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cting genius began RAW novel - chapter 5
이번 유재호가 연출할 영화에선 다양한 사연을 지닌 나이대의 주인공들이 등장했다. 그중에서 그들이 가장 공들여 구하고 있는 건 ‘취준에 실패하고 열등감에 찌든 20대 남성’ 역할을 맡을 배우였다. 이렇게 말하면 단순해 보일 수 있지만, 작품에서 중심을 잡고 끌어갈 인물이기에 감독의 눈에 드는 배우를 찾기 어려웠다.
연출부원들은 사진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중얼거렸다.
“서늘하면서도··· 어딘가 슬퍼 보이는데. 이 친구 마음에 드는데요?”
“근데 필모가 하나도 없는 게 아쉽네.”
“그러니까요. 이미지만 보면 딱 맞는 것 같은데!”
“으으, 이미지보다 중요한 게 연기다, 연기.”
유 감독이 기지개를 켜며 중얼거렸다.
“다음 주에 제대로 한번 보자고오···. 아, 허리야.”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유일의 프로필을 슬쩍 바라보았다.
‘···오디션장에서 대사나 제대로 뱉을련지.’
그러나 유 감독은 다음 주가 되어서야 깨닫게 되었다.
그가 했던 모든 걱정이 괜한 것이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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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안 되는 물건이 굴러 왔네
【심박 수 약간 높음. 체온 정상. 산소포화도 정상. 긴장상태이나 안정적인 편입니다. ‘방해금지 모드’로 설정할까요?】
‘응.’
유일은 적당히 기분 좋은 긴장감을 느끼며 대기실에 앉아있었다. 십여 분쯤 대기하자, 스태프가 다가와 그의 이름을 불렀다.
” 지원하신 한유일 배우님 맞으시죠? 네에, 저 따라서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유일은 스태프를 따라 오디션장으로 향했다. 문고리를 잡아 돌리자 기다란 테이블에 앉은 네 명이 보였다.
가장 먼저 유일의 눈에 들어온 이는 김미진이었다. 맨 왼쪽에 앉아있던 유일의 선배는 눈웃음을 지으며 ‘화이팅’하고 입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그런 김미진의 곁엔 유재호 감독이 앉아있었고, 그 옆엔 조연출과 촬영감독도 나란히 앉아있었다.
“안녕하십니까, 한유일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아침부터 오느라 고생했어요.”
다정한 인사가 오고 가는 중에도 가운데 앉은 유재호는 심드렁한 얼굴로 한유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에, 유일 씨. 저희가 보내준 지정대사는 확인했죠?”
“네. 확인했습니다.”
한유일은 조연출의 말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바로 그 지정대사 때문에 밤을 새웠다.
“좋아요. 빠르게 가봅시다.”
“준비되면 말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유일은 살짝 눈을 감은 채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한편, 조연출은 유일의 외모에 조금 감탄한 상태였다. 마스크도 좋고, 청바지와 흰 셔츠만 입었는데도 묘하게 패셔너블해보인다.
‘생각보다 키도 크네. 몇 센티는 늘려서 적었을 줄 알았는데. 185···맞는 것 같은데?’
문제가 있다면, 생각보다 그가 더 점잖고 반듯한 외모의 소유자라는 점이었다.
‘깔끔하게 잘생긴 게 배우로서 장점이긴 한데··· 우리 작품이랑 맞을지 모르겠네.’
조연출이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유일을 바라볼 때, 유일이 눈을 떴다.
“준비됐습니다.”
“크흠,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조연출은 목을 가다듬고 자신의 첫 대사를 읊었다.
“너. 제대로. 말해 봐. 왜 소희 죽이려고 했어?”
연기에는 재능이 없는 조연출은 책을 끊어 읽듯이 대사를 쳤다. 그러나 그 딱딱한 대사를 들은 유일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아니, 얼굴뿐이 아니었다.
그의 온몸이 달라지고 있었다.
