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cting genius began RAW novel - chapter 69
‘벌써 끝이라고···?’
믿을 수 없는 얼굴로 시계를 본 이혜진은 벌써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사실 는 배우들이 부담스러워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무대 위에서 제대로 연기를 해야했기 때문에 마음 놓고 편하게 할 수 있는 예능과는 거리가 멀었다. 연기 경력이 오래된 배우들이 주로 섭외가 되는 것 역시 그런 이유였고.
‘미쳤어···’
이혜진은 가시지 않은 여운을 달래며 핸드폰을 들었다.
저번 주까지만 해도 ‘그래서 한유일은 저기 왜 끼는데?’ 하는 반응을 종종 보곤 했던 이혜진은 걱정과 설렘이 섞인 마음으로 서치를 시작했다.
– 유랑극단 재밌다
[유지혁은 유지혁이다.. 각자 연습할 때는 잘 모르겠다 어렵겠다 그러다가 리허설 시작하자마자 찰떡같이 호흡 맞는 거 너무 멋짐..]┗ ㅇㅈ.. 물론 연출도 어느정도 있긴 하겠지만 리허설 ㄹㅇ 쾌감 오져ㅠㅠ
┗ 22 스포츠물 보는 것 같았음
┗┗ 짜릿하다!
– 유랑극단 보는 사람?? 질문 좀 받아줘
[아직 1화 클립으로만 봐서 잘 모르는데 예고편에서 한유일 테라스에서 뭐 찍고 있는 거 있었잖아.. 그거 뭐 찍는 거야? 한유일 영화제 때문에 간 거 아니었어?]┗ ㅇㅇ영화제 때문에 간 거 맞아
┗┗ 근데 왜 촬영을 해..?
┗┗ 그거 공식 스케줄은 아니고 그냥 개인적으로 찍은 단편이래!
┗┗ ㅇㅇ 감독 두 명이랑 배우 한 명이랑 찍은 거래 애프터 파티에서 친해져서 찍었다고 나옴
┗ 풀영상 여기서 볼 수 있음 (링크)
┗┗ 헐 ㄱㅅㄱㅅ
┗ 난 에이미 바움벡 이름 듣자마자 놀랐음..
┗┗ 한국에서는 잘 모르는데 에이미 바움벡도 그렇고 필립 시아마도 최근 핫한 감독들임
– 근데 유랑극단 보면서 느끼는 건데
[(유랑극단 캡처 이미지)혹시 엄지영이랑 문유화가 한유일 낳은 거 아니지?]
이혜진은 게시글에 첨부된 캡처 이미지를 보고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사진 속 한유일은 가운데 앉아서 열심히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고, 양 옆에 앉아있는 엄지영과 문유화가 그를 다정하고 깊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리허설 직전, 2화 중반 쯤 나온 장면이었다.
┗ㅋㅋㅋㅋㅋㅋ꿀떨어지는 거봐
┗ 아ㅋㅋㅋㅋㅋㅋ
┗ 근데 다들 한유일 예뻐하는 게 눈에 보였음
┗┗ 한유일 생각보다 넉살 좋아보여
┗┗ ㅇㅇ쉬는시간에도 세심하게 챙겨주고 그러던데 나같아도 예뻐할 듯ㅋㅋ
그 이후로도 ‘유랑극단’은 다양한 커뮤니티에서 회자되기 시작했다.
– (잡담) 혹시 유랑극단 보시는 분 있나요?
[늦게 저녁 먹으면서 보게 되었는데 너무 재미있더라구요~ 다들 연기를 너~~~~무 잘해요..^^]┗ 저요! 오늘자 방영분 진짜 멋있었어요ㅠㅠㅠ
┗ 한유일? 그 친구 연기 정말 잘하더라구요.ㅎㅎ 어른들한테도 잘하고~
┗┗ 아 그 젊은 친구 이름이 한유일인가요? 어디서 나온 배우인가 했네요~^^.
┗ 저도 봤어요~~ 연극 보고 싶은데 한국에서는 못 보는 거겠죠~?
– 유랑극단 재밌네요
┗ 동감입니다. 보면서 엄지영 문유화 윤슬아 이 셋이서 영화 하나 찍어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 기대 없이 봤는데 재밌습니다. 젊은 남자 배우도 연기 잘하던데요
┗┗ 얼굴마담인 줄 알았는데 연기 잘해서 놀랐습니다.ㅋ
*
SNS에서 를 본 이들의 다양한 반응이 올라오는 동안, 한유일은 연습실에 있었다. 그간 유일은 5번의 촬영을 위해 세트장으로 출근을 했으며, 촬영이 없는 날에는 대부분 연습실에서 연습을 했다. 회사에서 구해준 오피스텔이 회사와 가까워진 덕에 연습실까지 부담 없이 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였다.
유일의 상태와는 별개로, 촬영 자체는 순조롭게 흘러갔다. 원희수 감독은 매 촬영마다 만족스러워했으나, 정작 서현주에게 그 말을 들은 이후로 유일은 촬영장에서 완벽히 몰입하기가 어려웠다.
아직까지는 ‘기원’이 진희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시점을 촬영 중인 터라, 오히려 유일이 느끼는 이질감과 어색함이 극과 잘 어울린다는 게 다행인 점이었다.
‘···문제는 이후인데.’
유일이 미간을 찌푸린 채 고민하자, 브윈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실, 유일 님의 목표가 현재 연기하는데 있어서 크게 문제되는 상황은 아닙니다.】
브윈은 빠르게 이어 말했다.
