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cting genius began RAW novel - chapter 59
베를린, 그리고 (1)
직항이 없는 베를린 특성상, 일행은 프랑크프루트에서 내려 기차를 타고 호텔에 도착했다. 체크인을 완료했을 땐 이미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대였다.
“13시간 뒤면 상영회니까, 푹 쉬세요!”
한유일은 제작사 직원의 조언에 충실히 따랐다. 침대에 눕자마자 빨려 들어가듯이 잠든 것이다.
해가 뜨자마자 유일은 메이크업을 받고 옷을 갈아입었다. 유일의 전담 스타일리스트가 된 해연은 역작을 탄생시킨 조각가처럼 그를 가운데 둔 채 빙글빙글 돌며 살폈다. 이마를 가린 머리카락 한올까지 꼼꼼하게 살핀 그녀는 확인 도장을 찍듯 뿌듯하게 외쳤다.
“완벽! 해요!”
간단한 식사를 마친 뒤, 유일은 턱시도를 입은 구찬익, 황이원과 함께 영화제 지원 차량을 탄 채 이동했다. 도시 이곳저곳에는 일어선 곰이 그려진 붉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Internationale Filmfestspiele Berlin]“곧 내릴 겁니다.”
한유일은 황이원과 시선을 교환한 뒤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차 문이 열리고, 살짝 넘겨 이마를 반쯤 드러낸 머리에 코발트블루 정장을 입은 한유일이 차에서 내렸다.
그들이 내리자마자 사방에서 플래시가 터지기 시작했다. 옅은 미소를 지은 채 손을 흔들고 서 있던 그때, 유일의 귀에 익숙한 언어가 들렸다.
“혀어어어어어엉!”
한유일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펜스 너머로 손을 뻗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유일아!”
“황이원이다!”
“끼아악! 너무 잘생겼어요!”
나이대도, 성별도 다른 이들이 한데 모여 손을 흔들고 있었다.
“···!”
유일은 자신도 모르게 그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떻게 오셨어요?”
그의 질문에 사람들은 열을 올리며 외쳤다.
“유학생이에요!”
“전 여행 왔어요!”
“저희 몇 시간 전부터 기다렸어요~!”
“···!”
유일은 사람들이 내미는 수첩과 엽서를 차례로 받아가며 얼마 전 겨우 익숙해진 사인을 했다.
“···기다리느라 힘드셨겠어요.”
“아악! 하나도 안 힘들어요!”
물론 유일은 그들이 오로지 자신 때문에 여기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무려 구찬익 감독의 작품, 그것도 황이원이 출연한 영화가 아닌가.
그와는 별개로 쌀쌀한 날씨에 오랫동안 서 있었을 이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시간이 충분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는 미처 사인을 하지 못한 이들에겐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빠르게 구찬익 감독의 뒤를 쫓아갔다.
“죄송합니다.”
구찬익은 쯧, 하는 소리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정작 기분은 그리 나쁘지 않아 보이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스타가 다 됐구만.”
구 감독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황이원만 작게 웃을 뿐이었다.
*
자리를 옮기거나 뒤늦게 들어오는 사람들로 소란스러운 영화관 내부.
그 사이를 한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파리에서 태어나 라 페미스(La Fémis) 를 졸업한 이후, 계속해서 유럽 전역을 떠돌며 영화를 찍고 있는 젊은 감독, 필립 시아마는 헝클어진 곱슬머리를 쓸어넘긴 뒤 의자에 앉았다.
필립은 지금 매우 들떠 있었다. 그의 심장을 뛰게 한 것은 바로 오랜만에 신작을 들고 나타난 ‘디렉터 구’였다.
‘···정말 궁금했는데 말야.’
자막으로 뜬 영화의 제목을 바라보던 그는 이내 영화에 집중했다.
아무리 바빠도 하루 한 편 이상의 영화를 보는 필립은, 첫 시퀀스에 등장한 황이원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이원은 그간 봐왔던 한국 영화에서 몇 번 주연으로 등장한 적 있었다.
‘저 배우는 제법 얼굴이 익숙한걸.’
정장을 입은 채 지친 얼굴로 비를 맞고 들어온 혁진(황이원)은 어느 작은 가게 앞에 멈춘다.
이미 망해버린 꽃집.
그럴듯한 간판도, 멋진 인테리어도 없는 꽃집이다. 그러나 이상하게 혁진은 눈을 뗄 수 없다.
유리문 너머 보이는, 바닥에 떨어진 뭉개진 안개꽃을 바라보던 그는 서서히 시선을 돌린다.
[임대 구함 : 010-XXXX-XXXX]문에 붙여진 종이를 빤히 보던 그의 모습을 끝으로, 첫 씬이 끝난다.
이후 시간의 경과를 보여주는 씬이 지나가고.
꽃집을 여는 혁진의 모습이 보인다. 익숙한 듯 꽃 시장에서 꽃을 한가득 떼어와 다듬는 그의 모습이 몽타주로 지나간다.
