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cting genius began RAW novel - chapter 63
세컨드 피디는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이며 우진을 배웅했다.
“···안 되면 어떡하죠, 피디님?”
“걱정 말고, 애들한테 트레일러 잘 뽑을 생각이나 하라 해.”
몇 년 간의 감이 그녀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이건··· 된다.’
세컨드 피디는 환한 얼굴로 핸드폰을 들었다.
*
“···컷!”
감독의 외침에 유일은 천천히 눈을 떴다.
코앞에서 카메라를 들이밀고 있던 에이미 바움벡의 까만 눈동자가 유일을 빤히 바라보았다.
“···.”
그녀는 한동안 말없이 유일을 바라보았다.
한유일은 오랜만에 상쾌한 기분이었다.
시나리오가 길을 만들면, 그 길을 잘 닦고 끌어가는 게 연출이었으며, 배우는 그 길을 최대한 정확하게, ‘길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걸어야 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그의 발이 닿는 곳이 모두 길이었다. 그 위를 뛰고 구르고 넘어지는 모든 순간을 카메라가 담았다.
장구 없이 운동장을 달리는 경주말이 된 기분이었다.
【3단계 목표 달성률 : 30% 】
어느 순간 늘어난 달성률에 시선을 두자마자, 우진이 그를 불렀다.
“유일아.”
“네?”
민우진의 말을 들은 유일은 먼저 자신과 함께 영화를 찍은 셋에게 물었다.
“상관 없어요. 어차피 이 영상, 완성되면 오튜브에 올릴 거였거든요.”
쿨한 답과 함께 다정한 감사가 돌아왔다.
“율, 함께해줘서 고마워요. 진심이에요.”
“저야말로 감사하죠.”
촬영이 끝난 뒤부터 가만히 앉아있던 데이비드는 천천히 일어섰다. 그는 어쩐지 넋이 나간 듯한 얼굴이었다.
“어떤 캐릭터를 생각하고 연기한 겁니까, 그거?”
유일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답을 들은 데이비드의 눈썹이 올라갔다.
“···그랬군요.”
그는 복잡한 문제를 푼 듯 후련한 얼굴이었다.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군요.”
유일의 말을 들은 데이비드는 쓸쓸하면서도 다정한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베를린을 닮은 미소였다.
*
같은 시각.
이혜진은 솟아오르는 광대를 주체하지 못한 채 핸드폰을 쥐고 있었다.
핸드폰 안에는 당연하게도 한유일이 있었다. 그녀는 벌써 몇 번째 봤는지도 모르는 온라인 팬미팅 영상을 풀버전으로 보고 있었다.
‘···봐도 봐도 질리지가 않네.’
어제는 한유일의 샤스타에 새로운 게시글이 올라왔다.
[@1_and_only(사진) (사진) (사진) 무이 님들, 감기 조심하시고 건강하세요!]
무이 님이라니.
무이 ‘님’이라니!
이혜진은 앓는 소리를 내며 이불을 거칠게 때렸다.
유일이 함께 올린 사진들 역시 매우 ‘한유일’스러웠다. 베를린 돔과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노천 카페 테라스, 그리고 호텔에서 찍은 것으로 보이는 거울 셀카도 한 장 있었다. ···다행히 그냥 셀카보단 나았다.
한참 사진을 바라보다 팬카페를 둘러보던 이혜진은 뒤늦게 블루챗으로 넘어갔다.
‘…?!’
블루챗 피드를 넘기던 손가락이 어느 순간 멈췄다.
“@$#%%@#”
이혜진은 비명과 함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거··· 실화야?’
유랑극단은 처음이지? (1)
이혜진은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 화면을 눌렀다.
[@dwfgwWs ㅁㅊ유랑극단 팀이랑 율이랑 만났다는데? (게시글 캡처 사진)]캡처된 게시글은 커뮤니티에 올라온 목격담이었다.
‘···헙!’
게시글 속 흔들린 사진을 확대한 이혜진은 숨을 들이켰다.
멀리서 찍은 사진이라 흐릿했으나, 옆모습을 보니 분명 한유일이었다.
[@yuulll_33 한유일 유랑극단 나온다는 거 ㄹㅇ임???] [@asdfew 헐 이번에 엄지영 문유화 윤슬아 나온다는디]┗ [@dbdlf_fgdsecd 생각도 못한 조합 ㄴㅇㄱ]
┗ [@jfdrr 유랑극단+엄문윤 조합에 유일이요…?ㅁㅊ]
┗ [@yuulll_33 개같이 기대,,]
이혜진은 상기된 얼굴로 핸드폰을 쥐었다. 망해버린 수강 신청도 더는 생각나지 않았다.
촬영은 이제 시작되었을 테니 방영까지는 한참 기다려야겠지만···
‘얼른 보고 싶다.’
요즘 이혜진은 기다림조차 삶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배우고 있었다.
무이로서 얻게 된 첫 깨달음이었다.
*
“고생하셨어요, 배우님!”
한유일은 덩달아 고개를 푹 숙였다.
첫 상영회 때와 마찬가지로, 폐막식 역시 정신 없이 지나갔다.
몇 시간 씩 진행되는 메이크업과 몇 번의 인터뷰, 그리고 터지는 플래시와 함께 순식간에 지나간 영화제였다.
유일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구찬익과 황이원을 배웅했다.
