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cting genius began RAW novel - chapter 34
정작 유일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이었다. 그는 자신의 표정을 살피는 손지수의 시선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내며 담담히 답했다.
“특별히 문제될 만한 대화는 없었습니다. 황이원 선배님, 친절하시던데요.”
“그··· 래요?”
손지수는 잘근잘근 입안 살을 씹었다. 한유일에 대한 반감과는 별개로, 황이원이 신인에게 박하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그런데 저런 반응이라니. 손지수로선 이해할 수 없었다.
‘···뭔데, 대체?’
마음 같아선 더 캐묻고 싶었으나, 연출팀의 외침에 그는 잠시 그의 고민을 접어둘 수 밖에 없었다.
“28씬 슛 들어가겠습니다~”
스태프의 외침에 손지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디어.’
그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은 채 천천히 걸음을 뗐다.
저번 촬영 이후로 이 순간만을 어찌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그는 그간 열심히 읽어 온 시나리오를 소리나게 내려놓았다.
‘어차피 이 바닥은 잘나면 끝이지.’
“배우님들, 준비해주세요.”
“예에.”
“알겠습니다.”
손지수와 한유일은 세팅된 카메라 앞에 섰다.
유일은 꽃집 내부에서, 손지수는 꽃집 바깥에서 시작하는 씬이었다. 유일은 투명한 유리문 너머로 손지수와 눈이 마주쳤다.
‘···!’
그의 시선을 마주한 유일은 조금 놀랐다. 불과 얼마 전 만난 손지수의 모습과는 조금 달랐던 것이다.
손지수는 마치 눈앞에 있는 유일을 격투장 안에서 만나기라도 한 듯,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준비를 많이 하셨나본데.’
【오늘 손지수의 어조 분석 결과, 자신감 68%, 들뜸 17.6%, 언짢음 13.1% 기타 1.3%···】
‘···분석은 안 해도 되고.’
유일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처음으로 무대에 서기 직전 느꼈던 긴장과 기분 좋은 설렘이 다시금 느껴졌다.
한유일의 눈이 생기로 빛나기 시작했다.
‘···재밌겠는데.’
그리고, 몇 초 뒤, 카메라에 붉은 빛이 들어온다.
“28에 1에 1~”
“액션!”
.
.
.
사장인 김혁진이 자리를 비운 시간.
수일은 꽃집을 돌아다니며 이름을 외우고 있다. 매일 아침 김혁진이 준 일일 미션이었다.
“아, 뭐였지. ···얘는 리시안셔스. 얜 ··· 핑크 스타? 씨, 무슨 이름이 다 이딴 식이냐.”
머리를 헝크린 채 중얼거리는 수일.
그런 수일의 뒷편으로 딸랑, 하는 소리가 들린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빠르게 유일은 굽혔던 허리를 세운다.
“어서오세요.”
기계적인 인사를 하며 뒤를 돌아본 수일은 그대로 굳어버린다.
문고리에 손을 댄 채 서 있는 남자 역시 얼어있기는 마찬가지다.
수일의 얼굴을 빤히 바라본 남자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입을 연다.
“···진짜 여기있네.”
최빈.
수일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그의 모든 과거를 아는 사람.
지금의 박수일이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인물이었다.
“···.”
수일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뜬다. 설마하지만··· 눈앞에 서 있는 남자는 사라지지 않는다.
“너··· 살아있긴 했구나.”
최빈의 목소리는 허망한 듯하기도 했고, 화난 것 같기도 하다.
수일은 대수롭지 않게 답한다.
“그럼, 살아있었지.”
언제나 아무렇지 않게, 별일 아닌 것처럼 말하는 건 그의 특기였다.
“···야. 너 진짜···”
최빈의 입이 살짝 열었다가 닫힌다. 수많은 감정이 담긴 시선. 수일은 그 시선을 피한다.
답할 자신이 없는 감정이다.
“수일아. 너··· 아니, 아니지.”
이리저리 흔들리던 시선이 수일의 얼굴에 고정된다.
“네가 왜 여기 있는 건데? 이게 다 뭔데, 대체?”
“···고등학교 동창한테 하는 질문치고는 너무 구린데.”
“말 돌리지 말고.”
어느 한 쪽도 물러서지 않는다. 팽팽한 줄의 양 끝을 잡아당기듯.
원망과 무시라는, 서로 다른 분노가 각자를 집어 삼킬 듯 바라본다.
한 걸음 앞으로 걸어간 최빈이 박수일을 노려본다.
“나 저번에도 여기 왔었어. 박수일, 너 여기 사장이랑 무슨 사이냐?”