어깨가 움츠러들었고, 다리가 덜덜 떨렸다. 게다가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로 손이 하얘질 때까지 쥐었다가 폈다를 계속했다.
곧바로 다음 순간, 유일은 미간을 좁히며 헤헤 웃기 시작했다.
“에이··· 아저씨이~! 제가 왜, 왜 소희 누나를 죽이려 하겠어요, 네?”
분명 웃으면서 뱉은 말이다. 그러나 긴장으로 온몸의 근육들이 팽팽했다. 미소가 걸려있는 입에는 금방이라도 경련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
어느새 눈앞엔 비굴하고도 찌질한 남자가 서 있었다. 이렇게 순식간에 분위기가 바뀌다니. 조연출은 애써 놀란 표정을 감추고 대사를 쳤다.
“너 돈 필요하다고 했잖아. 애초에 여기까지. 온 것도, 죽으려고. 한 것도. 다 돈 때문이잖아.”
그러자 유일은 비굴하게 웃어 보인다. 큰 키가 무색할 만큼 몸집이 더욱 작아진다.
분명 처음 들어올 때 유일의 모습을 봤음에도, 지금의 유일은 처음부터 작은 사람인 듯 보였다.
“제가요,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니에요. 그래도 저, 나름 친구들 사이에서는 인망도 두텁고요··· 그렇거든요. 네? 좀 믿어주세요.”
“내가, 널. 어떻게 믿어. 뭘. 보고.”
유일의 감정은 대사를 듣는 중간마다 미묘하게 바뀌고 있었다.
정갈한 눈썹이 불쑥 솟아 올라갔다가 내려온다. 가볍게 벌린 입에선 작은 한숨이 흘러나온다.
"···하아."
이제 그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방 안을 돌아다닌다. 뭔가 고민하는 듯한 얼굴로 움직이던 그가 별안간 우뚝 멈춘다.
그 순간, 유일의 표정이 아주 살짝 달라진다.
‘···!’
한유일을 바라보는 조연출의 입이 놀라움으로 벌어졌다.
이제 한유일의 눈빛에는 약간의 자신감이··· 아니, 오만함이 담긴다.
그는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사람들을 바라본다. 그리고는 강하게 발을 구른다.
이제야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검지로 허공을 훑으면서.
조연출은 유일의 손짓을 따라 시선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네··· 이제 알겠어.”
이제 한유일은 웃고 있다.
넋을 놓고 있던 조연출은 자신이 대사를 던질 차례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사를 읽었다.
“···뭐, 뭐를 알겠다는 건데.”
“뭐긴요. 왜 아저씨가 나를 의심하는지 알겠다고요.”
한 걸음, 한 걸음. 그가 다가온다.
그의 눈이 번뜩인다. 생기나 총기와는 다른 반짝임이다.
“···아저씨가 한 짓이죠, 그거?”
이건··· 광기다.
조연출은 주먹을 꽉 쥐었다. 어느새 그의 손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아저씨.”
그가 얼굴을 들이민다.
“왜 소희 누나 죽이려 했어요?”
그리고 묻는다.
정말 궁금하다는 듯한 어조로.
그러나, 제정신이 아닌 눈으로.
“이상입니다.”
···딸꾹.
조연출의 입에서 튀어나온 딸꾹질 소리가 방을 울렸다. 조연출은 급하게 물을 들이켰다.
“···어, 괜찮으세요?”
“괜··· 괜찮, 딸꾹! 습니다. 잘··· 딸꾹! 큭, 잘하셨어요.”
겨우 물을 삼키고 진정된 조연출 곁에서, 유 감독은 굳은 얼굴로 한유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앞엔 곧게 서 있는 유일이 있었다. 처음 방에 들어왔을 때와 다름없는 얼굴이었다.
“그··· 네. 저희가 곧 연락드릴게요. 수고하셨습니다.”
조연출의 말에 한유일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네. 감사합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문이 닫히자, 적막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
겨우 정신을 차린 김미진이 고개를 저으며 빠르게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대충 들어도 욕설인 듯했다. 그 곁에서 유 감독은 여전히 딱딱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쟤가 국문학과라고?”
