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cting genius began RAW novel - chapter 89
그 또래의 아이돌이나 배우들은 보통 빠르게 적응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오히려 빈틈 없기로 유명한 이들도 허둥대거나 실수를 한번쯤은 하는 곳이기도 했다.
이강훈이 타이밍 좋게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야~ 유일 씨 쥑이네~! 뭐 어디 식당에서 일한 적 있나?”
“음, 길게는 아니고··· 잠깐 일해본 적 있습니다.”
“어어? 진짜?”
의외의 답을 들은 이강훈의 푸근한 얼굴에 놀라움이 번져갔다.
“예전에 친구가 하던 음식점 아르바이트 대타를 몇 번 뛴 적이 있거든요.”
“이야··· 얼굴은 그냥 도련님인데.”
“반전매력이네, 반전매력!”
각각 칼질을 하고 소스를 볶던 이강훈과 정주하는 서로의 눈도 보지 않은 채 멘트를 쳤다. 얼굴 마주볼 시간도 부족한 ‘오식탁’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자, 10분 남았네요! 일어나주시죠.”
박희진의 목소리가 들리고, 사연자가 천천히 일어섰다.
‘오식탁’에서는 마감 10분 전, 일반인 출연자가 직접 맛을 보고 중간 평가를 내리는 코너가 있었다.
출연자는 먼저 한유일 팀에게 다가와 작은 그릇에 소스를 한 숟가락 덜어 마셨다.
정주하와 이강훈은 떨리는 얼굴로 사연자의 입만 쳐다보았다.
“그때의 맛이랑 같아요, 달라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민하던 사연자가 입을 열었다.
“어··· 달라요.”
그 말에 열심히 소스를 만들고 있던 정주하와 이강훈이 좌절했다.
“약간··· 더 부드러웠던 것 같은데.”
“···.”
그때였다. 한유일이 움직인 것은.
혼자서 잠시 생각하던 그는 이강훈과 정주하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 귓속말을 들은 둘은 가늘게 눈을 뜬 채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게 진짜 될까요?”
“일단 가보자고! 밑져야 본전이니까!”
이강훈이 시원스레 답하자, 유일은 기분 좋게 웃었다.
“···!”
그 광경을 보던 피디는 직감했다.
어쩌면 한유일이 그의 생각보다도, 더 큰 화제성을 몰고 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
며칠 뒤.
이혜진은 침대 위에서 핸드폰을 붙잡고 있었다.
이혜진은 행복했다. 개강 이후 새롭게 만난 팀플 빌런들 탓에 밤을 새는 게 일상이었지만, 그럼에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행복하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그녀는 지금 한유일이 출연한 ‘오식탁’의 클립을 보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이미 풀버전은 모두 시청한 상태였다.
┗ 11:32 여기 한유일 거의 아웃X 알바생 같음
┗ 나 지금 면 건져내는 거 몇 번째 보고 있는 건지 모르겠음..
┗ 아니 진짜 왤케 잘해ㅋㅋㅋㅋㅋㅋㅋㅋ
이혜진은 그새 늘어난 댓글들도 함께 훑으며 앞치마 입은 채 뛰어다니는 유일을 감상했다.
한유일 팬들이 (부러움의) 비명을 지르게 했던 귓속말 장면 이후, 한유일이 소스에 뭔가를 넣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건 다름 아닌 두유였다.
거의 완성이 다 된 파스타, 그것도 된장크림파스타에 두유를 넣었다는 것도 의아했지만, 가장 놀라웠던 것은 그 파스타를 먹은 출연자가 손으로 입을 막으며 외친 말이었다.
– 어어···. 이거예요···!
– ···!
그 말에 상대 팀은 좌절했고, 한유일 팀은 순식간에 밝아진 얼굴로 서로를 부둥켜 안았다.
보통 ‘오식탁’은 패널들이 요리를 망하면 박희진이 수습하고 새로운 레시피를 알려 주며 끝나는 흐름이었다. 망친 요리를 수습하는 것 역시 재미 요소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박희진이 개입할 필요도 없이 끝나버렸으니.
‘어쩜 요리도 잘하냐···’
그렇게 감탄하던 이혜진은 이미 여러 번 돌려 본 터라 익숙해진 클립으로 넘어갔다. 해당 영상은 한유일과 제작진의 마지막 인터뷰 클립이었다.
[어떻게 두유를 넣을 생각을 하셨어요?]– 소스가 좀 더 부드러웠으면 좋겠다고 하셔서요. 생크림은 꾸덕한 맛이 강하고 우유는 넣으면 느끼할 수 있는데, 두유는 고소하고 부드럽거든요.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유일은 머리를 긁적였다.
– 사실 저희 이모가 두유 파스타를 좋아하시거든요. 자주는 아니고 가끔 해드립니다.
[!]– 곧 영화관에서 제가 출연한 영화, 를 볼 수 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리고, 지금 이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 모든 분들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마무리까지 완벽했다.
그렇게 한유일이 열심히 홍보활동을 하며 차기작에 대한 열망을 키워나갈 무렵.
의 프리미어 시사회 날짜가 다가왔다.
*
의 프리미어 시사회 당일.
평론가 이병수는 영화가 시작하기 5분 전부터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생수를 한 모금 들이켠 뒤 천천히 몸을 뒤로 젖혔다.
‘···원희수 감독이라.’
그녀가 20년 전에 첫 장편을 냈을 때도, 이병수는 평론을 썼다. 그때의 그는 더욱 젊었고, 치기 있었다. 시니컬하고 날카로운 평론으로 서서히 관심을 받을 시기이기도 했다.
