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cting genius began RAW novel - chapter 54
주호 : 가만히 있는 게 나아.
가희 : 가만히 있어서 뭐해.
주호 : 그냥 누워있는 거지. 물 위에 뜬 것처럼.
가희 : 계속?
주호 : 계속.]
“···.”
박영현은 꼼꼼히 시나리오를 읽는 유일을 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누군가에게, 그것도 동료 배우에게 처음으로 한 부탁이었다. 한참 고민하다가 문자가 전송되어버렸는데, 그걸 보고 정말 곧바로 와줄 줄은 몰랐다.
바닥에 주저앉아 십여 분간 꼼꼼히 대본을 읽던 한유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작할까요?”
“···벌써요?”
유일이 입을 열었다.
“우선 처음이니까 가볍게 해볼까요? 저도 아예 대본을 처음 본다고 생각하고 해볼 테니까··· 선배님도 그냥 대사를 맞춰본다고 생각하고 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고개를 끄덕인 박영현은 목을 가다듬은 채 자리에 누웠다.
그는 등부터 손, 다리까지 바닥에 딱 붙인 채 꿈꾸는 듯 눈을 감았다.
“야. 왜 이렇게 쳐져있어?”
유일의 ‘가희’.
처음으로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영현은 조금 놀랐다.
‘···전혀 다르잖아.’
20년 전 의 가희와는 전혀 다르다. 한 마디만 들었음에도 말투부터 성격까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냥.”
주호가 힘없이 답하자, 가희는 주호의 곁에 털썩 앉는다.
“또 온 거야? 그 ‘블루 타임’이?”
주호는 실눈으로 가희를 슬쩍 보고는 다시 눈을 감는다.
그럼 그렇지.
가희는 작게 한숨을 쉰 뒤 주호의 팔을 건든다.
“나가자. 햇빛이라도 쐬면 훨씬 나을걸.”
영현은 어쩔 수 없이 원작의 가희와 유일의 가희를 비교할 수밖에 없었다.
원작의 가희는 훨씬 철없고 발랄했다. 그에 비하면 지금 유일이 연기하는 ‘가희’는···
‘지친 직장인 같아 .’
‘햇빛이라도 쐬자’며 주호를 설득하는 모습도 달랐다. 기존의 가희가 아이처럼 떼를 쓰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의 가희는 조언을 건네는 듯한 태도였다.
“가만히 있는 게 나아.”
“가만히 있어서 뭐해.”
“그냥 누워있는 거지. 물 위에 뜬 것처럼.”
“…계속?”
가희가 묻는다. 한쪽 눈썹을 올린 채.
“계속.”
이상했다.
영현은 대화가 계속될수록, 자신이 말도 안 되는 것을 우기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난 아닌데.”
언제부터였을까.
영현은 원작의 가희를 잊었다.
“움직이는 게 더 낫지 않아? 차라리 뛰고, 공 던지고··· 그런 거 하면 스트레스가 좀 풀리잖아.”
영현이 눈을 뜬다. 천천히.
그리고 가희를 바라본다.
배우를 꿈꾸는 가희. 그러면서도 아르바이트를 계속하는 가희. 기회가 될 때마다 오디션을 보러다니고 감독들이 출몰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는 가희···
주호는 문득 깨달았다. 가희는, 공상 속에서 사는 자신보다 훨씬 이성적이고 성숙한 ‘어른’ 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자신도 모르게 짜증이 몰려왔다.
“좋겠다.”
자신도 모르게 비꼬는 듯한 말이 흘러나온다.
“뭐가?”
“고민 없어보여서.”
곧바로 돌아오는 날선 반응에 주호는 아차 싶은 얼굴로 눈을 뜬다.
“내가 왜 고민이 없어?”
말을 꺼냈을 땐 이미 늦은 뒤였다. 주호는 구구절절 변명을 꺼내기 시작한다.
“아니, 나는 맨날 이것저것 고민하느라 시간만 보내고···”
가희는 주호를 내려다본다.
조명 탓일까? 평소에는 약간 밝은 빛의 눈동자라고 생각했는데. 점점 눈동자가 어둡게 변해간다.
“아니잖아. 그런 뜻. ···너, 나는 생각 같은 건 안 하는 골빈 애라고 생각하지?”
아니, 아니야.
주호는 마구 고개를 젓는다.
“한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
···없는 게 맞나?
주호의 표정을 본 가희의 얼굴이 점점 차갑게 굳어간다.
“너 일부러 그러냐? 여기까지 하면 어떻게 하는지 보자, 또 여기까지 하면 어떻게 하는지 보자··· 그러면서 얘가 터지나 안 터지나 확인하는 거지?”