유 감독은 실소를 뱉었다.
프로필을 받았을 때만 해도 그저 얼굴 준수한 신인, 그것도 이제 막 연기 시작한 초짜인 줄로만 알았다. 그는 자신의 예상을 완벽히 빗나가버린 청년의 프로필을 펜으로 톡톡 건드렸다.
“말도 안 되는 물건이 굴러 왔네.”
*
오디션이 끝난 뒤에도 브윈의 협박에 못 이겨 연기 연습까지 마무리해야 했던 한유일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낯익은 목소리를 들었다.
“이제 오니?”
그는 피로가 잔뜩 묻어나는 얼굴로 환하게 웃어 보이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진하영.
오랜 기간 대학병원에서 일하던 그녀는 몇 년 전부터 가까운 간호학원의 강사로서 일하고 있었다.
“···밥은 잘 먹고 다니는 거지? 어째 살이 더 빠진 것 같다.”
“에이, 아니에요.”
진하영은 작게 웃으며 유일의 어깨를 토닥였다.
“아르바이트하면서 공부하는 거, 힘들지?”
“괜찮아요. 할만해요.”
“맨날 하는 말이라 믿을 수가 있어야지.”
“진짜로요.”
진하영은 찬찬히 한유일을 살폈다.
‘···이젠 진짜 어른이 다 됐네.’
유일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은 진하영의 오랜 습관 중 하나였다. 한유일은 그녀의 언니가 남긴 가장 소중한 유애(遺愛)였다.
진하영은 언니와 닮은 눈과 코를, 기다란 손가락을 보며 슬픔을 달랬다. 그리고 그건 유일도 마찬가지였다. 한유일과 진하영은 서로에게서 진소영의 흔적을 찾아내려고 애썼다.
“이모야말로 너무 일 많이 하는 거 아니에요? 얼굴이 너무 상했는데.”
“뭐어? 너 지금 나 늙었다고 맥이는 거지?”
진하영은 웃으며 한유일을 살짝 때렸다. 그러나 유일의 표정은 진지했다.
진하영은 애초에 결혼할 마음도 없었고 마음에 드는 사람도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러나 유일은 그게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최대한 조용히 공부만 하고, 어떻게든 빠르게 안정적인 삶을 찾으려 애썼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유일은 이모에게 자신에게서 벗어날 자유를 주고 싶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 길이 공무원이라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처음으로··· 다른 길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이모.”
“응?”
“저 연기 시작했어요.”
“···연기? 그, 배우들이 하는 그런 연기?”
“네. 음··· 최근에 학교에서 연극을 올리게 되었는데 꽤 재밌더라고요.”
진하영의 눈이 커졌다.
연기라니. 지금껏 차분한 모범생으로 살아온 유일의 모습만 봐왔던 진하영에겐 그저 놀라운 이야기일 뿐이었다.
“어머, 왜 나한테 말을 안 했어! 보러 갈 걸 그랬네.”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냥··· 앞으로 졸업하기 전까지 해보려고요.”
한유일은 담담한 얼굴로 말을 꺼냈으나, 진하영은 곧 눈치챌 수 있었다. 자신의 조카가 진심으로 기대하고 설레 하고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저런 표정은 처음 보네.’
중학교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최대한 빨리 안정적인 직업을 구해서 독립하겠다’는 말을 하던 유일이었다. 나이답지 않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유일을 생각하면, 진하영은 아직도 마음이 저렸다.
하지만 지금의 유일은 처음으로 제 나이처럼 보였다. 그 얼굴을 본 순간, 진하영은 유일이 하고자 하는 건 무엇이든 응원하고자 마음먹었다.
‘그리고 우리 유일이가··· 잘생기긴 했지.’
타고난 깨끗한 피부와 속쌍꺼풀이 진 눈, 그리고 높은 콧대와 키까지. 모든 요소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외모였다. 자신의 조카여서가 아니라, 유일은 언니와 형부의 예쁜 부분들만 빼다 박은 아이였다.
