 한유일이 나오는 작품은 커다란 스크린으로 보고 싶었다.
‘얼른 나왔으면 좋겠다.’
직장인은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다시 몇 번이고 돌려 본 하이틴 드라마를 재생했다.
달콤한 휴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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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학생의 방학은 긴 듯 짧았다.
[@jinnnny 선기현 진짜 한유일 아니면 누가 하냐 아무리 생각해도 캐스팅 진짜 신의한수임]의 마지막 회가 방영된 지도 꽤 시간이 흘렀지만, 이혜진은 여전히 드라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사실 그 드라마를 파는 모든 이들이 그랬다.
흐뭇하게 메이킹 필름을 감상하던 이혜진을 방해한 것은 핸드폰 알람이었다.
– 동기 이하나 : 혜진! 너 이번에 뭐 들을 거야? 한 교수님 수업 열렸다는데 같이 들을래?
“아.”
이혜진의 얼굴에 떠올랐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덕질하기도 바쁜데.’
현생이 덕질을 방해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슬퍼진 이혜진이었다.
“하아··· 방학 너무 짧다.”
그리고 같은 시각, 이혜진과 정확히 똑같은 생각을 하는 이가 있었다.
【···미리 알려드립니다, 유일 님. 내일이면 수강신청 기간입니다.】
좋았던 기분이 이렇게 순식간에 가라앉을 수 있다니.
“뭐야, 한유일. 왜 그러냐?”
“파스타 맛 이상해?”
“페퍼론치노 씹었나 봄.”
한유일은 같은 테이블에 앉은 친구들의 걱정과 추측을 들으며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아냐.”
한유일은 지금 동기들과의 식사자리에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 김진우와 강하나, 그리고 황리우가 함께했다.
곧 군대간다며 우는 소리만 하던 김진우의 입영일이 머지않았기에, 이를 기념해 만나기로 한 것이다.
촬영장에서 살다시피 하다가 이렇게 동기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니, 새삼 대학생 같은 기분이었다.
“야, 유일아. 황이원 실물 어떠냐?”
“잘생겼겠지.”
“자세히 말해줘. 속눈썹은 얼마나 길고 손은 얼마나 크고 어떤 물을 마시는지···!”
강하나의 열정적인 말에 김진우가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속눈썹이랑 손은 그렇다 치는데··· 어떤 물 마시는지는 왜 물어보는 거냐?”
“원래 덕질하면 다 궁금한 거야.”
강하나는 황이원의 오랜 팬이었다. 중학생 때부터 꾸준히 좋아했다나.
“분위기··· 좋으시지. 엄청 잘생기셨고.”
“너네 앞에 앉아있는 애도 잘생긴 배우라는 걸 잊지 마라, 너네.”
김진우가 괜히 툴툴대며 말하자 강하나가 싱긋 웃었다.
“그건 당연히 안 잊었지. 아직도 신기한데~!”
동시에 그녀는 친구와 덕질 대상은 다르다며 힘있게 덧붙였다.
“아무튼, 구찬익 감독이면 작품성 하나는 보장되겠네.”
“재밌을듯.”
강하나와 황리우의 말에 한유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기대해도 좋을 거야.”
솔직히 주연이 아닌 다른 역을 맡아도 흔쾌히 임했을 만큼, 재미있는 대본이었다.
유일은 자신이 맡은 ‘수일’의 역을 제외한 다른 캐릭터의 분석도 함께 병행했다.
어디까지나 재미있어서였다.
“···영화 스포는 안 되겠지?”
“대충 어떤 느낌인지 정도는 말해줄 수 있지 않나?”
【개봉 이전까지 배우로 참여한 작품에 대해선···】
‘안다.’
한유일은 브윈의 연설을 미리 차단하며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절대 안 된다.
“나중에 극장에서 봐.”
한유일은 친구들의 야유를 들으며 조용히 파스타를 입에 넣었다.
.
.
.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개강 이후, 월명대에선 특이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괜히 인문대를 서성거리는 학생들이 많아진 것이다.
시작은 한유일이 학교에 보인다는 대학교 익명 커뮤니티 게시물이었다.
– 방금 봤다 한유일
[개잘생겼네··· 몸도 좋음ㅅㅂ 아 잘생겼으면 운동하지 말라고]┗ 헐 어디서 봤냐
┗┗ 아까 월동관 앞에서
┗ 사인 받음?