혁진이 붉은색 아네모네를 살펴보고 있을 때, 맑은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 여기 알바 구한다면서요?
어딘가 모르게 어설프면서도 당당한 태도를 한 앳된 청년이 등장한다.
.
.
.
필립은 약간 김이 빠진 얼굴로 영화를 관람하고 있었다.
그가 기대했던 디렉터 구의 컬러가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불만과는 별개로 흡입력은 꽤 좋은 작품이었다. 이야기는 아주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흐름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다 영화는 자신을 찾아온 친구에게 화를 내는 수일의 장면에 다다랐다.
그때였다.
생각보다 평이한 스토리에 심드렁하게 앉아있던 필립의 표정이 조금씩 달라진 것은.
친구와 마주 보고 대화하는 청년, 수일의 표정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는 꽃집에서 일할 때의 헐렁하고 만만한 모습이 아니었다.
– 가라.
그는··· 마치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은 아이 같았다.
그 이후로 필립의 시선은 계속해서 수일의 표정을 따라다녔다.
수일 역을 맡은 배우는 연기를 보는 재미가 있는 배우였다.
같은 컷임에도 매 순간 미묘하게 달라지는 톤과 눈빛, 그리고 얼굴 근육. 그 모든 것들이 정교한 톱니바퀴처럼 맞아 돌아갔다.
‘저 배우, 분명 초 단위로 계산하면서 연기했을 거야.’
그게 아니라면 나올 수 없는 연기다.
그러나 특이한 것은, 그 계산이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모든 디테일한 요소들이 숨을 쉬고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웠다.
필립은 의자에 몸을 딱 붙인 채, 점차 영화에 빠져 들어갔다.
어느새 영화의 마지막이 다가왔다.
– 만나서··· 물어보고, 싶었거든요.
– 말하지 마라.
– 근데··· 이제 괜찮아요.
입에서도 피를 흘리며 기어코 미소를 지어 보이는 수일.
너무 많은 것을 알았다는 이유만으로 고통 받았던 청년이, 죽어간다.
시들어가는 수많은 색색의 꽃들 사이에서 죽어가는 수일의 모습을 본 필립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끔찍하게도 아름다운 씨퀀스다.
그 아름다움이 역설적으로 청년의 죽음을 필연적이고도 운명적으로 만들고 있었다. 햄릿 속 오필리아의 죽음처럼.
– ···춥다.
그런데 그때, 꽃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곧 영화가 끝날 거라 생각했던 필립은 눈을 크게 떴다.
그저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누군가 되감기 버튼을 돌리기라도 한 것처럼 깨진 병 사이사이에 시들었던 꽃들이 거짓말처럼 다시 생기를 되찾는다.
이건 수일의 환상일까, 아니면 혁진의 환상일까.
혹은 그들을 품었던 꽃집의 환상일까.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예상치 못했기에 더욱 인상적인 광경이었다.
그 직후, 클로즈업된 수일의 눈이 거대한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수일의 눈동자에 꽃들이 한가득 비치는 모습과 함께, 그의 지친 목소리가 들린다.
– 저거··· 내 눈에만 보이는 거 아니죠···.
혁진은 대답 대신 눈앞에 새롭게 피어나는 꽃에 손을 가져다 댄다.
‘그래서 그 컷들을 넣었던 거군.’
필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왜 중간마다 바람도 없는 실내에서 흔들리는 꽃들의 인서트가 필요했는지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 수일의 목소리가 울린다.
그가 꽃들을 살피며 아무도 몰래 속삭이던 말.
– ···싶어.
혁진도, 심지어 관객들도 듣지 못했던 말이다.
– 아무것도 몰랐던 때로, 돌아가고 싶어.
그 소원의 유일한 청자였던 꽃들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페이드 아웃.
모든 관객들이 숨을 죽이고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을 때, 혁진이 눈을 뜬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장례식장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갓 중학생이 된 듯, 앳된 얼굴의 수일이 거기 있다.
혁진은 홀린 듯 그에게 다가간다.
– 아빠 친구예요?
수일의 순수한 질문에 혁진은 고개를 젓는다.
– 널 보러 왔어.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그는 천천히 수일의 머리에 손을 올린다.
그리고 말한다.
주문을 외듯.
– 앞으로는··· 모든 문제에서 답을 찾지 않아도 돼.
– ···답이 있는 문제여도요?
– 모든 답이 널 행복하게 해주진 않아.
그러자 소년은 쉽게 답하지 않는다.
혁진은 안다. 이 소년이 얼마나 똑똑하고 당돌한지.
그렇기에 가만히 기다리기로 한다. 그가 어떤 답을 하든 놀라지 않을 자신을 하며.
– 하지만··· 언제나 행복할 순 없는 거잖아요.
소년의 답을 들은 혁진은 헛웃음을 터뜨린다.
이제야 혁진은 깨닫는다.
그는 몇 번이고, 아니 몇 십 번이고 이런 답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는 입을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