“뭘 또 그렇게까지 말해.”
“···내 말이 틀려?”
주호는 가희의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다. 조곤조곤하게 말하는 가희가, 너무 맞는 말을 해서.
“그래. 네 말이 맞다.”
울컥.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감정이 올라왔다.
“네가 한심해. 너무 한심해서 할 말이 없다. 됐어?”
그건 분노였다. 그러나 가희를 향한 분노는 아니었다.
가희에게 던진 비수는 부메랑처럼 온전히 주호 자신에게 돌아온다.
주호는 가슴께가 욱신거리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선배님.”
본래 말투로 돌아온 유일이 영현을 불렀다. 이어서 들린 질문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몇 번 정도 더 해보면 좋을까요?”
“···!”
.
.
.
연습이 거듭될수록 둘의 캐릭터는 점차 또렷해졌다.
몇 번이나 대사를 주고받다 보니, 어느새 시간은 자정이 가까워졌다.
“···이제 감을 잡은 것 같습니다.”
– 꼬르륵.
몇 시간 동안 집중을 한 탓인지, 연습이 끝나자마자 어마어마한 허기가 몰려왔다.
둘은 서로의 트레이너에게 비밀로 하기로 합의한 뒤, 유명 브랜드에서 새로 나왔다는 콘치즈 치킨을 주문했다.
달콤짭짜름한 가루가 잔뜩 뿌려진 치킨을 뜯으면서도 박영현은 멍한 얼굴이었다.
주문한 닭을 깨끗하게 비운 뒤에야 그가 입을 열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처음 가희를 연기 했을 때, 무슨 생각으로 읽은 겁니까?”
“그냥··· 아까 말씀드렸던 것과 같아요. 촬영장에서 처음 받은 대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박영현은 가라앉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하는 것과 직접 하는 건 분명 다르다. 자신 역시 알고는 있었다. 잘 안 됐을 뿐이지.
그러나 이어진 말에 영현의 눈이 조금 커졌다.
“어떻게 연기할지, 그 연기가 어떻게 보일지는 고민하지 않고요.”
“···!”
유일이 대본을 처음 읽기 시작할 때, 브윈에게 들었던 조언이었다.
그때, 반투명한 창 위에 뜬 달성률 수치가 반짝였다.
【3단계 목표 달성률 : 28.1% 】
“오늘, 고마웠습니다.”
“아닙니다. 재밌었어요.”
조금 피곤하긴 했지만 재밌었고, 달성률도 올랐다.
이런 게 일석이조지.
“그리고 말 놓으셔도 되는데요, 선배님.”
“···저도 선배님이라고 안 부르셔도 됩니다. 말도 편하게 하셔도 되고요.”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유일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앞으로 형이라고 부를게.”
“좋습··· 좋아.”
···이상하네. 왜 더 어색한 것 같지.
천천히 연습실을 나서려던 유일의 등 뒤로,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뒤풀이 때 말하고 싶었는데.”
영현은 연습실 구석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같이 연기해서 좋았다.”
*
“아··· 시간 안 간다.”
이혜진은 침대에 늘어진 채 앓는 소리를 냈다.
나흘 뒤가 온라인 팬미팅이었다. 느낌 상으로는 한달은 지난 것 같았는데!
‘내 배우 샤스타나 볼까.’
한유일은 여전히 셀카를 잘 찍진 못했으나, 팬들과의 소통에는 열심이었다.
[@1_and_only(사진) (사진)
날씨가 춥네요.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여러분!]
‘온라인 팬미팅 다음 날 바로 출국이랬지.’
베를린 영화제라니. 레드카펫에서 빛날 한유일을 생각하니 심장이 두근거렸다.
흐뭇한 얼굴로 샤스타와 블루챗을 오고가던 이혜진의 손가락이 문득 멈췄다.
[@yuuuulwife 한유일죽도록사랑해] [@yuuuulwife ㅅㅂ진짜볼수록잘생겻네]여기까지는 평범한 한유일 덕질 계정이라고 생각했다.
자신도 매일 같이 하는 말이니까.
[@yuuuulwife 무슨향수쓸까율] [@yuuuulwife 보고싶어보고싶어보고싶어] [@yuuuulwife 차기작언제찍을까.. 차기작뒤풀이는꼭가야지ㅠ] [@yuuuulwife 율집 XX동이라는데맞아?].
.
.
[@yuuuulwife 찾았다]이혜진은 싸한 기운에 손에 힘을 꼭 쥐었다.
‘뭐야, 이 새X는.’
