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cting genius began RAW novel - chapter 31
그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컷.”
조용히 컷을 외친 구찬익은 신중한 얼굴로 모니터링을 했다.
몇 분 뒤, 그가 헤드폰을 벗었다.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오케이.”
‘헐. 대박.’
조연출은 신나는 마음을 애써 감추며 생각했다.
‘당연히 딜레이될 줄 알았는데···!’
그래서 일부러 일촬표에도 시간을 넉넉히 잡아뒀다. 지금까지 구찬익과 함께 촬영하며 이렇게 빠르게 끝난 적은 손에 꼽았다.
생각보다 예정된 촬영이 이르게 끝나자, 긴장했던 스태프들의 표정도 밝아졌다.
“원래 저녁 먹고 34씬 진행하려고 했는데, 조금 이르게 시작해도 될까요 배우님들?”
“좋습니다.”
“그럼 우선 손지수 배우님부터 시작하죠! 클로즈업 컷이랑 헨드헬드로 들어가는 컷은 먼저 맞춰봐야 할 것 같아서요.”
곧바로 답한 유일과 달리, 손지수는 초조하게 입술을 축였다.
“···아. 죄송합니다.”
“응? 왜.”
구찬익의 물음에 한층 더 작아진 그는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사실, 제가 34씬 대사를 완벽하게 숙지를 못해서··· 아, 그렇다고 외우지 않은 건 아닙니다! 10분만 주시면 됩니다.”
“···.”
불편한 정적이 흐른 뒤.
구찬익 감독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정명진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어차피 카메라 세팅하는데 오래 걸리니까 배우분들은 좀 쉬죠.”
“···크흠.”
구찬익은 턱에 난 수염을 매만졌다.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이번 씬은 찍기 전에 여러 각도에서 화면을 보려 했는데 말야. 테스트라도 배우가 앞에 있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손지수는 아차 싶은 얼굴이었다.
‘아씨···. 이게 아닌데.’
‘구찬익 감독 작품’을 필모그래피에 넣고 싶은 마음에 자존심까지 다 버리고 조연으로 들어온 그였다. 그런 마당에 구찬익에게 밉보이고 싶진 않았다.
‘어떡하지. 그냥 읽으면서라도 하겠다고 할까.’
손지수가 빠르게 머리를 굴리고 있을 그때였다.
“감독님.”
정적을 깬 건 다름 아닌 한유일이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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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승이네
모두가 놀란 얼굴로 유일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중 가장 놀란 이는 손지수였다.
‘뭐?!’
구찬익은 역시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눈썹을 들어올렸다.
“자네가?”
조연출이 조심스럽게 유일에게 물었다.
“대사도 잘 모르실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그건 괜찮습니다.”
어제 브윈과 연습하면서 같은 씬을 몇 번이고 읽은 덕인지, 굳이 외우려고 하지 않아도 모든 대사가 떠올랐다.
‘이렇게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대사는 다 외워서요.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한유일의 확답을 들은 구찬익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허, 저렇게까지 자신하니 한번 해보지.”
손지수는 구겨진 얼굴로 한유일을 바라보았다.
100씬 분량의 대본.
그 중 한유일의 대사는 못해도 30%는 넘는다.
‘본인 대사에 내 대사까지 외웠다고?’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분명 허세일 거다.
그런데도 손지수는 불안해졌다. 손에 든 대본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자꾸만 시선은 한유일에게로 향했다.
“자, 그럼 위치에 서 주세요!”
구찬익의 미소를 마주하며, 유일은 카메라 앞에 섰다.
이번에 찍을 씬은 영화의 중반부에 들어가는 장면이었다.
꽃집까지 찾아와 설득에 실패한 최빈이, 또 다시 그를 찾아온 씬.
‘저렇게 자신하는 이유가 있겠지.’
구찬익은 가늘어진 눈으로 모니터 속 한유일을 바라보았다.
“카메라 롤-“
“34에 3, 테스트~”
“액션!”
한유일이 눈을 떴다.
의 아르바이트생 박수일이 아닌, 그의 친구 최빈이 되어서.
“···야. 박수일.”
최빈은 잠시 입술을 꾹 닫는다. 하고 싶은 말들을 고르고 고르는 듯 보인다.
이윽고, 그가 말을 잇는다.
“너 무슨 생각이냐, 도대체? 꽃집은 뭐고, 그 이상한 사장은 뭔데?”
팔짱을 낀 채 한유일을 바라보던 손지수는 순간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뭐지?’
막연히 자신의 연기를 따라하겠거니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의 한유일은··· 자신이 연기했던 말투와 묘하게 달랐다.
‘설마, 연구를 했다고?’
이내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랬을 리가 없다. 주연을 맡은 배우가 다른 캐릭터까지 분석을 했을리가 있나.
“···.”
손지수의 손에 들린 대본이 조금씩 구겨졌다.