저녁내내 유일의 연기활동을 상상해보던 진하영은 그날 밤 꿈에서까지 ‘배우 한유일’을 보았다. 꿈속의 조카는 이미 톱스타가 되어 있었다.
평소 수면장애 탓에 잠에서 여러 번 깨던 진하영은, 아주 오랜만에 푹 잠들 수 있었다.
*
[김미진 작가님]다음날 아침, 화면에 뜬 이름을 본 유일은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한유일입니다.”
– 후배님! 아니, 유일 배우님~!
그녀는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 우리, 같이 일해요~ 유일 씨~!
“네?”
– 유일 씨가 그 배역, 해줬으면 해요.
김미진은 ‘어제 시간만 안 늦었으면 바로 전화를 하는 거였는데’라고 중얼거리며 말을 이었다.
– 내일 시간 괜찮아요? 우리 만난 곳··· 아니지! 유일 씨 집이 어디에요~? 저희가 가까운 곳으로 갈게요~!
“아··· 내일은 아르바이트하는 시간만 피하면 괜찮습니다.”
– 어머~ 아르바이트도 해요? 어디서? 학교 앞에서~? 아, 좋아요~ 그럼 월명대 앞 별다방에서 만나요~!
김미진과 간단히 시간을 조율한 유일은 몇 초간 자리에 서서 전화가 끝긴 핸드폰을 내려다 보았다.
‘나··· 된 건가?’
이렇게 쉽게?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영화에 출연하게 되다니. 고작 몇 달 전의 자신은 상상도 못했을 일이었다. 얼떨떨한 얼굴로 방문 앞에 있는 유일에게, 브윈이 조용히 말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했잖습니까.】
-한 배우 화이팅!
유일은 이모가 방문 앞에 붙여둔 메모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평소보다 걸음이 훨씬 가볍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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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리고 다음날.
한유일의 두 번째 오디션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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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캐치했지?
【···유일 님.】
“···으.”
【유일 님! 일어나십시오.】
유일은 책상 위에 엎드린 몸을 천천히 움직였다. 그는 뻑뻑한 눈을 깜박이며 정신을 차렸다.
【지금 주무시면 안 됩니다. 내일 오전 10시와 오후 1시, 두 개의 중간고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녁에는 연극 오디션이 있습니다.】
“···알아.”
유일은 관자놀이를 누르며 중얼거렸다. 학교 공부에 규칙적인 연기연습까지 더해진 탓이었다. 이모에겐 괜찮다고 큰소리를 뱉었지만, 매 순간 쌓이는 피로도는 어쩔 수 없었다.
【···많이 피곤하시면, 각성효과를 얻을 수 있도록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각성효과?’
그래. 전에 브윈이 그런 말을 했었다.
체력에는 손을 못 대도 일정 시간 각성을 하게 도와줄 순 있다고.
‘각성효과라는 게 정확히 뭐지?’
【브윈 딕셔너리는 뇌신경세포를 자극하여 세로토닌 등의 신경전달물질 분비량을 늘리는 방식으로 단기적인 각성효과를 일으킵니다.】
···한번 해볼까.
유일이 그렇게 무심코 생각한 순간, 브윈이 넙죽 답했다.
【네. 바로 시작합니다.】
“어··· 어?”
그 순간, 차가운 물이 유일의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훑고 지나가는 듯했다. 그 감각에 몸을 떨기도 잠시, 뇌에 불이 켜진 듯 모든 피로가 사라지고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
유일은 상쾌한 얼굴로 거울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반쯤 감기던 눈이 생생히 빛나고 있었다.
【해당 각성효과는 건강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하루에 한 번만 가능합니다.】
···이래서 사람들이 약을 하는구나.
【브윈 딕셔너리의 각성효과는 ‘약'이 아닙니다. 세로토닌은 모노아민계 신경전달물질로서 인간의 감정과 기분, 수면 등의 조절에 관여하는···】
유일은 브윈의 목소리를 흘려들으며 다시 눈앞에 놓인 교재를 바라보았다.