목소리를 낮춘 채 천천히 내뱉는 물음에도 수일은 여전히 가벼운 태도다.
그는 어깨를 으쓱인다.
“알바랑 사장 사이지.”
“···너, 그 사람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냐?”
원망만이 가득하던 최빈의 시선에 약간의 긴장감이 깃든다.
“저번에 왔을 때 봤어. 말로 설명하긴 힘든데··· 뭔가 있어, 그 사람.”
“···뭐라고?”
“아무튼 진짜 이상하다고!”
애처로울 정도로 진심이 느껴지는 외침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듣고 있던 박수일은 눈썹을 올린 채 시선을 돌린다.
주름이 잡혀있던 그의 미간이 펴진다. 그리고 깊게 내쉰 한숨과 함께, 눈의 양 끝이 아래쪽으로 내려간다.
명백한 따분함의 표시였다.
“···!”
그의 표정을 본 최빈의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나 바쁘다. 꽃 안 살 거면 나가라.”
“···야, 박수일!”
모니터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구찬익이 입을 열었다.
“컷!”
순식간에 나온 오케이 컷이었다.
‘됐다.’
연습했던 대로다. 손지수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주먹을 쥐었다. 모니터에 비친 자신의 연기 역시 마음에 들었다.
손지수의 곁에 있던 구찬익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나직히 말했다.
“오늘 자네가 컨디션이 좋나보군.”
“···!”
그 말에 손지수의 광대가 높이 올라갔다.
구찬익이 유일을 보며 한 마디를 덧붙이기 전까지는.
“자네는 뭐, 항상 좋고.”
감독의 말에 한유일은 당연한 듯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손지수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진짜, 마음에 안 드네.’
손지수의 시선이 세트장을 훑었다.
집요하고도 붉은 시선이었다.
*
스태프들은 촬영장 구석구석을 바쁘게 돌아다니며 세팅에 매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촬영팀과 미술팀의 세팅이 끝나자, 조연출이 크게 외쳤다.
“다음 컷 촬영 가겠습니다~”
수일과 빈, 둘을 투샷으로 잡는 카메라에 불이 켜졌다.
“액션!”
구찬익 감독의 목소리와 함께 찰영이 시작되었다.
“나 바쁘다. 꽃 안 살 거면 나가라.”
“···야, 박수일!”
박수일이 한쪽 입꼬리를 올린다.
명백한 비웃음이다.
”왜. 다르게 말해줘?”
그가 한 글자 한 글자 정확한 발음으로 말한다.
“손님. 손님 때문에 다른 손님들이 다 떠나겠습니다. 제에발, 가주시겠어요?”
‘이것도 오케이 컷이겠네.’
카메라 감독은 곧 들릴 ‘컷에 대비해 손을 올리고 있었다.
한편, 수일의 말을 들은 최빈의 목에 핏대가 선다.
점점 붉어지는 그의 눈이 카메라에 담긴다.
모두가 숨을 죽인 채 수일과 최빈을 바라보던 그때였다.
쨍그랑-
“?!”
···들려서는 안 되는 소리가 촬영장에 울렸다.
뜻밖의 상황에 모두가 얼어붙고 말았다.
최빈, 손지수가 던진 유리 꽃병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난 것이다.
‘···아.’
조연출은 입을 합 다물었다. 하마터면 헉하는 소리를 낼 뻔했다.
곁에 있던 소품팀장도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꽃집 바닥에 흩뿌려진 유리조각.
두 배우는 더는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 유리 꽃병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망했다.’
물론 촬영장에서 이런 일이 처음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더 심한 애드리브도 많았다.
앞에 있는 물건을 집어던지는 애드리브 정도는 약과였다.
‘아무리 그래도 저 많고 많은 소품 중에 하필 유리로 된 걸 골라 집어던지냐.’
소품팀장과 미술팀장은 슬픈 시선을 주고받고 있었다. ‘저거 다 치우고 다시 가려면 골치 아프겠지’하는 얼굴이었다.
조연출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응?’
그런데··· 조용했다.
조연출은 의아한 얼굴로 구찬익을 바라보았다.
‘왜 컷을 안 하시지?’
구찬익 감독은 진지한 얼굴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연출은 그제야 한유일과 손지수를 바라보았다.
‘···어?’
둘을 보던 조연출의 표정이 점차 미묘해졌다.
두 배우는 여전히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최빈과 박수일로서.
붉어진 얼굴의 최빈이 입을 연다.
“변했네, 너.”
그의 목소리가 분노로 떨린다.