가장 적확하고도 중심을 찌르는 평론.
그는 그런 평론을 해내겠다는 다짐을 했다.
빵빵한 제작비로 적당히 구색을 갖춘 영화는 많다. 그러나 좋은 영화는 많지 않다.
그런 좋은 영화를 한국에서 찾기는 더더욱 어려웠고.
그렇게 한국 영화에 대한 실망감으로 젖어가던 그에게, 원희수 감독의 첫번째 장편영화, 은 일종의 충격이었다.
영화가··· 좋았으니까.
그날 이병수는 에 별점 8점을 줬다.
그러나 그 뒤로 원희수의 영화는 그의 기대를 충족시키질 못했다.
분명 대중성은 잡았다. 코어 팬층도 생겼다.
‘하지만··· 첫 영화의 신선함과 날카로움이 없었지.’
그래서, 지금 이병수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바로 실망할 기대였다.
원희수라는 감독도 그랬지만, 한유일이라는 배우 역시 그가 그런 마음을 먹게 한 이 중 하나였다. 유재호의 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였던 젊은 배우.
‘···잘하는 배우인 것 같긴 하지만.’
한유일은 아직 신인이자 새파랗게 어린 배우였고, 이병수는 신중하고 늙은 평론가였다.
이병수는 손가락으로 영화관 의자를 톡톡 두드리며 생각했다.
‘시작만 화려한 배우들도 한둘이 아니고.’
그때, 관객 입장을 확인한 직원들이 극장의 문을 닫았다.
그리고, 빠른 멜로디의 바이올린과 부드럽고도 은근한 첼로, 그리고 묵직하게 음을 받치는 콘트라베이스의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의 오프닝 시퀀스의 시작이었다.
‘무난한 시작이군.’
그는 리드미컬한 음악과 함께 집안을 청소하는 진희의 모습을 무감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야기가 점차 진행될수록, 이병수는 조금씩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이게··· 그 ‘진희’가 맞나?’
분명 아는 내용이고, 아는 캐릭터였다. 그러나 이상하게 낯설었다.
그리고 그 낯섦은, 기원이 등장했을 때 최고조를 찍었다.
– 진희 씨.
– 저를 아세요?
– 네. 꽤··· 오래 전부터요.
‘···!’
다리를 꼰 채 고개를 기울이고 있던 이병수의 눈이 점점 커졌다.
개봉 첫날
바람이 부는 유채꽃 밭.
사랑스러운 노란 꽃들이 춤을 추는 광경은 비현실적일 만큼 아름다웠다.
‘유채꽃 밭을 보고 싶다’는 진희의 말에 그녀를 데려온 기원이었다.
둘의 뒷모습과 함께 잔잔하고도 아름다운 선율이 들린다. 그러나 때때로 묘하게 어긋난 현악기의 음이 귀를 거슬리게 한다.
– ···아름답네요.
유일의 말에 진희는 한참이나 답이 없다. 홀로 날아다니는 하얀 나비에게 시선을 고정한 진희가 입을 연다.
– 이제, 다시는 찾아오지 말아요.
그 대사와 함께, 계속해서 귀를 거슬리게 하던 음악이 뚝 끊긴다.
작은 소음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
그 적막 속에서, 기원의 눈가가 잘게 떨린다.
그 뒤로 기원은 한동안 진희의 앞에 보이지 않는다. 그가 사라진 이후로 진희는 자꾸만 이상한 일을 겪는다. 양말이 매번 한 짝씩 사라지고, 밥을 먹으려 할 때마다 젓가락이 사라진다.
진희의 일상은 다리 하나가 짧은 테이블처럼, 삐그덕거리기 시작한다.
기원이 다시 나타난 것은 진희가 그렇게 한쪽이 무너진 삶을 겨우 이어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 절 기다리셨군요.
‘···!’
그 순간, 이병수는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기원의 얼굴을 커다랗게 잡은 채 살짝 흔들리는 카메라. 그 그보다 흔들리는 것은 기원의 눈··· 그리고 그 안에서 요동치는 감정이었다.
초조함 사이에서 고개를 들이미는 환희. 그리고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애정. 그 모든 것이 유일의 눈동자를 통해 보이는 듯했다.
“···하.”
이병수의 입에서 작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말도 안 되는 연기였다.
그때부터, 이병수는 분석하며 보는 것을 포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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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희와 기원이 서로 온전히 마음을 나눈 밤 이후, 기원은 정말로 사라지고 만다.
그가 사라진 뒤 강박적으로 집안을 청소하던 진희는 자신이 쓴 소설을 읽게 된다. 그리고 진희는 충격 받는다.
[그녀는 한 사내를 만났다. 그 사내는 여자와 함께 하는 모든 것에 기뻐했고, 모든 것을 사랑했다.···그 남자의 이름은 기원이었다.]
– 꽤 오래 전부터요.
– 제가··· 기다렸으니까요.
기원이 했던 모든 말, 그리고 자신이 했던 모든 말은 그녀가 오래 전 썼던 소설 속에 있던 대사였다.
소설이 끝나는 지점은 깊은 밤, 기원과 진희가 저택 앞에서 만나는 부분이었다.
– 절 기다리셨군요.
자신에게 다가왔던 기원의 모든말을 떠올리던 진희는 그만 이성을 잃고 만다.
자신이 가상의 인물을 사랑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그 순간부터, 진희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언제나 단정하고도 우아한 옷들을 입었던 진희는 옷장에 두기만 했던 쨍한 진분홍색 원피스를 입는다.