“너 진짜 왜 그러냐. 계속 그렇게 살 거야?”
최빈이 한 발자국씩 앞으로 간다. 애써 참으려 했으나, 결국 흘러나온 감정들이 얼굴에 번진다.
“그게 좋냐? 만족해?”
참을 수 없는 답답함이 격정이 되어 흘러나오고.
카메라에 그의 어그러진 얼굴이 흔들리며 담긴다.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뭔데? 돌아가신 어머니한테 죄송하지도 않냐?”
다음 순간, 한유일의 발끝이 살짝 들린다. 누군가 옷깃을 끌어당긴듯한 자세로.
마치··· 멱살이라도 잡힌 것 같았다.
“···!”
‘저런 것까지 연기를 한다고···?’
모니터를 바라보던 조연출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조연출의 눈에 보이는 저 배우는, 더는 한유일이 아니었다.
‘···최빈.’
‘어떻게 최빈을 연기하지?’가 아닌, ‘어떻게 최빈이 아니었지?’라는 질문을 하게 만드는 연기.
최빈은 느슨하게 입매를 올린 뒤 입을 열었다.
“···왜 신경쓰냐고?”
그러나 여유로운 듯한 입가와는 달리, 그의 눈가에는 작은 경련이 일고 있었다.
‘···!’
모든 스태프들이 숨을 참았다.
어느새 그들은 한유일이 아닌, 최빈으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넌 그딴 것도 질문이라고 하냐.”
최빈의 눈에 천천히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네가 내 친구니까, 새끼야.”
한숨처럼 흘러나온 마지막 단어.
그 문장이 끝남과 동시에, 최빈의 오른쪽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나왔다.
투명한 물은 천천히 볼을 적시며 굴러 떨어졌다.
“···컷.”
구찬익 감독이 입을 열었다.
방금 전까지 진공 상태이던 촬영장에 비로소 공기가 돌아온 것 같았다.
“하아···.”
그제야 조연출은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여전히 놀란 눈으로 한유일을 바라보았다.
‘연기를 잘한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조연출은 손지수를 흘긋 바라보았다. 손지수 역시 꽤 충격을 받은 듯한 얼굴이었다.
‘···압승이네.’
촬영장에 있는 모두가 인정할 터였다.
애초에 둘이 연기 내기를 한 것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구찬익이 옅은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네.”
“···감사합니다.”
유일은 눈물을 닦아내고 씩 웃었다.
브윈과 함께 시작한 주변 캐릭터 분석이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필요하실 땐 언제든 맡씀해 주십시오, 유일 님.】
‘···그래. 고맙다.’
한유일은 차가운 생수로 목을 축였다.
그 순간, 그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하는 브윈의 말을 들었다.
【2단계 목표 69% 달성.】
*
‘X발···.’
손지수는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남은 촬영이 어떻게 흘러갔는지조차 몰랐다.
‘최빈’을 연기하는 한유일을 보느라 정작 대사를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그만큼 그는 정신이 없었다.
‘···허세인 줄 알았는데!’
더 화가 났던 건, 주변 스태프들의 반응이었다.
한유일이 연기했을 때와, 그가 연기했을 때의 반응의 차이.
그 차이가 공기에서부터 느껴졌다.
‘젠장.’
굳은 손지수의 눈치를 살피던 매니저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배우님, 물 드실래요?”
“나 미지근한 물 싫어한다는 거 말하지 않았나?”
“아, 네···”
익숙하지만 들을 때마다 기분 상하는 까칠한 말투다. 매니저는 풀 죽은 얼굴로 주섬주섬 물을 집어넣었다.
“···됐으니까 일단 줘봐.”
“방금 미지근한 물 안 드신다고···”
“아, 일단 주라고 했잖아!”
“···.”
손지수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며 생각했다.
‘···적당히 친한 척 지내볼까.’
연기 좀 잘하고 주변 스태프들한테 신임을 받는다고 해도, 그래봤자 신인이다.
“현수야. 내 파우치 좀 줘봐.”
“···저 현수 아니고 수현인데.”
매니저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손지수에게 파우치를 건넸다.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살핀 손지수는 자신감 있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인 다루는 법은 잘 알지.’
손지수는 촬영이 끝나고 모두가 분주히 철수 준비를 할 때를 노리기로 했다.
그리고 그 때가 되었을 때, 손지수는 천천히 한유일에게 다가갔다.
유일은 특이하게도 허공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멍 때리나?’
천천히 그에게 다가간 손지수는 한유일에게 불쑥 말을 걸었다.
“한유일 씨.”
갑작스러운 부름이었기에 조금은 놀랄 줄 알았다. 그러나 한유일은 손지수가 올 거라는 것을 알고 있기라도 했는지, 그리 놀란 눈치가 아니었다.
“···오늘 보니까 연기 열심히 하던데. 시간 많았나 봐요?”
“그렇다기보단, 대본이 재미있어서요.”