필요할 때 각성효과를 종종 써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
– 이번 역은 혜화, 혜화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전날 시험해 본 각성효과 덕분에 유일은 무사히 시험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지금 그는 연극 오디션을 위해 대학로로 향하고 있었다.
【유일 님, 1번 출구에서 나가시면 됩니다.】
‘알겠어.’
유일은 브윈의 안내를 따라 혜화역 1번출구에 내렸다. 소이진이 보내준 장소를 알고 있는 브윈 덕에 지도를 켤 필요는 없었다.
소이진의 차기작, 는 A문화재단에서 지원받는 극이었다. 그래서인지 연습실이 있는 건물도 꽤 깔끔했다. 연습실을 찾아 들어간 유일은 곧바로 소이진을 찾아낼 수 있었다. 특유의 짧은 히피펌과 동그란 안경을 쓴 소이진은 한유일을 보자 반갑게 외쳤다.
“어, 유일 씨 오셨네!”
그 말에 소이진의 곁에서 몸을 움츠린 채 앉아있던 누군가가 얼굴을 번쩍 들었다. 남색 비니를 쓴 지친 얼굴의 여자였다.
‘저 분이 연출이신가 보네.’
“아, 유일 씨죠? 이진 작가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서미희입니다.”
유일이 인사를 하자 서미희는 반가운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연극이 무슨 내용인지는 대충 알아요?”
“아, 네. 작가님께서 설명해주셨습니다. 흥미로운 이야기라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어~ 그래요?”
소이진의 차기작은 무기력한 뱀파이어와 아이가 주인공인 극이었다. 무너진 빌딩의 잔해 밑에서 갇힌 두 인물이 서로 대화를 하며 가까워지는 이야기였다.
“잘 기억하고 있네요?”
유일의 말에 서미희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소이진은 이제 마지막 퇴고 작업 중이라며 밝은 얼굴로 덧붙였다. 그렇게 오디션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시작되는 듯 했다.
서미희가 웃으며 말했다.
“이진 작가님이 하도 유일 씨 칭찬을 해서 너무 궁금하더라고요. 제가 이렇게 말했다고 너무 긴장하는 건 아니죠?”
“설마요.”
하지만 밝은 얼굴과 달리, 서미희는 그리 긍정적인 마음은 아니었다.
‘소이진 작가도 유난이지. 연기과도 아닌 애를 불러서는···.’
솔직히 서미희는 소이진에게 ‘후배 필터’가 씌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같은 과를 나온 후배들을 보면 한 번 더 눈길이 가고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이해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제 막 공연 하나 올린 애한테 오디션까지 보러오라고 하다니.
게다가 그녀는 이미 생각해둔 배우들이 몇 있었다.
특히 뱀파이어 역할을 맡을 배우로는 ‘정수호’를 염두에 두고 며칠 전부터 연락을 해오고 있었다. 그는 국예대 연기과를 졸업하고 연극배우로서 4년간 활동해온 이로, 연극계에선 최근 ‘연극계 아이돌’이라 불리기 시작하는 배우였다.
서미희는 물을 마시며 유일을 슬쩍 훑었다.
‘···뭐, 깔끔하게 잘생기긴 했네.’
유일은 너른 회색 맨투맨에 검은색 슬랙스를 입고 있었다. 평범한 듯 보였지만, 키가 크고 비율이 좋아서 그런지 모델 같은 분위기가 풍겼다. 확실히 눈에 띄는 외모이긴 했다.
그녀의 곁에 앉아있던 소이진은 유일에게 짧은 대본을 주며 싱긋 웃었다.
“‘소년’의 대사예요. 천천히, 부담 갖지 말고 해요.”
소이진이 건넨 짧은 대본에는 소년과 뱀파이어의 첫만남이 담겨있었다.
극 초반에 건물이 무너진 이후, 잔해들 사이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아이가 낯선 이를 만난 순간 벌어지는 대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