【일례로, 마이즈너의 경우 배우의 무의식적인 야망 권력욕이 전체적인 극 흐름 속에서 독특한 역할 해석의 기반이 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절박한 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유일이 떨떠름한 얼굴로 생각하자, 곧 브윈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확히는, 유일 님의 ‘생존욕’ 또한 배우로서의 성취에 충분히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유일의 입에서 바람 빠진 웃음이 흘렀다.
다시 말하면, 이는 지금의 유일이 그러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다른 게 필요했다.
지금 그가 하는 연습들과도 다른 무언가가.
【···유일 님께서 원하신다면, 시나리오의 배경을 미리 경험해볼 수 있는 ‘배경화’ 훈련을 시도해볼 수 있습니다.】
뜻밖의 말에 한유일은 눈을 크게 떴다.
‘배경화라고?’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만들어 낸 시각, 청각, 촉각적 환영인 ‘배경’에서 배역을 연기하는 겁니다.】
일종의 가상체험 같은 건가.
“해볼게.”
고개를 끄덕인 유일은 문득 든 생각에 눈썹을 찡그렸다.
···왜 이걸 지금까지 알려주지 않은 거지?
【21씬의 ‘배경화’를 시작하겠습니다.】
그 순간, 유일의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
.
.
한유일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서서히 시야가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여긴···’
다방이다.
그것도, 그가 바로 어제까지 촬영을 했던 세트장과 똑닮아있는 다방.
세트장 주위를 가득 채우고 있는 촬영장비와 매순간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스태프들도 없는, 기원과 진희가 만나 대화를 하는 1980년대의 다방이었다.
유일은 체크무늬 식탁보와 붉은 두꺼운 의자가 늘어서 있는 내부를 둘러보았다. 다방의 가운데에선 통기타를 든 채 포크송을 부르는 이름 모를 가수가 있었다.
유일은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평소 의자에 앉는 것과 똑같은 감각이었다. 그는 손을 들어 천천히 식탁보를 쓸었다.
‘···이게 다 환영이라고?’
단순히 배경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정말 그 배경 속에 들어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유일이 놀라고 있을 무렵, 유일의 앞에 누군가 걸어왔다.
그 얼굴을 본 유일은 숨을 들이켰다.
‘···!’
한 여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단발에 우아한 연보라색 원피스를 입고 천천히 카페로 들어오는 여자.
여자는 빠르고 당당한 걸음과 달리 불안한 표정이었다.
【유일 님이 시나리오를 읽으며 상상했던 ‘진희’입니다.】
진희는··· 젊은 하선옥의 얼굴이었다.
유일이 몇 번이고 보면서 감탄했던 ‘진희’가, 바로 그의 앞에 있었다.
“···여기서, 다시 뵙네요.”
진희가 입을 열자, 유일은 자신도 모르게 답했다.
몇 번이고 읊었던 ‘기원’의 대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제가··· 기다렸으니까요.”
“저를 기다렸다고요?”
“···진희 씨.”
“더는 말하지 마세요.”
매정하게 답한 진희는 창문으로 시선을 던졌다. 유일도 그녀를 따라 창밖을 바라보았다.
세트장에서는 크로마키천으로 덮여 있던 부분이었으나, 지금은 온전히 창 너머의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펌을 하고 넓은 바지를 입은 여자와 동그랗고 커다란 안경을 쓴 남자가 지나갔다. 좁은 차도에서는 노란 개인 택시가 지나갔다. 지나가던 사람들을 바라보던 유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행 가본 적 있어요?”
유일의 질문에 진희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어릴 때 가족들이랑.”
“저랑도 가요.”
“그게 대체 무슨 소리···”
진희가 기겁하며 주변을 둘러보지만, 아무도 그들을 보고 있지 않았다. 유일은 이어서 대사를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 순간, 갑작스럽게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
유일은 어지럼증을 느끼며 테이블에 몸을 기댔다.
【심박수 19bpm 하락. 체온 1.5°C 하락. 산소포화도 93.8%. 저산소증 주의 상태입니다. 씬 21의 ‘배경화’를 중단합니다.】
브윈의 목소리와 함께, 눈앞이 까맣게 물들었다.
한유일은 천천히 눈을 떴다. 조금 전까지 보이던 80년대의 풍경은 사라지고, 거울로 덮인 연습실이 보였다.
“···하.”
한유일의 입에서 막혀있던 숨이 터져 나왔다.
긴 꿈을 꾸고 난 듯한 기분이었다.
유일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발을 딛자마자 두 다리에 힘이 풀렸다.
【‘배경화’의 과도한 사용은 피로감과 저산소증, 두통과 가슴 통증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말을 안 했던 거군.
유일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빈말로도 그리 좋다고 할 수 없는 안색이었다.
‘하지만···’
지금껏 연기하며 이렇게까지 모든 감각이 열린 채 연기를 했던 적은 없었다.
이걸 통해서라면··· 온전히 연기에 몰입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주는 못하겠네.’
유일은 일어서는 것을 포기하고 바닥에 누었다.
‘좀 쉬면 나아지겠지.’
그런데 그때,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들렸다.
“···유일 씨?”
연습실 입구에 김선아가 서 있었다.
하얗게 질린 채로.
될지도 모르겠는데?
“···.”
유일은 바닥에 누운 채 김선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안 그래도 밝은 편인 김선아의 피부가 점차 백지장처럼 변해가고 있었으니.
‘곤란한데.’
유일은 최대한 평온한 얼굴로 김선아를 바라보았다. 김선아는 여전히 창백한 얼굴이었으나, 곧 침착하게 표정을 갈무리했다.
한유일은 괜찮냐는 질문을 받기 전에 미리 선수를 치기로 했다.
“그냥 쉬고 있었습니다, 선배님.”
“···넘어지는 걸 봤어요.”
유일은 표정 변화 없이 답했다.
“다리에 쥐가 났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