순간 표정을 굳혔던 손지수는 이내 부드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 진짜. 내가 웬만하면 이런 실수를 안 하는데··· 요즘 너무 바빠서 그런가. 아아, 미안해요! 나 대신 힘들었죠?”
“아뇨, 즐거웠습니다.”
“···하하.”
주변을 둘러보며 큰 목소리로 말한 손지수는 유일에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전에 내가 했던 말. 신경 쓰고 있는 거 아니죠? 내가 그날 기분이 안 좋았어서 좀 예민했던 것 같은데. 마음에 담아두지 말라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이에요.”
“아닙니다.”
그래. 이렇게 나와야지.
손지수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유일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래, 같이 촬영하는 사람들끼리 잘 지내는 게 좋지. 술 좋아해요? 우리 나중에 술이나 같이 마시죠. 아, 아니다. 이 참에 오늘 갈까? 내가 좋은 데 알거든요.”
보통은 이렇게 말하면 대다수는 못 이기는 척 따라온다.
그때, 한유일이 슬쩍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 제가 술은 잘 안 해서요. 별로 좋아하진 않습니다.”
“···엉?”
호쾌하게 웃으며 그를 끌고 가려던 손지수는 당황한 얼굴로 유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오늘 저녁에 광고 미팅이 있어서···. 아쉽네요.”
하나도 아쉬워보이지 않은 얼굴이었다. 손지수는 자신도 모르게 욱해서 되물었다.
“무슨 광고인데···! 요?”
“GINVERG라고··· 저보다 더 잘 아실 것 같은데.”
손지수의 커다래진 눈을 마주하며, 한유일이 말간 얼굴로 되물었다.
“그렇죠, 선배님?”
손지수는 입을 벌린 채 애써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알···죠.”
모를 리가 없었다.
GINVERG는 불과 작년까지 그가 모델이었던 패션 브랜드였으니까.
“그럼, 좋은 저녁 보내세요. 선배님.”
깔끔하게 고개를 숙이고 돌아가는 유일의 뒷모습을 보며 손지수는 이를 악물었다.
‘X발.’
이런 호승심에 불탄 게 얼마만 인가.
‘···그래. 배우는 연기로 겨루는 거지.’
당장 차로 달려간 그는 분노의 시나리오 독파를 시작했다.
‘두고 보자. 한유일.’
연기로 패배감을 맛보게 해주지. 내 앞에서 좌절감에 휩싸여 엉엉 울게 해주마!
손지수의 매니저는 이글대는 눈으로 대본을 읽는 자신의 배우를 돌아보았다.
‘하···.’
얕은 한숨을 내쉰 매니저는 손지수가 대본에 신경 팔린 틈을 타 낡은 노트를 꺼내 천천히 페이지를 넘겼다.
전임자에서 전임자로, 가문의 비급처럼 전해내려오는 이었다.
[1005. 가끔 다른 배우들한테 시비 걸다가 갑자기 대본을 미친 듯이 읽을 때가 있음. 아이스 아메리카노 얼음 녹을 때마다 갈아주고 절대 절대 건드리지 마셈.]‘절대 절대’에 무려 별이 다섯 개나 붙어 있었다.
‘···카페나 가야겠네.’
매니저는 촉촉한 눈으로 핸들을 잡았다.
하루가 너무 길었다.
*
‘공원이 넓어서 그런지 공기가 좋네.’
누군가 자신 때문에 대본 분석에 매달렸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는 유일은, 개운한 기분으로 민우진이 기다리고 있는 차로 향했다.
“어, 유일! 이야기는 잘했어?”
“네, 형.”
유일은 평온한 얼굴로 카시트에 등을 기댔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은 반은 거짓말이었다. 한유일은 술 자체보다도 누구와 술을 마시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술 자체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니 100% 거짓말은 아니고.’
무엇보다 유일은 아직 손지수의 발언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 이거 다 듣보잡 신인 이용해서 내 개런티 깎으려는 거잖아!
– 걘 뭔데, 그 감독 숨겨둔 자식이라도 된대?
존경하는 감독을 향한 말이라기엔 지나치게 불손하다.
물론 정말로 손지수가 구찬익을 존경하는지도 모른다. 순간 욱하는 마음에 마구잡이로 뱉은 말일지도 모르지.
‘굳이 그런 사람이랑 술자리까지 만들며 가까워지고 싶진 않으니까.’
【탁월한 선택입니다, 유일 님.】
한편, 운전에 집중하던 민우진이 ‘아!’하는 소리와 함께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유일아. 방금 연락 받았어. 너 음료 광고 촬영 하나 잡혔다!”
“진짜요?”
화보 촬영이나 패션 브랜드 광고모델도 신기했는데, 음료 모델이라니.
“무슨 음료인지 물어봐도 되죠?”
“당연하지. ‘비타 톡 세븐’이야!”
비타 톡 세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