┗┗ ㄴㄴ 근데 사진은 찍음. 찍어도 되냐니까 고개 끄덕이던데
┗┗ ㅁㅊ 너 그런 사진 안 올리면 무슨무슨법으로 잡아가 당장 올려
– 옛다
[내 얼굴은 가림ㅋ(사진)]
┗ 아 미친
┗ 하 ㅅㅂ 인생 불공평하네
┗ 한유일 얼굴이 내 인생보다 밝다
┗ 유일 님 저랑도 한번만 마주쳐주세요
┗┗ 국어학 수업 청강해!
┗┗ 야 그건 좀···
– 아니 근데 한유일
[계속 촬영하는 거 아냐? 어떻게 학교 다니냐?]┗ 심지어 개열심히함
┗┗ 설정과다;;
┗ 이거 비밀인데 사실 걔 인생 2회차래
┗┗ 이게 맞다
┗┗ 이거 아니면 설명 안 됨
“으으윽···”
학내 커뮤니티 게시물들을 보며 인문대를 서성이던 혜진은 덕계못의 법칙을 뼈저리게 느끼며 슬퍼했다.
자신과 한유일의 시간표가 전혀 겹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이혜진이었다.
*
의 첫 촬영이 있는 날.
한유일은 차창 너머로 넓게 펼쳐진 분홍색 물결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이게 핑크뮬리구나’
바람에 따라 파도치듯 움직이는 광경이 아름다웠다.
‘이모랑 한번쯤 이런 곳도 와봤으면 좋았을 텐데.’
어쩌면 이번 촬영이 끝난 뒤에 같이 가볼지도 모르겠다.
이모라면 분명 좋아할 텐데.
【개강한 지 일주일 되었습니다, 유일 님. 현재 제출해야 할 과제는 총 3개이며, 그 중 팀으로 발표해야한 과제가 2개···】
“···하하.”
민우진은 실성한 얼굴로 힘없이 웃는 유일을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괜찮냐, 유일아?”
“그럼요.”
한유일은 숨을 크게 내쉬고 기지개를 폈다. 그리고 촬영장으로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한창 세팅 중인 촬영장.
카메라와 마이크를 비롯한 촬영 장비들 사이로 스태프들이 분주히 오고다녔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어어. 일찍 왔구만.”
구찬익 감독에게 먼저 인사를 한 유일은 촬영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마치 낙하산 장비 같은 스테디캠 을 장착한 촬영팀이 여유 넘치는 얼굴로 유일의 인사를 받았다.
“정말 고생이 많으십니다.”
“아닙니다~ 배우님도 고생이시죠.”
장비를 점검하는 촬영팀 옆에서, 정명진 촬영감독이 껄껄 웃으며 답했다. 그는 구찬익 감독과 오랫동안 활동해온 촬영감독이었다.
정명진은 한유일이 꽤 마음에 들었다.
촬영장에서는 스태프들을, 특히 연출팀 스태프를 NPC 취급하는 배우들이 많았다. 촬영의 시작과 끝마다 스태프들 사이에서 이런저런 뒷말이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반짝거리는 이미지만 보는 일반인들은 전혀 상상도 못할 일들이 매일 벌어지는 곳이 바로 촬영장이었다.
그러나 한유일에 대해선 그 어떤 찝찝한 뒷말도 들은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 갔던 촬영장 모두 나쁜 말이 나온 적은 한번도 없었지.’
물론 정명진으로서는 NG 없이 깔끔하게 오케이 컷을 만들어내는 배우가 최고긴 했다.
‘이번에도 잘 끝내주면 좋을 텐데.’
정명진은 그런 생각을 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슬슬 스탠바이 해야하는데···”
“뭐야, 손지수 배우는?”
콜타임은 4시였으나, 아직 촬영은 시작되지 못했다. 손지수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도착을 안 했나?”
“네··· 매니저한테 연락했는데 곧 온다고 합니다.”
구찬익의 표정을 보고 긴장한 조연출은 땀을 흘리며 답했다.
그리고 얼마 뒤.
4시 5분이 조금 넘었을 무렵, 손지수가 벤에서 내렸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여유로운 얼굴로 사람들에게 인사를 한 손지수는 매니저에게 턱짓을 하며 말했다.
“현수야. 얼른 전달해드리자.”
“···저 현수 아니고 수현인데요.”