팔로우 0의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계정이라, 굳이 신경쓸 필요도 없긴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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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땜 (1) [여기까지 무료입니다]
유일은 진하영과 중국집에 있었다.
촬영이 끝나자마자 베를린 영화제에 팬미팅 준비까지. 연초부터 정신 없이 바쁜 탓에 집에 붙어 있는 시간이 거의 없던 유일이었다. ‘조카 얼굴 까먹겠다’는 진하영의 애정 어린 투정에, 유일은 스케줄이 빈 틈을 타 그녀의 직장 근처에서 밥을 먹기로 했다.
“···유일아, 너 또 살 빠졌니?”
짜장면을 한가득 입에 넣던 유일은 당황한 채 고개를 들었다. 어젯밤에도 영현과 치킨 야식을 즐겼던 그였다.
“아니에요. 요즘 진짜 잘 먹고 다니는데, 저.”
···정말인데. 살도 1kg나 쪘고.
그러나 진하영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바빠서 그래. 너 그렇게 하다가 몸 다 상해. 내가 그런 사람들 한 둘 보니? 과로사가 괜히 있는 게 아니야. 전에 내가 맡은 환자는···”
또 시작되었다.
이모의 잔소리를 듣던 유일은 더 열심히 짜장면을 밀어넣기 시작했다.
그래도 듣기 싫지 않았다. 그는 진하영의 마음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유일아, 밥 먹고 어디로 간다고 했지?”
“회사요. 원래는 더 늦게 들어가도 되는데, 급하게 미팅이 새로 생겨서요.”
워낙 갑작스레 잡힌 미팅이라 유일도 전날에 들었다.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유지혁 피디.
유지혁은 10년 전, 힐링 예능계의 샛별이라 불리며 등장해 등의 시즌제 예능을 연달아 히트시킨 인물이었다.
최근엔 NBS를 퇴사하고 YTBC로 이적하며 새로운 시도를 계속하고 있는, 예능계에선 보증수표나 다름없는 인물이었다.
“허업, 유지···?!”
“이모.”
유일이 입가에 손을 가져다대자, 그제야 진하영도 목소리를 낮췄다.
“그 사람, 유명한 피디 맞지? 무슨 촬영이야? 혹시 유일이 너, ‘마당식당’ 같은 거 나가는 거야?”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여행 예능의 카메오 정도일 거예요.”
진하영은 연신 신기하다며 중얼거렸다.
“드라마 나오는 것보다 더 신기하다, 유일아.”
“···하하.”
짬뽕에 가득 올려진 통통한 새우를 열심히 먹던 그녀는 문득 생각났다며 입을 열었다.
“맞다, 저번에 어떤 이웃을 마주쳤어. 네 팬이라 하던데?”
“이웃이요?”
“응. 처음 보는 얼굴이었는데~ 얘기 들어보니까 타지에서 학교 다니는 학생이라 집에 자주 못온다고 하더라구.”
‘···잠깐.’
“그 사람이··· 이모를 한번에 알아 봤어요?”
“너랑 내가 좀 닮았니?”
장난스럽게 웃는 이모를 보자 심각한 유일 역시 얼굴이 풀어졌다.
“다 먹었으면 일어날까? 그리구 정말 안 데려다 줘도 돼~?”
“매니저 형이랑 근처에서 보기로 했어요.”
그렇게 배부른 저녁식사를 끝낸 유일은 진하영이 차에 타는 모습까지 지켜봤다. 혼자 들어가는 이모를 보니 신경이 쓰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 저번에 어떤 이웃을 마주쳤어. 네 팬이라 하더라?
‘···.’
그는 얼굴이 알려진 배우라 그렇다치지만, 진하영은 일반인이었다. 그것도 아주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는.
유일의 걱정이 계속되자, 브윈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현재는 내부에 외부인이 침입했을 경우에만 알 수 있습니다. 보안을 위해 추가적인 경보시스템을 다는 방법이 있습니다.】
경보시스템이라.
‘···생각해봐야겠네.’
꽤 괜찮은 생각 같았다.
*
진하영을 보낸 뒤 우진과 만나 회사로 들어온 유일은, 곧바로 유지혁 피디가 기다리고 있다는 미팅룸으로 향했다.
미팅룸에는 장재이 실장이 먼저 앉아있었다. 그리고 유지혁 피디와 제2조연출, 그리고 작가 한 명이 장재이의 건너편에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유지혁 피디는 동글동글한 얼굴과 소년같은 표정 탓인지, 50대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동안이었다.
“아~ 감사합니다. 정말로. 급하게 만나뵙자고 하셔서 놀라셨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