– 잘 찍고 오십쇼, 유일 씨. 다음에 시간 맞으면 같이 낚시도 하고요.
– 그럼 한국에서 보자고.
그리고 지금, 유일은 팀이 잡아 둔 숙소에 있었다.
– 편하게 오셔요, 편하게!
그 말을 듣고 안심했던 유일은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조금 당황했다.
“어머~ 유 피디, 우리한테 이런 친구를 붙여준 거야?”
“혹시 몇 살이에요? 아니, 피부 봐. 너무 뽀얗다~”
“우리 딸이 요즘 그렇게 좋아하는데~ 너무 반가워요~”
···한유일은 세 명의 배우들에게 둘러싸인 채 소파에 앉아있었다.
유일이 준비한 꽃다발과 케이크는 제작진이 준비한 화려한 음식들 사이에 묻혀 보이지도 않았다.
‘···스크린 너머로 보였을 땐 카리스마 넘치는 분들이셨는데.’
칼단발에 날카로운 눈매, 지적인 이미지로 똑부러지는 배역을 주로 맡아 온 엄지영. 자연곱슬에 커다란 눈, 그리고 살짝 각진 턱에 개성있는 배역들로 유명한 문유화. 미스코리아 출신으로 데뷔했으나 첫 작품 이후 곧바로 연기파 배우 타이틀을 얻었던 윤슬아.
같이 작품을 하지 않는다면 쉽게 만날 수도 없는 배우들이었다.
심지어 처음 그들의 이름을 들은 브윈은 이렇게 말했었다.
【엄지영 배우와 문유화 배우, 윤슬아 배우는 모두 한국예대 연극학과 선후배 사이인 배우입니다. 촬영장에서 가장 진지하면서도 무서운 배우로 후배들에게 유명하다고 합니다.】
···분명 그랬는데.
“와, 너~무 시끄러워요! 여러분! 오프닝 찍어야 하니까 한유일 씨 목소리 들어가게 좀 조용히 해주세요, 네?”
애걸하다시피 말하는 유지혁 피디를 향해 세 명의 배우들은 입을 닫는 대신 한 마디씩 던졌다.
“아니이~ 우리가 무슨 애에요? 지혁 씨, 반가워서 그러는 거잖아! 반가워서!”
“그러니까, 얼마나 고마워요. 젊은 친구가 우리 만난다고 케이크랑 꽃다발 사온 게~”
“기특해, 기특해!”
유일은 고막을 두드리는 발성 좋은 목소리들을 들으며, 그저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작은 소란 속에서 인사가 끝나고, 드디어 본격적인 오프닝이 시작되었다.
“우리가 이번에 무슨 극 올릴 지는 알아요?”
유지혁 피디의 말에 유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랑극단 측에서 미리 보내준 대본 덕에 알고 있었다.
“이라고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유지혁 피디가 밝은 톤으로 답했다.
오스카 와일드가 쓴 은 1890년도에 출판 된 고딕소설로, 유미주의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유 피디가 테이블 위에 올려진 대본을 가리키며 발랄하게 외쳤다.
“이건 구유리 극작가가 여러분들을 위해 을 새롭게 각색한 극입니다. 이미 세 분은 읽어보셨죠?”
“우린 다 외웠지.”
“벌써요~?!”
과장되게 외치는 유지혁 피디. 엄지영과 문유화는 장난스레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나 피디! 우리 배우야, 배우.”
“한달 전에 받았잖아. 당연히 다 외웠지~”
“맞아. 나 궁금했는데, 유일 씨는 대본 어땠어요?”
윤슬아의 다정한 질문에 유일은 웃으며 답했다.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매니저한테 들었는데, 유일 씨가 대본을 읽느라 밤을 새웠다고 하던데요!”
유지혁 피디의 말에 유일은 어색하게 웃었다.
정확히는 브윈과 다양한 방식으로 연기를 해보느라 그랬다.
에 아름다운 외면과 점점 추악해져가는 내면을 지니게 된 도리언 그레이, 그리고 그를 쾌락적인 삶으로 끌고가는 헨리 경,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그린 화가 배질이 등장한다.
영원한 젊음을 위해 영혼까지 바칠 수 있다고 했던 도리언 그레이가 결국 타락해버린 자신의 끔찍한 영혼-자신의 초상을 마주하게 되고, 자신의 초상에 칼을 꽂아 결국 스스로 죽음에 이르게 되는 이야기였다.
각색된 극은 원작과 분위기와 전체적인 틀은 같았다.
표면적으로는 주연 배우들이 모두 여성이라는 점이 달랐으나, 가장 큰 차이점은 따로 있었다.
바로 무대 가운데에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두었다는 점이었다.
인물들은 모두 무대 뒤를 향해 뒤집어진 캔버스를 보며 이야기를 한다.
인물의 이름과 기본적인 스토리라인은 비슷했으나, 각색을 거치며 캐릭터들의 크고 작은 설정들이 바뀌었다. 물론 처음부터 연극을 본다면 어려움 없이 이해될 수준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 유일 씨는 뭐해요?”
“···응? 유일 씨도 연극해요?”
“아니, 언니. 여기까지 왔는데 같이 무대는 서야지.”
처음 미팅을 했을 때부터 받았던 질문이었다.
그리고 한유일은, 연극 대본을 받자마자 하고 싶은 역할이 있었다.
“전···”
유일이 입을 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