“어쨌든.”
불만스러운 얼굴로 손지수를 흘겨보던 통통한 매니저는 차에서 테이크아웃 커피를 한아름 들고 내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커피 좀 사오느라~”
‘이 정도면 센스있는 배우지.’
스스로를 칭찬한 손지수는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촬영장을 둘러보았다.
“···웬 커피?”
“당장 테스트 촬영부터 해야하는데···”
“우리 아까 다 마시지 않았나?”
···이런 반응일 줄은 몰랐는데.
손지수는 당황스러움을 애써 숨기며 머리를 쓸었다.
분위기를 정리한 건 구찬익이었다.
“마실 건 나중에 마시고. 테스트 촬영부터 하도록 하지.”
떨떠름한 구찬익의 얼굴을 본 손지수는 그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네! 얼른 준비하겠습니다.”
그는 남몰래 식은땀을 닦고선 빠르게 분장을 받았다.
그리고, 드디어 촬영이 시작되었다.
.
.
.
손지수가 맡은 역할은 최빈.
박수일의 소꿉친구 역할이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풀숲을 헤치며 걷는 최빈의 뒷모습을 카메라가 천천히 따라간다.
그리고 카메라는 천천히 그의 앞으로 이동해 최빈의 얼굴을 보여준다.
무작정 앞을 걸어가던 최빈이 누군가를 발견한다.
그와 함께 그의 까만 눈동자에 감정이 차오른다. 걱정에서··· 안도로 바뀌어가는 표정.
그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한다.
“···어디갔나 했다.”
카메라는 최빈의 시선을 보여준다.
넓게 펼쳐진 핑크뮬리. 그 아름다운 분홍 물결을 바라보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이상한 광경이었다. 너무나도 아름다웠고, 그만큼 쓸쓸하다.
남자가 천천히 뒤를 돌아본다.
17인치 모니터로 모니터링을 하던 조연출 역시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손지수도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한유일은··· 분위기부터 달랐다.
프로필 사진으로 봤을 때나 실제로 대면했을 때는 담백하고 선한 느낌이었는데, 지금의 한유일은 가까이 다가가만 해도 찔릴 것만 같은 날카로움이 있었다.
유일, 아니 수일이 최빈을 살핀다. 그리고 입을 연다.
“왜 왔냐.”
“넌 친구한테 그딴 말밖에 못하냐?”
최빈은 자신도 모르게 욱한 채 말을 뱉는다.
그러나 이내 후회한다.
어쨌든 그는 지금 수일과 싸우고자 온 게 아니었다.
“너 대학교 포기했다며?”
“응.”
“야, 그 학교 천재들만 가는 데야. 다른 사람들은 가고 싶어서 안달인 곳이라고. 돈 쓰고 빽 써도 못 들어가는 곳을 네 발로 걷어차?”
“···천재라.”
박수일은 새파란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최빈은 울화통이 터질 것 같았다.
“제대로 생각해, 너. 너도 거기 가고 싶어서 중학교 고등학교 내내 공부만 한 거 아니였냐?”
“···선 넘는다, 너?”
“어. 선 좀 넘어야겠다.”
빈의 말에 수일의 얼굴에 티 나지 않는 금이 간다.
같은 씬, 새로운 컷.
풀샷으로 배경과 함께 두 인물을 함께 담은 화면이 모니터에 보인다.
구찬익 감독을 비롯한 스크립터와 조연출은 숨을 죽인 채 그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최빈이 성큼성큼 걸어간다. 그가 보이지 않는 선을 넘는 순간, 수일이 입을 연다.
“안 돼.”
“…뭐?”
“난 안 된다고.”
“그게 무슨 소린데.”
“난 천재 같은 것도 아니고, 그냥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시킨 대로 공식이나 쓰는 머저리 새끼라고.”
“너···”
“천재 취급 받으려고 애쓰는 것도 지친다.”
카메라는 수일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채 불안하게 흔들린다.
“가라.”
수일의 어깨 너머로 그의 등을 바라보는 빈의 흐릿한 인영이 화면에 보였다.
“어차피 넌 잘먹고 잘살 거잖아. 지금도, 앞으로도.”
“박수일!”
최빈이 수일의 이름을 외친다. 답답함과 분노가 얽히고설킨 외침.
그러나 박수일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그대로 돌이라도 되어서 움직이지 않을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