그러나 수일은 여전히 차가웠다.
“변한 건 너 같은데. 물건 던질 줄도 알고.”
손에 든 대본을 들여다본 조연출이 눈을 크게 떴다.
‘뭐야, 이거?’
[수일 : 나 바쁘다. 꽃 안 살 거면 나가라.빈 : ···야, 박수일!
수일 : 왜. 다르게 말해줘? (차갑게) 손님. 손님 때문에 다른 손님들이 다 떠나겠습니다. 제발 가주시겠어요?
최빈, 화난 얼굴로 수일을 바라보다 꽃집을 나선다.]
‘···이게 씬 끝인데?’
그러나 둘의 연기는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수일이 최빈을 향해 한 발자국 걸어간다.
움찔.
수일의 걸음에 살짝 움츠리는 최빈의 모습이 카메라에 담긴다.
최빈은 애써 눈을 부릅뜬 채 수일을 노려본다.
“너 진짜 너무한다고 생각 안 하냐.”
최빈의 말에 수일은 피식 웃는다.
“너야말로.”
그리고 그의 입에서 겨울바람처럼 차디찬 목소리가 들렸다.
“···선 넘지 마. 좋은 말 할 때.”
“···.”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수일을 바라보던 최빈은 그대로 뒤를 돌아 나간다.
꽃집의 문이 닫힌다.
수일은 멀어지는 최빈의 모습을 빤히 바라본다.
문에 달린 종만이 눈치 없이 맑은 소리를 내며 울리고···
“···컷!”
구찬익 감독의 컷은 그제야 들렸다.
모든 스태프들이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조연출은 알고 있었다.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좋네.”
그는 보기 드문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좋아.”
시나리오대로 갔다가는 자칫 밋밋할 수도 있는 장면이었다. 그만큼 배우들의 연기가 중요한 씬이었다.
구찬익은 빛을 받아 반짝이는 유리조각들을 바라보았다.
‘···흠.’
실수인지 의도인지는 알 수 없으나, 깨진 유리 화병이라는 이미지도 씬과 제법 잘 어울렸다.
하지만 무엇보다 괜찮은 건 따로 있었다.
‘대사.’
방금 찍은 씬은 핑크뮬리 정원에서 찍었던 씬 이전에 붙는 씬이었다.
방금 수일이 한 애드리브는 ‘선을 넘지 말라’는 그의 말을 짚어주는 역할을 했다.
‘감이 좋다니까.’
몇 번 더 모니터링을 한 구찬익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가자고.”
.
.
.
“저기, 형··· 고생하셨어요···.”
손지수의 매니저는 눈치를 보며 그에게 커피를 건넸다. 그러나 손지수는 매니저의 말을 못 들은 눈치였다.
“···.”
그는 천천히 힘이 들어간 주먹을 폈다. 손바닥엔 빨간 손톱 자국들이 눈에 띄게 나 있었다.
“하.”
손지수의 입에서 실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하···.”
엄밀하게 말하면, 그가 유리 화병을 던지고 수일에게 대사를 던진 것은 애드리브가 아니었다.
혼자서 몇 번이고 되뇌며 준비했던 연기였다.
물론 주연보다 튀는 조연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욕먹을 각오를 하고 던진 유리 꽃병이었다.
그만큼, 단 한 순간이라도 그를 압도하고 싶었다.
그러나 첫 대사를 내뱉은 순간 뭔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연기하는 내내,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되려 한유일의 페이스에 끌려다니기만 할 뿐.
‘···거꾸로 당했네.’
완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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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 속의 진주 (1)
“선배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
정작 자신을 너덜너덜하게 만들어 놓은 당사자는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 손지수를 더욱 힘빠지게 했다.
그는 답 대신 고개만 대충 끄덕였다. 지금은 답할 힘도 없었다.
유일은 그런 손지수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해도 온갖 열의가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그였다.
‘···혹시 배고프신건가.’
유일이 진지하게 그의 뱃속 사정을 고민할 때, 손지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동그랗게 눈을 뜨고 있는 한유일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한 달이 넘도록 한유일을 보며 짜증과 분노에 시달렸던 그였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허탈하게만 느껴졌다.
“괜찮으세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유일은 ‘그냥 신인’이 아니었다.
그때, 손지수의 입안에서 맴돌던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대체,”
도저히 말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했어요? 연기?”
“네?”
“아까 내가 병 깼을 때 놀라지도 않아보이던데. 그때 무슨 생각으로 어떻게 연기했냐고요.”
한유일은 의외의 질문을 받은 듯한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